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Feb 04. 2023

애니메이션 신경계와 재시동의 영화


애니메이션을 하위문화로 포지셔닝하는 일에 모종의 불안을 느낀다. 하위문화 자체가 하위문화로 이해되는 상황에 반기를 드는 게 아니다. 그런 하위의 성질 자체가 자기반영의 정체성이 됨으로 인해 수반되는 생성이 불만이다. 가령 하위문화가 자신을 하위로 인식할 때, 그는 그 자신을 말하기 위해 어떠한 상위를 필요로 한다. 이로 인해 그는 마땅한 격차가 없음에도 자신을 낮추게 된다. 그는 억압과 압제의 굴레 속에 ‘주인’을 섬길 것을 강요당하면서, 일평생을 패배의식에 젖어 살아갈 것이다. 다른 무언가 없이는 홀로 설 수 없는 존재가 될 테고, 이 경우 ‘하위’의 반대항으로서의 ‘상위’를 물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에 대항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이들을 구출해낼 수 있을까? 바꾸어 보면 이는 “무엇에 대항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말이 되어버린다. 이는 즉 하위문화의 기본 상태가 ‘대항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에서, 하위문화는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 있다는 말밖에 더 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애니메이션을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실제로 하위문화는 겉으로 드러나 있지만, 그게 사회적으로 쉬쉬되거나 터부시 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의견에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허나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그 자신이 확인되는 작업은 존재하는 것들의 사이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는 말과도 같으므로, 그런 맥락에서의 하위문화란 마치 유대인처럼 민족이나 국적을 초월한 무언가일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하위문화는 무언가의 사이에서 드러나면서, 그런 사이를 자기 정체성의 요인으로 삼는 후천적 구성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애니메이션의 ‘하위’가 주류에 반대하여 들고일어난 게 아니라는 점을 뜻한다. 애니메이션이 갖는 하위의 성질은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의식의 근저에 자리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신경망에 가깝다. 또한 의식은 신경망을 통해 구성되지만, 정작 인간의 의식은 주체를 가리키는 것에 사용되지 하위의 신경망을 가리키는 게 아닌 것처럼, 하위문화는 어떠한 주체를 포지셔닝하지만 그 자신이 신경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또는 은폐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도시에 필수적이나, 겉으로 드러날 때 미관을 해친다는 점에서, 또한 유기적이지 않게 보인다는 점에서 속으로 숨겨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전신주의 지중화 작업처럼, 도시에 양분을 공급하는 선로는 주체가 일상을 영위하는 의식단계의 예비에서조차 숨겨져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우리가 숨쉬기를 의식하고 나면 모든 게 부자연스러워지듯, 때로는 당연하지만 숨겨져야만 하는 게 있는 법이기에. 하위문화는 주류문화의 잔류로 발흥한 게 아니라 오히려 주류문화를 존속하게끔 한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하위문화는 문화를 향유하도록 돕는 사회적 기반 시설에 가깝다. 주류문화의 태동은 그러한 기반 위에서만 가능하며 이는 정전과 같은 예외적 사태를 통해서만 그 사실이 드러난다. 문화는 늘 무언가의 가능성을 내포한다기보다 가능성의 상태에서 예외를 경험하는 것으로 그 자신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하위문화와 주류문화 사이에 왜 간극이 있어야 하는지를 설명해준다. 양측은 서로를 인식하지 않을수록 더욱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일상적으로 작동할 때 도시는 하나의 풍경으로 녹아든다. 그리고 풍경의 특징은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그 ‘바깥’을 상상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이며, 이는 앞서 말한 맥락의 연장선에서 하나의 생태계를 구성한다. 



이를 통해 가능성은 외부를 배제하면서도 ‘가능’해진다. 말하자면 매체에서 하위의 성질은 교류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 보다 근본적인 흐름에서 존재의 원리로 자리한다. 항상성이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등장해온다. 도시의 풍경은 멀리서는 자연스럽지만, 그 안을 들여다볼 때 거리의 빈민들을 내비친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이런 풍경에서 근경과 원경은 따로 분리돼 있지 않으며, 그 모든 것이 도시의 일부를 구성한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어딘가를 응시할 때, 그곳은 자신을 위해 나머지 모든 곳을 짊어짐으로써 스스로를 풍경의 일부로 즉 ‘노예’가 되기를 자청한다. 특히 헤겔은 이러한 관계에서 노예의 위치를 긍정하지만, 적어도 이 의식은 종결의 지점이 관측되는 매체 분과에 적용될 수 없다. 인간이 살아가야만 한다는 점으로 인해 자신의 위치를 뒤바꾸려고 시도한다면, 매체는 삶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자신을 특정 위치에 근거 지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매체는 주류와 하위, 둘 중 어느 것으로도 설명이 불가하다. 이른바, 매체는 외부를 배제하지 않으며 그는 우리와는 달리 세계로부터 자신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체가 아니다. 그런 이유로 매체는 인간의 숭고함을 증명해낼 수 없다.



*



숭고란 자신이기를 유지하려는 시도 혹은 그런 감정에 관한다. 그래서 숭고는 항상성의 가치를 갖는다. 하지만 숭고는 자신이기 위해 외부를 배격하려 들지는 않는다. 숭고는 모든 것의 위에 서 있다는 점에서 최전방에 놓인 자신을 가리키는 단어일 뿐이다. 허나 자신을 최전방에 놓는다는 점이 자기 앞에 아무것도 없다는 점으로 인해 ‘미래’가 없고 ‘대안’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미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미래가 구성되는 것이라면, 이것은 마치 의식처럼, 세계의 신경망을 따라 구성되어 온다는 점에서 우리 자신이 바로 그 미래임을 말해준다. 미래는 의식의 일종이며, 이에 따라 미래를 논하는 일에 관한 여러 의식주의가 성행하게 되었다. 현실을 끝까지 밀고 나가자는 미래주의, 과거를 미래에 덮어씌우자는 레트로마니아. 이런 구분들은 모두 우리가 어떠한 ‘현실’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의 유물론적 기반을 두었고, 이러한 무게감이야말로 기초적이라는 의미에서의 하위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바로 하위문화 말이다. 



이 대목에서 다시금 애니메이션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영화사의 초창기에 있던 논쟁은 애니메이션과 많은 것이 얽혀있다. 가령 영화가 완전한 허구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이것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애니메이션과 그 원리에서 무엇이 다르냐는 의견에서 시작되었다. 영화가 아무리 현실을 촬영한 것이라 한들, 그것이 다시 풀이되는 과정에서는 재조립의 과정을 거치므로 그것은 결코 현실이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경계가 인간의 의식을 재현해내는 ‘기관’으로 취급되지 않듯, 영화에서 신경계의 문제란 의식을 재현하는 ‘기계’가 아니었다. 오히려 영화는 우리가 의식을 향유할 수 있도록 돕는 사회적 기반 시설에 가까웠다. 요컨대 영화가 애니메이션과의 변별력을 갖게 된 건, 그 자신이 사진을 기반 원리 삼음과 동시에 벌어진 일종의 분기와도 같았다. 영화는 현존하는 과거를 통해 자신을 미래의 지위로 끌어올리고자 했고, 여기서 ‘미래’란 우리가 구성되어 오는 세계의 일부가 되었다. 이제 미래는 우리가 ‘마주하는’ 게 아니라 우리일 수 있는 한 가지 기반이 되었다. 



사진 매체의 등장은 인간의 기억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인체 신경망을 해부학적으로 드러낸 것과도 같았다. 사람들은 사진의 출현에서 기억이 주체의 지위를 끌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주체는 세계에 맞서 싸우고자 자신을 하나로 응집했던 게 아니라, 미래와 과거를 견인하는 하나의 지점으로써 마련된 매체와도 같았다. 매체는 무언가를 담고 있는 상자가 아니라 세계의 안에서 구성되어 오는 신호의 구성체였다. 한편으로, 이런 주장은 ‘애니메이션’의 일종으로 이해되는 영화가 공통으로 갖는 ‘미래적인’ 속성을 “보다 현실성에 근접한 것”으로 언급했다. 과학적으로 우리는 신경 다발의 발달이 인간을 고등의식으로 이끌었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고, 그렇기에 이런 설명은 ‘과학’이 설명해주지 않는 영역, 믿음이나 세계의 은폐된 것에 관한 영역에 호기심을 들게끔 하기 때문이었다. 즉 영화의 애니메이션적인 속성이 영사기나 도료와 같은 과학으로 이해되었을 때, 애니메이션은 영화가 그리는 미래 안에서 소속을 잃은 현실인 ‘꿈’이 되었다. 



이는 애니메이션을 신경계로 이해했을 때, 인간의 의식이 과연 무엇에서 비롯되는지와 같은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을 연상케 한다. 뉴런의 연쇄적인 반응이 자신을 ‘나’라고 인식할 만한 근거가 된다고 명쾌히 말하는 건 불가하기 때문이다. 정지된 것을 움직인다는 의미에서의 애니메이팅은 되려 영화가 자신을 “2시간 정도의 고정된 시간을 갖고서 한 자리에서 볼 것을 요구하는 영상물”이라고 소개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반면 매체라는 말을 하나의 컨테이너로 이해할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정지를 동반하고 이는 영화를 현실의 근간으로 인식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유체에서 정지된 것이 가라앉듯, ‘정지된 시간’으로서의 영화 또한 의식의 작용에서 갈라져 나온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가능성은 외부를 배제하면서도 가능하므로 영화 자신은 의식의 근간을 내부에 두었을 수도 있다. 매체는 내부를 완결하려 들면서도 동시에 외부를 꿈꾸지 않는 건 아니니 말이다. 이를 따르자면 영화는 격리라기보다 하나의 구획으로 이해하는 게 가능하다. 영화는 그 안에서 현실을 시뮬레이션하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을 매체로 포지셔닝하면서 우리를 미래일 수 있게 하는 엔진에 동력을 전달하는 게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내러티브 비평의 슬픈 상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