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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Feb 21. 2023

레거시 차단 시대의 인정 투쟁


과거의 매체는 새로 등장한 매체에 편입된다는 매체학의 유구한 주장을 떠올려보자. 문자와 음악, 회화와 사진, 영화와 그 외 기타는 인터넷 매체에 편입되면서 그 자신을 독립적인 무언가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는 점점 더 하나로 통합되는 시대에 이전 세대와의 호환을 그만두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레거시 지원은 이전 사용자를 계속해서 가져갈 수 있는 효과가 있지만, 반대로 보면 그만한 자원이 추가 투입된다는 점에서 언제까지고 가져갈 수는 없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하위 매체는 항상 제거될 위협에 시달리며, 그로 인해 매체는 자신에 관한 인정 투쟁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레거시 차단’의 시대에 매체는 하위호환을 중단하고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들에게 과거는 자신이 붙들려있는 것에 불과하며, 나아가려면 쳐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하위호환을 하기엔 너무 데이터가 방대해진 세상이고, 하위 매체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부단히도 노력한다.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이 대목에서 이야기는 과거와 미래 두 개의 방향을 고려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는 미디어 컨버젼스를 가리키며 이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세상에서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면을 가리킨다. 몸집을 불려가는 과정에 다른 개체의 특성을 흡수한다면 종국에는 본연의 가치라 할 만한 것은 찾아보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 개체에겐 정체성 문제가 대두하는데, 어디까지가 자신인지를 구획하는 과정에서 과거와 미래, 현재가 혼합되고, 순간을 묘사하기란 어려워진다. 결국 개체는 시간을 구획하기를 포기하고 자신이 수행하는 기능에 따라 시간을 절단하기를 선택한다. 이제 특정 시간에 인솔되지 않는 주체는 하나의 거대 질서를 따라가기보단 작은 세계들로 나뉘고, 그 안의 질서를 성립시키면서 각각 세계를 별개의 기능으로 사용하려 한다. 헌데 기능을 나누는 일은 어떤 면에서 몸의 사회학을 연상케 하지 않던가. 절단되고 환원되는 기능 말이다. 



신체의 유기적인 연결에서 착안해 ‘부위파위’ 등의 묘사를 수행하는 메카물의 공식은 사회에도 적용되어 핵심 기능과 말단 기능, 말초신경과 뇌신경 등의 기능을 대입한다. 이제 세계는 그 구심점에서 중요의 척도를 따져 묻게 되어 버리는 것과 그러지 말아야 할 것으로 나뉜다. 자본주의의 대량생산주의는 끝없이 정체성을 생산해 거의 모든 상황에 대응해야 하는 주체의 정책을 가리키며, 이때 정체성은 특정 세계의 소속이라기보단 몸을 통솔하는 신경계의 정책에 가깝다. 손과 발, 머리와 신장 등을 하나로 엮는 것은 신경계이고 말하자면 ‘세계’들을 이어주며 횡단하는 이 정책이 바로 정체성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시간은 점점 더 개인화되고 원자화되면서 정체를 밝히는 일과는 멀어진다. 정체성이 신경계의 연결 부위라는 점에서 몸의 범주는 개인이 연결되는 곳에 한할 텐데, 확실히도 연결에는 한계가 있으며 이에 따라 레거시 지원을 중단할 필요성이 생긴다. 



레거시 지원의 중단은 점점 더 무거워지는 운영체제를 더욱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한다는 점에서 요구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이별해야 하는 것과의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구식’ 취급을 받는 일은 그리 유쾌하지 않으며, 연결의 중단은 곧 의식의 중단을 의미하므로 실질적인 죽음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렇게 연결이 끊긴 상황에서는 아무런 감각이 전달되지 말아야 함에도 어떤 경우에서는 그게 느껴지는 때도 있다. 우리가 환지통이라 불리는 이 병증은 신경계가 기존의 감각을 가상으로 시뮬레이션하고, 이를 다시금 신체에 수용한다는 점에서 상실된 연결을 수복하려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이른바,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트위터의 타래 등에서와 같이 시간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나누는 것에서도 관찰되는데 ‘연결’이 끊겼다고 생각되는 것에 관해 등장해오는 유령의 목소리를 떠올려보자. 과거는 발굴되고, 현재에 연결되지만 이때의 연결은 접합이 아니라 봉합이다. 



단순한 접합이라면 이합집산에만 불과하겠지만 오래된 것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일은 보기 드물다. 왜냐하면 말라비틀어진 신체를 이식해서 사용한다는 말만큼이나 이러한 일은 불가사의기 때문이다. 과거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현재와 연결되는 것일지를 떠올려보자. 우리는 현재를 살기 위해 과거를 잊으며 이는 데이터의 수용량에는 한계가 있어서다. 바꾸어 말해, 과거는 자신이 버린 게 돌아온다는 점에서 ‘하위’의 반발이며 돌아온 자기에 대한 두려움과도 같다. 그래서 과거와 연결되는 일은 신경계의 병증이라는 점에서 정신쇠약의 일종으로 이해되고 그것이 현실에 돌아오지 못하도록 시뮬레이션하는 게 봉합의 주요 역할이 된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새로 등장한 매체는 늘 이전의 매체를 하위호환한다”는 매체학의 유구한 명제는 신체의 절단이 아니라 신경계의 재편을 암시한다. 일반적으로 미래는 진화의 방식으로 변태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하위를 ‘중단’할 뿐이라는 것이다. 



데리다의 용어인 유령성이 몸과 정신의 어긋남을 묘사하고자 몸과 정신이라는 형식 모두에 얾매인다는 점을 고려하면 ‘호환’이라는 말 또한 어긋남의 경우를 동반한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호환’은 자신이 알 수 있는 이외의 영역 모두를 미지로 남겨둔다는 말과도 같다. 이 점에서 호환은 단순히 공언된 연결의 자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연결고리의 상실을 겪은 매체가 어떠한 경로로 현재에 난파되어오는 일은 그리 이상하지 않다. 하위호환을 중단한다는 말은 관심을 껐다는 말에 불과하므로 완전히 사라졌을 리는 없으니 말이다. 결국 오래된 문화, 혹은 밈의 재발굴이 시사하는 것은 오래전에 버려서 사라졌어야 할 물건이 돌아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는 우리 세계에 ‘외부’가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내부가 어떠한 막에 의해 가로막혀 있어서 내부에 있는 게 외부와 교류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즉, ‘몸’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엔 명실상부한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지양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주어진 영역에서만 무엇이든 될 수 있다면 이는 애초에 한계를 가정한다는 점에서 상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지 중단이라는 말처럼 잠시 연결을 끊어둔다는 점에 가깝고, 이는 기계적 신호를 구성하는 켜짐과 꺼짐이라는 두 가지 상태에서 비롯된다. 요컨대 연결이라는 말은 신호가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신을 구성하지 않을 것들을 쳐내는 레거시 재편 작업인 것이다. 따라서 이 한계는 몸이라는 용어에서부터 그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몸은 우리가 인식하고 다룰 수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신경계의 연결이 이루어지는 말단까지를 뜻하므로 애초에 그러한 인식에서 ‘몸’이라는 형식이 도출된다. 즉, 몸은 자기반영성의 성질이 있고 이를 따르자면 세계의 ‘외부’는 인식의 바깥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알아차릴 수 없다. 세계에 소속된 우리가 어떻게 바깥을 규정할 수 있고, 또 거기에서 ‘없다’고 판단할 근거는 무엇인가?



가장 최신의 매체가 하위 매체들과의 하위호환을 중단하는 일 같은 게 벌어질 수는 없다. ‘단계’라는 말은 생물학에서의 진화나 철학에서의 위버맨쉬와 같은 초월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하위호환을 중단하는 것은 연결의 방식을 달리하는 것이지 세계의 바깥을 가정하지는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영화가 디지털 안에서 하위 매체로 포섭되었을 때 그 자신이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일은 영화의 확장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확실하게도 영화 스스로가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기는 하나, 그게 내재적인 것인지 아니면 역사의 뒤안길에 발흥한 운동인지를 구분 짓기란 어렵다. 혹자는 포스트라는 용어를 영화에 접목하면서 이것이 과거와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린 영화를 다시금 재시동해줄 수 있다고 믿지만, 이러한 시동은 연결을 재구성하는 게 아니라 이들 세계에 진정으로 바깥은 없음을 말해주면서 매체의 궁극적인 소멸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안심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또한 영화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일을 걱정하면서, 최신의 디지털 매체가 하위호환을 중단할 것을 우려하는 일은 디지털이 어떠한 상위 개념으로 여겨지는 것을 전제하지만 이러한 오해는 전적으로 ‘하위’라는 용어에 근거할 뿐이다-어쩌면 하위호환 중단에 관한 우려는 “대안은 없다”로 표상되는 세계의 종말에서 그 가능성이 떠올랐던 게 아닐까. 사람들은 세계의 종말을 발명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바깥을 무시하거나 왜곡했고, 여기서 하위라는 표현은 일종의 가상계를 상정하면서 그것이 “의식과 몸 사이의 의도적인 불일치를 불러내므로 신속하게 ‘제거’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것에 사용됐다. 인간을 초월하려면 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탈인간주의의 몇몇 주장처럼, 영화가 생존하려면 영화의 형식을 버리고 영화의 시선으로 세계와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대안’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에 따라 포스트라는 말은 상위종을 가리키는 게 되었고, 하위는 열등함을 의미하게 되었다. 



허나 포스트 매체의 시대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늘 과거와 연결돼야 하는 것처럼, 몸의 역사에서 신경은 세포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면서 이들 모두가 결국 몸이라는 하나의 형식에 있을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매체는 더는 신예와의 호환을 유지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형식에 재연결되는 과정을 거칠 뿐이다. 이는 몸에 상처가 났을 때 상처 부위가 수복되는 것처럼 하위호환의 포기가 구시대와의 이별이라는 극단으로만 해석되지 않을 이유를 제공한다. 세포의 사멸이라는 점에서는 철학적으로 과거의 우리와 현재의 우리가 다르다고밖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정체성은 그것이 ‘나’이기를 원하는 신경계의 연결 덕분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영화는 드러내는 쪽과 바라봐주는 양측 모두와의 연결로써 자신을 재발명하는 것이지 결코 혼자서 인정투쟁을 벌이고 있지는 않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시뮬레이션이 원활하도록 돕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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