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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Feb 27. 2023

포스트 3.11의 정동과 자기 상실


패러다임에 관한 정의를 구글에 검색하면 “한 시대의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인식의 체계. 또는, 사물에 대한 이론적인 틀이나 체계. 순화어는 `틀'.”이라는 다소 적확한 설명이 제공된다. 한 시대, 사람들, 인식의 체계라는 키워드에서도 알 수 있듯, 패러다임은 어떠한 경향성을 의미하며 그런 의미에서 페르소나라는 단어와 비슷하게 들린다. 특정 사건을 기점으로 질서가 재편되는 패러다임처럼, 특정 상황에서의 질서를 마주하는 방법은 페르소나이며 이는 개인이 상황에 맞게 행동하지 않으면 그러한 질서에 거역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사람들은 패러다임이라는 거대한 물결에 올라타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하고, 이는 기본적으로 흐름의 문제이자 생존의 문제라는 점에서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다. 거부할 수 없는 질서는 개인의 외견을 깎아 세우고, 이로 인해 생겨나는 페르소나는 개인이 세계에 대응하는 방식이라기보단 세계를 마주 보는 방식에 더 가깝다. 


사람들은 패러다임을 마주하고자 자신의 페르소나를 바꾸고, 이에 순응하는 법을 배운다. 이 천편일률적인 행복은 일말의 걸림 없이 흐름이 진행되고, 패러다임은 매끄러운 외관 혹은 그렇게 드러내며 살기를 요구한다. 그래서인지 패러다임은 무수히 많은 페르소나를 만들어내고 이를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 페르소나를 가면에 빗대는 심리학의 비유처럼, 개인이 시대에 대처하는 법은 각자 다르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어진 조건에 순응하게 하며 이에 따라 가면은 천편일률적인 형태를 하게 된다. 이른바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를 마주한다는 게 이 이야기의 핵심이고 그런 가면들의 사이에서 우리가 어떤 흐름을 겪어내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좋다. 가령 행복의 형태는 대강 비슷하지만 불행의 형태는 몹시 다양하다는 격언은 하나의 패러다임이 분열되는 경우의 수를 보여준다. 시대가 내세우는 행복의 조건은 하나지만, 그로 인해 추락하는 경우는 무척 다양하다는 것이다. 


이 행복과 추락 사이에서 드러나는 모순이 바로 찢김(tearing)인데, 이것은 세계의 작동과 이를 드러내는 표면이 서로 어긋나는 현상이다. 우리는 이 둘을 의식적으로 겹쳐보지만 때로는 그 둘 간에 동기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패러다임은 질서이지만 구조이기도 하다. 구조화는 현상에 관한 틀을 제공하지만 반대로 포착되지 않는 무언가를 낳기도 하니 말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영화에서도 동일하다. 일단 영화는 우리가 현실을 파악하도록 돕는 틀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영화이기에 놓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면이 있다. 흔히 재현의 논리에서는 영화가 현실을 포섭하지 못한다는 점이 주로 지적되곤 하는데 반대로 현실 또한 영화를 포섭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말인 즉, 영화에서 패러다임의 문제가 포스트라는 용어로 설명되는 것은 ‘포스트’라는 선언으로 자신과 현실 사이를 찢어놓고, 이를 토대로 행복 아닌 분열을 묘사하기 위함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영화가 포스트의 문제를 선언할 때 그것은 패러다임이 변했으며 더는 돌이킬 수 없다는 비가역성의 문제에 등치된다. 영화가 포스트를 패러다임의 맥락으로 받아들일 때 이 문제는 현실 세계를 구조화하는 질서로 이해되고야 만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라본 포스트 시네마는 현실이 무엇이라고 말하면서 이를 고정해서 드러내는 효과가 있다. 이는 현실은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못 박는다는 점에서 행복의 가치를 규정하는 것과도 같으며 이 경우 분열의 수는 우리들 현실 쪽에 남는다. 포스트 시네마가 묘사하는 현실의 경향이란 그러한 현실에 굴복하기를 요청하며 이를 행복의 조건 삼는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행복에 포섭되지 않는 수많은 얼굴이 있다. 특정한 패러다임을 마주하는 방식이 꼭 맞서 싸워야 하는 것만일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기력하게 고개를 돌리는 것도 정답은 아니다. 영화에서 포스트의 문제는 단지 현실과 영화 사이에 어떠한 스침이 발생한다는 점을 묘사하는 것으로 족하다. 


하지만 많은 경우 사람들이 포스트 시네마에 기대하는 것은 영화가 자기들이 속한 시대를 잘 보여주기를 바라는 일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미 자신이 소속되어 더는 바라볼 수 없게 된 그 시대를 외부에서, 관찰자의 눈을 빌려 묘사해주기를 바란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만 자신이 소속된 시대에 관해 알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더 나아가 이들은 영화의 출발이 재현의 논리였다고 지적하며 포스트 시네마는 시대적 패러다임을 재현함으로써 그 영화적 본분을 다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분위기를 재현한다는 건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 포스트 시네마는 시대적 부름에 응해 분위기를 묘사하는 것이거나, 또는 패러다임에 소속되지 않는 한에서만 내보일 수 있는 분위기를 보여주려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서도 역시 정직은 통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현실을 마주하지 못하기에 현실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지 못하고, 그렇기에 포스트 시네마도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지 못한다. 


즉 포스트 시네마에서 분위기는 재현될 수 없는 축에 속한다. 왜냐하면 분위기는 현실에서 영화로 옮겨오는 게 아니라, 현실에 포섭되지 않는 게 영화로 흘러들어온다는 점에서 동기화 실패의 지점에 가깝기 때문이다. 만약 포스트 시네마가 어떠한 패러다임을 묘사하는 일에 충실하다면, 현실에서 현실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어떤 불일치가 바로 분위기다. 포스트 시네마의 인물들이 항상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애도는 시원하게 한 번 우는 걸로 끝나지 않으며 이는 그러한 감정이 단순한 현상이라기보다 특정한 무언가를 생산하고 수행하는 구조에 가깝다는 점을 보여준다. 바꾸어 말해 감정과 분위기가 구조이기에 현실의 패러다임은 영화에 수용될 수 있고, 또 자신을 포스트라는 용어로 소개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포스트 시네마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그에 대한 공격이나 방어가 바르게 수행되도록 돕는 효과가 있다.   


그렇게 보면 포스트 시네마가 현실의 어떤 대리나 재현으로 자신을 포지셔닝하지 않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포스트 시네마는 현실과 영화를 같은 타임라인에 두면서 실시간으로 무언가를 진행하려는 게 아니다. 포스트 시네마는 점진적으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며, 이 흐름에서라면 충분히 포스트라는 표현이 성립한다. 포스트 시네마에서의 포스트란 극복의 의미가 아니라 관객이 침입해 들어올 만한 지점을 만들어둔다는 점에서의 찢어짐이다. 전 시대와 현 시대를 갈라놓는 의미에서의 찢어짐이 아니라 현실에서는 패러다임에 맞서 고개를 들기 어려운 환경이 포스트 시네마의 찢어짐을 통해 감정을 투사 혹은 이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포스트 시네마에서 분위기라는 말이 가리키는 건 바로 그렇게 현실과 어긋난 것들이다. 분위기는 패러다임 안에서 공유하는 시공의 흔적이 아니라 우리가 보는 곳과 잡는 곳이 일치하지 않는 것과 같은 위화감의 맥락에서 동작한다. 


패러다임은 개인의 정체성을 찢어놓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잃어버린 걸 수복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현실에서 분열된 채로 살아있을 수 없기에 자기 현실을 영화로 만들 수 없다. 그러나 그 누구도 포스트 시네마를 두고서 비겁하다는 표현을 사용하진 않는다. 포스트 세월호도, 포스트 3.11도 이미 지나버린 시절을 추억하는 것에 그칠 뿐인 게 아니다. 어떤 면에서 이런 분위기는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기 힘든 현실의 요청이 아니라, 시대적 흐름 안에서 개인이 삶을 마주하는 방식의 잔흔일 수 있다. 말하자면 포스트 시네마는 ‘지나간’ 것을 추억할 뿐인 무언가가 아니라, 사그라든 분노와 청산되지 않은 슬픔과 이런저런 마음들의 여분이다. 이른바, 포스트 시네마는 이후의 맥락에서 과거를 회고하거나 기록하는 용도가 아니라 구조화의 실패를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무언가에 접근하려면 필연으로 소모되는 것들이 있는 것처럼 패러다임을 마주하는 방식에서 소모된 마음은 영화에 접근하는 것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


포스트 3.11이라는 용어는 2011년 이후의 일본영화를 가리키는 것에 흔히 사용되곤 했다. 이는 사건의 여파가 영화에 미칠 만큼 거대했다는 점을 뜻하기도 하지만, 일본 영화의 경향이 새 시대로 넘어갔음을 뜻하기도 한다. 90년대의 옴진리교 사건을 겪은 일본 사회가 불신의 트라우마에 사로잡혔을 때 이 경향은 200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감정의 농도는 옅어졌지만 믿음의 붕괴는 사회적 연결망의 해체로 이어졌으며, 고립의 감정을 강조하는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치카와 준의 <토니 타키타니>와 원작 소설 작가인 하루키의 유행은 ‘상실’의 시대라는 문구를 잘 보여주었고, 이와이 슌지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 그리고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는 어떠한 사건의 ‘이후’에서 출발하고자 했다. 사건은 이미 벌어졌는데, 그게 왜 벌어졌는지를 이해하기 힘드니까 단서를 현재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일본의 2000년대 영화는 돌이킬 수 없다기보다는 사회적 안전망에 관한 믿음이 산산이 분해되고, 그것이 유령적인 것으로 남아 사회 전체에 관습처럼 스며들었다고 볼 수 있다. 


믿음 이전의 공동체가 믿음의 영역으로 넘어가면서 “이전”은 개봉되지 않는 편지가 되었다. 이러한 경향에서 과거를 추억하는 일이 대두한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는 아직 믿음이란 게 살아있던 시절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상기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믿음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각자가 소속되어 있던 믿음의 영역이 다르다는 점에 있다. “‘우리’가 향유했던 시절은 같은 걸까.” 믿음이 무너진 사회에서 믿음은 그 자체로 개인의 과거를 지탱하며, 이는 이들의 현재가 서로 다른 출발점을 갖는다는 점에서 도착점만을 살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자면 2000년대의 일본영화는 그러한 공통분모를 찾는 게 현재에 대피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모두의 영역이 다르다면 발 디딜 현실은 그러한 불안정함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안전함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 영화가 보여주는 불안의 정동은 불안정한 현실이 아니라 되려 견고한 지지대를 보여준다. 모두가 느끼는 불안은 그게 실존하는 위협이든 말든 간에 정말로 무언가 있다고 믿게 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 사이에는 공통의 현실이 생겨나고, 불안의 원인이 다를지언정 자리하는 위치는 같다. 이윽고 2000년대 일본영화의 정동은 3.11이라는 대재앙을 맞아 자기위치를 상실하고야 만다. 포스트 3.11이라 부르는 일본 영화의 경향은 크게 자기위치의 상실로 요약되는데, 이는 유럽의 누벨바그에서 영향을 받은 1970년대 청춘 영화의 경향을 되풀이하는 듯 보인다는 점에서 특이사항이 있다. 물론 이는 하이틴 장르를 뜻하는 게 아니라 1960년대를 풍미했던 태양족과 같은 전후 일본의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다. 가령 1966년의 오시마 나기사가 제작한 <백주의 살인마>와 같은 영화에서 발견되는 형식적 불안함은 현실의 내러티브를 다각도에서 살피고자 했던 자기파악의 결과물이었다. 자기위치를 알 수 없는 만큼 최대한 다양한 풀이법을 써보려 했고, 이러한 경향은 풍요의 1980년대를 거치며 퇴색됐다가 90년대의 사이버펑크, 2000년대의 옴진리교를 거쳐 2010년대에 부활한다. 


이들 영화의 경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의 시대정신은 부유하고, 떠다니는 것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으며 더군다나 이는 사무라이가 멸종한 현대 사회에서 더 큰 부채의식을 준다. 버블 경제라는 주군이 꺼졌다면 카케무샤의 뒤라도 쫓아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리고 이제 세계는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다. 3.11의 풍경은 모두가 생각하던 이상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현존만을 감각하게끔 한다. 사실 주군의 상실은 현대 일본의 기틀이 된 미군정 이후의 세계, 즉 포스트 천황 세계에서 지속되는 물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카케무샤라는 존재의 상실은 비록 그것이 헛될지라도 무언가를 바라보며 추구하는 일의 끝을 알린다. 신과 함께하는 세계가 끝났고, 그 자신이 홀로 서야 하는 시대에 개인은 신이 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 이는 거대서사의 종말과 함께 자기 영역만을 끌고가야 하는 생존자의 시대이기도 하다. 


지켜야 할 사람도, 지켜야 할 세계도 없이. 포스트 3.11의 세계는 단순히 재난 이후를 살아가는 트라우마적 정동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으며, 그림자조차 볼 수 없게 된 세상에서 개인은 삶의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됨을 의미한다. 어쩌면 포스트 3.11의 풍경이 일본 영화의 계보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른다. 방향상실은 대개 전후처럼 구체제가 붕괴한 자리에서 도래하는 경향이 있는데, 일본의 전후는 현대체제라는 점에서, 현대 일본도 지속되는 전후에 있다고 가정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3.11은 이런 흐름에 소속된 정치적 여파가 아니라 말그대로의 자연재해라는 점에서 그 어떠한 방향에서도 벗어나 있다. 바로 이 점으로 인해 3.11은 과거를 답습하지 않는다. 3.11은 45년의 원폭이나 14년의 세월호처럼 시대적 맥락 안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니다. 70년대의 베트남이나 50년대의 한국처럼 어떠한 전선을 형성하고 있지도 않다. 3.11은 과학적으로밖에는 설명이 불가하다는 점에서 모든 세계에서 벗어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예외사태이다. 


혹자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맥락에서 3.11 이후 일본영화는 불가해졌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과학으로만 설명 가능하다는 점이 3.11이라는 사태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과학이 세계의 현상을 발굴하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주체 없는 세계를 선가정한다면, 3.11을 과학으로 규명할 때 인간의 역할은 늘 바라보며 후속에 따를 수밖에 없는 지위에만 머무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3.11의 맥락은 더는 바라보는 것밖에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인류 최후 체제를 선언한 후쿠야마의 선언과도 닮아있다. ~밖에는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게 우리가 결코 잘나서가 아니라 그저 세계는 예외 사태를 허용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후쿠야마의 선언을 떠올리자. 포스트 3.11을 영화가 묘사한다는 건, 그것을 보여주거나 서술한다기보다 항상 3.11을 바라만 보는 처지에 놓였다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왜냐하면. 3.11이 거기에 있어서 시선이 가로막혀야만 비로소 자기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 포스트 3.11의 감각은 되려 3.11 이후를 살아간다는 점에서 3.11을 뒤로한다기보다는 3.11을 최후에 두면서 이를 하나의 방향 삼는다. 


3.11이 일본 최후의 체제가 되었다고 말하는 일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영화 자신이 포지셔닝하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더는 이것 외의 대안을 생각해볼 수 없다는 생각이 그것 이후의 세계에 남겨졌을 뿐이라는 감각과 연결될 때, 대안 이후의 세계는 해결책의 부재와 책임 대상의 상실이라는 점으로 주체에 다가올 뿐이다. 말하자면 이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고 또한 변화의 여지도 없는 부동의 세계라는 점에서 최후이다. 그런데 이러한 최후를 두고서 역사의 다른 시기와 연결짓는 일은 가능한가. 시대 앞에 무력한 개인이라는 주제는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고, 어떠한 운동 후에 목적의식을 잃어버린 세대인 1970년대 또한 예외는 아니다. 이런 70년대와 10년대를 연결하는 것은 확실히 잘못되었다. 즉, 그렇게 잘못된 연결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목격되는 몇몇 시선에 관해 우리는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출발선에서 이야기해야 할 건 포스트 3.11이라는 시선 안에서 자가당착에 빠진 영화를 깨부수는 일이다. 


가령 구로사와 기요시의 <지구의 끝까지>와 같은 영화에서 우리는 바다를 바라보는 감각과 도쿄만의 화재 등을 목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포스트 3.11의 맥락에서 목적의식을 잃어버린 청년층을 대변해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3.11은 예외사태라는 점에서 어떠한 목적성을 담보하지도 혹은 응집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특히 인간의 이성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홀로코스트가 아니라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른 이성이 있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보다 근본적인 사태이며, 만약 이들 영화를 평해야 한다면 그 평가의 방식은 상실의 정동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에 관해 이뤄졌어야만 한다.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 시대에 3.11의 잔상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이미 일어나버린 일은 사건의 전조를 감지하는 일과 그에 관한 후속평가를 동반하지만, 과거와 미래 양쪽방향으로의 접근은 존재원리를 하나로 환원할 뿐 진정한 의미에서 그에 대한 묘사나 평가가 되지는 못한다. 바꾸어 말해 이는 포스트 3.11이라는 말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후를 모색하기보단 그 시절, 그 자리에 머무를 뿐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포스트 3.11이라는 틀로 일본 영화의 2010년대를 설명하는 일은 그 과정에서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그림자도 따라갈 수 없고, 대상이 부재하는 상황이라면 그러한 사건에 대한 묘사는 자신이 겪은 일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미완의 사태로 규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 기요시의 영화를 시대극으로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기요시는 <스파이의 아내> 같은 영화를 통해 2020년대에 관한 어떠한 시선을 내놓았다고 알려졌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밝은 미래>와 같은 2000년대 영화를 단지 분위기와 캐릭터만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무언가로 설명하는 일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는 물론 3.11이라는 사건이 우리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서인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2010년대를 3.11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일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계속 찾고만 있다는 인상을 줄 뿐이다. 정작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게 아니라 ‘포스트’라는 말이 갖는 파급력이 일종의 인식론으로 역사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그동안 우리가 겪어왔던 1970년과 2000년대 등의 정동이 2010년대의 파급력 안에 잠식되어버릴 뿐이라는 우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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