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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an 22. 2023

내러티브 비평의 슬픈 상실

아무쪼록 나는 근래의 영화 비평이 내러티브를 돌보지 않는 것에 아쉬움을 표하는 쪽이다. 추측건대 근래의 영화 비평이 내러티브를 돌보지 않게 된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영화가 자신의 지위를 미디어의 한 분과로 옮김으로써, 영화를 두고 ‘횡단’이라는 단어에 기대는 게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영화는 어떤 것들에 걸친 하나가 아니라 어떤 것들의 사이에서 드러나는 무엇이 되어버렸고, 이에 따라 통합된 질서를 포함하는 ‘내러티브’는 지양되었다. 이른바 ‘질서’로 풀이될 수 있을 내러티브 형식이 패퇴한 이 모습은 언뜻 보았을 때 무질서를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허나 혼돈에서의 질서라는 말처럼, 무질서는 어떠한 ‘질서’를 내포하며, 이를 따르자면 내러티브는 오히려 영화의 형식에서 도출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어쩌면 근래의 영화 비평은 내러티브를 돌보지 않는 게 아닐 수도 있다. 내러티브가 영화의 형식 사이에서 드러난다면, 우리가 내러티브로 알던 것의 정체는 그 자신이 특정된다는 점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말하자면 이때의 내러티브란 ‘영화 안에 주어진 것’으로서 세계와 관계하지 않고 그 자체로 독립되었다는 점에서의 유물론을 따른다.


앞선 논의를 잠시 풀어놓아 보자. 만약 내러티브가 유물론의 일종이라면 영화에서 이야기란 본래부터 거기에 있던 것일까(유물론), 아니면 형식과 같은 외부적 요인과의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것일까(신유물론). 혹은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영화란 본래 있던 걸 겉으로 드러내는 것인가(표현주의), 아니면 본래 있던 걸 보여주는 일인가(재현). 분량의 한계로 모든 경우의 수를 짚을 수는 없겠지만, 내가 제안하려는 건 내러티브 비평의 쇠락이 내러티브 자체의 쇠락을 의미하진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내러티브가 본래적으로 ‘있다’고 말하는 게 ‘질서’라면, 그 이유는 그게 순리여서가 아니라 플러스 값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야기가 어떠한 형태로 있고, 그걸 가시화하는 게 영화라는 프레임의 일(framework)이라면, 내러티브는 분해와 재조립의 과정을 거치지 않기에 구태여 리얼리티를 따져 물을 필요가 없게 된다. 말하자면 영화란 UV 광선이나 편광 안경처럼 볼 수 있는 세계의 깊이를 더해주는 것일 뿐, 그 본질을 바꾸진 않는다. 같은 맥락으로 영화 비평에서 내러티브의 홀대를 생각하는 게 가능하다. 영화 비평이 내러티브를 홀대하게 된 건, 내러티브가 그 자체로 자신을 반영된 상태로 여겨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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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영화에서 내러티브의 역할은 시간에 따라 진행되는 게 아니라 그런 시간을 진행하는 것으로써, 일종의 물질적 지지체로 여겨지곤 했다. ‘고고학’이라는 말로도 표현되었던 이 개념은 시간의 층위가 물질적인 진행을 따른다는 점에서, 그런 물질층을 파고 들어가면 지난 시간을 역산할 수 있으리라 믿게 했다. 또한 내러티브가 시간의 구조라면, 반대로 내러티브는 시간을 지지할 만큼 견고해야만 했기에 그 자체로 완결적이고 무고한 것이 되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내러티브는 그 시간적 원리처럼 본래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겨졌으며, 이에 따라 “본질을 바꾸는 게 아니라 그 인식의 방법을 달리하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대두했다. 쉽게 말해 내러티브가 하나의 완결성을 띤다면 그건 마치 이데아를 논하는 것처럼 단지 재현하는 것만이 가능했다. 허나 재현이란 분해와 재조립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었고, 그 말인즉슨 인식이라는 것이 ‘단절’을 의도한다는 점을 의미했다. 인지에 관한 노력이 모두 단절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내러티브의 완결성은 단지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차단하는 것에서 비롯될 뿐이었다. 요컨대 문제는 그 자신의 완고함이 아니라 인지에 관한 노력이 모두 단절로 귀결될 뿐이라는 점이었다.


내러티브에 관한 파악이 물질에 기반한다고 보았을 때, 영화는 이미 파악된 작업으로써 그 내부를 인식하는 일은 세계의 완결성을 해치는 일이 된다. 영화는 어떻게 보든 간에 그 자신을 결론에 놓을 것이며, 내러티브로의 접근은 모두 결정론을 따를 것이다. 말하자면 내러티브 비평은 어떠한 경우에도 본질에 미칠 수 없다는 미명 하에 그 자신의 접근을 유보했을 공산이 크다. 내러티브 비평이 쇠락하거나 지양된 건, 재현에 관한 불신이 생긴 오늘날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허나 우려스러운 건 내러티브를 지양하는 일은 이미 전제된 공통의 현실이 있다는 점을 가정한다는 점이다. “인지에 관한 노력이 모두 단절로 귀결된다”는 건 우리 현실에 거부할 수 없는 질서가 있다는 점을 뜻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영화 비평은 현실을 바꿀 수 없으며,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면 차라리 현실에서 도피해버리자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어차피 도피해봤자 본래의 현실은 변하지 않기도 하다. 단지 그런 현실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대체만이 있을 뿐이고, 이런 대체들은 모두 희망으로 도출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 없기에 벌어지는 비운의 현실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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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오늘날의 우리는 영화에서 내러티브란 게 이미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여기면서, 이를 바꿔보려는 시도는 가능성의 세계를 확정해버린다고 보았을 공산이 크다. 현대 물리학의 정수처럼 들여다보는 순간 상태가 확정되어버리므로, 영화라는 프레임으로 말한다면 어느 순간 내러티브는 분해와 재조립의 과정으로 재현되어버린다. 즉, 영화의 본래적 상태가 있다고 보면서도 정작 이를 들여다볼 땐 관찰자의 상태 또한 내러티브 일부로 반영되고야 마는 것이다. 결국 영화를 있는 그대로 보는 법은 내러티브를 건들지 않고서 그 주변부로 파악하는 것, “영화의 내러티브는 그 주변으로 발산되고 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내러티브 비평은 서술을 각오한 순간부터 이미 내러티브를 쫓을 수 없다는 점을 각오하기에 오히려 내러티브에 관한 확증 없이 시도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러티브 비평은 영화를 보아야만 글을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지만, 사실은 내러티브의 서술 과정에서 관찰자의 시선이 개입되므로 우리는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관찰자를 따라가는 것뿐이다. 분해와 재조립의 과정을 견인하는 건 어디까지나 그 사이에 횡단으로 놓인 주체 덕분이니 말이다. 


이 점에서 내러티브 비평은 애초에 외부와의 관계에 소속되어있고, 영화의 형식에 관하는 글은 굳이 ‘그런 영화’가 아니어도 될 것이므로 관람의 경험 여부가 독서에 미치는 건 부수적이다. 관계는 얼마든지 내러티브를 재인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오늘날의 영화 비평은 그 관계를 횡단하는 것으로 내러티브를 인식하는 게 가능하기에 되려 내러티브에서 출발하기를 꺼린다는 결론이 나온다. 내러티브를 뚜렷하게 하는 일이 불가해져서가 아니라, 현실을 횡단하면서 만들어지는 대체들을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이는 우리가 어떠한 대체에서 자신을 출발시키는 게 아니라 되려 출발이라는 상태 자체에서 여러 부수적인 현실이 파생된다는 점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이동성의 강화는 특정한 결말에 도달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되려 마찰은 현실의 중단이 아닌 분열을 암시한다. 어쩌면 내러티브 비평을 사람들이 꺼리게 된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가 우리 세계를 횡단하는 상황에서 절대적인 하나가 없다는 점은 영화가 하나의 해결수단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뜻하므로, 오히려 더 많은 분열을 통해서만 투과의 가능성을 얻는다고. 이른바 영화는 무언가를 ‘말하지’ 못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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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영화가 하나의 대체 현실이자 유령으로 이해되는 것은 명실상부하게 내러티브의 종말과 연관이 있다. 내러티브의 종말이라는 말이 ‘이야기하기’의 끝장을 보진 않겠지만, 적어도 이런 표현으로 전하고자 하는 바는 가능성이 아니라 불가능성의 사이를 횡단해야만 비로소 가능성을 논할 수 있는 불행한 현실이다. 물론 이것이 무언가를 섣불리 단언했던 과거의 태도에서 벗어나는 것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특정 다수를 가리키는 말에서 불특정 다수로 논점을 옮겨가는 일은 적어도 ‘극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더는 사람들을 가둬놓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자명한 사실일 테다. 요컨대 과거에도 관객은 군중 혹은 대중이었지만 적어도 그 자신의 자리를 잃지는 않았고, 그렇기에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싸움이란 게 확고히 존재했다. 여기서 내러티브란 어떤 이야기를 서술할 것인지에 대한 의도를 내포하였고, 이는 일종의 주도권 싸움과도 같아서 ‘자리’란 행진을 위해 마련되어야 할 무대와도 같았다. 그러나 오늘날 내러티브는 더는 특정한 자리를 갖지 않으며 세계 안에서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만 노력할 뿐, 무언가의 시작점으로도 종착점으로도 기능하지 않는다. 


우리가 늘 중간 지점을 산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중간을 산다는 건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공간에 머무를 뿐이며 이곳에서 이동은 완수되지 않는 삶의 과제다. 전통적인 영화적 내러티브의 종말이 비평이라는 서술 언어의 상실로 이어지는 건 그런 맥락에서의 연결일 수도 있어 보인다. 어쩌면 내러티브 비평은 불가하거나 입지를 잃고 만 게 아니라 우리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을지도 모른다는 말. 영화관에 들어가고 나오는 것과 같은 삶의 문턱이 점점 사라지면서 의미를 가둬놓는 일도 어려워지고 있다. 그렇다면 오히려 의미를 새로 ‘생성’하는 일이 더 쉬울 것이며, 이 과정에서 내러티브를 영화의 물질적 토대 삼는 일은 지양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일은 그 물질적 토대의 상실을 통해 의미를 구획하는 일에 실패하였고, 이에 따라 의미의 이전을 살펴보려는 시도는 발견 이전을 서술하는 일이 되었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이때의 우리는 ‘그것’을 밝혀내는 걸 두려워하는 걸까. 무언가를 ‘있다’고 확정할 때 그것은 다른 자리에 자신을 대입한다. 즉 우리의 현실로 그것을 대체해버리면서 이들을 한 번도 없던, 대체의 현실로 만들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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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현실은 적어도 메타버스와 같은 측면에서만 유효하게 작동하는 단어는 아니다. 오히려 대체 현실은 포스트 휴머니즘이나 포스트 시네마 같은 포스트의 맥락에서 작동한다. 대체 현실은 현실을 지향하지만 정작 자신이 현실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귀인한 단어인 것이다. 이른바, 포스트 시네마는 영화의 이후를 탐색하지만 끝내 시네마라는 속성으로 돌아오고야 만다. 그런데 사실 이는 영화를 두고서 어떠한 현실로 파악했기 때문으로, 무엇이 우리의 지배적인 의식인지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영화가 우리 현실에서 특수한 무언가에 해당한다면, 영화는 그 자체로 고등할까? 포스트 휴머니즘의 사례는 인간을 동물과 구분 짓는 일 자체가 이미 동물의 이후라는 점에서 ‘포스트’의 속성을 획득한다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포스트 시네마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물음보다는 이미 자신을 영화로 지칭할 때부터 포스트 시네마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때 내러티브 비평은 내러티브의 점진적인 상실이 아니라 내러티브를 구분 짓는 일의 특수함을 벗어나려 시도한다. 모든 인간이 동물인 것처럼, 포스트 시네마는 자신의 근간인 시네마로 존재하기를 시도하고, 여기서 내러티브는 결코 미래 방향이 아니다. 


우리의 신화에서 내러티브는 대개 ‘예전’ 이야기로써 작금의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를 위해 언제 어디서라는 구체적인 증명은 생략되었는데, 이는 어느 시대에서나 편히 접근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러티브의 상실은 우리가 이야기를 서술해가는 능력을 잃어버렸다기보다는 왜 하필 ‘작금’과 결합해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말하자면 이야기하기 능력의 상실은 기억해야 할 ‘여기’의 상실과도 같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을 상실했다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순간을 기억해야만 한다는 점일 수도 있다. 기억하기 능력의 확대는 기억의 가능성을 열어줌으로써 기억하기의 불가항력을 금지하고, 이에 따라 영화는 지배와 복속의 수단이 아닌 의지와 극복의 수단이 된다. 물론 이런 설명은 내러티브 비평이 저항의 맥락을 따른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영화가 어떤 압력으로 동작하지 않는 시대에 영화는 기억의 저장고 역할을 함으로써 현실과의 실시간 접근이 가능하다. 마치 컴퓨터 저장장치처럼, 한 편의 영화는 무언가에 대한 기록으로써 보존 파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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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타이얼의 말처럼 너무 만연하고 흩어져버려 정지된 것만 같은 시간이 된다면, 이런 시간은 전통적인 기억하기 틀의 붕괴가 아닌 ‘연장된 형태’로의 방법론적 확장일 수 있다. 무엇을 기억할 것인지와 같은 문제의식은 무엇도 기억할 수 있다는 의식으로 확장되면서 기억의 중심부를 잃는다. 포스트휴먼이 자기 신체의 경계를 지우듯 내러티브의 와해는 영화에서 기억의 경계를 지운다. 만약 몸이 기억을 담는 그릇이라면 오늘날 ‘나’를 구획하는 것은 결코 몸이 아닌데, 가령 ‘나’를 설명하는 것들은 나의 바깥에 더 많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영화를 어떤 이야기로 설명하는 일에서 역할은 외부에 더 많이 주어질 수 있다. 영화는 기억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 기억이야말로 영화의 특수한 사례라고 보아야만 한다. 데이터의 바다에서 지적 생명체가 탄생하는 것과 같은 원리에서, 영화는 기억의 바다에서 탄생한 생명체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영화는 기념비적인 무언가이기보다 기억의 자생성을 암시한다는 점에 더 큰 의의가 있다. 무엇을 기억할 것인지와 같은 문제는 외부적 시선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결정된다고 말이다. 


무엇이 될 것인지, 어떻게 살 것인지와 같은 문제에 있어 외부를 반영하지 않기란 힘든 일일 것이다. 몸의 경계를 확립하는 일은 세계에 자신의 목소리를 낼 때, 그게 반향되어 오는 척도를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스트 휴머니즘이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구획하지 않는 것처럼 포스트 시네마에서 ‘경계’는 무언가를 가둬놓는 것일 수 없다. 시네마가 경계를 요구하는 게 무언가가 ‘되어야겠다’는 인간적 의식 탓이라면 우리는 시네마가 인간학적 시선을 따라가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한 그렇기에 ‘외부’는 인간의 시선 밖이 아니라 끌어오는 속도보다 멀어지는 속도가 더 빠른 경우 등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즉, 기억은 되려 팽창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부재’란 접근법의 부재이지 물리적 손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른바, 얼마든지 영화를 멈춰볼 수 있는 세상에서 내러티브의 가치는 결코 시간에 굴하지 않기 때문에 기억의 층위엔 지질학적 압력이 작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엔 화석이 없으며 계보학도 없다. 오직 현재를 진화의 최종장으로 기억하는 최후의 인간만이 남아있을 뿐이며, 최후의 인간은 모든 것을 기억하지 않는 자신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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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이야기란 늘 ‘이후’에서 출발한다고 보아도 좋다. 사건이 진행 중인 동안에 이야기하기가 불가하다면 이야기의 서술은 항상 ‘이후’의 자리를 점유할 수밖에 없다. 내러티브 비평의 상실이 암시하는 건 바로 그렇게 사건이 진행 중이라는 점이다. 영화는 어떠한 사건이 벌어진 것을 스크린에 들여온다는 점에서 늘 이후의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어떠한 사건이 공존한다는 점을 알린다는 점에서 그 내러티브를 상실한다. 이 경우조차, 내러티브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다는 점에서 대체되는 것일 뿐 세계에서 말소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단지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은 나머지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입지를 내세웠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내러티브의 상실, 또는 내러티브 비평의 상실은 자본주의 사회가 유동성을 내세우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영화에서 내러티브는 말하기 방식의 규격화로 이해되고, 이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일이 비평이라 한다면 비평은 알고리즘 챗봇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를 조합하는 일이 하나의 기능으로 이해되는 시대에 오히려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되려 기능이 된다. 이게 바로 어떠한 기억 앞에서 우리가 침묵, 혹은 언어를 상실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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