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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Dec 10. 2022

「천국의 때」와 영화에서의 희망


1. 


세상에는 두 가지 타입의 진리가 있다. 하나는 신학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여기에는 ‘신학적 이성’과 ‘과학적 이성’이라는 두 가지 타입이 있다. 이성을 두 갈래로 양분해 온 인류의 역사에서 과학은 대개 신학을 위한 보조에 불과했으며, 이런 구도가 와해된 것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과학이 진보를 이루었으며 신학적 믿음이 불가해졌다는 점. 혹자는 과학의 발달이 가져온 계몽이 신학적 사고관을 구축(驅逐)했다고도 보지만, 이 두 가지 구도는 단지 ‘신학이 지배하던 세계’라는 점만으로 해석되기엔 곤란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이 말이 중세까지는 사실일지 모르지만, 과학의 발달로 인해 가장 고도화된 것은 바로 무기였기 때문이다. 벨 에포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제는’ 신학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류의 힘으로 자생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던 19세기는 곧바로 닥쳐온 전쟁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이성적’ 사회는 오히려 그런 이성을 통제할 수 없는 타성으로 이어졌고, 오히려 사람들은 신의 지배에서 벗어난 세상이 점점 통합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느꼈다.  


‘과학적 이성’에 대한 관점이 바뀌는 것은 이 시기다. 중세에 과학이 신학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논리적 근거였다면, 현대에 들어 과학(적 이성)은 신학을 극복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는 경향이 있다. 과학이 발견되고 확정된 사실에서 자신의 믿음을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확정하는 일은 하나의 보편적인 믿음이 된 것이다. 이는 신학이 믿음에서 사실을 확정하던 것과는 다른 것이어서 사람들에게 ‘이성적’이라는 표현에 대한 다른 해석을 심어주었다. 이제 이성이라는 말은 가능성을 가리키는 한 가지 수사가 되었으며 이곳에서 신학은 아무런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나 쓸 수 있는 말이 되었다. 요컨대 신학은 이제 모든 것을 설명하던 자리에서 내려와 그 무엇도 설명할 수 없을 때 가장 마지막으로 찾는 개념이 되었다. 물론 이 경향이 절대적인 보편자로서의 신을 상정하는 것만은 아니다. 인간이 절망에 빠질 때 신을 찾는 건 신이 세상에 만연해서가 아니라 과학이 실패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확실하게 말해둘 수 있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는 과학을 통해 슬픔을 극복하고자 하며, 이 과정에서 ‘과학’은 신학이 있던 자리에 자신을 대체하려 든다는 점이다. 이른바,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이성적’이라는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여러 슬픔을 마주하게 되며 이 단락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과학이 실패한 자리”와 SF가 연결되는 대목이다. 이를 위해 먼저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단어에 대해, 이 과학적 허구가 의미하는 것이 ‘행복한 결말’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말했던 대목을 떠올려보도록 하자. 과학적 허구라는 장르인 SF는 크게 ‘공상적 판타지’로 불리는 마법과 신화의 세계의 반대편에서 실제로 있을 법한 것을 토대로 만들어진 ‘현실적 판타지’로 여겨졌다. 그리고 과학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판타지는 “이미 발견된 것들은 모두 원리가 설명되어야 한다.”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전제를 바탕으로 한 세계관을 갖는다. 바꾸어 말해 이 세계에서 ‘판타지’라는 개념은 그런 세계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등장할 때 등장해 온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SF는 단지 사이언스 픽션인 것만이 아니라 사이언스 판타지이기도 하며, SF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의 “과학이 실패한 자리”를 보여준다. 


2. 


어딘지 모르게 근래의 미디어 매체에서 SF다운 분위기를 느끼곤 한다. 이는 장르적인 몇몇 속성의 발현이기보다는 미래의 잔재가 현실에서 부분적으로 실현됨에 따른 것인 듯하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된 논리와 이성으로 설명되는 세계는 미래에 대한 예측과 통제가 우리의 ‘가능성의 범주’안에 있다는 점을 따랐고, 그런 의미에서 이 ‘SF’적이란 ‘그럴듯함’의 속성으로도 이해된다. 쉽게 말해 ‘SF’는 그게 있을 법하다고 느끼는 일들에 대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표현 방법이다. 그렇다면 SF가 불행에 가까운 이유는 바로 그러한 표현 방법에 있을 것이다. “인간은 불합리한 것을 희망할 수 없다.”고 말하는 테리 이글턴의 설명을 따르자면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것’이 희망될 수 없는 세계가 바로 SF이니 말이다. 쉽게 말해 ‘과학적 가상’이라는 이 세계에서 희망은 항상 예측 가능하고 측정 가능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런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때 우리는 그런 희망이 판타지에 가깝다고 느낀다. 즉 인간의 힘으로 이겨낼 수 없는 것들에 관한 불가항력의 순간들이 오히려 ‘과학적 가상’이라는 완벽히 통제된 희망의 세계로 인도하는 셈이다. 


하지만 완벽하게 통제되는 것은 없으며, 혹은 그렇게 보이더라도 여기에는 완벽에 관한 불안감이 작용한다. 평화로운 일상은 금세 깨어질 것이며, 너무나 행복한 삶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불안을 동반한다. 왜냐하면 이런 감정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그렇기에 이는 판타지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른바 ‘과학적 가상’이라는 논리적이고 설명적인 세계에서 행복과 같은 감정은 설명될 수 없는 부류에 속한다. 그래서 과학적 가상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그럴듯함을 가지고서 이에 소속되지 않는 남은 것을 설명하고자 하고자 한다. 헌데 ‘그럴듯함’을 지니지 않는 것은 이성적이지도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아서 불합리한 게 아니던가? 그렇다면 과학은 이 불합리함을 보여주면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 걸까? 여기서 그런 불합리함을 설명하는 두 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과학 이전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의 이후이다. 전자를 따라가는 이들에게 불합리함은 과학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에 해당하며 후자를 따르는 이들에게 불합리함은 과학이 해결하지 못하는 실재적 문제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이 둘 모두에서는 행복의 발생에 관한 문제의식이 있으며 그런 행복을 소유하지 못하는 게 바로 과학이라고 말한다. 


과학적 가상은 행복을 소유하거나 통제하지 못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화려하고 슬픈 기만술이다. 사람들은 행복이 불가하거나 어렵다고 느낄 때 과학에 의존하며 이는 SF라는 장르가 늘 불행과 희망과 연결되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이른바 과학적 가상이란 두 편을 한 자리에서 보여주는 더블 빌이며 불행이나 행복 어느 하나만이 존재하지는 않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하기에 그것은 희망일 수 있고, 혹은 논리적이지 않은 것이기에 이는 막연한 불행이기도 하다. 우리는 세계를 지배하는 논리가 작동하지 않기를 바라는 방식으로 희망을 갈구하며, 혹은 불행을 두고서 논리의 붕괴를 발견하는 일을 즐기기도 한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한 일이 이 세계에 등장해오는 일은 무엇일까.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세계를 자기만의 논리에 편입하는 일이 선행되는 것일까 아니면 <터미네이터>의 AI처럼 자신을 죽여주기를 바라면서 세계의 논리를 성립시키는 것일까. 세계를 논리에 일치시켜야 하는 행복이 있는 반면 논리가 세계를 파악하지 못해야만 하는 불행도 있다. 마치 세계의 무의식을 두고서 ‘실재’라는 이름으로 테러리즘을 말하는 이들처럼, 불행의 가치란 과학적 가상 안에서 판타지의 역할로 남는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SF는 사이언스 판타지라는 약어로도 읽히는 것 같다. 왜 SF 장르가 항상 현실과의 미묘한 불협화음을 자아내는지를 생각하면, 이는 ‘인간적인 것을 추구하지만 애매하게 닮아버려서 불쾌함을 주는’ 모종의 골짜기처럼 논리적인 듯하지만 실상은 기묘하게 닮은 것일 뿐이고 여전히 파악되지 않는 몇몇 문제들을 다루는 것에서 귀인하는 것일 공산이 크다. <공각기동대>와 같은 영화에서의 존재의 관한 물음, <가타카>와 같은 드라마가 다루는 DNA와 밈에 관한 설화. 그렇다면 우리의 세계가 SF적으로 변해간다는 인상을 받는 건, 단순히 우리가 상상하던 미래를 실현하는 과정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았던 가능성이 정말로 현실에 침투해오는 경우여서일 테다. 즉 과학적 가상이라는 현실은 “짜잔. 그런데 절대란 건 없군요.”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이 세계는 우리로 하여금 “상상하기에 이루어진다”거나 혹은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는 범주에 있다”고 믿게끔 함으로써 ‘상상하는 능력’과 자유를 앗아가는 것이다.


3. 


지난 12월 1일 넷플릭스에서 <죠죠의 기묘한 모험> 6부가 완결되었다. 6부를 보며 느끼는 점은 만화가 점점 이해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인데, 딱 잘라 설명하긴 힘들지만 만화가 연재되던 시기가 2000년대 초반이라는 점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2000년에서 2003년까지 연재된 이 만화가 21세기를 열어젖히는 하나의 흐름에 있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6부의 내용에서 주축을 이루는 것은 운명에 관한 이야기로, 그 이야기의 중심은 신부 푸치가 가속을 통해 사람들이 운명을 각오하는 세계를 마주하게 하는 것에 있다. 여러 과학적 이야기가 판타지스럽게 남발되는 이 만화에서 과학적 원리가 하나의 인과를 구성하는 것으로만 사용된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웨더 리포트의 날씨 조작 능력에서 정신조작을 연결하는 일이나 풍수지리와 권법을 연결해 전투기술로 활용하는 등의 활용은 확실히 과학적이라기보단 ‘기묘하다’고 볼 법한 것에 가깝다. 이들 스탠드는 ‘과학적’인 척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상상의 영역에 있다. 


그렇지만 푸치 신부가 내세우는 가속과 중력의 원리는 ‘과학적 가상’에 비견될 수는 있어 보인다. 푸치 신부가 주장하는 ‘각오’라는 건 인간이 니체의 영원회귀론을 정확히 풀이한다. 중력을 통해 시간을 가속하고 이를 통해 다시금 새 우주로 일순하면서 인간의 운명을 되풀이하자는 그의 주장은 우리가 익히 아는 과학의 원리와는 크게 상충한다. 특히나 신부인 그에게 과학은 신학을 위한 보조에 불과하며, 그가 주장하는 ‘운명’이라는 건 과학으로 세계를 설명할 수 있게 되면서 심령현상 등이 사라져버린 이 시대에 마치 귀신과도 같은 스탠드 배틀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작가의 태도인 것 같기도 하다. 쉽게 말해 [죠죠] 시리즈는 ‘설명할 수 있음’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있다. 만약 SF가 무엇이든 설명할 수 있게 되어버린 세상에서 [설명할 수 없음]을 통한 어떠한 실재적 가치 찾기를 추구하는 장르라면, [죠죠]는 확실히 그에 걸맞는 만화라고 할 수 있다. [죠죠]의 기묘함은 ‘설명할 수 없음’을 바탕으로 하며 이는 곧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기를 포기했다는 말과도 같다. 


만화의 6부가 1부에서 6부까지는 가장 최근을 다룬다는 점에서 가장 과학적으로 발달한 세계를 다룬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6부는 푸치 신부를 메인 빌런으로 내세우면서 영원회귀라는 인간 찬가에 대한 주장조차 인간에 의해 지배받지 않는 상태로 만들어버린다. 말하자면 6부에서는 운명이라는 주제조차 논리적으로 설명되기를 포기한다. 6부에서 과학은 신학 아래에 종속되어 있으며 이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운명’을 포기하고서 이들 위에 군림할 통솔자를 마주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푸치의 직업이 신부라는 점만으로 신학을 위해 종사하는 과학이라는 구도를 내세우는 건 다소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마주하는 인간의 태도에 있다. 설명할 수 없는 재난을 마주했을 때 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와 같은 문제. 우리는 그것을 이성적으로 파악하기보다 그것이 충분히 있을 법하기에 이성적으로 대하기를 포기해버린다. 예컨대 푸치의 주장은 그러한 운명을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면 모두를 실패에 몰아넣자는 것과도 같다. 


무엇보다 6부에서 가장 풀리지 않는 의문은 일순과 회귀를 다루는 [메이드 인 헤븐]을 위해 푸치가 달에 가까워지려 한다는 점에 있다. 6부의 최종 장이 벌어지는 케이프커내버럴이 우주선을 발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위도라는 나레이션이 뒤로 지나갈 때, 그곳에서는 ‘천국의 때’를 기다리는 푸치의 C-moon이 기다리고 있다. 발음상으로 마치 See-Moon으로 들리는 이 작명에서 우리는 중력이 약해지는 때인 만조를 떠올리며, 이는 곧 지구의 중력이 약해지는 장소라는 점에서 인간의 이성에 대한 한 가지 도전정신을 불러일으킨다. ‘중력’이라는 진리의 법칙이 약해지는 시공간에서 늑대인간이라던가 하는 알 수 없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바로 이곳이 ‘설명할 수 없음’을 실현하는 인간의 힘을 ‘벗어난 세상’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푸치의 천국이 의미하는 바는 과학에 대한 배반, 논리와 이성이 설명불가한 재난에 관한 우리의 무의식적인 절망이다. 말 그대로 과학이 실패한 자리에서 신학을 부르짖는 게 바로 푸치인 셈이다. 


4.


천국의 때라는 건 있을까? 일반적인 형용사로서 천국은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극상의 순간, 혹은 구원의 흐름에 이제 막 입문하는 결정적 순간을 뜻한다. 가령 신체적인 면에서 오르가즘이 이런 천국에 비견되기도 하는데, 이는 오르가즘이 직접적으로 신체에 작용한다는 점 이외에도 인간의 의식에 가장 극적인 전환점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귀인한다. 불행은 사소하고 끈질기게 달라붙어 인간의 의식을 잠식하지만, 오르가즘이 주는 변화는 엔도르핀의 급격한 방출이라는 점에서 확고한 변화를 끌어낸다. 그런데 오르가즘은 인간이 의도할 수 있는 변화의 순간이라는 점에서 어떠한 천국에 비견되었던 게 사실이다. 즉 우리는 천국을 달성하고 성취해야 할 수 있는 성격으로 파악했다는 말이 된다. 헌데 그렇다면 천국 또한 불행처럼 사소하고 끈질기게 달라붙음으로써 변화에 도달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물론 불행을 의도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에서 불행과 천국의 작동원리는 다를지도 모른다. 둘 다 예상치 못하게 찾아오지만 불행을 거부하고 싶어하는 것과는 달리 천국은 바라 마지않는 것이다. 하지만 천국은 그 바램의 속성에서 현실이 극적으로 바뀌길 고대한다는 점에서의 특이점이다. 우리가 불행을 두고서 극적이라 느낄 때는 그게 이미 시작되었음을 느낄 때지만, 천국의 순간을 겪는 건 그게 막 시작되는 순간이다. 따라서 우리는 천국을 일종의 ‘변화’와 연결해 생각했으며 이로 인해 천국은 ‘때’라는 말과 결부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헌데 위에서 말했듯이 천국 또한 불행과 마찬가지로 변화의 일종이므로 천국은 특정한 순간이 아니라 그것으로 향하는 과정이다. ‘천국의 때’라는 건 무언가에 이르는 과정이라는 점에서의 ‘이미 시작됨’을 뜻하는 것이지 줄곧 기다리기만 해서 달성되는 성격은 아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때가 왔다고 말하는 일은 우리가 이미 겪는 일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일 뿐, 어떠한 사건이나 사태를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천국을 바라는 건 우리의 지난 삶과 일상에서 주어진 기회를 다시금 확인하려 드는 것일 뿐 막연하게 기적을 바라기만 하는 건 아니다. 이른바 희망이란 게 아무런 근거가 없지 않다는 점이 이 대목에서 확인된다. 희망이라는 건 나름의 근거를 갖고서 행해지는 바램이며 이는 곧 그것이 특정한 가능성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뜻한다. 어떠한 것이든 간에 그게 일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를 두고서 ‘가능하다’고 표현해야만 하는 셈이다. 따라서 희망이라는 말은 형용사라기보다 가능태로 일종으로 여겨져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어떠한 변화의 순간으로 사용하는 ‘영화적’이라는 표현 또한 그런 의미에서의 가능태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5.


영화적이라는 말은 현실이 보여줄 수 없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는 점에서의 희망과 연결됨으로써 단순히 영화에만 머무르지 않는 탈매체적인 성격이 된 듯하다. 이 말이 분명 ‘보여줄 수 없음’을 ‘볼 수 없음’을 연결해주진 않지만, 확실하게 말해둘 수 있는 건 영화적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변화의 순간이 있다는 점이다. 영화적이라는 말은 영화라는 단어에서 벗어나 그런 틀을 적용할 수 있는 하나의 순간을 가리키게 되었고, 이는 사진과는 달리 프레임 안에 흘러가는 시간이 있다는 점에서의 변화를 가리킨다. 영화적이라는 표현은 영화라는 매체에서 귀인했지만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단서와 결합하면서 천국의 때를 가리키게 된 셈이다. 그렇다면 천국의 때가 ‘이미 시작됨’을 의미하듯이 영화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이미 어떤 과정 안에 있음을 가리키는 건 아닐까. 영화가 우리에게 말해준 것은 세계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가 시간과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간은 우리와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다시 말해서 우리는 시간에 탑승해있으며 이런 시간에서 내리는 게 불가능하기에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건 단지 창문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의 역할이 바로 그 창문이라고 보아도 좋을 테다. 우리가 시간에 탑승해있다는 점을 알 수 있는 건 영화와 같은 창문을 바라봄으로써만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영화적이라고 표현하는 건 우리가 시간에 소속되었음을 발견하게 되는 모종의 순간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영화적이라는 말을 어떠한 과정으로 이해하는 일에서 순간의 가치는 버림받지 않는다. 분명 영화적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어떤 과정 안에 있음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발견의 순간으로도 기능하지만, 이 둘은 서로 상충하지 않으며 오히려 둘이 함께 있어야만 비로소 하나의 단서를 가리킨다. 그게 바로 희망, 우리가 이미 어떠한 흐름에 소속되었으므로 ‘가능하다’고 말함과 동시에 그것이 창문을 통해 확인되는 순간이다. 


카메라의 보급으로 인해 누구나 자기만의 사진을 갖게 되었다고 보았던 견해는 디지털 시대 들어서도 영화에 동일한 문구로 반복되었다. 디지털카메라의 보급은 누구나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세상이 왔다는 말이 성립하게 했으며, 실제로 애플은 아이폰으로 찍은 단편영화를 유튜브에 업로드함으로써 이것이 충분한 영화 촬영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해냈다. 허나 그럼에도 영화를 촬영하는 일은 여전히 어떤 힘과 아이디어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정말로 누구나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된 건 아니다. 우리가 영화적 순간을 두고서 특별하게 여기듯이 영화를 찍는다는 건 단순히 보고 기록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으며, 바로 그 의미를 실현해가는 과정이 영화를 구성한다. 바꾸어 말해 영화라는 것은 의미의 구조이므로 그 실례나 배열을 어떻게 가져가는지에 따라서도 다른 면으로 충분히 보일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각의 우려와는 달리 영화는 결정론을 따르지 않으며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 물리적인 의미에서 영화란 기록의 일종이므로 촬영의 순간이라는 점에서 그 순간이 결정된 하나의 단락으로 이해된다. 허나 우리가 ‘가능하다’는 말을 통해 영화적이라는 표현을 이해한다면 영화는 찍는 것만큼이나 아무나 볼 수 없다. 영화와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상황에서 어떠한 순간을 포착하는 일은 아무나 가능하지 않다. 이는 기본적으로 꿈을 꾸는 이가 이것이 꿈임을 알아차리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꿈을 꾸는 이들에겐 꿈을 꾼다는 전형적인 진실이 있기 마련이다. 그 말인즉 영화를 보는 이들에겐 영화를 ‘본다’는 전형적인 사실이 있으며, 이는 그들이 영화를 보면서 어떠한 결정론에 시달리지 않는 것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된다. 영화는 그 자체로 결정된 사실이 아니므로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은 결코 신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영화를 보았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시간에 소속되었는지를 확인함으로써 이미 결정되고 고정된 것을 바뀔 수 있게끔 한다. 


6.


이 대목에서 천국이라는 단어에 대한 용례를 재점검해보도록 하자. 우리는 천국을 두고서 어떠한 과정에 있는 것이자 발견의 순간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는 자신이 그러한 천국으로 향하는 과정에 있다는 인식이 있으며 여기서 영화는 그것을 단지 발견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영화 자체가 어떠한 목적지가 아니며 영화는 그저 흘러가는 과정 안에서 잠시 포착가능한 형태로 나타난 ‘느려진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시간에 탑승하고 있음을 가정한다면 그 끝은 죽음이라는 점에서 영화는 결코 목적지가 될 수 없다. 되려 영화는 우리가 불행을 의도치 않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희망을 의도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리고 이를 지속적으로 읽고 쓰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천국에 관한 갈망을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된다. 즉 영화를 본다는 건 어디까지나 의도적인 일이라서 우리가 기적을 바란다는 점에서 우연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렇게 이해될 만한 건 불행뿐이다. 


그 누구도 불행을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화 같은 순간이라는 말은 불행을 의미하는 게 될 수 없다. 영화적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미 자신이 어떠한 과정 안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시간의지의 표명이자 회복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시간을 두고서 희망의 자리에 둔다는 점을 뜻하는바,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열려있다는 점에서 희망이 바로 그러한 위치에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즉 우리가 영화를 보며 어떠한 희망을 얻는다면, 그건 영화의 내용이 아니라 영화 자체가 우리 스스로 흐름을 조절할 수 있는 시간이어서다. 그리고 영화적이라는 표현은 시간이 멈춘 듯이 느껴지고, 혹은 무언가와 눈을 마주친 순간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에서 통용된다. 헌데 그렇다면 이처럼 환경이 시간을 바꾸는 일에서 착안하여, 우리 자신이 그런 환경을 바꾸는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계속해서 환경을 바꿔왔고 믿음에서도 이는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를 본다는 건 자신이 세계를 바꿔나갈 수 있다는 일련의 믿음에서 비롯되거나 혹은 이를 적극적으로 실현하려 드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리고 영화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러한 믿음이 세계의 표면으로 드러나면서 이를 우리가 목격하고 공유하는 일을 뜻한다. 우리는 영화에서 희망을 보는 게 아니라 희망을 말하기 위해 영화를 요구한다. 우리는 천국의 때를 기다리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를 바꾸는 것으로도 그러한 때에 가까워질 수 있다. 천국의 때는 자신이 믿는 것이 겉으로 드러난 영화를 통해 도래하는 순간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셈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오늘날 ‘영화적’이라고 지칭되는 몇몇 이현상의 증가가 단순히 세계의 균열이라고만 여길 게 아닌, 우리의 세계가 바뀜에 따라 드러나는 몇 가지 징후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영화적인 것을 눈치챌 수 없을 테고 또한 우리는 세상을 결코 바꿀 수 없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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