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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Feb 14. 2023

미래 삭제의 구제론


밀레니엄이란 무엇일까?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바이러스의 이름? 우리가 세기의 종말이라 불렀던 2000년대 증후군을 가리키는 말? 후자를 따른다면 이는 ‘이후’의 담론과 연결된다.


이후란 무엇인가. 세상이 망할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세계는 2000년을 맞이한다. 따라서 그들에게 밀레니엄은 멸망 이후의 세계이며 본래대로라면 존재할 수 없다. 이게 바로 우리가 그리는 ‘이후’의 의미이다. 분명 끝나야 할 게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는 일, 이게 꿈속이라는 걸 알아차렸음에도 깨어나지 못하는 자각몽의 상태. 강덕구의 『밀레니엄의 마음』이 가정하는 밀레니엄의 시대는 그런 의미에서의 ‘To be Continued’이고, ‘포스트’이며, 반환과 연장의 역사이다. 특히 “’현실’이 일구어내는 시스템의 항구적인 지속 상황”(p.114)이라는 표현은 밀레니엄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항구적’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영원이라는 맥락에만 의존하지 않으며, 그것이 계속해서 유예되고 연장된다는 점에서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다. 항구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눈앞에 있음에도 잡히지 않는다는 뜻이며, 마모를 통한 인식의 오배에 의존하는 ‘영원’보다 훨씬 고통스럽다. 


영원은 남극의 백야처럼 주체의 인식이 세계에 갇혀버린다는 점에서, 또한 그게 줄곧 반사된다는 점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항구는 세계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하며, 그렇기에 주체는 세계에 올라탄 입장에서 자기 또한 앞으로 나아간다고 착각하게 된다. “내가 나의 삶을 선택한다는 선택의 배후”에 자리한 “가공할 만한 현실”이 “기대 지평”을 상실했다(ibid.)고 보는 강덕구가 “미래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예전에 우리는 외삽법을 근거로 미래를 현재에 당겨왔지만 오늘날 이는 통하지 않는다. 미래를 현재에 당겨와서 이를 활시위 삼는다는 사이버 펑크의 방법은 “기대 지평을 상실”한 밀레니엄에서 영원히 지구를 도는 아킬레스 난제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미래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고, 현재는 줄곧 연장되면서 평화는 ‘항구’적으로 유지될 테다. 이른바 “’역사의 종말’의 종말”은 우리가 더는 죽음이라는 개념조차 상상할 수 없게 된 현실이 ‘바깥’을 상실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내부를 잃어버림으로써 더는 세계와 자기 사이를 구획할 수 없게 되어버렸을 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는 세계의 속도에 올라탐으로써 발을 내딛는 법을 잊어버리고야 만 것이다. 


그와 동시에 세계의 속도와 주체 사이에는 잔상이 생겨난다. 눈으로 쫓는 속도보다 실제 속도가 더 빠르기에 벌어지는 이 현상은 “데리다가 현실 (…) 몰락 이후 (…)를 다루면서 갖고 오는 ‘유령학’”(p.116)의 존재를 입증한다.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현실의 가속이 아무런 인식이나 영향을 끌어내지 못하는 건, 지구가 엄청난 속도로 자전하고 있음에도 우리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 말 그대로 우리는 관성에 의해 내부가 바깥에 유착되어버려서, 내부가 경계에 유착되고야 말아서 항상 과거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우리가 과거를 그리워해서가 아니라 가속주의라는 최대최속의 시대에는 과거조차 미래와 자리를 나란히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시대는 레코드판과 같은 하나의 접면을 통해 ‘죽은 것들’을 현재의 표면에 맞닿게 하고, 이를 통해 어떠한 미래를 가정하지만 정작 그러한 미래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유착만큼이나 어긋나 있다(p.119). 


이런 세계에서 미래는 과거와 현재를 관성적으로 수행한다. 그렇다면 밀레니엄은 ‘이전’이라는 과거와 ‘이후’라는 현재를 통해 만성적인 미래를 끌어내는 작업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유령처럼 출몰해오는 것들은 드러난다는 맥락에서의 창조와 생성이라기보단 본래 있던 걸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손상, 혹은 훼손의 맥락에 가깝다. 오늘날 디지털 필름을 제조하는 과정은 열화된 것을 되살리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서, 아예 의도적으로 훼손한 후에 모자란 부분을 외삽해서 어떠한 미래로서 ‘예측’되는 것을 지금-이곳에 당겨오는 것이다. 이른바 “’유령학’이라 함은 이러한 입출력 과정의 손실 혹은 기술적인 오류를 기반으로 삼고, 이를 모방하려고 애쓰는” 것이라 할 수 있다(p.120). 따라서 이때의 미래는 그 자신의 내부에서 가정되었을지라도 되려 자신을 찢어발기고 상처를 수복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내부에만 의존하는 건 아니다. 이 내부는 항상성과 치유력에 의존하지만, 그 과정에서의 수복은 데이터 스토리지의 방식처럼 정보를 일대일로 대응시키지 않는다. 


여기까지 읽으면 밀레니엄은 확실히 ‘망쳐진 미래’의 좋은 표본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금의 미래가 방지해야 할 위협”(p.124)으로 여겨지는 것은 이것이 과잉 증식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가령 AI 기술을 통한 이미지 업스케일링과 생성 기술은 완전히 무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다. 이런 기술은 본래 있던 것을 분해하고, 이를 토대로 어떠한 미래를 외삽하는 것뿐이다. 즉 ‘미래’라는 것은 우리의 인식과는 달리 현실과 동떨어진 무언가가 아니며 오히려 현재를 망쳐놓고, 이를 퇴보시켜서 그런 상황을 가속해 여러 번 반복해보았을 때 완성되는 마지막 세계에 가깝다.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는 물질로 이루어진 우리 역사를 끝에서 두 번째 세계로 보았지만, 오히려 밀레니엄은 세계를 여러 번 돌려 도착했다는 점에서 일순이고, 그러한 의미에서 늘 항상 최전방에 자리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의 신학이다. 특히나 강덕구의 말처럼 1960년대 우주 개발 붐의 종언이 “문화적 상상력을 ‘반복’”(p.106)에 이르게 한 세기의 종언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세계의 ‘바깥’을 제거해버렸을 뿐이라는 점에 주목해야만 한다. 보통 반복이 끝났다고 본다면 그러한 반복에서 해방되었음을 의미하겠지만, 되려 우리는 AI와 같은 반복 학습을 통해 미래를 새로이 ‘예측’하는 것으로 나아갔으니 말이다.  


과거에 미래란 도래하고 닥쳐오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갈 하나의 지표가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미래라는 말은 그려지는 현재를 더욱 선명하게 하거나, 혹은 과거를 학습해서 다시금 현재에 재조합하는 일을 가리킨다. 아주 확실하게, 여기서 ‘현재’라는 말은 이미 완성된 것으로 제시되어있지 않으며 단지 물건을 내려놓거나 서술하는 표면의 역할만을 할 뿐이다. 그래서 이런 예측은 미래를 더 잘 이용하게 해준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현재에 머무르도록 돕는다. 한때는 기술이 그리는 미래가 백투더 퓨쳐와 같은 오래된 ‘이후’처럼 여겨졌지만,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건 매끄러운 표면을 타고 미래로 가속하는 최대최속의 세계이다. 또한 이로 인해 “현실의 스케일에 돌이킬 수 없는 오류들이 일어”난다(p.80). 세계의 속도를 초과해서 움직이는 이들이 마주하는 것은 아직 생성 중에 있어 열화된 것처럼 보이는 표면이다. 


“현실은 예술이 지닌 가공할 만한 가소성을 모사하는 걸 넘어, 그보다도 더욱 불안정해지고 복잡해진다.” 오늘날 현실은 균열과 마모를 지우기 위해, 연결성과 선형성을 위해 혼톨로지의 유령성조차 그 자신의 일부로 구성한다. 하지만 밀레니엄의 세계에는 그러한 리니어를 의도적으로 해체하는 방식으로 유령성을 드러내는 몇몇 시도가 있다. 이는 특히 애니메이션과 같은 분야에서 그 의도가 잘 드러난다. 한때 애니메이션은 셀이라 불리는 동화를 바탕으로 운동의 이음매를 조작하는 행위였지만, 밀레니엄 시대의 애니메이션은 그 시대적 흐름에서 선형성을 획득하며 이런 와중에 균열은 하나의 힌트가 된다. 가령 가속주의자들의 말처럼 이 시대가 “대안을 상상할 수 없는” 펑크라면, 이런 인식에 균열을 내야만 비로소 세계를 돌아볼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봉준호의 <설국열차>가 그리는 마지막 장면처럼, 우리가 세계에 올라타 있을 때 법칙에 지배되지만 균열은 그런 의미에서의 무질서 그 이상이다. 


이에 따라 애니메이션은 그 자신의 매체적 특성을 활용하는 방안으로 균열을 택한다. 영화가 여전히 현실을 포획한다는 원리적 한계에 사로잡힌 반면, 애니메이션은 어떠한 흐름 안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카툰렌더링과 같은 후처리 기술의 발달은 대상과 사물의 표면을 질감처리하면서 운동과 배경 사이의 균열을 드러낸다. 이는 특히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과 같은 영화에서 운동은 선형적으로 묘사하고, 그 사이의 스터터링으로 세계 내의 대상이 배치되는 순서를 드러내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의도적으로 잔상을 남기는 이런 묘사는 밀레니엄 초기에 ‘불릿 타임’이라 불렸던 느림의 미학을 계승하면서, 이를 토대로 가속을 묘사한다. 눈으로 다 쫓을 수 없기에 프레임이 끊기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 묘사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나 <장화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에 이르기까지 그 자신의 배경을 외부 세계로 배척하면서 자신은 항상 표면에 머무르고자 한다. 


과거에 세계는 인물이 살아가는 무대였고 그렇기에 그 시간축에서 자리를 옮길 수 있었지만, 오늘날 세계는 그 모든 것에서 표면이고 그렇기에 균열은 세계 자체의 분열이 아니라 그런 세계에서 홀로 저프레임, 저화질로 렌더링된다. 이른바, 의도적으로 균열을 드러내는 일을 시작으로 밀레니엄은 운동을 세계에 돌려주고자 하는 셈이다. 물론 세계가 하나의 우주선에 해당한다는 걸 알리려는 몇몇 시도가 있기도 하다. 피셔가 말했던 <칠드런 오브 맨>과 같은 영화에서 우리는 균열을 배제하려는 시도를 본다. 하지만 1960년의 달착륙을 마지막으로 외계라는 미지의 세계가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같은 시기 등장한 “예술 장르로서 사이버 펑크는 점점 더 불안정해지고 복잡해진다.”(p.113) ‘펑크’라는 미래 삭제의 구제론은 이제 심지어는 미래조차 우리가 참고 삼을 뿐이라는 점을 통해 ‘사이버’라는 값어치를 획득하며, 이것은 오늘날 사이버 펑크가 끝에 다다른 문화가 된 것만큼이나 밀레니엄은 우리 시대의 막장이라는 점을 설명한다(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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