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시장에 편집자는 필요할까? 이 물음은 꽤 단순하지만 굉장히 많은 고민을 내포한다. 이에 대한 고민을 풀어가기 전에 짧은 점검의 시간을 가져보자. 가장 먼저 살펴볼 것은 편집자라는 용어의 구체적인 정의이다. 예전에 나는 디시인사이드의 한국만화 갤러리에서 한국 웹툰 시스템에도 편집자가 있어야 한다는 울화 섞인 성토를 목격했던 적이 있다. 일본 출판만화 시장의 편집자는 작가의 옆에서 이야기의 흐름을 보조하거나, 더 나아가 제안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한국만화의 전반적인 질적 하락 문제를 해결하려면 편집자 직책이 도입되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독자들은 왜 편집자라는 일본만화의 직책을 언급했던 것일까? 한국만화가 일본만화보다 질적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해서였을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 요구에는 한국만화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겨있다.
일본만화의 편집자를 정확하게 번안할 수 있는 말은 없지만, 얼추 웹툰 PD라는 말이 대응된다고 본다. 물론 양측 시장 구조의 차이가 있으므로 한국의 ‘PD’와 일본의 ‘편집자’ 직책을 나란히 두는 건 무리가 있을 것이다. 웹툰 PD가 제작사와 플랫폼의 두 가지 계열이 있다는 걸 감안해도, 우리 입장에서 일본 시장의 편집자 역할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긴 어렵다. 만화라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웹툰은 출판만화와 다른 계통으로 분류된 종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만갤이 편집자라는 말을 어떤 문맥으로 사용했는지 알 것만 같다. 그건 바로 플랫폼-스튜디오 시스템의 산업적 측면에 파묻히는 웹툰 본연의 가치다. 점점 플랫폼화되어가는 웹툰 시장에서는 작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스튜디오 시스템이 대두하는데, 이 웹툰 공장에서 품질 QC와 A/S가 제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외부적 개입의 요구로서의 편집자
웹툰의 품질에 관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느낀다. 누군가는 그림체를 중요시할 수도 혹은 이야기를 중요시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만화에 대한 외적인 면은 그렇게까지 큰 비판이 되지 못한다. 만화를 구성하는 것에는 여러 측면이 있고 결국 이들 모두가 만화의 한 요인이라는 점에서 세일즈 포인트는 다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독자들이 편집자의 이름을 호명했던 건 “그냥 비즈니스 관계로 계약만 맺고 사건이 터졌을 땐 나 몰라라 하면 그만이냐”고 비판하는 것이었다. 가령 2021년을 휩쓸었던 만화계 이슈를 떠올려보자. 작가의 폭주가 벌어지고야 만 웹툰 <헬퍼>부터 강한 표절 의혹이 제기된 <엽사>, <길티액스>, <이매망량>등의 대처에서 네이버 측의 대응은 침묵이었다. 네이버는 독자들의 항의가 그저 억까에 불과하다고 여겼고, 작가들에게 ‘일단 대응하지 말고 사태를 관망할 것’을 조언했다.
네이버의 이러한 대응은 플랫폼 기업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리라 생각된다. 플랫폼은 기본적으로 중개를 수익구조로 가진다. 이들 기업은 자사의 플랫폼에 입점하는 이들을 소비자와 연결해준다는 점으로 돈을 번다. 즉 연결해주기만 할 뿐 원칙적으로 네이버가 작품 자체에 개입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네이버는 작가와 플랫폼이 대등한 입장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평소 작가에게 높은 수익분배를 해주곤 했으며, 또한 작가가 작품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든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다. 작가에게 작품의 전권을 위임하면서 최대한 창작의 자유를 보장한 셈이다. 허나 문제는 플랫폼 안에서 특정 입주 업체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이들이 별다른 대응 없이 입주자에게 책임을 위임한다는 점이다. 자신들은 중개업자에 불과하며, 계약 이외의 것은 전적으로 작가 본인이 처리해야 한다는 말 말이다.
네이버 웹툰은 자사와 계약한 작가들을 철저히 자영업자-프리랜서로 취급하면서, 그들이 어떤 구설에 휘말렸든 간에 자신이 헤쳐나가야 할 일이라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심지어는 이미 결정된 연재계약이기에 함부로 만화를 강판시키지도 않는다. 말하자면 철두철미한 비즈니스 관계. 작가를 단순한 하청이 아닌 동반관계로 여긴다는 점에서 이는 확실히 긍정적인 면일지도 모르겠으나, 독자들에게는 작품에 대한 관리소홀로 보이기만 할 뿐이다. 혹자는 독자들의 의견을 따라 작품의 차후 행보를 결정하는 건 순전히 인민재판에 불과할 뿐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즉 독자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작가 개인에 연재권을 보장하는 네이버의 판단이 옳다고 말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이는 최대한 많은 작품과 계약하면서 관리 인력은 최소화하는 네이버식 운영방식에 대한 불만일 수도 있다.
네이버 웹툰은 플랫폼 사업자이기 전에 콘텐츠 사업자라는 점에서 <배달의 민족>과는 다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네이버 웹툰은 그만큼 자신들의 콘텐츠 풀 형성에 신경 써야 하며 그 과정에서 QC와 A/S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검수는 플랫폼을 관리하는 수준의 인력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이에 대해 네이버 웹툰 측은 QA 인력을 확충하고, 독자참여위원회(가칭)를 창설하겠다는 답변 을 내놓았지만 이미 독자들 사이에서는 “만화 사업을 하는 회사가 동시대의 다른 만화를 모르는 게 정상이냐”는 비판이 지나간 뒤였다. 특히나 이는 김준구 대표가 “만화 사업의 다양성을 늘리기 위해 최대한 만화를 모르는 직원들을 채용 중”이라고 발언했던 대목과 맞물리는 것이기도 했다. 김준구 본인이 어린 시절을 만화방에서 보낸 것과는 반대로, 만화를 관리하는 인력은 정작 ‘만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네이버 웹툰은 자사의 PD를 편집자라는 이름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일본 만화에서 사용하는 편집자라는 용어와 용례가 달라서, 독자들로서는 그 역할을 혼동할 수밖에 없다. 일본 만화 시장에서 편집자가 출간되는 오프라인 지면에 만화를 배치한다는 점에서의 편집자라면, 네이버 웹툰 PD는 작가가 보내온 원고에 오타만 검수한 후 곧바로 업로드한다는 점에서 발행인에 더 가깝다. 양측 간의 이해 차이는 여기서 발생한다. 언론사의 형태에 가까운 만화 잡지사의 경우는 데스크 체제가 있으므로 작품의 발행이 견제되기 쉽지만, 플랫폼의 형태에 가까운 웹툰 사업자의 경우는 어디까지나 작가와 독자 사이를 중개하는 역할에 불과하다. 이는 즉 작가와 독자 사이에 상호작용이 일어나기 쉬운 웹툰 환경에서 굳이 ‘견제’의 역할이 플랫폼에 맡겨질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견제의 역할이 플랫폼에 맡겨질 이유가 없다는 건, 독자들이 만화 작가를 직접 감시하고 개입할 수 있어서다. 허나 반대로 생각하면 플랫폼은 콘텐츠 사업자로서의 의무를 소비자에게 전가하고 있다. 가령 잡지 연재에서 만화에 대한 독자 의견은 대개 편집부를 거쳐 전달되는 경향이 있다. SNS나 기타 행사 등으로 독자와 직접 소통할 수도 있겠지만, 웹툰의 댓글 시스템만큼 직접적인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잡지 연재에서는 출판사가 작가에 대한 피드백을 취합하고, 또 작가를 보호해준다. 반면 웹툰은 그렇지 않다. 웹툰은 웹의 특성인 상호작용성이 도드라지는 매체다. 또한 상호작용성이 강하다는 말은 작가가 독자에게 휘둘리기 쉬운 환경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웹툰 작가에게 댓글은 피드백의 창구인 동시에 악플러들의 온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네이버 웹툰의 댓글 시스템은 이들 플랫폼의 기반이 포털 사이트라는 점에 귀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포털 사이트 특유의 소통성이 웹툰에까지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웹툰의 상호작용성을 댓글에만 한정하기 힘드므로, 이 대목에서는 네이버 웹툰이라는 회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네이버 웹툰은 플랫폼 회사이면서 콘텐츠 회사라는 특수성이 있다. 그리고 플랫폼 기업에게 요구되는 윤리는 자신들의 입장을 ‘중개’에 놓으며 관망하지만 말고, 개입이 필요할 때는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점이다. 플랫폼 기업이 단순히 콘텐츠를 중개하는 역할에만 그칠 때, 그 안의 콘텐츠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든 간에 사용자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이를 정당화할 명분이 생긴다. 즉 플랫폼은 공정해야 하기도 하지만 최소한의 개입은 필요하다. 헌데 콘텐츠 사업에서 개입이란 검열의 문제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편집자가 만약 외부적 개입의 요구일 경우 이는 작가의 주권에 관한 중대한 침해가 될 수 있다. 최근 10년간 문화계 전반에 화두가 되었던 검열 논란을 떠올려보자. 티브이 예능과 웹소설, 만화 웹툰과 게임 및 영화에 걸쳐 여러 사건이 있었지만 이런 논란들의 핵심은 창작물의 표현을 제한을 거는 것은 시민 독재이자 자가 검열로 이어진다는 문제 제기였다. 어쩌면 그래서 네이버 웹툰은 작가에 대한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을 것이다. 자신들이 작가를 보호해주어야 한다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건 12/15/18세 이용가와 같은 최소한의 규칙만이라고. 협력자 관계에 있는 작가들에게 자신들이 따로 간섭할 권한 같은 건 없으며, 오히려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행동이라고 말이다. 고로 네이버측이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게 사건에 대한 철저한 외면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나름의 이해할 여지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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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는 단순히 작품을 연재할 공간을 제공해주기만 할 뿐 작품을 운영하는 건 온전히 작가의 몫이다. 네이버가 작가에게 어떤 행동으로 개입하는 건 주어진 현실에 개입하고 이를 편집하려 드는 일이 된다. 즉 외부의 개입, 혹은 검열이라 부를 수도 있을 방향성의 변경이 원천적으로 차단되므로 이 무대는 온전히 작가의 것이 된다. 사실 일본처럼 편집자라는 존재가 웹툰 시스템에 등장할 경우, 웹툰 작가의 작품에 대한 저작권리와 수익분배 등의 문제가 복잡해지기도 한다. 요컨대 편집부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말은 모든 작품이 작가 개인의 역량에 달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독자들은 네이버 웹툰에 올라온 작품들을 보며 이것이 온전한 작가의 역량이라는 점을 명료히 파악한다. 그리고 작가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한 만큼의 대가를 가져갈 수 있다. 겉보기엔 서로 윈윈하는 구조인 것이다.
외부 변인 없이, 온전히 자신의 실력만으로 작품을 끌어가는 이곳에서 ‘작품’은 그 자체로 남아있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주도성을 독자는 작가에 대한 이해도를 더욱 높일 수 있다. 특히 이는 작품 속의 세계를 온전히 자신이 창작하는 만화 예술의 경우 더욱 중요하다. 만화의 경우 작품 속의 세계를 작가의 완전한 반영으로 설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세계관이 더욱 도드라진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작품의 운영이 온전히 작가의 것이 된다는 말은 리스크를 작가에게만 지우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작품이 못 만들어져도 작가 탓이며 실제로 네이버가 따로 작가에게 간섭한 건 없으므로 작품이 못나면 작가의 역량 부족이다. 그래서인지 이 과정에서 필요 이상으로 작가에게 실력에 대한 비난이 가해지는 듯한 면도 분명 있다. 능력이 없음에 관한 비판 말이다.
어떤 이들은 능력이 많은 사람이 더 많은 돈을 가져가는 게 옳다고 말한다. 이는 자유주의 시장경제 이론에 따른 논리이다. 네이버 웹툰은 이 구조에서 고용 안정성을 늘려 작가로 하여금 한 편의 작품을 온전히 끝마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연재에만 오롯이 집중하고, 연재 경험을 얻어 더 좋은 차기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선순환이 이뤄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상대적으로 능력이 떨어지는 작품들도 줄곧 자리를 유지함으로써 경쟁의 논리가 발휘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일단 한번 연재를 시작하면 고용이 보증되는 상황에서는 작품의 문제 개선에 대한 노력이 상대적으로 덜할 수 있다. 또한 네이버 웹툰을 업계 최고로 치는 상황에서, 이곳에서 연재하기를 원하는 다른 작가들에게는 “저런 사람도 연재를 하는데 나는 왜?”라는 물음이 들게 할 수도 있다.
연재에 들어간 작품들이 실력적으로 충분히 검토되었는지를 의문이 들게 한다는 점에서 네이버 웹툰의 작품 선정 기준이 모호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점은 비단 네이버뿐만 아니라 여타 콘텐츠 플랫폼도 공유하는 문제로, 인터넷 공간은 작품을 선보이는 것에 한계가 없으니 그냥 많은 작품을 들여올 수 있다는 점에서 귀인하는 문제다. 그리고 이는 이하의 두 가지 맥락을 지닌다. 첫 번째는 관리의 문제다. 많은 작품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은 책임주체를 작가로 한정 짓는 일인데, 수백편에 달하는 작품들이 일주일 간격으로 업로드되는 일을 관리하려면 그만한 인력과 수고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는 관리인력을 충원하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지금처럼 작가에 책임을 맡기다가 문제가 생기면 나중에 대응한다는 식으로 운영하면 ‘외부적 개입’에 대한 요구는 사그라지들지 않는다.
우리가 중요하게 바라보아야 할 두 번째는 공정(工程)의 문제다. 틈새시장 공략식으로 소수 취향의 작품을 들여놓다 보면 평균에서는 미달인 작품도 나올 수 있다. 취향이란 게 결국 데이터베이스의 조합인 만큼, 특정 독자를 염두에 둔 작품은 서브 컬쳐의 코드를 수행하면서 여타 다른 역할은 상대적으로 덜 신경 쓸 수도 있다. 쉽게 말해 작품을 구성하는 데이터베이스의 편차치가 시장 전체의 평균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 경우 작품의 독자들에겐 데이터베이스를 충족하므로 다른 아쉬움을 상회하지만, 작품의 비독자들에겐 그냥 평균에 못 미치는 작품으로만 보인다. 그래서 이들이 지적하는 질적인 저하는 모든 면에서 떨어진다기보다는 점점 더 만화를 구성하는 요인, 독자와 시장과 작가군이 점점 파편화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에 가깝다.
편집자라는 구체적인 직책을 호명하면서 외부적 개입을 요청하는 독자들의 입장은 대개 그러한 파편화에 대한 중재를 요청하는 것이다. 범죄가 일어나면 경찰을 찾고 집에 불이 나면 소방관을 찾듯, 독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에 대외적인 위기가 몰려올 때 편집자를 찾는다. 물론 여기서 편집자는 존재하지 않는 직책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직책을 만들어 찾는다는 점에서 이러한 의견 표명은 보다 긴급한 것으로 보인다. 한때 사회를 휩쓸었던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을 떠올려보자. “이런 만화도 있는데 왜 내가 좋아하는 만화는 순위권에 들지 못하나”라는 식의 공정(公正)에 관한 문제의식이 대두할 때, 이는 단순한 웹툰 문화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관한 분위기가 된다. 플랫폼에 입성하는 게 곧 실력의 증표이고 높은 연봉을 받는다면 그만한 실력을 증명해보라고 말이다.
즉, 공정의 시선에서는 네이버 웹툰이라는 플랫폼에서 연재한다는 점만으로 작품의 흥행을 날로 먹으려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첫 직장이 향후 이직에서도 큰 영향을 미치듯이, 네이버 웹툰이라는 플랫폼으로 데뷔하면 차기작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이 있을 것이므로 소위 말하는 ‘출발선’이 다르게 된다. 이와 더불어 네이버 웹툰이라는 플랫폼이 업계 1위인 만큼 그에 걸맞은 책임감이 요구된다는 점, 그만한 대우를 받으면서 정작 결과물은 엉성하게 내놓는다는 점 등이 독자의 비판 요인이었다. 물론 네이버 작가가 높은 연봉을 받는다는 말은 독자에게 있어 검증되지 않은 사실이다. 구체적인 자료가 외부에 공개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각종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웹툰 작가의 모습이 화려하고 부유한 것으로 비쳐졌고, 이에 따라 대중은 웹툰 작가에게 공정에 관한 화두를 들이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짚고 넘어갈 점은 있다. 네이버 웹툰이 구체적인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다 한들, 연재 이력이 있는 작가들에 따르면 복지나 성과금을 포함해 타 플랫폼보다 많은 액수를 지급하는 게 사실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네이버의 이러한 행보는 능력주의의 일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성과에 따른 수익분배가 센 만큼 책임도 작가에게 강하게 물리는 방식. 작가의 작품에 대한 권리를 존중한다는 네이버 웹툰의 친절함에는 책임주의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있다. 자신들의 플랫폼에서 연재를 하는 이상 작품을 위한 모든 여건을 만들어주겠지만, 그렇게 대우해주는 만큼 작품에 대한 권한은 모두 작가가 가져가므로 QC에 대한 논란까지도 모두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공정에 대한 책임론이 네이버 웹툰에 강하게 적용되는 이유이지 편집자를 호명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다.
내부적 개입의 요구로서의 편집자
네이버는 업계 최고의 대우로 유명하고 또 그래서 작가 지망생들에게 꿈의 무대로 꼽힌다. 한번 연재를 시작하면 강판되는 일도 없어서 웹툰 공무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허나 반대로 말하면 고용이 극도로 안정적이어서 근로자의 근무태만에 제동을 걸 수단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반 기업이라면 프로젝트 단위라 할 수 있을 ‘작품’ 단위로 계약이 이루어지는 웹툰 업계에서는 일단 연재에 ‘합격’하는 것부터가 근로의 시작이다. 그리고 네이버 웹툰은 일단 근무가 들어가면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는 작가에게 전권을 위임한다는 점에서 비교적 좋은 직장으로 인식되었다. 허나 이는 작가 개인이 프로젝트의 1인 경영자라는 뜻이기도 하므로, 네이버 웹툰 측에서는 해당 사업체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따로 개입을 해야 할 이유도 책임을 져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시장의 괴리감이 여기서 비롯된다.
한국에서 능력주의 붐이 일었을 때, 개중에서도 공정에 관한 화두에서 중요한 건 책임론이었다. 공정을 요구하는 젊은 세대의 목소리 중에 눈에 띄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라면 OK’라는 점이었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졌다면, 그리고 그렇게 주어진 기회로 인해 자신이 파멸에 빠진다 한들 이는 모두 자신의 책임이므로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젊은 세대는 그렇게 말했다. 쉽게 말해 ‘공정하다는 착각’은 공정이라는 말 자체가 착각이라고, 우리는 그런 착각을 이겨내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즉 모두의 출발선이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공정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네이버 웹툰은 자사의 계약 작가들을 공정하게 대우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의 선택’이라는 함정에 몰아넣으면서 이들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사업체에 불과하다. 이게 바로 괴리감의 정체다.
작가 개인의 능력은 분명 다르다. 그러니 작품의 퀄리티도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네이버 웹툰은 연봉 이외의 측면에서 자사의 작가들을 공정하게 대했고, 이 과정에서 사업자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모순점이 있었다. 능력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내밀은 공정이라는 카드는 독자들에게 있어 평균 이하로 규정된 작품에서 역효과를 냈다. 독자들이 웹툰을 콘텐츠로 바라본 반면, 네이버 웹툰은 이들 작품을 플랫폼의 구성원 즉 ‘협업자’로 규정하면서 공정하게 대우할 것을 약속했다. 독자들은 이러한 점을 ‘다른 출발선’으로 여겼으며 네이버 웹툰의 이런 태도를 제 식구 감싸기로 이해했다. 독자들은 이러한 맥락에서, 자사 플랫폼의 작품에 논란이 일었을 때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는 네이버 웹툰을 방관자로 규정했다. 이들은 이 사태를 두고서 편집자라는 외부적 개입을 떠올렸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편집자라는 말이 뜻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독자들 자신이 작품에 대해 견제를 하는 만큼 플랫폼 측에서도 같은 노력을 해주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한 소비자로서의 독자가 아니라 어느 정도 담론의 생성을 겸하는 프로슈머로서의 면모를 뜻한다. 어떤 면에서 편집자라는 외부적 개입의 요구는 문제의 발생과 원인을 시장 구조 바깥에서 찾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능력이 있으면 높은 조회 수를 가져간다는 능력주의 세계에서 편집자는 계약이 이루어낸 구조 안에서도 사각지대는 있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내는 장치였다. 즉 편집자라는 존재는 바깥에서 안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라 내부에서 문제 제기를 위해서도 필요했던 셈이다. 그런 고로 편집자라는 말은 시장 대 시장 간의 비교가 아니라 한국 만화 고유의 틀 안에서 고찰되고 다뤄져야 한다.
이번에도 역시 중요한 건 두 번째 의미이다. 편집자라는 말이 독자들로 하여금 외부적 개입을 요구하는 것이었다면, 여기서 그 ‘외부’란 과연 무엇일까? 웹툰 플랫폼의 바깥에서 혜성처럼 날아올 구원자를 가정했던 걸까? 이 문제에 있어서 외부란 웹툰 플랫폼이 하나의 완결된 형태로 남아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본질적으로 일본식 웹툰 PD=편집자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플랫폼에 소속된 인력일 수밖에 없는 편집자가 ‘일본식 시스템’의 수입처럼 언급된다는 것이다. 편집자라는 직책이 웹툰 회사에 고용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마치 정체된 웹툰 플랫폼에 변화를 불러올 인력처럼 설정되었다는 점이 그렇다. 따라서 독자들이 말하는 편집자를 이해하려면, 완결된 형태를 돌파하려면 다시금 플랫폼의 맥락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외부에서 바라보았던 것을 내부로 다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일본 만화계의 경우, 작가를 관리하고 보조하는 역할은 편집자에게 주어진다. 단순히 비즈니스 관계에만 불과하지 않고 작품의 내용을 두고서 작가와 협업하는 조언자의 역할도 했다. 그래서 일본만화를 즐겨보는 만화 팬들에게 편집자란 <데스노트>나 <나루토>, <원피스> 등과 같은 대작 만화의 일부였다. 당신은 그림이 빈약하니 그림 작가를 구해보라고 조언했던 <데스노트>의 편집자, 이런 기술 이름은 어감이 이상하며 이 인물이 여기서 하차해버리면 안 된다고 말했던 <나루토>, <원피스>의 편집자. 이들 만화에 편집자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잡지에서 조기 강판당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고, 이런 문맥에서 보면 한국만화 팬이 일본만화 시장의 편집자를 호명하는 이유를 잘 알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이 망가지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웹툰이 댓글이라는 일차적 소통창구가 있다 하더라도, 혹은 SNS와 같은 다른 창구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일하는 장소인 플랫폼의 말이 작가에게는 더욱 절대적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독자 없이 작품이 존재할 수 없는 건 맞지만, 기본적으로 연재할 장소가 없다면 만화를 독자와 연결하는 것이 불가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플랫폼이 작가를 입맛에 맞게 통제하는 불상사가 벌어질 수도 있지만, 플랫폼의 입장에서도 현재의 관계이면서도 잠재적 재계약을 하게 될 작가에겐 적절하고 충실하게 조언을 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콘텐츠가 곧 생명인 플랫폼 입장에서는 작가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며, 근래의 근로 문화를 고려하면 플랫폼 입장에서도 갑질을 해서 좋을 것은 없다. 즉 플랫폼 입장에서는 작가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는 게 가장 편한 운영 형태이다.
헌데 이러한 플랫폼 기업적인 운영행태가 콘텐츠로서의 웹툰에 악영향을 끼친 건 아닌가. 앞서 말했듯이 독자들의 눈에 비친 것은 상호존중하는 협력자 관계가 아니라, 플랫폼 측에서의 일방적인 방치였다. 플랫폼의 특성상 다양한 취향의 작품이 세분화하여 업로드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만 데이터베이스의 편차치가 평균 이하인 작품이 플랫폼에 있을 때 플랫폼은 이를 해고하든가 도와주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이 맥락에서 편집자란 “단순히 플랫폼에 작품을 납품하는 관계로만 작가와의 관계를 맺지 말고 플랫폼 측이 직접 나서 소통하라”는 뜻이다. 이는 그들이 한국만화의 질적 저하를 민감하게 느끼고 있다는 증거임과 동시에, 만화를 둘러싼 여러 논란에 사후적으로 개입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플랫폼에 대한 실망감의 표시였다.
예컨대 한국만화 팬들이 편집자를 호명하는 건 만화 시스템의 우열을 가르자는 게 아니었다. 만화의 개선될 여지에 관한 사후적 개입, 즉 책임을 지는 것. 바로 이것이 한국만화 팬들이 원하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해 이는 개선될 여지가 명확함에도 그런 여지를 파고들지 않는 태도에 관해 ‘편집자’라는 개념이 선택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한국에서 만화 편집자라는 말은 일본식 협업 시스템, 개선될 여지가 있는 것을 더욱 발전시켜 최고의 대작으로 만드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재미도 없고 만듦새도 조악한 작품이 왜 계속 연재되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 독자들은 현재의 플랫폼 위주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적어도 재미와 만듦새를 보완해줄 ‘적극적 개입’의 요구를 소명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는 독자들이 만화의 개선될 여지를 언급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독자들은 작가와의 관계를 그저 납품업체 정도로만 여기는 플랫폼의 행보를 비판했다. 겉으로 보면 공정에 관한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듯 보이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지지하는 만화에 대한 아쉬움이 담겨있다. 독자들은 자신이 잘 보고 있던 만화가 작가의 역량에 따라 무참히 침몰하거나 하는 일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줄곧 댓글을 달며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지만 이를 통해 전해지는 목소리에는 한계가 있다. 또한 작가 본인이 개인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기에는 사건의 당사자이기에 사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다. 결국 작가에게 의견을 전달하기 좋은 인물은 작가의 곁에서 오래도록 있어서 친분이 있고, 작품에 대한 제작과정 전반을 잘 이해하며, 작가와 플랫폼 양측 모두와의 연결점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작품에 애정을 갖는 업계 관계자 말이다.
이게 바로 독자가 말하는 편집자다. 플랫폼 산업 내부에서 볼 때 편집자라는 말은 공정에 관한 엄격한 규율적 가치를 조율하는 인원을 뜻한다. 플랫폼 자체의 검토 능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외부적 개입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 플랫폼 산업 외부에서 볼 때, 그러니까 콘텐츠 기업의 논리로 본다면 이는 어떻게 해야 좋은 작품을 만들 것인가의 문제이다. 웹툰이 상호작용성이 강한 만큼, 작가와의 피드백이 원활하다면 독자의 의견을 작품에 반영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테다. 또한 독자가 작가를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가에게 소소한 의견 등을 제안하는 게 불합리하다고는 볼 수 없다. 작가 또한 자신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바라봐줄 사람이 있어야만 작품 창작에 도움이 되니 말이다. 즉 플랫폼은 단순히 작품을 내거는 게시판 이상의 것이 되어야만 했다.
다만 독자의 경우 개인마다 배경지식이나 취향이 파편화되어 있으므로 이를 종합해 의견을 제안할 대표자가 필요하다. 외부적 개입이 아니라 내부적 개입으로서의 편집자가 이렇다. 아래에서 위로 의견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힘을 응집해 벽을 찢고 들어갈 개입의 힘이 바로 편집자다. 국민이 강한 의견 수렴을 위해 투표로 국회의원을 선출하듯 편집자는 독자의 대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한국만화에서의 ‘편집자’란 일본만화의 편집자라는 용어와 분리된다. 일본만화의 편집자가 출판시장에서의 작가 담당인원 정도의 느낌이라면, 한국만화에서 편집자라는 말은 독자의 의견을 수렴해 작가와 소비자 사이에 적절한 징검다리가 되어주는 역할이다. 독자가 작가에게 직접 폭언을 하는 일이나 작가가 독자의 의견을 나 몰라라 하고 막 나가는 일을 방지하는 게 편집자의 역할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한국만화 전체가 품은 숙제라고 할 수 있다. 표절 시비가 있을 작품이 아무런 검토 없이 올라온다거나 작품의 양만 늘리고 질은 하락하는 현상이 단순히 네이버 웹툰에만 벌어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만화업계가 플랫폼 경제로 들어서면서 관리 및 전문인력의 역량이 이들 성장을 따라가지 못했다. 말하자면 이는 한국만화가 플랫폼 기업화되어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시행착오로 보인다. 개중에서도 특히 편집자라는 직책을 호명한 것은 플랫폼 시대가 낳은 만화 산업의 제작구조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웹툰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지 20년이 되어가는 현시점에서 한국만화는 만화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팀과 연재 플랫폼 간의 일대일 계약이 대세인데, 이 스튜디오 시스템에서는 작품에 대한 지분과 책임 소재가 굉장히 모호하다. 그렇다면 독자는 누구에게 말해야 할까? 대표자가 필요하지 않을까?
스튜디오 시스템에 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요점만 짚어보자. 만약 작품에 문제가 생긴다면 외부에서는 이들의 대표자를 누구로 규정할까? 오늘날 여전히 작가 1인 체제로 제작되는 작품이 있지만 대부분은 웹툰 기획사나 스튜디오에 소속되어 활동한다. 이는 작품에 관한 저작권리의 관리와 같은 대외적인 면을 회사에 의탁하고, 자신은 작품 활동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다. 한편으로는 완성된 콘티 등에 펜선이나 배경처리 등을 전담으로 하는 인원의 도움을 받아 플랫폼 ‘납품’에 최적화된 제작 구조를 가져갈 수 있어서기도 하다. 이는 한국만화가 주간 연재가 대세라는 점을 제하더라도 작가의 노동량을 줄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헌데 이렇게 분화되는 작품 제작 과정에서 작품에 대한 대외적인 피드백도 결국 여러 제작인원에게 분산될 수밖에 없다. 피드백은 더는 작가만의 것이 아니게 된 것이다.
피드백은 더는 작가만의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웹툰은 여러 사람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작품의 저작권리가 분산되듯 책임소재 등도 모호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논란에 침묵해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침묵을 깨기 위해 발언할 대표를 만들어두자는 생각은 어떤 면에서 책임 전가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일은 기존의 인력이 아닌 다른 직책에 맡기지 않으면 안 된다. 내부에서 바라보는 현실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편집자라는 직책이 플랫폼에 고용되어야 할 이유는 스튜디오 시스템 안에서 웹툰 PD의 존재로 인해 어느 정도 중복되기 마련이지만, 스튜디오에 소속된 PD는 연재 플랫폼의 도움 없이는 해결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으며, 오히려 그러한 내부/외부 모두에서 개입을 실행하는 게 더 효율적이다.
이제 웹툰 시장에 편집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던 한만갤로 돌아가보자. 편집자라는 말은 한국만화의 플랫폼/스튜디오 이중 체제가 아직 뚜렷이 분리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스튜디오는 작가에게 매니지먼트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대외적인 갈등 사태에서는 독자가 작가와의 소통을 원한다는 점을 근거로 개입을 하지 않거나 혹은 망설인다. 다른 한편 플랫폼은 작가를 공정한 협력자 관계로 설정하지만 정작 비즈니스로 규정된 영역 외에서는 협력자의 역할을 포기해버린다. 플랫폼은 스튜디오 시스템 혹은 작가 개인의 역량에 따라 헤쳐나가야 할 일이라고 판단하면서 공정의 가치를 내세운다. 그렇다면 이 두 경우 모두에서 독자의 불만은 어느 창구를 통해야만 작가에게 안전히 전달될 수 있을까? 지금의 우리에겐 내부와 외부를 이어줄 수 있는 편집자라는 존재가 필요해 보인다. 이들의 애정 어린 목소리를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