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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14. 2022

한국 만화에서 키치의 문제


키치는 고급을 지향하는 저급 문화라고 알려졌다. 고급과 저급이라는 말에 거부감이 들 수 있지만, 이를 이해하려면 기술복제시대에 접어들며 원본을 손쉽게 복제할 수 있게 된 시기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기술복제 시대는 도자기나 회화 같은 예술품을 양산할 수 있게 해주었고, 이에 대중은 ‘고급’의 겉모습을 했지만 사실은 공산품에 불과한 물품을 사들였다. 이게 바로 키치 문화의 근본이다. 그러니 여기서 ‘저급’이라는 말은 고급이라는 말에 파생되어 나온 것이지 선천적인 등급을 의미하진 않는다. 고급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이었고 그만큼 상대할 수 있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키치는 ‘B급’이라는 싸구려 문화로 이해됐고, 더 나아가 이는 선망하는 목표로부터 이탈하는 것들을 망라하는 개념이 되었다. 쉽게 말해 키치는 본래의 맥락을 벗어나도 되는, 진지함을 노선으로 잡지 않았기에 뭐라 해도 이해될 수 있는 무언가를 뜻하는 게 되었다. 이제 키치는 특유의 자유분방함을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반대로 말해 자신을 상대하는 이들이 없다는 사실도 직감해야만 했다. 


2000년대 중반 처음 시작된 <야인시대> 합성물은 끝내 키치 문화로 자리 잡았다. “고자라니”라는 대사로 유명한 심영 역의 김영인이 이 문화에 우려를 표했던 적도 있지만, 이후 긍정하는 방향으로 선회함으로써 다시금 합성은 이어졌다. 이후 “나 상하이요”로 유명한 상하이 역의 조상기는 유튜브 채널 [근황올림픽]과의 인터뷰에서 “솔직히 좀 저급해요.”라고 언급하면서, 이 합성물 시리즈가 키치임을 확인시켜주었다. [야인시대 유니버스]는 최소한의 규칙만이 있을 뿐,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 같은 건 없으며 작품을 대하는 태도 또한 진지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말해 이 합성물의 제작자들은 제작에 진심이었지만 진지한 태도로 임하진 않았는데, 왜냐하면 이는 그들이 진지함을 표방할 때 세상 또한 합성물에 진지함을 들이댈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분석은 주객이 전도된 것일 수도 있다. 애초에 세상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피어난 문화가 외부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된다는 소리다. 하지만 둘 사이에 인과를 설정하지 않더라도 진지함을 지양하는 키치 문화는 충분히 살펴볼 만하다. ‘진지해지지 않는다’는 말에서는 굉장히 많은 기운들이 관측되니 말이다.


*


주호민이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진행하는 [위펄래쉬]는 만화가 지망생이 보낸 원고를 짧게 첨삭해주는 콘텐츠다. ‘지망생’이라는 특성상 보내오는 원고는 꽤 자유분방한데, 이 중에는 키치적인 감성인 것도 몇 있다. 이에 대해 주호민은 ‘카연갤 감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다음처럼 말했다. “이런 원고는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먹힐지 몰라도 플랫폼에는 갈 수 없어요. 일단 원고가 질적으로 좀 덜 완성되었다는 인상이 있고, 양지에서는 잘 먹히지 않을 감성이에요.” 주호민이 지적했듯이 ‘카연갤’로 대표되는 인터넷 커뮤니티 만화의 특징은 겉보기에 ‘키치’적인 면이 있다는 점이다. 크게 보았을 때 이들은 자신의 원고를 콘티와 같은 수준에만 머무르게 하는 면이 있고, 이는 사람들에게 ‘진지하지 않다’는 면에서의 키치를 연상케 한다. 진심이 아니라는 게 아니라 ‘진지함’을 표방하지 않는 게 인터넷 만화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위펄래쉬가 유튜브 콘텐츠인 만큼 상대적인 ‘진지함’을 표방하는 지망생들만이 몰리진 않았으리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한국의 만화 문화에 ‘키치’가 적지 않게 분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인터넷 방송’을 보는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인터넷 문화에 익숙할 테고, 이는 곧 그에 익숙한 이들이 창작한 만화의 전송으로 이어졌다고 추론해볼 수 있을 테다. 


그러니까 한국의 인터넷 문화에서 키치라는 건 아마추어리즘이나 힙스터리즘과도 무관하지 않다. 김홍중의 말처럼 2010년대 이후의 한국 사회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면, 아마추어리즘이라는 말은 다소 변질된 감이 있는 “괜찮아.”라는 말로써 이해될 수 있다. 프로들이 돈을 벌기 위해, 혹은 가치와 주관을 지키려고 자신의 작업에 최선을 다한다면, 아마추어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가령 신카이 마코토의 <날씨의 아이>에서 “괜찮아.”라는 말로 봉합되는 서사를 떠올려보자. 이 만화는 무언가를 할 운명을 타고난 이에게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지 않아도 된다고, 다시 말해서 ‘아마추어’가 되도 괜찮다고 말한다. 자신이 사는 세계에 우선하는 건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이기에 그들은 아마추어를 택한다. 모 만화의 대사처럼 죽어버리면 무엇이든 끝이니까 먼저 자신의 세계를 지켜내야만 하는 셈이다. 이에 따르자면, 어떤 재능이나 운명을 타고났다 한들 진지한 태도로 그에 연연할 이유는 없다. 재능과 운명이 우리 세계가 부여한 것이라면, 그런 요청에 응답하는 일은 언제까지고 미뤄져도 괜찮다. 이게 바로 ‘키치’라는 말이 내세우는 비-진지함’의 가치가 ‘괜찮아’와 결합하는 대목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말은 결국 ‘무엇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무언가가 된다’는 말이 ‘진지함’이라는 견고함의 양태와 결합한다면 비-진지는 유동성과 관련 있다. 


확실히, 인터넷 문화에 익숙한 이들이 그린 만화를 ‘키치적’이라 정의하는 건 무리다. 하지만 키치가 인터넷 문화에서 발견되는 일만큼은 확고하게 말할 수 있다. 어쩌면 개인화가 진행되고 점점 더 냉소적으로 변해가는 사회적 분위기가 소위 말하는 ‘비-진지함’의 발현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왜 그렇게 뿔났음?”이라던가 하는 수사는 “여기서 너만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식의 뜻을 내포하면서 상대방을 화나게 한다. 이 말은 소위 말하는 ‘유도리 없음’의 맥락에서 듣는 이에게 문화에 소속되지 못함에 따른 무안을 준다. 이에 대한 반발로 ‘쿨찐(쿨한척하는 찐따)’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하는 등, 사람들은 점점 더 냉소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사람마다 각자의 취향과 가치관이 다르다면 이를 통합하는 일보다 그냥 외면해버리는 일이 더 쉽기 때문이다. 이는 유동적인 사고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비-진지’를 내세우면서 진지함에 대한 거부감을 내비치는 것에 불과하다. 이들은 진지함이라는 말이 기존의 관습이나 역할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 이들은 그러한 진지함 안으로 들어가려면 다른 많은 걸 포기해야 한다는 걸 알기에 쉽사리 이를 택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키치의 가치는 본격적으로 부양한다. 누군가는 진지한 현실을 피해 온 인터넷에서조차 그러한 진지함을 겪기 싫어할 수도 있다. 또한 진지하면 꼰대가 되는 사회에서 비-진지함은 나이 듦이나 어른이 됨에 따른 변화를 거부한다는 피터 팬의 마음가짐일 수도 있다. 이런 맥락으로 카연갤 만화를 바라보면 유독 미완성에 가깝거나 자전적인 내용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손쉽게 이해된다. 이들은 자신의 처지를 미완성에 둠으로써 아직 남은 변화의 가능성과 규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쟁취하고 싶은 것이다. 


이들은 특정 문화에 대한 소비와 실제 사회적 의례를 구분하면서 둘 사이를 키치/진지함이라는 관계에 놓고, 자신의 문화에 비판을 가하는 이들에게 “왤캐 진지함? 밖에서는 아무도 그렇게 말 안 함.”이라고 답한다. 이는 현실 세계가 인터넷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거운(진지한) 장소로 인식되는 한편, 인터넷 공간은 그렇지 않기에 자기들만의 문화를 향유하는 게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가능성은 현실적/비현실적이라는 말이 대개 현실과 인터넷 공간 사이에서 뛰노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현실의 진지함이 통용되지 않는 곳이 바로 인터넷이라고, 바꾸어 말하면 바로 그 점이 진지함이 먹잇감이 되는 현실 사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이유라고. 어쩌면 이는 오래전의 화가들이 그림에 눈을 그리지 않았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옛날 사람들은 초상에 눈을 그리면 그림 속의 대상이 정말로 살아난다고 믿었다. 이에 화가는 의도적으로 눈을 그리지 않음으로써 그림이 살아나지 않게 했다고 한다. 즉 눈을 찍는 행위가 그림을 완성 짓는 행위였는데, 이는 비-진지함이라는 말이 갖는 미완의 속성이 의미하는 바와 별반 다르지 않다. 비-진지함은 그림의 세계로부터 응시당함에 따른 공포, 또는 그것이 완결될 때 자신이 그에 빨려 들어갈 것을 두려워했던 이들의 심리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프로가 되는 것이 두려워 의도적으로 아마추어리즘을 숭상하고, 자신의 작업을 A급을 닮은 B급으로 만든다. 만약 눈동자를 찍어 그림이 완성된다면, 그들은 A급의 세계에 빠져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될 테니 말이다.


이에 따라 잠정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소위 ‘카연갤’ 풍이라 지칭되는 만화들이 키치적으로 보인다면, 그 이유는 이들이 진지함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내용이나 형식 모두로 이들은 진지하기를 거부한다. 비교적 정형화되지 않은 형식이나 깊은 숙련도의 퀄리티를 내지 않는 것은, 오히려 만화가라는 이상에 다가설 수 없는 현실을 두려워해서다. 그렇다면 이 논의는 결국 만화가로서의 삶, 혹은 만화 시장이 과연 현실적인 진로인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2020년대에 웹툰으로 대표되는 한국 만화 시장은 점점 성장세를 타고 있고 나름의 블루 오션으로 여겨진다. 만화 원작의 드라마나 영화가 활발히 제작되는 가운데 국내 굴지의 웹툰 회사들은 본격적인 세계화를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만화는 정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일까? 카연갤 만화의 부흥은 누구나 만화를 쉽게 그리고, 업로드 할 수 있게 된 인터넷 통신의 보급에 힘입은 것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만화를 그릴 수 있다는 말은 바꾸어 말해 누구도 보지 않을 만화가 양산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혹자는 소품종 대량생산의 시대에는 만화가 더욱 세부적으로 발전해야 더 많은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하겠지만, 만화를 쉽게 그리는 환경이 만화에 대한 진지함으로 이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네이버 웹툰 플랫폼에서 자주 들려오는 표절 시비는 네이버 김준구 대표가 말했던 “우리 편집자(PD)는 최대한 만화와 동떨어진 사람으로 뽑고 있다.”는 대목과 어울려 하나의 시너지를 불러낸다. ‘유동적인 사고’라는 명목으로 비-진지함을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일이 과연 만화 시장에 옳은 것일까. 


웹툰 시장에선 ‘편집자’라는 말이 아니라 PD라는 용어가 더 선호된다는 점을 지적해볼 필요가 있겠다. 이는 한국에서 편집자의 역할이 작품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게 아닌, 글-그림-채색 등의 인력 풀을 엮어주는 중개상에만 그치기 때문이다. 플랫폼 측에서는 작가들의 고유 권한(저작권이라던가)을 존중해준다는 점을 근거로 대지만, 이 방법이 저작권 관리에 수월하다 한들 작품에 대한 처우는 작가 본인이 알아서 하라는 점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편집자의 개입을 두고서 검열이라고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작가에게 검수의 책임을 모두 물릴 때 이것은 작가 개인의 자기 검열을 유발할 수도 있다. 만화에 대한 진지함을 작가에게만 물린다면 결국 만화 플랫폼은 진지함에 진지함으로 답하지 못하는, 그저 상업적인 것에 몰두할 뿐인 업체가 되어버리고야 만다. 결과적으로 카연갤 만화와 플랫폼에 연재되는 만화의 외적 퀄리티가 다르다 한들, 그 본질에선 별반 다르지 않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카연갤 만화가 진지함을 두려워한다면, 플랫폼 만화는 자신들이 진지해져선 대중이 꼬이지 않는다는 점을 두려워한다. 만화 산업이 점점 발전하는 가운데, 만화 플랫폼에 입성하는 일은 그만큼 많은 노력을 요구하게 되고 이는 곧 데뷔에 대한 개인의 좌절과 포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카연갤 만화가 어떤 이유든 간에 그러한 진지함에 대한 거부로 이해된다면, 그 반대편에 있을 플랫폼 만화는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을 마주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움츠러들고 고착화되는 경향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확실히 네이버와 카카오가 자사의 포털에서 웹툰 서비스를 별도로 분리함에 따라 그러한 리스크는 줄었다고 볼 수 있다. 검색 엔진은 어느 정도 공익을 추구해야 하므로, 불특정 다수에게 유해할 수 있는 요소를 차단하는 일은 합당하니 말이다. 그러나 웹툰 서비스를 별도로 분리한 자회사에서 진행하는 근래에 검열은 어떤 맥락에서든 상업성을 띨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상업성과 진지함은 별개의 문제이다. 누구라도 좋아한다면 무작정 들여오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일은 키치조차 되지 못한다. 플랫폼은 자신들의 진지함이 웹툰 업계 전반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예우는 오히려 만화 매체에 드리워진 키치를 양산한다. 상업적인 성공을 노린 작품이 더 많이 올라올수록, 더 많은 사람이 작가지망생으로 남기를 포기하고 키치로만 남을 것이다. 여기서 더욱 좋지 않은 사례를 가정한다면 플랫폼의 비-진지함과 작가 개인의 진지함이 만났을 때 벌어질 부정교합이 있다. 플랫폼이 단순한 중개업자로만 남는다면 기성 작가들 또한 그저 키치로만 남을 공산이 크다. 만화 작가는 그저 상품을 납품하는 업자에 불과하며 만화 산업은 돈벌이 수단으로만 전락한다. 만약 만화 매체의 특징으로 영화와는 달리 작가 개인에게 막대한 창작의 권한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부정교합은 더욱 가속화한다. 영화감독은 투자자에게 보답하기 위해 별수 없이 좋은 영화를 찍어야 하지만, 만화 작가는 온전히 자신의 실력이기에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없다면 그냥 포기해버릴 공산이 크다. 


문제는 카연갤 만화처럼 명실상부 재능이 있음에도 시장 진입의 협소함과 개인 여건에 따라 포기해버리는 작가들이 많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렇게 포기해버리는 이들이 많을수록, 만화 업계에 프로로 데뷔하는 사람이 늘어난다 한들 실력 있는 이들이 올라올 확률은 더욱 줄어들고야 만다. 이러한 질적 저하는 점점 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어떤 면에서 이는 만화 업계의 진입 장벽이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오히려 만화 업계에 진입하길 거부하는 만화 낭인을 양산한다. 물론 정반대로, 만화 낭인들의 형성은 만화를 더 쉽게 그릴 수 있게 된 인터넷 환경을 보여주는 것일 뿐 만화 업계와는 별 연관이 없을 수도 있다. 허나 확실하게 말해둘 수 있는 건, OTT 업체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어떤 만화든 최대한 많이 올려두려는 플랫폼에게 만화 매체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결코 좋은 미래가 기다리진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특출난 만화 하나만을 위해 플랫폼에 방문하는 일보다는 플랫폼 자체에 긍정적인 이미지가 있을 때 키치는 주거지를 잡고, 그 안에 정착할 것이다. 예컨대 이 문제는 결혼 문제와도 비슷한 점이 있다. 비-진지함을 고수하는 이들에게서 진지함을 끌어내는 일은 굳이 결혼과 연애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사건’이 시작될 만한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과도 같다. 플랫폼엔 둥지가 없고, 커뮤니티엔 먹이가 없다면 지망생들은 어디로 가야만 할까? 이 문제의 해결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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