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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an 06. 2023

운명이 도래하고 실패가 낯선 자리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를 보면서 운명에 관해 생각했다. 영화에서 운명이라는 것은 무엇일지, 만약 있다면 그 운명은 존재론으로 혹은 관념론으로 파악될 것인지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유레카>에 관한 글을 찾아 읽었고 유운성이 아오야마 신지 강연에서 <유레카>를 일본 영화의 맥락에 기대어 파악하는 맥락을 발견했다. 유운성이 <드라이브 마이 카>의 평문에서 ‘이후의 영화’로 지칭하는 하마구치의 영화가 아오야마의 <유레카>를 성실히 되짚는다면, <유레카>를 말할 때 이 맥락은 “일본적 풍경이라 지칭했던 것이 무너지고 이것이 일본 예술 영화 안에서 다시금 회귀하는 구조”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유레카> 이후의 20년에서 아오야마가 말하던 ‘이후의 영화’는 다시금 하마구치에게서 ‘이후’라는 맥락으로 도돌이로 환산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후’를 되새김질해서 얻는 득은 무엇일까. 소화가 더 잘 되길 바란 것인지 아니면 먹을 게 없는 건지와 같은 가정을 해볼 수 있겠다. 전자의 경우 일본영화에서 ‘이후’의 문제는 해결 불가하다는 결론이며, 후자의 경우는 일본영화가 어떠한 형태로든 성장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후자에 관한 생각을 이어가자면 어쩌면 이 경향은 ‘성장하지 않는 아이들’이라는 주제의식 안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 같다. 김병규가 신카이 마코토의 <날씨의 아이>에서 지적한 게 세계의식과 개인 신체의 분리라면, 확실히도 이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스파이의 아내>와 같은 영화에서도 발견된다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마코토와 기요시 사이에 많은 거리감이 자리하지만 적어도 일본이라는 범주로 본다면 이들 영화는 칸트적 맥락에서의 세계와 개인을 서술한다는 점에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이 연장선에서 <드라이브 마이 카>는 자동차라는 사물을 통해 그 자신을 침묵의 세계를 관통하는 개인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으며, 잘 알다시피 이는 ‘무대’라는 점을 통해 영화로서 은유된다. 요컨대 하마구치가 <드라이브>에서 구성하는 건 “영화는 세계 안에서 성장하지 않는다”라는 주제의식이었다고 보아도 좋다. 무대는 세계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세계의 밖에 있어야 하며 그렇기에 <드라이브>의 무대 리허설은 그 자체로 원본이다. 이들의 합은 리허설에서만 성장할 수 있고 되려 무대에 들어가면 성장하지 못한다. 


이를 따르자면 다음처럼 말할 수 있을 테다. 오히려 영화는 세계 밖에서만 성장할 수 있고 ‘이후’에서만 어른이 될 수 있다고. 그런데 이런 요약에서 이상한 점은 이후와 이전 사이의 관계가 평행하다는 것이다. 가령 위에서 말했듯 무대 밖에서 무대 위에 오르는 게 이후에서 이전으로 향하는 일이라면 ‘이후’라는 건 시계열적인 무언가를 뜻하는 게 아니게 된다. 우리가 포스트라는 용어를 두고서 그것을 고고학적 맥락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이들 영화에서의 이후는 이전을 재탐구하려는 듯 보인다. 즉 <드라이브>는 시계열적으로 <유레카>의 이후에 나왔지만 오히려 두 영화는 같은 세계에 존재함으로써 둘이 전혀 성장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표에 불과하다. 유운성이 말하는 건 이 대목으로, 두 영화 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붕괴의 신호뿐만 아니라 외부가 내부로 들어가는 구조 즉 ‘성장하지 않음’의 주제의식이다. 이들 영화에서 세계의식은 개인의 신체를 다루지 못하며, 오히려 그 자신의 범주를 한정하기 위해 신체에 틀어박히려는 경향이 있다. 고로 이들 영화에서 신체는 고유하거나 주요한 것으로 부상할 수밖에 없는바, <유레카>의 주된 시선이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형태로 구성된 것은 그 때문일 테다.


알다시피 <유레카>의 후반부는 버스를 타고 다니는 인물과 몇몇 장면으로 구성되었고 여기서 버스는 모종의 집처럼 기능한다. 숙식을 해결한다는 점에서 집에 빗댄다면 이곳은 이들의 신체로도 보여지며 이 신체의 고유성은 그들 버스가 지닌 속성이 그 시절의 사건에 머물러있다는 점으로 확언된다. 말하자면 이 버스는 성장하지 않음의 증표이며 버스를 타고 다니는 이상 아이들은 성장할 수 없다. 아마도 <드라이브>의 서사 짜임은 이곳에서 비롯되었을 테다. 무대에서는 성장할 수 없고 리허설을 통해 성장한다는 이 구도는 <유레카>의 성장은 전반부에 집중돼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성장이 전반에 집중돼있다는 말은 영화가 그리는 이후란 영화의 전반에 있으며, 이는 영화의 후반부가 그런 이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다룬다고 지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즉 이들 영화에서 이후라는 표현은 영화의 도입부가 각자 버스 납치 사건과 아내의 죽음 등인 점을 가리킨다. 이들 영화는 이후에서 출발하며 이미 어른이 된 이들이라는 점에서 더는 성장의 여지가 없는 상태다. 결과적으로 이들 영화는 어른이 유년기를 탐구하는 방식으로써 <에반게리온> 시절의 그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생각해보면 <에반게리온>의 후속작인 <신 에반게리온>은 에바의 주박이라는 개념을 통해 성장하지 않는 아이를 직접적으로 제시한다. 신지도 아스카도 레이도 마리도 모두 성장을 멈춘 상태거나 혹은 그렇게 되며 이는 영화의 결말에서 아버지인 겐도와의 일대일 전투로 이어진다. 그런데 ‘아버지’와의 갈등은 아오야마가 <유레카>에서 천착했던 주제가 아니던가? <유레카>를 비롯한 영화들(이를 테면 <헬프리스>)에서 아오야마가 그려냈던 것은 일본의 20세기를 구성하던 아버지 천황과의 이별과 그에 따른 사회적 분위기였다. 이런 와중에 20년이 지나 <신 에반게리온>이 제시하는 아버지와의 갈등은 이전처럼 아들의 일방적인 ‘외톨이다움’이 아니라 서로에 맞서 싸우는 일로 진행된다. 신지와 겐도는 서로 같은 기체에 올라 싸우며 이 과정에서 주변 세계는 2D의 현장을 벗어나 글리치가 난무하는 3D 혹은 디지털 세계로 붕괴된다. 즉 <신 에반게리온>의 결말은 자신을 영화 밖으로 추방하고 있으며 이는 곧 <드라이브>가 무대의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던 것과는 정반대 방향이다. 그렇다면 <신 에반게리온>은 성장하지 않음에 관한 콤플렉스를 해결하고자 한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바꾸어 말하자면 어쩌면 <드라이브>는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그려내야 했던 건 아닐까. 


이 서술만으로 논의를 이어가기엔 주제가 좁혀지지 않는 면이 있으므로, 잠깐 <날씨의 아이>를 언급해두려 한다. <날씨의 아이>의 결말은 이상하리만치 무책임한 것으로 ‘충분히 있을 법’하다는 점에서 개연적이지만 정말로 그런 선택이 최선이었는지는 의문이기에 ‘핍진성’은 결여되어있다. 호다카는 히나를 위해 자신이 구전으로 들은 ‘바깥’을 애써 무시해버리고는 현세의 도쿄라는 안쪽으로 도피해버린다. 물론 이들은 히나의 능력이 어떤 형태로 사용되고 또 어떤 유의점이 있는지를 미리 학습했다는 점에서 약간의 리허설은 진행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이들의 선택은 그 성장에 있어 완성된 형태였으며 그렇기에 오히려 영화의 결말은 의문을 남긴다. 만약 영화가 이들을 미숙한 채로 내버려뒀다면 도쿄를 수장시킨다는 결말은 다소 납득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에게 리허설은 충분히 이루어졌기에 되려 이 선택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게 이뤄진 선택은 이들 무대를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그 자신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완성이라는 말은 더는 나아갈 곳이 없다는 점에서의 ‘이후’가 생략된 것이고 이에 따라 이후라는 말은 설자리를 잃는다. 


말하자면 <날씨의 아이>가 보여준 것은 희망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거기서 끝나버린 세계이다. 세계야 계속 흘러가겠지만 이들의 여정은 여기서 끝났으며 이는 마치 만화의 완결과도 같은 것이다. 마찬가지의 형식이 <드라이브>에도 있다. <유레카>의 결말을 장식하는 대사가 “그 아이는 다시 집으로 돌아올거야.”라는 차회예고인 반면, <드라이브>의 서사는 가후쿠가 상대를 끌어안으며 이전의 트라우마를 해소하는 방식으로 짜여있다. 즉 리허설을 통해 진행된 무대가 리허설을 설파해버림으로써 완전무결한 무대만을 남기는 식으로 영화는 진행된다. 이른바 <드라이브>의 가후쿠는 후쿠야마가 말하는 최후의 인간이며 이곳에서는 더는 역사의 발전이 없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가후쿠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끝에서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를 최후로 남기는 이런 설계가 남기는 이점은 무엇일까. 어쩌면 하마구치는 영화가 현실의 모든 고난과 역경을 감내해야 한다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영화를 마치 사건사고의 쓰레기통 삼으면서 그 영화가 연기하는 무대는 우리들 현실이 해내지 못한 것들의 완결이라고. 


그러나 이런 형식은 영화를 존재하게 할 수는 었어도 그렇게 도달한 현실에 우리를 존재하게 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무대가 현실로 확장되는 순간, 우리 또한 연기자가 되어 그러한 희망을 연기할 뿐인 게 되어버리니 말이다. 따라서 내부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그 자신의 터전을 외부로 확장하는 <드라이브>의 방식은 경계를 해체하는 것인바, 더는 이후로 나아갈 길이 없다고 말하는 ‘최후’의 감각은 궁지에 몰린 쥐가 아니라 세계를 집어삼키는 뱀에 가깝다. <드라이브>는 세계를 치유하는 게 아니라 이전 세계가 존속하기를 포기했으며, 어떤 면에서 이는 근본적인 치유가 아니므로 자기살해의 형식에 더 가깝다. 말하자면 적어도 <유레카>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 믿었던 반면에 <드라이브>의 세계는 문제해결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더 비관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세계를 살아갈 이유란 게 정말로 있을까? 사람들은 <신 에반게리온>의 결말을 두고서 안노가 자기 작품을 스스로 끝내고 싶어한다고 말했지만, 그런 경향은 단순히 에바에만 적용된 게 아니라 일본영화 전체의 경향이라 할만하다.


이처럼 <신 에바>에 따르면 일본 영화에서 ‘성장하지 않음’의 문제는 신체에 갇혀있는 정신으로도 서술될 수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정신은 신체의 성장을 견인할 수 없으며 그릇의 문제는 적어도 정신과 불일치한다. 아마 이 모습이 <드라이브>가 그리는 연극무대처럼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니다. 리허설은 무대를 완성할 수 없으며 무대라는 건 리허설과 완전히 일치할 수 없다. 인간이 살아가는 무대란 오히려 개인의 사고를 무대 위에 완성시킨다는 점에서 자기 신체의 범주를 확립하는 일에 더 가깝다. 즉, 세계 안에서 개인이 정신을 소유하는 방식은 세계 안에 신체를 구성함으로써 그곳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내는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나는 이들 영화가 어떠한 운명을 묘사하는 건 아닌지와 같은 문제를 제기해보고 싶다. 만약 운명이라는 게 보편타당한 맥락에서의 미래로 서술된다면 적어도 우리에게 운명이란 ‘그 자신이 거머쥘 수 있다는 점’에서의 특정성이 있을 테니 말이다. 이를 따르자면 연극에서 리허설은 자신이 그리는 미래를 확정시키고자 한다는 점에서의 운명론이다. 보고 들은 순간 즉시 미래로 고정되어버린다는 전형적인 신탁 말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 이상의 신체를 상상할 수 없다고 믿는 이들의 의견은 대개 자기 신체를 보다 정교하게 활용하는 방식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곤 한다. 마찬가지로 영화 또한 주어진 세계의 바깥을 상상할 수 없는 입장에서 그 자신의 숏을 보다 정교하게 활용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는 영화가 이미 어떠한 결말을 가정하면서 이를 그려가는 과정에 몰두하는 것으로, 그 미래가 고정되었다는 점에 중점을 둔 실행이다. 이들에게 영화란 최후의 체제로 달려가는 과정으로, 그 의미는 자신의 삶을 자기 손으로 끝낸다는 점에서 자기살해의 숙련도를 높이는 것과도 같다. 즉 이들에게 영화란 치유될 수 없는 것이므로 더는 무언가를 해본다기보다는 해변의 끝자락을 향해가는 드라이브와도 같다. 그렇다면 행여나 자기살해를 통해 새로운 무언가로 태어난다는 환생이 가능하지는 않을까. 물론 이는 가능하지만 그게 가능해지려면 주어진 것 이상을 상상해야 한다는 점에서 영화가 자신에 어떠한 형식이나 형태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주어진 것 이상을 상상하는 방법은 그러한 이후에서 자신이 존속할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스스로 지워버리는 일이다. 


그 점에서 <드라이브>가 망각을 선택했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드라이브>의 선택과 오브제는 어떠한 사건이 결코 망각될 수 없다고 말한다. 가령 <드라이브>의 히로시마는 그것이 잊어서는 안 될(memorial) 사건이기에 되려 비가역적인 지점으로 작용하는 듯한 인상이 있다. 마찬가지로 <드라이브>의 가후쿠는 아내가 죽는 시작점에서부터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며 이를 따르자면 영화 전체가 어떠한 이후로서 결정된 운명이라고 볼 수 있다. 유의할 건 이것이 단순한 이후의 삶을 그리는 게 아니라 일본 영화라는 맥락에서 하나의 바깥을 구성한다는 점에 있다. <칠드런 오브 맨>의 자동차가 아이를 품은 여인을 세계의 바깥으로 탈출시킨다면 <드라이브>의 자동차는 아이를 잃은 사내를 세계의 안쪽으로 끌고 간다. 여기서 우리는 이 영화가 무대를 묘사한다는 점에서 그것이 일종의 잠재태, 들뢰즈 식의 폐허로 이해될 가능성을 고려할 수 있지만 그 과정은 어떠한 합의로서의 공동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상한 전후체제의 논파라기보다 자포자기에 가까우며, 이 점에서 <드라이브>는 <유레카>의 과거로부터 다소 퇴보한 듯 보인다. 


<드라이브>는 이후를 소화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되새김질만 한다고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이런 되새김질을 지켜봐야 하는 건 한편으로 이곳에 구로사와 기요시의 <스파이>처럼 슬픔을 상기하는 과정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일의 경과와 결론에 책임을 지는 일은 응당 이뤄져야 하지만 정작 그 과정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일이 많기도 할뿐더러, 바깥의 공동체를 논할 때 우리가 바라본 희망은 이미 밖으로 확장된 무대를 따라 그 위에 올려져있다. 그 점에서 <드라이브>의 가능성은 무대를 확장하는 형식에 있다. 무대를 거쳐 바깥을 배제하는 형식으로 본다면 이것은 운명을 거부하기 위해 망각을 택하는 일에 가깝지만, 반대로 이는 연극이라는 형식을 통해 한정된 세계를 전체로 확장하고 이를 통해 운명을 어떠한 관념에서 분명히 존재하는 것으로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유레카>가 어떠한 상상적 공동체를 가정하면서 그것을 이상적인 관념에 기대어 파악했다면, <드라이브>에서 운명이라는 말은 거진 존재하는 것으로써 일종의 고도처럼 ‘반드시’ 온다고 보는 것에 가깝다. 확실히 <드라이브>가 공동체를 외면한다는 말에 관해서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희망을 저버리진 않았기에, <드라이브>는 여전히 <유레카>의 연장선에 있으며 또한 영화이기를 포기하지도 않았다. 


*


<재벌집 막내아들>을 보며 실패에 관해 생각했다. 씨네21에 조혜영이 기고한 에서도 지적하듯 근래 웹소설의 주류 흐름에는 ‘회귀’와 ‘빙의’, ‘환생’이라는 세 개의 키워드가 있는데, 이는 이미 영화에서 안전한 실패로 지적되었던 <엣지 오브 투모로우>등을 통해 미리 접해진 바 있다. 사실 이것조차 일본의 라노벨이 원작이므로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다고 볼 수 있겠으나, 중요한 건 이러한 ‘게임적 리얼리즘’이 지금에 와서는 어떤 부류로 변형되었는지다. 게임적 리얼리즘이라는 말이 유행하던 2010년대로부터의 10년이 흐른 지금, ‘실패’라는 말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 것일까? 말하자면 우리는 게임적 리얼리즘이 여전히 유효한 단어인지를 살펴 물을 필요가 있다.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적으로 흥행한 세상에서 게임이라는 말은 이제 더는 가공의 공간을 가리키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고. 또한 이러한 게임에서의 실패는 가공이라는 말로써 보호받지 못하므로 ‘죽는다’라는 말이 단순한 은유에만 그치는 건 아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요약해서 말하자면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지점은 “게임은 더는 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라는 의문제기의 현장이다. 마치 <소드 아트 온라인>의 서비스 연도가 2022년인 것처럼, 우리는 게임이 현실과 구분되지 않을 세상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게임에만 한정해 말했지만 가상이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 것은 2020년대의 흔한 풍경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사냥의 시간>과 같은 포스트-SF 아포칼립스 영화에서 한국은 “빠르게 변화했지만 여전히 한국적인 무언가”로 묘사된다. 이 영화에서 공간은 가공의 한국과 실제 한국이 겹쳐져 있으며, 이는 모호한 중첩 상태를 형성한다. 한편으로 <내언니전지현과나>나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처럼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무는 방식으로 매체에서의 경계를 말하는 작품도 있다. 이들 작품은 우리가 그동안 작품을 구분해왔던 경계는 두 공간이 하나의 지대를 점유함으로써 중첩의 문제로 다뤄진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두 세계에서 중요한 건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아니라 양쪽 모두에 존재할 수 있는 주체 혹은 신체의 유무라는 것이다. 따라서 관통, 횡단, 이주 등으로 풀이할 수 있는 이 현상에 관해 우리는 위에서 논한 회귀, 빙의, 환생이라는 키워드를 재고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상에서 중요한 건 ‘자신’임을 잃지 않는 일이며, 이는 물리적인 몸이 달라지더라도 주체의 연속성만 유지된다면 괜찮다는 뜻이니 말이다. 


이때 몸이라는 것은 단순히 성별이나 종족 등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시간 축을 포함한 좌표계를 의미한다. 이 세계에서 신체란 개개인에 부여된 좌표이며, 이러한 좌표의 연속성이 고유명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고유명이야말로 독자가 작품에 이입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고유명은 어느 세계에서나 주체의 자리를 확보해둔다는 점에서 여러 상태를 엮기에 용이하며 이는 독자로 하여금 그러한 세계를 수행하게끔 한다. 독자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어야 하므로, 단순히 세계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러한 세계에 자신을 존속시키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회귀, 빙의, 환생의 세 가지 사용에서 가장 중요한 건 죽음이나 실패로부터 출발하는 플롯이 아니라 “그 어떤 세계에서도 자신이 살아남으리라는 의지”의 실현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회빙환]의 플롯은 운명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니라 자신이 미래에 출몰하리라는 예지의 능력에서 시작되는 셈이다. 말하자면 [회빙환]은 일단 한번 죽고 다시 시작되는 재시동의 맥락이라기보다는 미래에 대한 선취매개의 형식에 더 가깝다. 과거에 게임이라는 말이 언다잉(죽지 않음)의 맥락에서 안전한 실패와 그에 따른 사회적 안전망을 묘사했다면, 오늘날 게임이라는 말은 현재를 앞서 가며 미래에 도래하는 주체를 묘사함으로써 실패의 몫을 주체가 아닌 환경에 지운다. 만약 실패가 환경이라면, 그런 환경에서 존속하는 자신의 모습은 실패에 생존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과거와 현재의 결정적인 차이는 실패를 양분으로 삼는 방식에 있다. 과거가 실패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절대적 실패는 없다고 말했다면, 현재에 실패라는 말은 하나의 도전이라기보다 삶의 터전이자 세계의 전제인 듯 보인다. 우리가 모두 실패했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는 실패가 기본값인 세계를 살아가고 있으며 이곳에서 성공은 예외적인 값이라고. 그리고 이렇게 성공이 변수로 치부될 때 실패는 더는 추락으로 여겨지지 않으며 오히려 성공이야말로 세계를 추락시키는 원동력으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카메론의 <알리타: 배틀엔젤>에서 공중도시인 자렘을 떠올려보자. 영화가 시작하는 것은 자렘이라는 상위 세계의 하위세계이며 이들 모두가 자렘에 가길 원한다. 그러나 자렘에 가지 못한다고 해서 이들이 자신을 패배자로 여기지 않으며 되려 자렘은 출세의 증표로서 예외적인 무언가로만 치부될 뿐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카메론의 다른 영화 <아바타>에서 주인공 제이크 설리의 처지를 떠올려볼 수 있다. 상이군인인 제이크 설리가 아바타로 환생하기를 택한 건 어떤 연유였을까? 어쩌면 설리는 자신의 처지를 실패자로 여기면서 아바타를 새 육체로 삼았을 수도 있다. 허나 이 영화에서 실패라는 말을 제이크 설리 개인에게만 부여하기엔 설리를 배신자로 만드는 꼴밖에 더 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애초에 추락할 곳이 없다는 점에서 이들 인류를 실패의 상태로 규정하고, 이들이 미래에도 존속하는 방법으로 아바타라는 신체를 접속지점 삼았다는 점에서 미래에 출몰하는 신체로서의 아바타를 논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 논의의 핵심은 우리가 게임이라는 말로 지정했던 가상은 더는 추락 방지망으로서 실패를 담보하는 지점이라는 게 아니라, 이미 성공으로 지정된 장소로서 우리가 그곳에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논하는 곳이라는 점이다. 이는 우리에게 가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지우지만, 이때의 삭제는 인식을 허무는 게 아니라 과정을 체득하길 요구한다. 이른바 실패라는 말은 성공을 도출하기 위해 설정된 무대이며 이것은 세상이 이미 끝장났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마이너스에서 출발해 제로를 향해가는 이 공식에서 우리는 생존의 가치가 플러스가 아닌 잔존의 맥락임을 파악한다. 과거의 게임이 어떤 시도를 하든 생존을 담보한다는 점에서 계속해서 시도할 수 있는 대목을 인물의 성장판으로 삼았다면, 근래의 게임은 이미 생존한 상태에서 출발해 그러한 생존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는지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인물의 성장은 초장부터 완성된 형태다. 이미 외적으론 완벽하면서 내적으로는 미숙한 상태가 바로 서사의 출발점이 되는 셈이다. 요컨대 실패의 현실은 단지 미래에 접속하기 위한 현장으로서 설계되었을 뿐 그 자체로 추락의 입지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이미 완성된 현실은 그 자체로 무결하지 않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무언가를 쌓아올릴 때 그 견고함이 빛난다. 


이른바,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이 추락방지망이 아니라 좌절을 안겨주는 현실이 될 때 우리는 세상에 내쳐졌다는 의미에서의 잔존감을 획득한다. 그래서 이 세계는 어떠한 목적성이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이 목격한 미래를 확정시키려는 투쟁의 과정 혹은 여정이 될 수밖에 없다. 실패한 현실은 성공의 순간을 확정적으로 도출해내며 우리가 운명이라 부르는 것은 우리가 성공의 순간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따라 버려지는 나머지 것들에 관한 애도에 더 가깝다. 남은 것을 어떻게 ‘순간’으로 마주하는지에 관한 물음은 적어도 우리가 실패한 현실에 내쳐졌다는 흐름에서 그렇게 살아남은 것을 다시금 생존의 현실로 재창작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즉, 오늘날 게임이라는 말은 우리가 주체를 재창조하는 과정을 가리키며 이러한 재창조의 과정에서 연속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흐름에서 [회빙환]은 무언가 다시 시작하려는 욕구 같은 것에 의존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시 시작한다는 말은 이미 망쳐진 현실을 다시 살려보려는 일이나 마찬가지인데, [회빙환]에서 현실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서 출발하고, 이는 곧 이들이 미련을 완전히 버리는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 더는 추락할 곳이 없고, 따라서 이는 실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를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실패는 미래의 자리를 만들어둔다는 점에서 도래적이라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회빙환]은 실패한 현실을 마주하기 싫어서 다른 곳으로 도피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 장르들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건 깔끔히 이전 세계를 포기해버리고서는 구세계의 법칙으로 신세계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아주 명백하게 두 세계는 비슷한 법칙을 공유하지만 서로 다른 곳임이 확인되며, 이에 따라 우리는 실패나 성공 모두에서 벗어나 자신이 아는 것들에 2배를 적용할 수 있다. 특히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회귀물, 자신이 이미 아는 결말을 따라간다는 빙의물의 경우가 그러하며 이는 정말 낯선 장소에서 시작하는 환생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 환생물은 고정된 자리 없이 줄곧 자리를 옮겨 다니는 노마디언들의 사회에 별반 다르지 않으며 한편으로는 실시간으로 옛것이 되어버리는 사회에서 우리가 실패를 통해 무언가를 배울 수는 없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 실패조차 이미 구세계의 법칙이 되어버린 상황에서는 오직 확정된 미래에서 자신을 출발시키는 것만이 일보전진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미래는 확정된다는 이 맥락은 그 점에서 결코 터무니없지 않으며 시작점이 변하는 세상에서는 되려 도착점에서 출발하는 게 더 빠르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킬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실패를 마주하는 태도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그건 바로 실패를 실패할 경우이다. 자신이 실패의 상황에 있다는 걸 몰라야만 비로소 미래를 향한 자기만의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중 하나가 그것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났을 때임을 떠올려보아야 한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경우를 계산하며 살지만 그럼에도 예측 불가한 상황은 항상 벌어지곤 하는데, 개중에서도 우리의 능력 밖에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인간을 좌절에 빠트린다. 가령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자연재해 말고도 거듭된 시험의 실패나 정밀하게 준비했다고 여겼던 학교 입시에서의 실패 등이 그렇다. 이는 공통적으로 우리가 근방의 미래를 예측하며 살아가기 때문으로, 우리가 미래에서 항상 살아있고 그런 미래에서 현재의 자신을 도출해낸다는 사실은 이를 통해 입증된다. 미래로부터 견지해온 현재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날 때란 자신이 그 미래에 살아있지 않다는 점을 뜻하므로, 현재 또한 어그러지는 셈이다. ‘운명’이라는 것은 바로 이렇게 우리가 무언가를 통제하는 의식 전반을 의미한다. 우리는 항상 자신이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지를 결정하며, 우리가 가상으로 지칭하는 이것이야말로 게임 속 아바타의 존재원리이다. 아바타는 다른 세계에 있으면서 우리의 시간을 앞질러 존재하며, 이는 몸을 움직일 때 어떤 동작을 하겠노라 판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련의 예측을 통해 진행된다. 그렇다면 결국 이 게임은 우리가 신체를 자연스레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과거의 잔상일 뿐이라는 점을 말해주는 건 아닐까. 적어도 우리에게 실패란 바로 그런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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