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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Dec 14. 2022

펑크의 시대에 연결을 생각하다


콜리그에 투고한 열 일곱 번째 글이다
https://colleague.co.kr/forum/view/760521



어쨌거나 코로나 판데믹은 탈출구를 찾은 듯 보인다. 한국에서도 거리두기가 해제된 지 반년이 되었고 여러 거대 행사가 오프라인에서 성황리에 진행됐다. 대면접촉이 불가했던 상황에서 강제되었던 온라인 소통이 사람들을 표면적으로 ‘연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우리는 서로를 직접 만나기를 고대했다. 이를 두고서 일상으로의 회복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억눌렸던 욕구가 해소되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다시 만나고, 서로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어떤 것은 생각보다 더 처참했고, 어떤 것은 생각보다 잘 버텨졌다. 상식과 경제가 박살 났고, 처음으로 마주하는 모든 게 하나의 예외였다는 점에서 판데믹은 새로운 삶을 위한 기준선이 되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판데믹은 우스꽝스럽게도 새 시대의 표준이 되기에 손색이 없었고, 그게 출발선은 아닐지라도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심어주었다.

확실한 건 판데믹이 세계를 끝장내지 못했고 또한 엄청나게 많은 변화를 끌어내지도 못했다는 점이다. 혹자는 판데믹을 세계의 특이점으로 여겼지만 이미 가속주의에 빠진 세계에 이 폭발은 사소했다. 약간의 수정이 있을지언정 추락의 방향은 건재했고, 판데믹은 거대한 역사 안에 한줄기만 남을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떠올리게 되는 것은 ‘Doomer’로 묘사되는 밀레니엄 세대의 어둠이다. 종말이라는 뜻을 지닌 ‘Doom’이라는 말에서 기원한 ‘Doomer’는 “이미 세상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끝나버렸다.”고 말하는 서양 젊은 세대의 의식 혹은 부류를 뜻한다. 어쩌면 과거의 히피와도 같은 부류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소통이 없고 연결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로 주목된다. 세상은 어차피 끝장났고, 그런데 그걸 이해하는 것은 오직 나 혼자뿐이고,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는 두머에게 세상은 고독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머의 감성은 미래가 불확실한 젊은이들의 그것이라는 점에서 ‘한때의 치기’나 젊은 세대의 문화로 이해될 여지가 크다. 중이병, 대이병, 홍대병이라는 말처럼 언제까지나 그러지는 않으리라고 여기면서, 이를 ‘미숙함’의 표식으로 삼으면서 좀 더 자라 어른이 되면 그것이 말끔히 치료될 것으로 여긴다. 확실히 이 말이 틀렸다고만은 볼 수 없지만, 이들이 마주한 상황이 보다 거대한 무언가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중이병, 대이병, 홍대병은 다소 개인적인 고민이라는 점에서 사적 세계에 관한 개인의 소속감을 중요시했지만, 두머는 다르다. 두머는 세계가 사유화될 수 없다고 믿으며 따라서 개인으로서는 소속되는 게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세계는 거대한 의지에 의해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며, 사적 실천이 불가능하기에 이 안에서 개인은 ‘살아가는’ 게 아니라 되려 존재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이때의 개인은 ‘살아간다’는 동사가 아니라 부동하게 수축된 존재다. 즉 우리는 추락의 감정을 실시간으로, 일종의 연결로 여겼다. 헌데 이는 자신과 세계 사이에 완충지대가 항상 있고 이게 충격에 관한 방호구이기도하지만, 반대로 보면 사태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수면이나 추락에서의 부유하는 감각에서 ‘연결’은 특정한 포인트가 아니라 자신을 감싸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겐 표면적인 유대가 없고 이해되는 흐름이 없다. 물 위의 꽃가루 분자처럼, 단지 자신이 무언가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거대의식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는 거대한 위기 앞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무력감으로 이어진다. ‘종말’이라는 말에 걸맞게 모든 의식이 하나의 결정론으로 수렴되면서 두머는 사건을 마주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건 이후에 덩그러니 놓이기만 할 뿐이다.

베트남전과 같은 세계 문제에서 사람들은 반전시위와 같은 형식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는데, 기후변화나 거대지진 같은 문제에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특히나 9.11과 같은 테러는 그 용례에 걸맞게 인간에게 마주하고 닥쳐올 위기의 성격을 완전한 ‘포스트’의 영역으로 넘겨버렸다. 이들은 ‘이전’을 곧바로 스킵한 채 ‘이후’로 남겨진 것이다. 비릴리오의 말처럼 출발하는 것보다 도착하는 일이 더 먼저 관측되는 시대에 ‘이전’은 힘을 잃었으며, 이에 따라 ‘이후’의 감각이 대두된다. 따라서 이때 ‘연결’은 중요한 키워드인데, 그 이유는 거대한 이야기가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된 게 아니라 그와 연결되는 방법이 상실됨으로써 실질적인 의미에서의 ‘부재’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부재는 애초에 겪어보지 못한 것에 관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전후와도 같다. 전쟁의 손자 세대들이 되려 전쟁을 더 말하는 것처럼, 큰 이야기 상실의 손자 세대는 겪어보지 못한 큰 이야기를 그리워한다.

이 맥락에서 레트로에 관한 상상과 가속주의라는 말은 하나의 합의점을 찾는 듯 보인다. 레트로의 부흥도 그렇지만 서브컬쳐에서 사이버펑크 장르의 소소한 인기를 떠올려보자. 사이먼 레이놀즈가 말하듯 ‘펑크’라는 말이 “미래는 없어”라는 문구로 풀이된다면, ‘펑크’란 미래에 대한 강한 회복의 의지이거나 혹은 뾰족한 수 없는 척하는 과거로의 회귀라 할 수 있다. 요컨대 펑크란 시기적으로 “이미 지나쳐버린 미래”이며 이를 구하고자 한다면 과거로 떠나자고 말한다는 점에서 이상한 타협점으로의 현재를 그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기에 기술이 결합된 사이버펑크는 인본적인 의미가 아니라 네트와 테크놀로지를 위시한 연결을 그린다는 점에서 AI와 5G가 지배하는 판데믹 세상에 더 잘 어울린다. 21세기의 초연결 사회가 사람들을 고독하게 만드는 건 오히려 그런 관계의 시작점이 아니라 ‘이후’만을 알 수 있어서라고. 사람을 알아가는 게 아니라 이미 다 아는 것처럼 전제하고 행동해서라고 말이다.

이 주장의 개요는 포스트모던이 거대한 이야기를 잃어버렸다고 말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게 한참 전에 끝나버린 세상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두머는 거대한 이야기에 관한 확신이 없다. 혹은 모른다. 전후라는 말이 전쟁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손자 세대를 통해 완성되듯이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은 거대한 이야기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세대를 통해 완성된다. 바꾸어 말해 두머는 사람들이 어떻게 연결됐는지를 모르는 세대다. 거대한 이야기가 사라지고 거대한 빈 공간(우주나 네트워크라는 황무지)이 등장한 이 시대에 개인은 구심점을 잃어버리고야 말았으며, 이에 그들은 항상 지금이야말로 자신의 위치임을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는 오직 ‘실시간’만이 존재를 확인해주며, 그런고로 ‘연결’은 자신을 설명하는 전제이자 그런 연결에 의해서만 설명되는 인간상을 만들어낸다. 이게 바로 두머가 네트워크와 친연성을 갖는 이유다.
 
가령 트위터를 구글에 검색하면 나오는 “트위터. 핵심은 ‘실시간’입니다.”를 떠올려보자.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자신의 고독감을 채우는 방식은 트위터와 같은 공간에서 파도에 몸을 맡기며 ‘실시간’으로 사람과 연결되는 ‘감각’을 즐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시간은 출발보다 도착이 더 빠르며, 이는 곧 무언가가 되어야 하는 것에서 이미 무언가가 되어버린 자신을 ‘무언가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해 긍정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즉 초과한 현재로서의 미래가 잉여분으로의 과거에 손을 내미는 방식으로 균형을 맞추려는 게 이들의 연결이다. 이들은 과잉 연결되어있고 또 과대대표되었으며, 과거가 돌출되었다고 믿으면서 과거를 미래에 끌어오는 방식으로 세계가 실시간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시간의 고고학이 하노이의 탑처럼 이루어진다면 이들에게 세계는 하나의 노드이며, 두머가 실시간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게 곧 미래를 붙잡으면서 과거를 돌이킬 수 있는 단 하나의 장소여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사건 이후에 관한 감각이 결정론이 지배하는 세상을 초과하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 두머가 몸담은 가속주의 세계관이 결국에는 종말을 피할 수 없다는 최대광속을 따른다면, 그 누구도 광속을 앞지를 수 없다는 게 바로 세계의 법칙이다. 하지만 두머에게 실시간은 미래가 있다는 환상을 보여주면서도 과거를 잡아당길 수 있을 것만 같은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 가장 안락한 존재의 자리가 된다. 이윽고 전후의 힘이 마주하면서 시간은 완전히 정지해버리고, 두머는 성장하지 않는 아이 혹은 끝나지 않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 이른바 존재에서 사람으로의 이행, 두머에게 실시간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기에 세상과의 유일한 연결고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결은 시간을 파열하고 존재를 분열시키므로 순행적 섭리로의 결말은 결코 도래하지 않는다. 단지 느려지고 느려지면서 현재를 포기하지 않는 노력만이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어떠한 결말을 상상하기보단 그러한 결론 이후에 도달하는 다양한 가짓수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다중우주에 관한 상상을 이와 유사한 현상으로 거론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같은 영화를 보면서 생각해볼 수 있는 건 ‘선택받지 못한’ 우주가 그 중심축의 ‘나’와 ‘실시간’으로 함께한다는 감각이다. 이 감각에서 우리는 ‘이후’를 살아가는 모습, 아직 무슨 일이 시작되지 않았고 앞으로 펼쳐질 날들이 많다는 ‘이전’으로의 전회를 꾀하는 작은 희망을 본다. 그러니까 이 실시간이 말하는 ‘이후’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미래를 뜻하는 건 아니다. 이러한 ‘이후’는 계속해서 무언가로 남겨지고 미끄러진다는 부유력을 뜻한다. 그리고 이 부유력에 마찰계수가 없다면 실시간이 되고, 마찰계수를 일으키면서 둘 사이에 합의점을 찾는다면 폭발이 될 것이다.

이 대목에서 두머는 갈림길에 선다. 하나는 폭발의 순간에 영원히 머무르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폭발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는 일이다. 후자를 먼저 논해보자. 우리가 알다시피 폭발을 탈선의 순간이라 볼 수 있다면 ‘폭발 이후’라는 것은 이미 미래나 과거 어디로든 속하지 않는 시간일 수밖에 없다. <드라이브 마이 카>나 <날씨의 아이>에서처럼 과거로부터 드문드문 전승으로 내려오던 ‘커다란 이야기’(히로시마와 날씨의 무녀)의 손자 세대인 이들에게 ‘이후’라는 것은 바로 그로 인해 성립가능한 과거와 미래 모두를 거부하기에 벌어지는 현상에 가깝다. 그렇다면 그것은 왜 현상인가?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기준으로 삼아야만 어떤 것을 정의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세기의 탈선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후’는 우리가 섣불리 서술할 수 없는 시간이자 그런 의미에서 현실과 연결되지 않은 시간이다.

전자에 관해서는 <탑건: 매버릭> 같은 부류의 영화나 <엣지러너> 같은 만화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은 거창한 목표 같은 걸 갖고 살아가지 않는다. 커다란 이야기가 없는 세상은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바꿔 말해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세상이기도 하니까. 이곳에서 이들은 그저 존재하기만 할 뿐이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몇몇 문제들은 세계의 배경으로 자리 잡아 살아가는 무대와 지형이 된다. 마하 10을 향해 높게 나는 매버릭의 모습이 계기판에 실시간으로 작용하고 이 영화의 시간은 멈춘다. 요컨대 이 부류의 이야기는 들어가면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나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미 다 끝난 일을 가지고서 시작하는 이 이야기들은 과거를 회복하거나 미래를 만회하려 하지 않는다. 커다란 이야기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은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그냥 이야기가 없으며 또 이야기되지도 못한다. 화면이 멈추자, 이야기는 ‘이후’로 넘어가며, 이곳 세계는 우리의 현실과 노드로 연결된다.

이런 이야기를 두고서 두머를 끌고 오는 건 논증을 정교하게 끌고 오지 않는 한 흥밋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잘 안다. 다만 확실하게 말해두고 싶은 점은 세계가 포스트 판데믹이라는 ‘이후’에 강하게 사로잡힌 것만큼이나 사람들에게서 연결에 관한 욕구가 강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초연결이 미래에 관한 결정론으로 나아가는 일에 모두가 질렸다. 하지만 모두가 각자의 이후를 살아가는 현실에서 더는 공통된 세계를 살아가지 못하게 된 우리가 하나로 통합된 ‘이야기’란 걸 쓸 수 있을까. 만약 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세계에 활동하는 인격이 하나만 있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이 다중인격을 조화롭게 드러내는 방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예컨대 다중우주라는 건 그런 의미에서의 다중인격을 뜻하는 건 아닐까. 들뢰즈의 표현을 빌린다면 이 분열된 자아는 실시간의 끝에서, 수축된 영광으로서 무언가를 응시하고 노래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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