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Jan 20. 2022

웹툰 시장에 편집자는 필요할까?


웹툰 시장에 편집자는 필요할까? 이 질문은 짧지만 정말로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첫 번째는 편집자의 역할을 무엇으로 정의하는지다. 내가 소수 웹툰 독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느낀 괴리 중 하나는 “웹툰에는 왜 편집자의 역할이 작거나 혹은 부재하는지”였다. 이들 독자의 의견이 전체를 대변하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이 질문은 ‘한국 만화’의 정체성에 관한 한 가지 의견을 제시해주었다. 


이들은 웹툰의 전반적인 퀄리티에 불만이 많았고, 트레이싱이나 작가 개인의 구설에 관한 처리 문제를 놓고서 “플랫폼은 이 문제를 방관하며 손 놓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옆 나라 일본의 출판 시장의 경우를 언급하며 “편집자는 작품에 적극 개입하여 퀄리티 콘트롤(QC)을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루토>와 같은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 편집자는 작가와 협력하여 작품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아마도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일단 웹툰 시장과 출판 만화 시장에서 편집자의 역할이 다르다. 그 이유는 이들이 활동하는 무대, 즉 시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웹툰 문화는 네이버나 다음과 같은 플랫폼 위에서 자생했고 바로 이 점이 출판 만화 시장과의 차이점이다. 플랫폼이라 함은 작가들의 작품을 보기 편하게 한곳에 모아둔 것이므로, 플랫폼은 작가의 작품을 선별 공개하는 ‘지면’일 뿐 직접적인 개입은 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웹툰 작가는 명실상부한 1인 사업자다. 프리랜서라는 말이 포괄하지 못하는 범주에 1인 사업자라는 말이 있다. 1인 사업자는 기획부터 생산까지 모두 자신이 도맡아 해야 하고 그래서 QC가 용이하다. 하지만 반대로 보면 이는 웹툰 시장이 작가에게 비정상적으로 많은 부담을 안겨주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능력적인 면에서 글과 그림, 연출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작가는 많겠지만 그 모두를 책임지는 일은 상당히 부담스럽다. 이런 상황에서 작가 개인은 자동 채색 프로그램이나 디지털 배경 작화처럼 역할을 분담할 방안을 찾는다. 다른 한편, 작가는 회사에 들어가 자신의 권한 아래 채색과 배경, 종합 감수와 같은 인력을 제공받아 기획을 수행하는 팀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작가 개인과 플랫폼 사이의 관계라는 시장 형태가 존재한다. 


현 시대의 모든 웹툰이 플랫폼만을 오매불망 바라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웹툰 작가들에게 플랫폼은 작품을 선보일 지면이기도 하지만 ‘이 일을 계속할 수 있게 해주는 생계수단’이라는 인식이 더 강하다. 왜 열심히 그린 만화를 블로그나 웹 커뮤니티에 공개하지 않고 플랫폼에 투고하겠는가? 전자의 경우는 자신의 노동력을 그저 소비하는 것뿐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돈이 안 되는 취미 생활을 계속할 수는 없기에 그들은 플랫폼 행을 택한다. 실제로 플랫폼과의 계약은 그리 나쁘지 않다. 1인 사업자 형태로 운용되는 현 웹툰 시장에서 네이버 웹툰의 ‘7:3’ 비율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플랫폼이 너무 과다한 이익을 취하는 게 아닌지를 반문해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이런 생각을 해보자. 요기요나 배달의 민족 같은 플랫폼 사업자에는 여러 음식 업체가 입점해있다. 음식 업체는 이들 플랫폼을 홍보 지면으로 삼음으로써 플랫폼 사업자에 일정 금액을 지불한다. 요기요는 이 글이 올라가는 시점(22.01.15)에 건당 12.5%의 수수료를 업체에 부과하는데, 업체들은 이 수수료가 비싸다고 느끼면서도 별다른 대안이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요금을 낸다. 그렇다면 네이버 웹툰의 7:3 비율의 배분은 정당한 수익 배분일까? 네이버가 업계에서 가장 최고의 대우를 제공한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네이버는 작가의 콘텐츠를 다른 상품으로 변환할 기회, 그리고 홍보 서비스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정당한 수수료를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네이버보다 영세한 다른 웹툰 플랫폼의 경우는 어떠한가. 네이버만큼의 대우를 해주지 못한다면, 네이버만큼의 수수료를 떼가는 건 그리 합리적이지 못한 일이 될 테다.


쉽게 말해 너무 많은 책임이 있고, 돈은 너무 적게 벌고 있다. 플랫폼이 악독 사업자고 웹툰 작가가 착취의 대상이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플랫폼에 소속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은 확고하다. 우리가 이미 넷플릭스를 통해 검증했듯이 플랫폼은 로컬 콘텐츠를 글로벌 시장에 배급하기에 용이하고, 또 수익 배분에 있어서도 나름 명쾌한 답을 준다는 장점이 있다. 좋은 작품을 만들어 공급하기만 하면 대금을 확실히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플랫폼은 생산자에게 매력적인 선택지이다. 반면 한번 이루어진 계약은 중간에 작품이 대박 나더라도 계약 시점에 합의된 것 이상의 대가를 받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기도 하다. 물론 이는 안정성에 따라 감수해야 할 대가이겠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가 플랫폼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건 아닐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내가 알고 싶은 건 편집자라는 말이 갖는 시장과 대중 사이의 괴리이다. 대중이 편집자라는 말을 말뜻 그대로 받아들이는 반면, 시장에서 편집자라는 말의 용례는 사뭇 다르다. 시장에서 편집자라는 말의 속뜻은 기획자에 더 가깝다. 영화로 치면 감독이 아니라 제작자에 더 가깝고, 다른 한편으로는 업계 사람이 아니라면 그만큼 잘 구분되지 않기도 하다. 웹툰 시장에서 대중이 아는 편집자의 역할에 가까운 건 프로듀서인데, 이들은 회사나 팀 단위에 소속되어 작품 별개에 관여한다. 프로듀서는 포토샵으로 작품의 대사를 타국의 언어로 변환하거나, 작품 콘티나 완성품을 보며 출하 전 QC를 진행하는 등 전통적인 편집자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는 팀 단위로 움직이는 만큼 일본 출판시장의 그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웹툰 시장은 작품을 플랫폼에 납품하는 형태라는 점에서 출판 시장과는 다른 운용법을 지닌다. 출판 시장에서 만화를 선보이는 지면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구성을 갖는다. 즉, 선별부터 편집 그리고 출하까지 하나의 팀 단위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문학동네의 국내 5팀은 만화 단행본을 주로 출판하는데, 이 프로세스는 출판사에 소속된 이들이 출판사의 명의로 책 한 권을 냈을 때 비로소 마무리된다. 반면 웹툰 시장은 플랫폼 명의로 웹툰이 나오는 게 아니라, 작가 명의로 웹툰이 나온다. 말하자면 이 웹툰의 저작권은 원칙적으로 작가에게 있으며 플랫폼이 작가를 직접 고용한 게 아니다. 작가는 작품을 기획하고 만들어서 플랫폼에 접촉하는 형태로 사업을 운용한다. 작가는 그 자체로 하나의 팀이자 회사인 셈이다. 


결국 대중이 생각하는 편집자의 역할은 플랫폼이 아니라 팀, 혹은 작가 개인에 맡겨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대중이 정말로 그걸 몰라서 편집자를 요구하는 걸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는 자유와 방임이 아닌 관리 감독의 철저함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쉽게 말해 플랫폼 사업자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다. 바로 이곳에 플랫폼과 대중 사이의 괴리가 있다. 플랫폼은 비교적 많은 대중에게 다가설 요령으로 다양한 품질과 장르의 작품을 자사에 영입하지만, 그 모든 결정에 동의를 구하지는 않는다. 선택권만 제공하면 그만이고 플랫폼은 단지 작가들의 작품을 공개하는 지면에 불과하므로 자신들에겐 별다른 책임이 없다는 게 플랫폼의 논리이다. 


이러한 점, 문제가 생기면 작품을 내리거나 하면 그만이라는 태도는 어떤 면에서 무책임하거나 방관하는 듯 보일 수 있다. 직접 고용이 아니라 간접 고용으로 운용되는 이 상황은 라이더나 택배기사와 같은 직종에서 종종 목격되는 기업의 책임 회피를 생각나게 하고, 웹툰 독자는 만화 팬이기 전에 대중이므로 이러한 상황에 동의하지 않는다. 요컨대 대중이 말하는 “편집자”라는 것은, 그 용례를 정확히 알고 사용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의미는 명확하다고 볼 수 있다. 웹툰 독자에게 편집자라는 말은, 작품에 대한 수정이나 검열의 의미라기보단 사태에 대한 책임 소재를 규명하고 마땅한 처리를 해야 한다는 말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가 생각해보아야 한다. 왜 대중은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는 것을 요구하게 되었을까? 


많은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겠지만 딱 잘라 떨어지는 이유는 없는 듯하다. 유동성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망을 보장하라는 것일 수도 있고, 재난상황에 대처하는 발 빠른 움직임일 수도 있다. 명쾌히 답변하기를 회피하고 모호한 발언을 일삼는 기업의 세태에 질렸을 수도 있고,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벌 받지 않는 사회에 분노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히 말해둘 수 있는 건, 대중은 플랫폼이 작가와의 수익관계에서 얼마를 벌어들이는지는 별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대중에겐 두 가지 작품만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과 내가 보기 싫어하는 작품. 스낵 컬쳐 위주로 돌아가는 웹툰 시장에서 이 논리는 그 무엇보다 자본주의적이고, 또 실용적이다. ‘좋아한다’라는 말을 구성하는 논리는 복잡하지만 일단 그렇게 결론이 나는 순간부터 작품은 지지의 대상이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오늘날 편집자라는 말이 대변하는 건 정말로 작품에 개입할 사람을 찾기보단, 그러한 판단을 명쾌히 수행할 대리인을 찾는 것에 더 가깝다. 자기 말이 맞으니 와서 편을 들어달라 말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잘 모르겠으니 명쾌한 답을 내 달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는 판단의 근거가 모호해지는 복잡다단한 사건이 자리한다. 이른바 이데올로기 싸움이라 불리는 진영 간의 싸움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신념을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암묵적으로 그들의 판단을 이해하지만, 자신과 대립되는 상황에 있기에 그에 동조할 수는 없다. 편집자에 대한 요구는 이 대목에서 발견된다. 자신이 직접 판단을 내릴 경우 자신이 직접 그에 동조하는 것이 되므로, 자신이 책임지지 않으면서도 판단의 쾌감을 취할 수 있게 해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판단을 대리한다는 말은 어떻게 보면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자기 생각인데 남들이 해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인터넷 방송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포맷 중 하나가 대리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먹는 방송이나 게임 방송, 각종 전자기기의 언박싱 영상, 세계 각지를 여행하는 영상 모두가 개인이 그것을 수행할 여유가 없을 때 심리적으로 만족감만을 대신 취하게 해준다. 즉, 직접 자원을 투입하지 않고서도 감정만을 취한다는 점에서 합리적이거나 이기적인 행동이다. 마찬가지로 웹툰에서 편집자라는 말은 대중에게 그런 맥락에서 통용된다. 편집자라는 말은 대중이 지닌 편집증이 겉으로 드러난 실례이다. 플랫폼이 작품을 선별하는 기준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아니라 자사에 더 많은 이익을 안겨다 줄 수 있는지에 한하며, 대중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그런 부분이다.


예컨대 “왜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 정식 웹툰으로 승격을 못 해요?”라는 말은 질문의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다. 웹툰 편집자는 웹툰의 작품성을 평가하는 존재가 아니라 잘 팔릴 만한 상품을 들여오는 사업자이자, 그에 관한 실무자일 뿐이다. 선택받지 못한 작품이라는 말이 개개인의 취향에 대한 불만족과 연결되는 순간 만화 본연의 가치는 사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다른 한편 작품에 대한 창작의 권한은 온전히 작가 본인에게 있고 이에 개입하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기도 하다. 자칫하면 검열이 될 수 있을뿐더러, 무엇이 옳고 그른지의 기준이 불명확하다면 대중 정치로 전락해버릴 우려가 있다. 플랫폼이 작가와 대중 사이에 공유하는 한 가지 공통점이란, 이것이 세상에 공표되는 순간부터 사적일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사실이 양측 모두에게 정말로 중요하다. 


플랫폼과 계약을 맺었다는 건 작가 개인이 이 작품을 사유화하지 않겠다는 약속과도 같다. 작가는 작품이 대중에 미칠 파급력을 미리 염두에 두고 작품의 전권을 마음대로 휘두르지 말아야 한다. 자기 작품이니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은 사실상 팬들을 배신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플랫폼 측에서도 마찬가지다. 플랫폼은 이 작품을 파생 상품화할 때 작가의 동의를 구해야 하고, 계약을 새로이 갱신하여 바른 수익 분배를 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돈만 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웹툰 시장이 기본적으로 만화 예술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해친다. 이처럼 작가와 플랫폼이 대등한 관계를 가져가는 상황에서, 오히려 대중에게 요구되는 자세란 이것을 ‘웹툰’이 아니라 만화로 생각하는 일이다. 즉 웹툰은 하나의 형식일 뿐 작품의 질적인 면에 대한 평가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편집자에 대한 대중의 요구는 웹툰의 질적인 면에 대한 개입이라기보다 웹툰을 구성하는 현재의 구조, 형식에 던져지는 것일 테다. 기본적인 퀄리티가 되지 않아서 웹툰이 될 수 없는 게 아니라, 기본도 안 된 이가 노력하는 사람보다 앞서 나가는 불합리함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편집자라는 말은 경쟁사회에서 요구되는 채점자, 면접관과 비슷한 역할에 대한 대중의 호명 의식이 아닐까? 결과적으로 우리는 “공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금 던져보게 된다. 플랫폼에는 무한히 많은 작품이 들어올 수 있지만 그에 따라 원하는 작품을 찾기란 어려워진다. 이런 상황에서, 웹툰 플랫폼의 미래가 마치 넷플릭스처럼 알고리즘 추천 시스템을 도입하리라는 점은 그리 어렵지 않게 예측 가능하다. 예컨대 노출의 정도가 곧 작품의 흥행과 연결되는 상황에서 작품 추천의 개인화는 생산자에서 소비자로 직접 연결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행여나 그렇다면, 편집자라는 건 그런 알고리즘을 뜻하는 게 되지 않을까. 기계는 감정도 없고 형체도 없으니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것과 대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게 소통이라는 점은 변치 않는다. 우리가 넷플릭스에 들어선 짤막한 드라마들을 영화와 마땅히 구분하지 못하듯이, 출판 만화와 웹툰의 경계가 모호해질 날이 올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웹툰은 한류가 될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