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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Feb 08. 2023

대체되지 않는 유령, 침투되지 않는 미래


“어떠한 방식에서, ‘기록하는 것’에는 죽은 자들을 되살리는 힘이 있고, 그것들은 꽤나 무서우니까.”(p.74) 나원영은 “기억을 통해 되살려질 때마다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난 유령처럼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는 기억이 시간을 품고 있다는 점과 더불어, 그런 기억은 ‘기록’의 일부로서 기억이 왜 죽은 자들을 되살리고 왜 무서운지를 설명한다. 가령 “전 죽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요.”라고 말하는 <유주얼 서스펙트>의 대사는 말 그대로의 유령을 가리키지만, 한편으로는 명반의 조건이 바로 가수의 죽음으로 완성된다는 점을 말해주기도 한다. 그들은 죽음으로써 자기 존재를 ‘기록’에 편입하고, 이는 존재 자체가 기억에 내포된다는 점에서 그들이 “음악이라는 시간 안에서 어긋난 유령처럼 나타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음악을 두고서 기록이라 말하는 것에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음악은 시간의 일환이기에 기억에 편입되는가, 아니면 음악이 기억이기에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것인가. 레코드판의 기록방식을 뇌간주름에 빗대었던 몇몇 견해를 떠올리면 후자에 무게가 실린다. 이들 견해에서 음악은 기억을 무의식의 영역에 저장하고, 이를 불러오는 것이었으며, 이에 따라 음악은 기억에 사로잡히지 않는 존재인 ‘유령’을 불러낸다. 이른바, 유령이란 ‘무의식’이기에 우리의 의식과 공존할 수 없는 게 ‘공존’하는 상태를 뜻한다. 바꾸어 말해 유령의 목소리란 물리적으로 침범하거나 교환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균열을 통해 흘러나오는 기억을 지칭한다. 따라서 유령의 목소리가 “꽤나 무서운 건” 그들이 죽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가 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여서다. 



그렇다면 음악은 그 자체로 균열이라 보아도 좋지 않을까. 음악의 멜로디는 기본적으로 반복을 가정하며 설계된 조각을 잘라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따라서 조각들의 모음인 음악은 겉보기에 혼성이더라도 많은 층위를 내포하며, 이는 음악에 종속되는 시간 또한 아주 많은 절단부위를 내포함을 뜻한다. 요컨대 음악은 균열이라는 점으로 인해, 바로 그 파인 홈 덕분에 무언가를 ‘기록’할 수 있고 죽은 자를 되살리는 힘이 있다. 같은 원리에서 우리가 오늘날 ‘음악’이라 부르는 게 시간 안에서만 존재하는 예술이 아닌 이유가 명확해진다. 우리가 여러 시간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균열’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음악은 시간을 따르지 않는다. 음악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이 한곳에 공존함을 보여주며, 이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질적이고 또 괴리된다. 그럼에도 그런 괴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지기에 이는 유령에 다름없는 것이다. 



특히나 이는 “시간적 원근감을 도저히 분별할 수 없게 되고, 모든 옛 것들이 다 현재에 맞춰 되살려”(p,95)지는 혼톨로지가 대체현실로 연결되는 구절을 설명한다. 혼톨로지는 과거를 샘플링해 현재를 재창안하는 작업으로 풀이되는 음악 장르로, 오늘날 매체에서의 고고학적 흐름과 그 유사성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초이동, 극소비와 같은 사례에서 사라지는 물성이 장소로서의 ‘공간’을 지운다는 점과 관련있다. 사이먼 레이놀즈가 『레트로마니아』의 서문에서 말하듯 공간 인식의 부재는 시간 인식의 부재가 아니라 시간을 모든 공간으로 확장하기 때문이다. “공간을 대신해 시간이 노스텔지어를 구성하는” 이 시대는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는 세상에서 우리의 과거와 미래 또한 그렇게 된다는 점을 지시한다. 이로 인해 “한번도 살아보지 못한 시간”을 우리는 ‘현재’로 인식하며 살아가게 된다. 여기서 과거와 미래의 연결은 그 균열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오직 음악만이 그런 균열을 겉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음악은 영상 매체와는 달리 시간의 ‘흐름’에 편승하지 않으며, 따라서 기억의 교차지점에서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미래’를 끌어내기 때문이다. 



특히 혼톨로지는 그 작업이 평면이라는 점에서 흐름에 벗어난다. 음악을 믹싱하는 작업은 영상 매체와 마찬가지로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의 타임라인을 따라가지만, 영상과는 달리 시간 안에서 자신들의 교류와 합체를 통한 화음을 이루고, 이러한 교차에서 어떠한 균열이 드러난다. 실시간으로 표면에 자리하는 온라인과는 달리, 배후의 오프라인에서는 오히려 그런 온라인의 균열을 배제하면서 우리가 ‘음악’이라 부르는 새로운 미래를 출연시킨다. 그리고 나원영은 이러한 혼톨로지 작업에서 등장한 새로운 미래를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대체현실”로 규정한다.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편집프로그램의 타임라인에서 벗어나는 순간, 배후에 남겨진 것은 타임라인 위의 것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하나의 화음인 것이다. 그리고 이 화음이 바로 현실 위에 유령처럼 덧씌워지는 대체현실, 우리가 ‘브금’이라 부르는 음악의 현실 침투 능력을 설명한다. 



브금은 우리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웹툰이나 영화와 같은 온라인 매체에서 적절한 장면에 삽입됨으로써 특정한 분위기와 맥락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여기서 착안하여 만들어진 용어가 바로 ‘침투력’으로, 침투력이 높은 브금은 어떤 상황에서도 어울리기에 여러 매체에서 널리 사용되곤 한다. 하지만 침투력은 ‘그’ 매체의 친화력을 따르는 게 아니라 균열을 파고드는 자신의 능력을 따름에도 자신이 파고들 현실이 있어야만 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바꾸어 말해 브금은 무언가에 배경으로만 제시될 뿐 그 자신이 온라인이 될 수는 없다. 즉, 브금은 현실의 균열을 드러내는 것에 역할이 있지 현실을 대체해 들어갈 수 없으며, 이러한 점에서 브금은 현실에 덧씌워진다는 의미에서의 대체현실이다. 이는 데스크탑 컴퓨터의 바탕화면에 프로그램 창을 어레이 온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은 브금을 구동하는 기반임을 말해준다. ‘침투’라는 표현이 무색하게, 브금은 무의식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교차를 보여주는 것뿐이다. 



데스크탑 환경에서의 어레이 온은 그 배치에서 드러나는 특유의 평행 덕분에 어느 하나에 우위를 두지 않는다. 데스크탑 환경에서 창은 포커싱이라기보다 태스킹에 우위를 두며, 그 모든 것은 우리의 배후에서 마치 무의식처럼 공존한다. 그러나 무의식은 운영체제 없이 전면에 불려오지 못하며 또한 리니어의 경험도 깨어지지 못한다. 우리가 네트워크에 접속하려면 바탕화면 위에 브라우저 창을 띄워야 하듯, 무의식은 균열을 통해 드러나며 그러한 의미에서 인터넷은 일종의 대체 현실과도 같다. 인터넷은 각자의 연결과 지대를 갖는다는 점에서 공존의 맥락을 갖지만, 애석하게도 네트워크는 물성을 갖지 않으며 따라서 이때의 공존은 마치 유령과도 같은 게 될 뿐이다. 네트워크는 우리의 현실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우리 현실에 균열을 내어 그 배후의 무의식을 보여주는 통로인 것이다. 이는 즉 대체현실의 침투력은 침투될 것으로의 현실을 가정하는 것이지 현실을 기반해 만들어진 무언가는 아니라는 점을 뜻한다. 



이점을 염두에 두면, 침투력은 구멍 뚫린 튜브처럼 압력차로 인해 쏟아져나오는 유체현상을 가리키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공간 인식의 부재가 시간을 모든 선으로 평행하게 한다면, 이렇게 공간을 서로 분리하는 일은 특정 시간을 가둬놓는 효과가 있다. 바로 이렇게 가둬진 시간이 대체 현실이라 말할 수 있을 테다. 이른바. ‘대체’는 그 자신의 근간으로 편입되지 않으며 오히려 항상 특정 현실의 배후에 공존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존재를 성립시킨다. 그러한 점에서 “시간이 이음매에서 유령처럼 드러난다”는 표현의 진의는 오늘날 나무위키와 같은 하이퍼링크 시스템에서 ‘클릭’의 행위는 시간의 봉합이 아니라 어떠헌 현실의 대체로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링크는 다른 어딘가로 우리를 이동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눈앞의 화면에 그들 정보를 불러오는 것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우리는 어떤 대체 현실을 목격한다. 



이를 따라 생각하면 과거의 문화를 떠올리고 기념하는 일은 우리가 과거로 퇴보하는 게 아니라, 약해진 현실에 난 균열로 과거의 문화가 무너진 댐처럼 쏟아져 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때의 으스스함은 열린 창문처럼 차가운 외부 공기가 유입되는 탓이다. “기억에 사로잡히지 않는 존재인 ‘유령’”은 기억의 범주를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의 범주에 시간을 종속하는 일로 인해 생겨난 결과다. 헌데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대체 불가능한 한 가지는 시간일까 공간일까? 앞서 말했듯이 음악은 시간의 논리를 따르지 않으며, 이는 전기 인류 역사에서 구전이 음악의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점으로도 증명된다. 문자라는 증서보다 더 기억의 근간을 이루었던 것은 바로 음악이었던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음악은 그 연주의 시간 동안 현실에 종속된 시간을 깨트림으로써 우리에게 항상 대안이 있음을 말해줬다. 그리고 이 맥락에서 펑크에서의 “미래는 없어”는 우리가 종속되는 미래가 없다는 점으로 이해될 수 있다. 



대체현실은 현실을 도피하는 이들이 도망쳐서 도착한 낙원이 아니다. 아마 그럴 수는 있겠지만, 대체현실은 우리가 도망쳐서 도착하는 곳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에 다른 의식을 평행하게 펼쳐 보이는 ‘근간’의 설계이다. 그래서 대체현실은 온라인 시대에 최적화되어있을 수밖에 없고, 굳이 음악이 아니더라도 정해진 규격으로 반복되는 여러 놀이는 그들이 하나의 현실에 접속해있음을 겉으로 드러내면서 이를 자신의 현실에 침투시키려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해 이들에게 ‘미래’라는 단어는 언뜻 보았을 때 타임라인의 이후에 자리할 것처럼 들리지만, 그것은 어떠한 조건을 충족했을 때야 비로소 드러난다는 점에서 항상 그들의 현재에 있었다. 단지 연쇄적일 뿐 먼 미래에 현재와 동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요컨대 ‘대체현실’이라는 용어는 늘 지금을 시작점 삼는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를 이곳에 부르는 게 아니라 클라인의 병과 같은 위상학을 준거 삼아 우리 현실에는 꽤 많은 분열이 자리함을 보여준다. 결국 대체현실이란 샘플링의 경제학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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