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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24. 2022

잔혹한 세계와 상처받지 않는 세계

<선배는 남자아이>에 <스파이 패밀리>를 곁들인 약간의 상상

<선배는 남자아이>는 네이버 웹툰의 매일 플러스에서 연재되고 있는 만화다. 동 회사의 일본 서비스 플랫폼인 라인 망가에서 연재된 것을 네이버에서 번역 및 서비스하고 있다. 그리고 네이버에서 연재가 시작되었을 때 댓글창은 난리가 났다. 사람들은 모종의 ‘다른’ 루트로 이 작품을 접했었고, 이것이 바로 그 네이버에서 연재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온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웹툰 시스템에서 인터넷에 연재되던 만화를 정식으로 포섭하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다. 하지만 일본에서 연재된 이 작품이 사적으로 번역되면서까지 한국 웹에서 떠돌았던 건 그 소재에 이유가 있다. 



[선배는 오토코노코 先輩はおとこのこ]라는 일본어 원제와 썸네일은 이것이 그리 단순한 이야기만은 아니리라는 점을 추정케 한다.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여장을 하는 남자아이인 마코토가 있고, 그의 여장한 모습에 반했다가 사실은 여장인 것을 알게 되면서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여후배 사키가 있다. 또한 마코토의 동성 친구인 류지가 있고, 그는 마코토의 여장한 모습에 반한 것인지 아니면 남성으로서의 모습에 반한 것인지를 자문한다. 이들의 관계는 동성 및 이성 간의 사랑이라는 맥락에서 줄타기를 하지만, 결국에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귀결된다. 



‘낭자애’라는 번안어가 제시되고 있는 오토코노코라는 단어는 ‘외형과 내면 모두가 여성스러운 소년 캐릭터’를 뜻한다. ‘미소년’이라는 단어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지만, 이 단어는 모에 요소가 가미되었다는 점에서 보다 오타쿠적인 맥락에서의 이해를 요구한다. 그 이해란 대개 2차 성징이 오지 않았거나 그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외견을 뜻한다. 즉, 아직 남성이 되지 않은 상태의 남성으로서 여성이 될 수 있는 마지노선에 있는 게 바로 오토코노코다. ‘트랜스’의 관점에서 오토코노코란 남성이라는 확정된 미래의 가장자리에 서있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오토코노코란 그 전송(트랜스)의 과정에서 급격한 변화를 동반할 수밖에 없으며, 바로 이 점이 극을 끌어가는 주요 동인이다. 들뢰즈식으로 말한다면 오토코노코란 동물 되기(becoming)의 일환으로, 변신의 고통으로 제시되는 마조히즘, 자신의 기관이 동물적이기를 멈출 때 고통을 느끼는 존재인 것이다.[1] 오토코노코는 내면의 여성성이 겉으로 드러나는 과정에서 내적인 것 혹은 외적인 것과의 마찰을 겪는다. 그리고 이때의 마찰은 긍정될 수밖에 없는 모에적 속성 안에서 마조히즘으로 발전한다. 바로 이러한 마조히즘이 여러 이질적인 것 사이에 자신을 자리할 수 있게 해준다. 



사람들은 이 만화를 두고서 “오토코노코물이자 BL물이자 백합물이자 로맨스물”이라고 표현했다. 많은 장르가 한 곳에 어울린다는 점에서 화제를 낳은 것인데, 생각해보면 이는 ‘이질적인 것들의 종합인 자신을 긍정해나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만화 내적으로도 어울리는 평가다. 일종의 정당화하는 관점에 해당하는 이 과정은 A와 B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분열된 자신’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 분열 자체로서의 긍정을 뜻한다. 따라서 이때의 분열은 봉합의 일종이다. 그러나 봉합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것이 삶의 징검다리로서의 실재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오토코노코라는 모에적 속성에 담긴 정의를 토대로 이질성이 종합된다. 그리고 정당화하는 관점에서 분열은 겹친 세계의 위상을 하나로 요약하는 기능을 갖는다. 요약건대 이 만화에서 오토코노코는 분열이다. 오토코노코는 분열이면서도 봉합의 일종이므로 되려 이질적인 것에 포섭되지 않고서 자신으로서 미끄러질 수 있는 셈이다. 가령 스너프 필름에 비견될만한 료나 장르도, 동물을 애호하는 퍼리 장르도 모에의 데포르메 안에서는 하나의 분열로 기능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모에 속성의 괴리된 현실은 ‘정당화할 수 없는’ 현실을 양립 가능한 왜곡의 형태로 만든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동물로 퇴보하는 것이다. 



다만 모든 오토코노코가 개인의 정체성 변화를 동반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오토코노코는 말그대로의 데이터처럼 취급될 수 있다. 데이터는 평면이라는 점에서 단순자고 단순자라는 점에서 별다른 파악 없이 이해된다. 즉 이때의 마조히즘은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세계”에 포섭되어 있다. 자신을 동물의 상태로 되돌림으로써 이성에서 후퇴시키고, 이를 통해 분열을 자신과 세계 사이에 봉합한다는 것. 이곳에서는 심지어 통증의 주체인 자기조차 상처받지 않는다. 바로 이렇게 동물은 이성을 포기함으로써 되려 자기로 남을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말하자면 동물은 이성이 없기에 부자유를 획득하는 게 아니라 이성이 없어서 자유로운 것이다. 되풀이하자면 동물은 통증이 없어서 상처받지 않는 게 아니라 바로 그 통증 탓에 상처받지 않는 자신으로 남는다. 따라서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세계”는 피와 죽음, 분쟁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아니라 평화란 게 존재할 수 없는 투쟁 상태이다. 이 마조히스트들은 자신이 바라는 현실이 가능하지 못하다는 점에 절망한 나머지 가능해야 할 현실을 가능한 현실 중 하나로 격하하고야 만다. ‘정당화’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분열의 자리를 현실이 아닌 주체에 옮겨두는 것. 



그렇다면 <선배>에서 이러한 변화는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을까. <선배>의 작가 pom 은 “이야기를 만들 때는 뭔가의 이유로 불행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행복하게 만들 것이냐,를 생각하면 좋다.”는 편집자의 조언에서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 작법은 아주 기본적인 것이지만, 통증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세계를 통증에서 구하는 인물상(마조히스트)이 점점 줄어든다는 점에서 한 가지 의의가 있는 듯 보인다. 세상이 통증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에서, 삶에 염증을 느끼는 일은 전적으로 세계의 몫으로 남는다는 점이다. 즉 세계/삶=정당화됨이라는 것이다. 



<선배>에서 마코토가 겪는 건 남성이지만 여성이 될 수 없는 세계이면서, 여성이지만 남성으로 비쳐지는 세계일 수도, 혹은 남성이면서 여성인 세계일 수도 있다. 이런 위상들은 분열을 통해 하나로 종합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 정체성의 전송과정에서 응당 벌어져야 할 분열이 모에라는 속성을 통해 세계에 위탁된다는 점이다. 분열적 주체로 자리해야 할 곳이 분열된 세계로 대체되면서, ‘잔혹한 자신’ 혹은 자신에게 잔혹한 자로서의 마조히스트는 ‘잔혹한 세계’, 혹은 세계를 잔혹하게 하는 마조히즘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살펴보면 알겠지만 양쪽 모두에서 주체는 배제된다. 



잔혹한 세계에서 할 수 있는 건 울먹이는 것뿐이다. 잔혹한 세계란 끊임없는 과정에 걸친 세계이며, 원인과 결과가 분열의 자리에 들어가 자신에 대한 설명을 흡수해버리는 마조히즘이다. 예컨대 잔혹함이란 되기의 감정이며 그런 의미에서 <선배>의 오토코노코는 이성이 될 수 없기에 고통받는 존재이다. 사키와 류지의 트랜스는 동물적이기를 추구함으로써 그런 고통을 멎게 하는 진통제의 역할이라 할 수 있다. 기호적으로 무언가를 보여준다기보단, 잔혹함의 중화제에 가깝다. 다시 말하자면 오토코노코는 이성이 될 수 없기에, 확정된 미래에 도달하지 못함이 확정되었기에 더욱 고통받는 존재다. 



달달한 로맨스 만화를 두고서 너무 과열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히 사람들은 더는 마조히스트를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사람들은 마조히스트가 아니라 마조히즘을 원한다. 세계가 잔혹하다고 말해야만 원인과 결과를 세계의 탓으로 돌릴 수 있어서일까. 어쩌면 이는 정당화하는 관점의 예행 단계일지도 모른다. 가령 <스파이 패밀리>의 경우, 주인공 로이드는 평화로울 수 없는 세계 안에서 평화일 수 없는 조건으로 평화를 일구어내야 한다는 불완전한 결합의 상태에 놓인다. 그리고 이런 불완전함은 정당화하는 관점에 포섭된다. 



로이드의 내적 목표는 “아이가 울지 않는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로이드의 이 목표가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세계”의 다른 판본처럼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만화에서 로이드는 이성적이고 냉철한 스파이로서의 자신을 아이를 사랑하는 따스한 남자로 되돌리면서, 이를 통해 분열(분단)을 자신과 세계 사이에 봉합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는 궁극적으로 가족 만들기라는 <스파패>의 주제의식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 만화의 가족은 어떠한 ‘관점’에 의해서 정당화되고 있다. 그래서 언뜻 보이는 불완전함은 내부로 포섭되고, 불완전한 결합은 그 자체로 분열의 자리를 세계에서 안으로 옮긴다. 



여기서 우리는 그렇게 옮겨진 분열이 결국 배제의 논리를 수행할 뿐이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세계를 잔혹하게 하는 마조히즘은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세계”에 포섭되어 있고, 이 안에서 스파이로서의 로이드(코드명: 황혼)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되려 이성을 연기해야만 한다는 역설에 놓인다. 그 세계는 그 사람을 필연적으로 아프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세계는 잔혹하다”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만 성립한다. 황혼은 설명될 수 없는 자신으로만 남는 되기의 존재다. 여러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결국 그 모든 정체성은 스파이라는 이름 아래 통합되고야 만다. 



스파이는 국가를 위해 임무를 수행하지만 정작 대외적으로는 국가에 소속된 것이 아니어야만 하는 존재다. 즉 스파이는 분열이다. 하지만 분열은 봉합의 일종이기에, 로이드에게 스파이란 자신을 그러한 세계에 봉합하는 것이다. <스파패>의 비천함은 바로 이 대목에 있다. “잔혹한 세계”와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세계”의 사이, 마조히스트와 마조히즘의 양쪽 모두에서 로이드는 배제된다. 이곳에서도 역시 응당 벌어져야 할 분열은 모에를 통해 세계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이동한다. 그렇다면 역시 잔혹한 건 이런 모에를 통해서만 분열을 긍정해야만 하는 우리들의 세계인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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