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Oct 25. 2023

이상하게도 이상적인, 한국 만화 비평에 대해 말하기


“비평, 그게 돈이 됩니까.” 23년 6월에 발간된 『기획회의 585호』[1]의 부제목이자 주제어다. 해당 호에 참여한 이재민 비평가는 웹툰 비평에 대해 이야기하며 “만화를 통해”서만 이야기할 뿐 “만화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이는 비평을 통해 사회적 현상을 이야기할 뿐, 정작 텍스트에 대한 논의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이러한 논의의 부재로 인해 제대로 된 “논쟁”이나 “합의”의 과정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만화를 무언가를 말하기 위한 도구로만 삼을 뿐, 만화 자체에 대해 말해보지 않아서 만화란 무엇인지를 얘기해본적이 없다고 말이다. 그래서 그는 이로 인해 만화 비평은 전달 의지를 상실했다고 비판한다. 만화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만화를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러니 만화 비평은 정작 만화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 그렇다면 구태여 ‘만화’ 비평일 이유가 없다. 만화를 통해 사회적 현상을 이야기하고 싶다면 굳이 만화가 아니라 문학이나 영화로 가는 게 더 먹거리가 풍부하다. 결국 만화 비평은 시장의 맥락에서는 “돈이 별로 안 되는” 것일 뿐이며, 이로 인해 만화 비평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후의 서술에서 ‘만화’라는 단어는 한국과 관련되었을 때 ‘웹툰’을 뜻한다.) 


특히 이 글에서 유의미하게 다가오는 문장은 “자신이 해롭지 않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는 자조이다. 위험인물이 아니라고 판단되어야만 기성 매체에서 일감을 수주받는다는 말은 비평가로 하여금 보수적인 자세를 취하게끔 한다. 무언가 새로운 발언을 하려면 이게 ‘문제가 될 만한’ 발언인지를 스스로 되묻는 과정에서 일종의 자기검열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비평가의 사고는 커리어와 생계를 위해 제약당하며, 이런 상황에서 만화에 대한 문제제기나 담론 형성이 이루어지기는 힘들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논의의 부재’는 비평가들의 인식이 모자라거나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위한 최적의 선택일 수도 있어 보인다. 비평가를 전문가로 본다면 그런 전문가들이 자기 분야에서 아무런 생각도 갖고 있지 않을리가 없다. 그렇다면, 비평가가 자유롭게 생각을 꺼낼 만한 무대를 만들어주어야만 한다. 우리가 만화에 대해 말하려면 비평의 장을 현실주의에서 풀어놓고 참여하는 것과 구속되는 것 사이를 잘 구분해야만 한다. 의식이 상대방에 사로잡혀있으면, 무슨 말을 한다 한들 모두 상대방에 관한 것으로 환원되어버리기 마련인데. 만화 비평도 비평에 사로잡혀있으면 무슨 말을 해도 비평에 관할뿐이다. 말하자면 내 의견은 만화 비평은 비평이라는 말과 분리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며, ‘비평’은 참여의 장이 되어야만 한다. 


비평은 비평가를 구속한다. 이는 한국에서 비평이 사회적 참여 의무와 깊이 관련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의 비평은 문학으로부터, 일제 강점기와 군부정권을 거쳐 사회 참여를 호소하는 지식인들의 창구로 이용되었다. 지식인-비평가는 신문이나 도서에서 작품을 통해 사회 현상을 발견하고 또 이를 토대로 대중을 계몽 및 선도해야 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과거에 문학인은 지식인이기도 했고 특히 글을 쓸 줄 안다는 점에서 비평가를 겸하기도 했다. 이후 비평의 장은 문화 개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90년대 들어 영화 비평으로 넘어갔다. 기성 문학 비평가들이 영화 비평으로 넘어오기도 했으며, 또한 새로운 세대에 걸맞은 ‘영화’ 비평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가령 정성일과 같은 시네키드의 세대는 예전까지 주류였던 문학 비평이 아니라 ‘영화’의 영역에서 영화의 언어로 영화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영화 비평가로 인정받았다. 이후 한국에서 ‘비평’이라는 말은 단지 문학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영화도 가리키는 게 되었고, 이는 영화가 ‘비평’의 분과 중 하나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했다. 이를 따라 생각하면 우리가 만화 비평을 위해 왜 만화를 말해야만 하는지는 자명하다. 만화 안에서 말해지지 않는 이야기는 결코 영토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국민에 의한 국가가 국민 스스로 세워져야 하듯, 만화 비평은 만화 내부에서 자생할 때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만화를 보고 자란 세대가 만화에 대해 배우면서 만화를 이야기하는 풍토가 마련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만 만화는 고유의 영토로 인정받을 수 있고 또 여기서 비평은 독자적인 분과로 파생되어나올 수 있다. 이재민이 만화에 대해 말하지 않는 만화 비평을 언급한 건 바로 그 점이다. 만화 비평이 문학이나 영화, 혹은 문화 비평의 한 갈래로만 존재할 때, 만화에 대해 말하는 건 어렵거나 불가능해진다. 비평가의 소양이 전문성이라면 만화에 관해서만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만화’ 비평가라 볼 수 있을 상황에서, 만화 비평은 지금껏 문학, 영화, 사회 등의 지면에서만 다뤄지고 있을 뿐이다. 결국 만화 비평가는 각자의 분과 안에서 하나의 부분으로만 자리하며, 우리가 ‘만화’와 ‘만화 비평가’를 말하는 건 불가해진다. 그리고 하나로 통합할 만한 정체성이 없다면,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를 모르기에 비평할 수 없다. 각자의 분야에서 전문가들은 문학의 언어로, 영화의 언어로, 사회적 시선으로 만화를 바라보지만 여기서 만화는 결국 그들 자신을 말하기 위해 거쳐가는 것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토는 아니다. 


이때 만화에 대해 말하는 건 (___)에 대해 말하기라는 공백으로만 이야기된다. 강덕구 비평가는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에서 “공백은 이야기할 경험의 부재”라고 말하면서 장소 이전에 경험이 있음을 말하는데, 이는 만화도 마찬가지다. 만화 비평은 이야기할 경험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만화는 시장의 성장에 비해 그게 어떤 시장인지에 관해서는 제대로된 이야기가 이루어진 적이 없는데, 이는 우리가 현재 웹툰을 주로 ‘만화’로 인식하는 것에서 귀인하는 것일 수도 있어 보인다. 예를 들어 실질적으로 웹툰 시장이 2010년대 초반에 시작된 걸 떠올려보자. 웹툰이 스마트폰이 보급되던 시절의 유산이라 가정하면 만화인은 많이 잡아야 40대다. 그리고 기업이나 프로젝트에서 팀장급으로 선출되는 나이가 주로 40대임을 감안하면, 현재로써는 만화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된 전문가는 시장에 몇 명 되지 않으리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스마트폰으로 포털 플랫폼이나 E-book 형태로 한국 만화를 읽고, 그걸 자신의 내적 경험으로 체화한 인물은 아직 시장의 리더가 아니다. 그러니 어쩌면 만화 비평의 문제는 이들이 팀장이 되거나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시점이 되고 나면, 자연스레 해결될 수도 있다. 어린 시절에 만화를 접했던 이들이야말로 만화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테니 말이다. 


유년기에 형성된 사회적 관념이나 성격은 성인이 되어서도 유지되곤 한다. 마찬가지로 웹툰을 보며 자란 세대는 만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무척 자연스럽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게임을 접했던 부모들이 자녀들의 게임에 별 다른 생각을 갖지 않는 건 이들에게 게임이 자연스러운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에 달린 팔다리나 숨을 쉬는 일처럼 그냥 세계가 보여줄 수 있는 개연성인 것이다. 만화를 보며 자란 세대가 아이를 키우거나 직장의 선임 총괄이 될 때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이 어른들은 아이들의 문화를 두고서 콘텐츠 자체나 그걸 즐기는 방법의 문제로 생각하지, 게임이나 만화 자체가 더럽고 비천해서 한시라도 빨리 배제해야 할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이들은 게임과 함께 자랐기에 게임이 삶의 중요한 순간을 결정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슬프거나 기쁠 때도 자리를 함께한다는 걸 안다. 쉽게 말해 이들에게 게임은 낯선 게 아니며 오히려 이해하기 쉬울 정도로 자기 삶의 일부가 되어있다. 만화에 대한 감정도 만화를 어려서부터 접한 이들에겐 그리 이상하거나 역겨운 게 아니다.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 시간이 없거나 감수성이 달라지거나 해서 만화를 더는 보지 않게 되었더라도 자신이 과거에 보았던 것들, 혹은 그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는 있다.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만화 비평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은 인과가 아니라 ‘자리’이다. 만화를 이야기한다는 건 우리가 언제라도 만화로 돌아와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뜻한다. 삶의 어느 시점에서나 침투해올 수 있는 이 장소가 바로 만화 비평이 시작되는 곳이다. 위에서 “비평가가 자유롭게 생각을 꺼낼 만한 무대”라고 말했던 이 장소는 우리가 만화를 배제하지 않는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형성되었을 때, 만화에 이야기를 꺼내는 일도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가령 우리는 아이가 영화를 보러 간다고 해서 이상하게 여기거나 하진 않는다. 한국 영화는 다 쓰레기가 아니느냐고 말했던 시절이 분명 있긴 했지만, 그러한 70년대 80년대를 지나온 오늘날의 한국 영화는 문화예술 산업 중에 예술과 상업 모두로 선두를 달리게 되었다. 어려서 영화를 보았던 세대들은 한 자리에 모여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를 통해 사회적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듣고 싶어했던 건 그렇게 모여서 나온 결과물이 아니라, 한 자리에 모일 정도로 영화라는 장소를 사랑했고 또 소속감을 느꼈던 이들의 각기 삶이다. 어떤 계기가 그들을 여기에 이르게 했는지를 궁금해하고, 이들의 삶이 미래에 어떤 궤적을 이루게 될지를 고민하는 일이 바로 영화를 이야기하는 방법이 되었다. 


이 전문가들이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우리는 흔히 무언가에 관해 이야기할 땐 보편타당한 사실에 기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위 말하는 방법론이란 것인데 이는 우리가 논리를 전개할 때 그 전개와 구조를 쉽게 파악하게끔 해준다. 유년기에 접했던 사실들은 우리가 그에 투입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우리의 삶이 이를 중심으로 달라붙기 때문에 이해하기 쉬워진다. 딱히 알려는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이미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기에 주변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소리다. 그렇게 보면 만화의 방법론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렸을 때 자신이 보았던 것들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2023년도 상반기를 휩쓸었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그러한 문화적 기억이 공유되는 양상을 보여줬고, 세대를 불문하고 우리는 만화에 대해 할 말이 있었다. 즉, 슬램덩크는 여기 이곳에서 전정으로 이야기되었으며 이곳엔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 만화에 대한 경험을 고백하는 사람은 없거나 혹은 찾아보기 힘들다. 어렸을 때 만화에 푹 빠져 살았다고 말하는 일은 흔치 않으며, 문학이나 영화, 혹은 음악을 두고서 자기 삶의 일부가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보다는 현저히 적다. 만화에 푹 빠져 살았다고 하면 철이 없어 보여서 그랬을까? 그보다는.


자신이 푹 빠진 만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자연스럽다. 하지만 만화에 푹 빠졌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건 그렇지 않다. 만화만을 단독으로 좋아한다고 말하는 일은 한국 사회에서 소위 말하는 오타쿠의 맥락으로 이해돼왔다. “만화 좋아해요.”라는 말에서 별도로 국적을 밝히지 않는다면 이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일본식 오타쿠의 자장에 놓인다. 그렇다면 ‘웹툰’이라고 정확히 고쳐 말한다면 경우는 다를까(물론 글에서는 편의상 통일했지만). 방탄소년단의 노래가 자신이 힘들 때 위로해주었다고 말하는 팬이 있는가 한편, 진로와 취업에 관한 고민 중에 영화 보는 일에만 몰두했다고 고백하는 팬이 적지 않다. 그렇지만 만화를 두고서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기다릴 때처럼 짧게 나는 시간에 본다고만 이야기할 뿐, 무언가 깊게 생각하면서 보는 건 아니라는 말이 태반이다. 그말인즉 웹툰이 실질적인 한국 만화로 기능하는 상황에서, 만화를 만나는 시간은 삶에서 버려지거나 무용해서 그다지 기억에 남지는 않는 시간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만화는 세간의 인식에서 그리 진지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며 사람들은 버림받는 시간에 더는 머무르려 들지 않는다. 즉 만화 비평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또 하나의 문제는 만화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만화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만화를 짧은 시간에 만난다. 단행본을 사서 읽거나 E-book 형태로 몰아서 보는 정도가 아니라면 만화는 항상 우리 삶의 사이나 변두리에 자리한다. 눈을 깜빡이는 찰나의 순간처럼 금새 휘발되고 마는 이 순간에는 무언가 경험이나 유대 같은 게 쌓일리 없다. 따라서 우리는 만화란 무엇인지를 자문해야 한다. 만화란 무엇이고, 또 만화란 어떤 문제일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화를 먼저 말해야만 우리는 만화 비평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다. 우리는 만화를 이야기할 방법의 부재가 아니라 만화를 대하는 태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공백이었다면 상황은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고 상대방도 모른다면 지금부터 새로 만들어가면 되는 것이므로, 서로 이야기하며 만화에 대한 진지한 갑론을박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성 매체에서 만화를 하나의 차세대 먹거리로 발굴하는 과정이 만화에 대한 첫 인상을 좌지우지했다. 스마트폰의 사용과 그 위에 놓인 웹툰을 하나로 합치면서 ‘젊은’이라는 키워드를 만화에 넣어버렸다. 이로 인해 만화에 대한 첫 인상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우리가 대해야 할 외계인으로써의 10대를 이해하는 방법론이 되고 말았다. 동시에 만화를 대하는 태도는 우리가 MZ에 관해 말하는 것만큼이나 통계학적이 됐다.


말하자면 우리가 만화를 대하는 태도는 작금에 MZ를 대하는 것과 같거나 혹은 유사하다. 한국 만화가 MZ 문화의 일환이 됨으로써 만화에 대한 인식은 MZ로 굳어졌다. 기업은 만화 사업을 MZ 세대를 공략하는 것에 집중하며 이는 작품의 실제 수요층을 고려했을 때도 자연스럽다. 허나 만화라는 말이 MZ의 맥락에 포함되어버리면서 만화 자체에 대한 논의를 하기 힘들어졌다. 한국에서 만화라는 말은 MZ를 말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 중 하나로만 치부되며, 만화 비평은 이제 문화나 사회 지면을 거치지 않고서는 이야기를 꺼내기조차 어려워졌다. 다른 한편 일본 만화(망가)에 익숙한 한국의 서브컬처 독자들과의 비교에서도 한국 만화는 ‘한국적’ 맥락으로 MZ를 끌고 오며 여기서 MZ는 한국 만화가 어떤 내용인지를 구태여 묻지 않는다. 그냥 한국에는 이런 장르가 유행하고 이런 소비 패턴이 있다고만 말할 뿐, 어떤 작품이 이 상황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혹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묻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만화에서 MZ의 흔적을 분리해내는 것이고 이를 통해 만화를 철없는 이들의 유희에서 빠져나오게끔 하는 것이다. 또한 한국 만화에서 한국이라는 말을 다시 쓰면서, 이를 구속되는 것이 아닌 참여하는 것으로 바꾸어야만 한다. 


*


에리카 발솜은 「현실-기반 공동체」[2]에서 “모든 객관성은 상황적”이라고 말하면서 전체주의를 예시로 든다. 그는 “전체주의는 현실과의 접촉을 상실했을 때 등장해왔다”고 말하면서, 객관성이 부분적으로만 파악된다면 상황적 맥락을 따라 유동하는 현실-기반 공동체야말로 존재하는 민중이라고 말한다. 만화 비평도 이와 유사하다. 우리가 만화 비평에서 겪는 문제는 이것이 만화라는 매체가 아니라 한국 만화의 자장 안에서만 자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국이라는 말은 작품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의 문제, 한국 사회의 현황인 성별 갈등이나 혐오 발언 등의 맥락에 강하게 구속당한다. 사람들은 만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 만화가 유발하는 연상작용에 더 관심이 많으며, 이는 문화계에서 만화를 하위에서 주류로 끌어올리려는 움직임과 맞물린다. 물론 비평에 있어서 동시대성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대를 비평하는 것과 동시대인으로 살면서 만화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만화를 읽는 MZ 세대의 비율 통계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이야기하는 게 전파력이 더 높을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데. 실은 만화에 관한 논쟁들은 대개 만화 독자들 사이에서 전파되는 경향이 있다. 동시대인이 아니라 같은 장소에 있는 사람들 말이다. 


트위터의 상위 토픽이 만화계의 특정 이슈로 도배되거나 하는 식의 반응은 만화에 관한 피드백이 SNS에 익숙한 젊은 층 위주로 돌아가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문제는 이렇게 젊은 층의 참여도가 높다는 말이 그만큼 동시대에 잘 부합한다고는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동시대라는 표현은 시대 참여적이라는 말과 결이 같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에 의견을 표명하고, 또 항의하는 일은 만화에서 동시대를 연상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만화를 말하는 건 “만화를 좋아하는 이들”의 의식 안에서만 가능하다. 가령 동년 6월에 있었던 네이버 웹툰 AI 저작 사건에서도 이에 대한 비평적 화두는 만화가 아니라 네이버 측의 대응과 독자들의 보이콧에 있었다. 평자들은 웹툰에 AI를 도입하는 일은 네이버 플랫폼에 업로드하는 순간부터 작품에 관한 학습 권리를 내주어야 하는 것이며, 이는 사실상 거대 플랫폼으로의 진입을 위해 ‘동의’를 요한다는 점에서 기업 윤리에 대한 비판이 일었다. 여기서 만화 독자의 역할은 “한국 만화 망했네”나 “네이버를 국정 감사에 올리자”와 같은 식의 거대 담론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들이 피해를 보는 걸 두고 보지 않겠다”와 같은 팬심이다. 이들 독자는 AI와 예술 윤리와 같은 담론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님과 팬 공동체에 호응한다. 


에리카 발솜의 지적처럼 팬문화 중심주의가 현실과의 연결을 상실했다고만은 볼 수 없을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해둘 수 있는 사실 하나가 있다. 한국 만화의 팬들은 한국이나 만화가 아닌, 한국 만화의 자장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는 곧 만화에 대한 동시대적인 참여 욕구가 ‘객관성’에 대한 판독 욕구이기도 하다는 점을 의미한다. 한국 만화에서 벌어지는 논쟁은 만화의 매체적 성질에 관한 미학적인 성과를 가늠질하는 게 아니었다. 한국 만화의 주된 논쟁은 대개 텍스트가 아닌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작가의 사회적 의식 부재를 비판하는 일과 작가를 셀럽으로 만드는 추양 활동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건 한국 만화가 지닌 양면성이다. 바꾸어 말해 [한국 만화]에서 한국이나 만화는 양쪽 모두 제대로 이야기되지 않았고, 이 둘은 만화 작가라는 교집합을 통해서만 다뤄졌다. 그런 이유로 만화 비평은 작가라는 피뢰침을 통해, 주변부에 구속당하면서 다시금 주변부로 환원되어버리는 경향이 생겼다. 이때 만화 비평은 이야기할 대상이 부재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팬의 입장을 따라 주변부로 자신을 변위했기에 만화 텍스트의 중심부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 만화 비평이 의도적으로 리스크를 회피하려 든다고 비판하는 건 잘못됐다. 


우리는 한국적 맥락, MZ로 풀이되는 한국 만화의 정체성에 관해 물어야 한다. 웹툰을 두고서 MZ의 문화라고 말하는 것에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지금껏 웹툰과 관련된 홍보는 모두 MZ를 겨냥했고 이를 따라 만화에서 MZ를 분리하자는 건 무리라고 말이다. 확실히 웹툰에서 MZ라는 말을 분리해내는 건, 이 매체가 스마트폰의 발전과 역사를 함께한다는 점에서도 무리인 듯 보인다. 그러나 ‘한국’ 만화를 논하는 일과는 달리 웹툰에서 MZ는 매체 자체의 정체성을 규정하지 않는다. 이는 한국 만화에서 웹툰이 주류를 이룬다고 해서 한국 만화의 정체성을 MZ에 국한해버린다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특정한 장르가 주류를 이룰 때 여기에 포커스가 맞춰 각종 현안이 다뤄지는 일은 그리 이상하지 않지만. 한국 만화의 국적성을 MZ에만 국한하는 건 다른 문제다. 한국 만화에서 한국이라는 단어를 제하고도 만화에 관한 이야기는 성립할까? 다시 말해서 웹툰이라는 형식에서 MZ를 제외한다면 이것이 한국 만화가 될 수 있을까? 웹툰은 K-만화의 맥락으로 다뤄졌으며 여기서 한국 만화는 웹툰을 자기 정체성 삼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웹툰의 주요 수요층인 MZ가 한국 만화의 주된 독자로 등장했으며 이제 ‘한국’은 한국의 MZ 세대를 가리키는 것에 사용된다.


한국 만화의 세계화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한국적인 정체성의 확립이 아니라 만화를 대하는 사회적 인식의 변화이다. 만화를 대하는 태도가 변하지 않는다면 거기에 어떤 국적이나 정체성이 덧붙여지든 간에 서브 컬처의 맥락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한국 만화를 MZ 문화로 가정할 때 ‘한국’은 한국적 맥락 안에서만 동작하기에 자신을 규정하는 것에 무리가 있고, 또 같은 이유로 외부 세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MZ는 한국 안에서만 기능할 뿐이므로, 우리가 한국 만화를 두고서 해외에 소개할 때는 무엇이 한국적 맥락일지를 고려해야만 한다. 가령 우리가 살아가는 국가가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한다고 보면 한국 만화의 주축이 MZ라는 말은 이들을 특정한 세대라기보단 일종의 민족이나 인종처럼 바라보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세대론은 한국 만화에 대한 시선을 MZ론으로 변질시키거나 또는 타자화된 한국으로 위치짓는다. 한국 만화의 주요 독자를 무엇으로 바라볼지와 같은 문제에서 MZ는 되려 한국적 정체성의 바깥에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며. “90년대생이 온다”와 같은 도서가 베스트 셀러로 등극하는 세간에서 MZ는 기성이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전략적 탐구의 대상이었다. 말하자면 한국 사회에서 웹툰은 폭발적인 성장을 이해할 수 없는 탐구 대상이었다. 


그 점에서 만화 비평이 안고 있는 한 가지 문제점은 MZ를 상대화하는 경향에 맞서 만화의 자리에서 만화를 말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자신이 해롭지 않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 실정에서 타자화된 MZ는 문화적 이해나 포용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주변부에서 메인을 위협하는 위치에만 있을 뿐이다. 이를 따라 만화를 비평하는 일은 문학이나 영화처럼 주류를 거치지 않으면 희석되지 않을 위험성을 내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요컨대 만화 비평은 전달 의지를 상실했다기보다는 위험을 회피하는 한에서 최대한 자신이 하려는 말을 다 하고자 했을 수도 있다. 만화 비평은 만화가 무엇인지를 잘 몰랐기에 만화에 대한 언급을 피했던 게 아니라, 오히려 만화를 잘 알았기에 애써 눈 맞추기를 피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게 만화 비평이 현재 처해있는 구속의 상태이다. 비평이 사회적 참여 의무를 동반한다면 만화 비평 또한 사회적 일원이라는 점을 전제해야 하며, 이때 우리는 만화가 살아가는 사회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만화는 아직 만화의 장 안에서 생겨난 젊은 비평가들이 아니고서는 이에 관해 어떤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만화를 MZ 문화로 바라보는 시선이 되려 만화를 대하기 어렵게 했고, 이를 따라 우리는 만화에 MZ라는 단어를 분리해내야만 한다. 


한국 만화에서 한국의 의미를 재고해보자는 건 이를 위한 전제이다. MZ를 철없는 것으로, MZ 문화인 만화를 철없는 이들의 놀이로 바라볼 때 K-만화라는 웹툰의 대외적인 형식은 벽 안에서 벽 바깥에 대해 말하는 게 되어버린다. 단순히 한국에서 처음 등장해 한국에서 인기를 끈다는 말로만은 만화의 문화적인 성격을 강조할 수 없으며, 이 경우 만화는 단순한 제조업 상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고 만다. 하지만 우리는 먹고 마시고 떠들어 버리는 소비재가 아니라 서로 함께 모여 놀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장소를 원한다. 만화를 문화로 바라본다는 것은 만화의 안쪽에서 바라본다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비평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비평은 단순히 창작자에게 방향성을 제시하고 독자에게는 작품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드는 아고라가 되어주어야 한다. 혹자는 만화가 디지털 환경에 빠르게 적응했다는 점을 근거로 개인 SNS나 댓글란을 통한 독자와의 교류를 언급하면서, 이미 만화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인 게 아니느냐고 물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이 경우는 닫힌 사회에만 그쳐버리면서 어떤 사안이나 안건에 대한 판단 기준이 내부적으로만 마련됨으로써 현실과는 동떨어진 무언가가 될 우려가 크다. 문화적 현상으로 발견될 수는 있어도 문화가 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이 서술에서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보자면, 오늘날 만화 비평의 문제는 만화가 아니라 만화에 관한 것들을 두고 씨름한다는 게 주안점이다. 만화가 뭔지 몰라서가 아니라 만화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 모종의 두려움과 회피적 성향이 있다. 그러나 비평의 본질은 각자가 이상을 갖고서 대결하는 것으로, 애초에 정답이란 게 없으며 양쪽 모두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것이기에 옳고 그름의 판단 대상이 아니다. 이를 따라 생각하면 만화 비평의 문제의식은 문제를 회피하려는 리스크 회피의 양식에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사업의 리스크를 지고 싶지 않아하는 플랫폼 사업자와 1인 창작자로써 만화 작가의 작품 운영이 있으며, 플랫폼 사업자가 비-장소로 기능하는 와중에 비평의 자리는 ‘부재중’이다. 출판만화의 시절에 출판사는 말그대로 출판하는 게 주된 업무였지만, 웹툰 사업 시대에 중요한 건 만화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파생할 플랫폼이며 이 점에서 네이버는 자사의 서비스 노하우를 기반으로 안정적인 경영을 하고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네이버 웹툰 기업이 결국 플랫폼 사업자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는 점이다. 네이버 웹툰은 마치 배달의 민족과 같은 업체들처럼 수수료를 받는 것에만 주력하며, 더 나아가서는 차세대 먹거리인 AI 시대를 위한 학습 도구로만 작품을 이용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작가와 독자는 실질적으로 방해될 뿐인 플랫폼을 ‘구태여’ 돌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주변부로의 위치짓기와 환원이 심해진다. 이때 주변부로 파종되어버린 한국 만화 생태계는 통합된 공론장 없이 서로가 섬에 갇히고야 만다. 즉 작가와 독자가 비교적 직접 교류한다는 SNS나 개인 방송 채널, 사적 커뮤니티는 만화 텍스트의 본질을 독자의 직접적인 참여처럼 보이게 하나, 이는 정말로 우리를 이어놓는 중개지대의 부재로 인한 공론장의 상실일 뿐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 만화는 문화 담론이 아닌 장르적 공식과 밈을 수입하며, 이때 만화 비평은 자연스레 바깥에서 바라보아지는 타자화된 시선만을 획득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국 만화는 대체 무엇일까? 한국 만화는 정작 한국으로도 만화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니 한국 만화를 비평하기 위해 한국 만화 안으로 들어가자는 비평가에게 당장 필요한 건 만화 비평의 자리이다. 이를 위해 비평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만 한다. ‘객관적’으로 말이 되는지를 따지는 일은 이미 각자의 현실이 조각나버린 상황에서 객관성이 조각난다는 점으로 인해 무용해진지 오래다. 한국 만화를 설명하는 것은 어떠한 맥락에서만 존재할 뿐 그 흐름이 여러 인물과 단체들 사이에서 하나로 귀결되진 않는다. 


모두가 한 자리를 볼 때 그게 서로 다른 외견으로 보일 수는 있지만 그에 따른 민중들이 단순히 존재하기만 한다면, 만화 비평은 그러한 현실에 소속되어야만 비로소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 한국 만화를 빌려오는 게 아니라 서로의 이상이 부딪히는 장소에서 이야기를 출발시켜야만 한다. 결국 만화 비평의 문제는 만화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서 비평가를 선출하는 것 이전의 문제이다. 만화 비평은 사람이 부족한 게 아니라 창작자와 독자의 거리가 비교적 가깝다는 점으로 인해 사라진 사이가 문제로 지적된다. 그 점으로 보면, 만화 비평이 항상 주변부를 통해서만 관철되는 건 양자가 너무 가깝기 때문에 구태여 먼 길을 돌아가려는 것일 수도 있다. 분명 만화 비평은 만화에 관해 이야기하는 비평이 아니라 만화의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풍경에 더 의존한다. 바꾸어 말해 지금 한국 만화에서 필요한 건 비평가를 찾는 게 아니라 한국 만화를 비평한다는 현실 자체이다. 비평이라는 말이 이상을 찾는 일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런 이상이 실현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그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상대방과 계속해서 이상을 부딪혀보아야 한다. 우리는 만화를 두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공론장으로 돌아가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다시금 만화가 촉발하는 이상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1]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기획회의 585호』, (서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23)

[2] 에리카 발솜, 「현실-기반 공동체」, 김지훈 역, dockingmagazine, [웹사이트], 2019.09.23. http://dockingmagazine.com/contents/16/113/?bk=main


매거진의 이전글 내부와 외부를 잇는 존재로서의 편집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