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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r 22. 2023

[세계]의 '바깥': 항상성이 실패한 공간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의 서문에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전개되고 공간적으로 펼쳐지는 정신적[心的] 활동 상태에 관한 기록”이라고 적었다. 이 문구는 역사를 투쟁을 통해 파악한다고 보면서 세계의 중심을 인간으로 돌려놓았다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 문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체의 투쟁이 아니라 세계의 범주이다. 신채호의 책에서 [세계]는 동아시아 전반의 정세가 아니라 ‘나’와 ‘확장된 나’로 분리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세계]는 나와 ‘확장된 나’ 사이의 중간항이 없이 연결되는 하나의 시공간이다. ‘몸’은 특정한 경계를 두고서 세계 안에 주체를 형상화하는 게 아니라, 세계 자체가 마치 하나의 몸처럼 항상성을 유지하고자 하며 우리는 이를 투쟁이라 부른다. 이 점에서 신채호가 말하는 역사는 기요시가 <스파이의 아내>에서 말하는 코스모폴리탄적 정체성에 맞닿는다. 기요시의 이 영화에서 우리는 ‘나=세계’라는 세계 자아로의 확장을 목격하면서, 인물의 행동은 모두 세계의 통증과 자신의 몸을 유연화하는 것에서 비롯됨을 깨닫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아오이 유우가 폐허가 된 풍경을 바라보며 가슴 아파하는 이 현장에서 우리는 그녀가 소속된 장소인 병원과의 묘한 동조를 느낀다. 자기 신체의 아픔이 세계의 아픔에 등치되는 이 상황은 그 중간항인 ‘풍경’을 건너뛰고서 곧바로 작용한다. 말하자면 여기서 ‘역사’는 나 자신이자 세계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스파이의 아내>의 결말은 그 위치를 병원으로 설정함으로써 아오이 유우가 아프다는 점을 직접 전달한다. 즉, 이 영화에서 [세계]는 아와 비아의 일치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풍경’은 [세계]의 면역작용을 돕는 물질처럼 여겨진다. 이를 따르자면 이곳에서 [세계]란 풍경 없이는 성립할 수 없으며 한편으로는 그러한 풍경이 겉으로 드러나더라도 꾸준히 무시되어야만 비로소 이 이야기는 설득력을 얻는다. 우리는 이를 미장센이라 부른다-연극에서 풍경을 이루기 위해 적절히 배치되는 사물과 오브제 전반을 일컫는 이 말은 배우의 몸이 무대에 드러나는 활인화와 이들이 소속된 무대극의 세계를 적절히 매개하는 일을 가리킨다. 미장센은 그 자체로 어떠한 의미들을 이루기보단 배우와 세계를 적절히 이어주는 관계의 집합항이다. 요컨대 <스파이의 아내>의 결말은 병원에서 나온 그녀가 폐허가 된 풍경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그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하나의 관계 맺기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이 결말은 [세계]의 구성물질이 바로 역사라고 말하는 것에 다름없으며, ‘나’와 ‘내가 아닌 것’의 투쟁이 역사라면 [세계]는 ‘나’가 바로 ‘내가 아닌 것’에 곧바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계]를 다루는 영화도 그러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처음에 [세계] 장르로 출발한 것들이 점진적으로 [세계]를 벗어나는 과정에서는 역사의 누출이 이루어진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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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1990년대 후반, <신세기 에반게리온> 부류의 애니메를 가리키는 것에 사용됐다. 하지만 이 용어는 마땅한 정의와 합의점을 찾기 힘들다는 점에서 매체로서의 장르가 아닌, 현상으로서의 장르로 이해됐다. 사람들은 [세계]를 ‘나’의 개인사가 ‘세계’의 거대 담론에 곧바로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했고, 이 과정에서 중간항은 제거됐다. 요컨대 [세계]는 자신을 담론에 곧바로 연결한다는 점에서 역사를 무시하거나 회피하는 일로 여겨졌으며, 이에 따라 장르는 하나의 대체 현실로 이해받거나 혹은 그렇게 기능했다. 기존 세계가 멸망할 것이라는 세기말적 분위기를 따라 발흥한 여러 현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원하는 현실로의 도피를 꿈꾸게 하였고, 이는 곧 주류 세계의 삭제로 이어졌다. 하나의 절대적이고 보편타당한 현실은 없다는 것, 바꾸어 말하면 ‘나’를 구성하는 건 하나의 지지체가 아니라 여러 현상에 둘러싸이는 감각 그 자체다. 그 세계들에 소속되지 않고 미끄러지는 감각이 바로 관계 맺기의 과정이 된다. 이처럼 [세계]란 ‘나’가 ‘내가 아닌’것에 에워싸이는 것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세계] 장르의 작품들이 일종의 심리치료처럼 보이는 건 다소 합당했다. 이들은 현실을 구하려 하기보다는 그런 현실들을 통해 위로받으려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바깥’으로서의 역사는 무시됐다. 


[세계]에 관해 장르적으로 합의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깥에 관한 배제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아주 확실한 연결고리로 자리한다. [세계]는 독자적인 역사를 구축하고 그 안에서는 그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존재 원리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그 투쟁의 역할을 설득하지 않는다. 여기서 투쟁의 목적은 현실 세계의 도덕과 유사할 수 있지만, 그 행동의 직접적인 원인이나 규율이 되는 원리만큼은 현실과 확고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에반게리온>의 이카리 겐도의 목적은 인류를 하나로 환원해서 죽은 아내를 만나기 위함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AT 필드가 존재하는 가능 세계인 덕택이다. 즉 그 목적에 있어 합리성은 있지만 반대로 주류 세계와의 직접적인 일치는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왜 주류 세계와의 호흡을 포기했는지를 궁금히 여겨야 한다. 사람들은 [세계]를 통해 무엇을 얻으려 했던 걸까? 아마 그건 ‘하나된’ 것이 불가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건 세계가 멸망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를 향해 달려가는 걸 보기 싫어서일 수도, 혹은 더는 통합이 불가해진 분위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즉 역사를 서술하는 것의 불가능함을 의미하는 바, 세계에 소속되는 것만으로는 역사를 더는 꿈 꿀 수 없게 된 상황에서는 자신이 곧 세계가 되는 것밖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자신이 세계를 좌지우지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그건 단지 ‘바깥’에 반대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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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완전무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내가 아닌 것을 배제했을 뿐이라는 점에서 폐쇄적이다. 그리고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서 [세계]의 고독은 좀 더 자신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세계]는 세상살이에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보다 적확하게 서술하려는 운동의 일환이었고, 여기서 ‘바깥’은 가능 세계의 반대말로 사용되었다. 이른바, 가능 세계란 바깥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의 일환으로 작성된 것이었다. 어떠한 사건에 관한 움직임이 투쟁으로 드러나는 과정에는 바로 그러한 의식이 개입한다. 합치되지 않는 서술 방식은 그 사이를 파고드는 것보다 그 안을 밀어내고 자신을 자리시키는 방식을 선호하게끔 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역사를 개변하기보다는 ‘물질’로서의 역사를 선호하면서 그들 자신에게 하나의 존재론적인 흐름을 만들어두고자 했다.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무대는 완성될 수 있었기 때문에, 바꾸어 말하자면 역사를 전면도 후면도 아닌 다른 것들을 형평성 있게 이어주는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게 하기 위해서는 [세계]가 하나의 현상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세계]는 시대정신을 바꾸거나 참여하지 못한다는 결정적인 오류와 단점이 있었다. [세계]는 자기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이 자기일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그들이 몸담은 세계를 바꾸려 하기보단 그 자신을 바깥으로 밀어내려는 움직임에 관한 반발로만 이해되었다. 


[세계]의 완고함이 본격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하는 건 이 무렵이다. 자원에 관한 고갈을 겪는 우주시대의 지구 문명처럼 [세계]는 바깥으로의 진출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됐다. 미래에 관한 종말 의식이 사라지고 이제는 죽을 수조차도 없게 되었다는 의식이 지배적으로 되는 과정에서 사람들 사이에는 역사에로의 참여요구가 일어났다. 달리 표현하자면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제 <에반게리온> 식으로 하나의 통합된 의식체, ‘간극’으로서의 자아로 통합되기보다는 특정한 의식과 방향을 갖고 행동해야 한다는 자기 정체성의 소명의식이 대두하였다. 면역체계로의 역사는 이제 영화에서 미장센으로만 기능하기보다는 본격적인 기능이 되어야 했으며, 자기 완결성으로의 체계는 그 붕괴와 함께 역사를 무대에 누설해야만 했다. 바로 이게 완고한 [세계]가 점진적으로 자신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내놓고 얻은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세계가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그러한 고통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체제의 완고함이 아니라 불사의 극점일 뿐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제 사람들은 세계에 자신을 내놓는 것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세계 자아의 맥락에서 스스로를 상처 내거나 망치려 드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역사에의 자기의식은 향상된 자아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으므로, 이제 [세계]의 ‘바깥’은 미지의 공간이거나 회피해야 할 기억이 아니라 항상성이 실패한 공간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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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포스트 3.11의 정동을 생각하면서, 자기위치의 상실이 일종의 무중력 상태를 만들어내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백야를 두고서 우리가 풍경의 상실과 방향을 연결짓듯이, 폐허가 된 세계는 방향설정의 근거를 없앰으로써 주체의 위치를 ‘바깥’에 근거 삼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즉 방향상실의 감각이 어디까지를 [세계]에서 잘라내야 할 것인지를 논하는 일이라는 것을 뜻한다. 확장된 세계 자아에서는 세계=나라는 공식이 성립하지만, 어디가 바깥인지를 알 수 없다면 이를 근거 삼기 위해 자신은 다시금 [세계]로 분리되어갈 필요가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세계의 범주는 확장되는 게 아니라 점점 축소되는 것만이 가능하다. 이렇게 계속해서 세계를 축소해나가면 종국에는 점으로 수렴하는 자신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지를 몰라도 결국 경계의 범주는 좁혀질 것이므로, 자신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는 언어의 범주는 획기적으로 늘어난다. 이를 따라 포스트 3.11의 세계가 어떤 면에서 실어증의 그것과 닮아있다고 볼 수 있을 테다. 실어증은 언어를 잃어버리는 질병이면서도, 동시에 언어를 잃어버림으로써 그 자신을 설명될 수 없는 어떤 존재로 확립하기도 한다. 슬라보예 지젝의 말처럼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언어의 상실은 궁극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어떤 문제를 가리키며, 이를 통해 주체의 방향상실은 자기 자신이 곧 세계라는 중심적인 지위를 가리키는 게 된다. 


이는 특히 2010년대 중반의 일본 영화에서 자국 영화의 침체를 포스트 3.11 이후의 세계, 즉 ‘미래 방향의 모색’으로 연결하는 과정에 그 의의가 있다. 일본영화란 무엇인가를 묻는 과정은 일본사회란 무엇인지를 묻는 것과도 같으며, 여기서 미래 방향은 건설적이고 희망에 찬 의견을 묻기보단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부터 빠져나오는 출구전략에 더 가까워 보인다. 예를 들어 포스트 3.11에서 주로 지적되는 재난에 관한 단상은 “죽음이 어디에나 존재하며 우리는 그걸 받아들이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특히 이는 “예측이 불가능하다.”라는 점을 전제하며 재난의 후천적인 발견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재난의 선제적인 방어가 아니라 기존에 있던 것이 얼마든지 포스트로 변형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말하자면 포스트란 특정한 실행 가능성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작금을 설명하기 위해 발명된, 현재를 [세계]와 매개하기 위해 발명된 하나의 개념이다. 그리고 이러한 포스트란 3.11과 같은 재난의 풍경에서 발원한 바, ‘실어증’이라는 단서는 “소명할 수 없음”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방법의 부재를 암시한다. 이는 즉 그것의 실체가 있더라도 그에 접근할 방법이 없다는 뜻으로, 자신의 실체를 늘 이전에 두면서 늘 무언가가 되어버린 인간으로서밖에 세계에 존재할 수 없다는 현실을 가리킨다. 이른바, 포스트 3.11의 주체는 최후의 인간을 양성하면서 주체를 [세계]에 곧바로 대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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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이 마코토의 재난 3부작을 보면 2016년부터 2022년까지 재난에 관한 의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게 가능하다. <너의 이름은>(2016), <날씨의 아이>(2019), <스즈메의 문단속>(2022)은 각각 3년의 간극을 두고서 제작됐다. 이들 작품에 대해 세세히 논하기보단 가장 마지막에 이르러 영화가 도달한 ‘것’에 관해 말해보고 싶다. <스즈메>는 이전까지의 작품과는 달리 3.11을 직접적으로 묘사한다는 점에 그 차이점이 있다. <스즈메>는 지진을 어떠한 충격으로 묘사하지 않으며, 인물이 과거에 겪은 사건을 이후의 행적을 통해 긍정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니까 이는 크게 볼 때 두 가지로 풀이된다. 하나는 재난을 직접 마주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진의 이미지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전자가 회복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지진의 땅울림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없던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지진은 있던 것이 없던 것처럼 여겨진다는 점에서 주체의 언어 소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는 곧 표현 방법의 부재로 이어지면서 최후의 인간을 양산한다. 그런데 이는 마치 일본영화가 ‘자기’를 말하는 방법을 상실한 것과도 유사한 상황이어서, 일본적 ‘자기’란 그 명맥이 사건으로 인해 끊겼을 뿐 단절 자체가 방향성의 상실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단절 자체가 방향성을 상실하지 않는다는 말은 거칠게 말해 세계질서를 뜻한다. 세계엔 거대한 의지가 있고 그 의지가 개인의 방향을 설계한다고 보는 이 입장은 ‘역사’를 하나의 거대한 유물론적 물질로 설계하면서 개인은 그에 파생된 기억을 따라간다고 보는 것이었다. 이를 따르자면 사람들은 어떠한 의식에 사로잡혀있으며 이곳에서 ‘나=세계’라는 말은 그 중간항인 풍경으로서의 배치를 허락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세계]에는 현실의 무언가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고 실제로 신카이의 이전 두 개 영화들은 현실이 작품에 침투하지 못했다. 이들 세계는 운석, 홍수와 같은 대체현실을 겪었고 이들 자신의 현실은 그 항상성이 유지된다는 점에서 내부적으로 투쟁이 완결되는 상태다. 그러나 <스즈메>의 경우 이들은 3.11이라는 날짜를 통해 안과 밖을 이음으로써 그 내부의 투쟁을 외부로 유출한다. 쉽게 말해 이전까지의 기억이 ‘나’와 ‘내가 아닌 것’이라는 두 개의 가정으로 자신을 유지했다면, 이제 그 둘은 영화와 현실에 대입되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은 곧 현실이 말하려는 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누출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는 어떠한 이후를 가정하는 일이 포스트라는 용어처럼 하나의 단절을 이루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한 하나의 제안일 것 같다. 두 세계가 완전히 분리된다면 그것은 충동을 거쳐 어느 하나가 죽거나, 혹은 공멸할 위험이 있다. 하지만 두 세계가 처음부터 동등하다면 그 결과는 다르다.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는 히어로 장르로 시작한 만화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점점 히어로의 책임과 의무를 다룬다는 점에서 시리우스한 전개를 선보이고 있다. 2014년에 처음 연재를 시작해 2023년에는 마무리를 향해가는 이 만화는 무엇보다 주요 빌런인 시가라키 토무라의 힘인 붕괴에 힘을 실어준다. 말 그대로의 붕괴를 묘사하는 이 작업에서 우리는 대지진의 흔적을 목격하며, 이는 무너지는 시가지의 모습과 그로 인해 히어로에 관한 신뢰가 무너지는 과정과 깊이 연결된다. 히어로에 의해 유지되던 사회의 치안이 붕괴하면서 완전한 무법지대가 되어버린 일본 사회의 모습은 거진 면역체계의 붕괴를 겪는 듯 보이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선과 악의 싸움은 병원균과 백혈구의 싸움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지진’이라는 것은 어쩌면 <스즈메>가 말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를 누출시키려는 하나의 작업인 듯 보이기도 한다. 처음에는 작은 개성에 불과했던 게 점진적으로 커지면서 세계 전체를 무너뜨리는 일이 되는 묘사는 무엇보다 3.11 이후에만 등장할 수 있는 풍경이라는 것이다. ‘나’의 개인사를 히어로 사회에 전체에 대입하면서 ‘붕괴’를 원한다고 말하는 토무라의 말은 말 그대로의 [세계]를 가리킨다. 또한 그렇다면 이곳에서 최후의 인간은 포스트라는 말 자체, 멸망이 아니라 항상성으로 유지되던 내부를 완전히 말살하는 게 된다. ‘나’를 파괴하는 게 곧 ‘확장된 나’와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지진은 단순히 재난의 시작점인 것만이 아니라 포스트 사회의 탈출구처럼 기능하는 듯 보인다. 2021년에 연재를 종료한 <진격의 거인>도 만화의 결말을 지진으로 마무리 지었다는 점에서 역사를 무대에 누설하는 방식으로 [세계]의 붕괴를 택한다. 만화는 처음에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이상향을 에렌에게 부여하지만, 수미상관의 구조를 따라 시작과 끝이 연결된 이 세계에서 역사는 하나의 [세계]였다는 점이 확인된다. 이를 따라 에렌은 전 세계에 땅울림을 일으키면서 아와 비아의 투쟁이었던 역사를 끝내고자 한다. ‘나’이자 ‘세계’이기도 한 시조거인의 힘은 하나로 단일화된 역사를 밖으로 끄집어내기 충분했고, 한편으로 이 지진은 단순한 재난이라기보다는 일본 사회 스스로가 지진에 관한 트라우마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세계 자아가 자신을 학살자로 지칭할 때 그것은 자기학대의 일환인 것일까, 아니면 내부를 다져 외부에 가깝게 하고자 하는 운동의 일환일까. 어느 쪽이든 간에 역사를 누설하면서 얻어내려는 게 체제의 완고함이 아니라 불사의 극점일 뿐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스즈메>가 보여준 누설의 흐름 안에서는 <나히아>와 <진격거>라는 두 개의 길이 있다. 양쪽 모두 붕괴의 길을 피하지 않지만, 한쪽이 세계를 구하는 반면 다른 한쪽은 자아를 구할 뿐이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풍경은 어떤 것일까. 분명 이곳에 단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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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이미지에서 출발해보자. <스즈메>의 시그니쳐 이미지는 천장이 날아간 돔 아래서 홀로 서 있는 문의 모습이다. 스즈메가 문을 열자 그 안으로는 현세와 이어지지 않은 명계가 보이며, 스즈메는 아무리 해봐도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훗날 밝혀지는 사실은 살아있는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은 불가하며, 예전에 죽을 뻔한 기억이 있던 사람만이 비로소 그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때 중요한 건 바로 그 장소의 문만이 가능하다는 것. 이는 있는 그대로의 과거가 현재까지 이어져 와야만 한다는 점을 뜻한다. 그 사이에 단절이 발생하면 문은 부서져 버리고야 말기에. 요컨대 이 영화는 자신이 보여주려던 시절에서 줄곧 이어져 왔으며 그 사이에 단절은 없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3.11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스즈메는 [세계]의 견고함을 문이라는 상징으로 드러낸다. 가령 문은 안과 밖 모두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다는 점을 떠올려볼 수 있다. 문은 안과 밖을 나뉘는 경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안과 밖 모두로 풀이된다는 점에서 양쪽 모두에 해당하므로 중첩의 상태에 더 가깝다. 문이라는 건 단절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연속성을 유지하는 하나의 관문이 되어주며, 그 어떤 단절의 상황에서도 문은 주체로 하여금 살아남을 만한 숨구멍이 되어준다. 그렇다면 문은 표면과 한계가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의 에어 포켓은 아닐까? [세계]라는 어항에서 말이다. 


이 영화에는 명계와 현세라는 두 개의 공간이 있고 서로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세계]를 공유한다. 이른바, 영화는 명계와 현세를 하나의 공간에 두는 듯 보이므로 여기서 ‘바깥’은 정녕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스즈메의 일기장에 칠해진 검은 화면을 통해 스즈메의 어린 시절을 [세계]에 확대적용한다. 이를 통해 영화와 현실 사이의 간극은 채워지며, ‘문’이라는 것은 영화를 통해 3.11의 과거와 작금의 현실을 오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문’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세계의 견고함을 뜻한다고 말해두려 한다. <스즈메>가 묘사한 3.11은 영화 안의 재난일 뿐, 현실의 무엇에도 비견될 수는 없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스즈메>는 현실에 직접적으로 다가서기보다는 과거와 현실 사이의 중간항이 되고자 한다. 그런데 사실 이 영화는 “소중한 것은 이미 한참 전에 받았었다”고 말하면서 과거를 현재의 시점에서 정당화해버린다는 점에서 그러한 중간자로서의 역할을 ‘연결성’으로 확보하지 못한다. 고등학생 시점의 스즈메가 어린 시절의 스즈메에 다가서는 순간, 우리는 스즈메의 ‘어머니’라고 여겼던 게 사실은 자신임을 알게 됨으로써, 그들의 현실에 후퇴의 지점은 사라지고야 마는 것이다. 이를 따라 만화는 오직 현실에 충실한 작품으로만, 치유도 작품 내적인 것으로 완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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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진격의 거인>의 마지막 1화가 공개되면서 우리에겐 미래를 대비할 의무가 생겼다. 왜냐하면 일전에 알려졌듯 이 작품의 결말부에서는 “살육자가 되어줘서 고마워.”라는 대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작품의 주제의식 전반을 배신하는 것이기에 논란이었고, 추가로 발행된 분량도 이 결말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른바, “이미 결정된 것”으로써 오직 애니메이션만이 결말을 수정하는 게 가능했다. 따라서 애니메이션 완결이 목전에 이른 지금,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이 만화가 어떤 결말을 맞이할 지일 테다. 애니메이션의 결말을 어떻게 연출하느냐에 따라 이 만화는 구제의 가능성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만화를 이미 정해진 것이라 가정할 때, 애니메이션을 만화의 구제론으로 사용하는 일은 가능할까? 이 둘은 이미 매체의 분화를 겪은 시점에서부터 다른 작품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서로 다른 작품으로 분류하는 건 그 엄밀함에서 정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허나 애니메이션 등의 연출을 통해 작품의 방향성이 완전히 달라진다면, 대체의 여지는 열려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특히 방향성을 설정하고서 나아가는 몇몇 왕도 전개의 틀 안에서 독자가 원하는 ‘결말’이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작품이 길어질수록, 독자는 작품의 전체적인 방향성을 따져 묻게 되며 여기서 ‘방향성’은 독자로 하여금 작품의 결말에 배팅하게끔 한다. 즉, 독자는 작품의 방향성에 탑승한 것이지 특정한 결말을 요구하는 것만은 아니다. 


합리적인 추론이 배신당하더라도 그것이 만화의 방향에 부합한다면 독자는 얼마든지 열린 결말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다. 이를 따라 말하건대, ‘대체’란 이미 쓰인 것을 없던 일로 하자는 게 아니라, 과거를 바꿀 수 없다면 단지 미래로 나아가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따르는 셈이다. 여기서 나는 ‘대체’라는 말이 정해진 결말과 연결되는 방식을 말해보려 한다. 과거를 바꿀 수 없기에 미래로 나아간다는 말은 그 자체로 불가능성과 연결되는바, ‘대체’는 어떠한 불변의 현실을 밟고 서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렇다면 ‘변하지 않는 것’이란 그 특유의 단단함을 무기로 내세운다고 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바꿀 수 없기에’ 무언가를 바꾸려 한다는 것인데, 이는 전체적인 방향성에 간섭할 경우 작품 자체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기에 아예 통째로 현실을 바꿔보려는 시도를 동반한다. 방향성에 얽힌 세세한 것들을 분리해낼 수 없다면, 그 줄기를 토대로 처음부터 역사를 수정해가는 일이 더 편리하니 말이다. 바로 이 줄기가 전개의 단단함을 보증하는 뼈대이고, 그렇기에 대체는 이 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원작과 다른 판본의 매체라 할지라도 작품의 기본적인 설정과 무대는 유사해야 한다는 점을 뜻한다. 이처럼 하나의 작품 안에는 정해진 것이 있고, 이는 바뀌어선 안 된다. 이야기가 장기화될수록 전체적인 방향성을 잡는 일은 더욱 중요해지고 독자 또한 그런 예측에 부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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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과 무대를 유지하는 일은 그 미래의 예측가능성을 통해 자기 자신도 예측의 범주에 넣는다. 청자는 어떤 결말을 받아들이는 태도로 자신을 변화시키며 이를 통해 미래는 점점 더 납득이 가능할 만한, 독자가 원하는 ‘답정너’에 가까워진다. 그런데 이런 면이 결말까지도 정해두는 이상, 파국적인 결말을 피하려는 누군가는 정해진 것을 바꾸려 할 수 있다. 미래가 정해져 있다는 말은 어떤 선택도 바로 그 미래에 소속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일이 가능하다면 자신 또한 가능하다는 가정하에 독자는 역사를 새로 쓰려 한다. ‘이야기’는 그 흐름의 맥락에서 역사의 범주에 속하므로, 역사가로서의 독자는 이야기의 서술을 개인의 취향에 맞추려 든다. 바로 이 ‘역사가’라는 대목이 중요하다. 완고한 현실을 재발굴하려는 일은 어쩌면 고고학자의 면에 가까울 수 있다. 과거를 현재에 매개하면서 역사를 새로 쓰는 작업은 이미 벌어진 일을 바꾸지 못하지만 우리가 다다른 결론을 바꿀 수는 있다. 하지만 역사가는 동시대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고고학자와는 다르며, 마찬가지로 현재는 진행형이기에 완고하지도 않고 또 부동하지도 않다. 현재에도 방향성은 있지만 어쨌거나 변화의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역사가로서의 독자는 이미 완결된 결말을 ‘발굴’하여 2차 창작하기보다는 그것이 아직 현재에 열려있다고 보면서 새로운 현실로 대체해가기를 주장한다. 


이는 대체라는 말이 이전의 것을 저버리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중요한데, <진격거>의 사례에서도 애니메이션의 결말은 원작의 그것과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다는 뜻이다. 결국 <진격거>는 그 자신의 원작을 결코 저버릴 수 없으며, 애니메이션이 어떻게 끝나든 이미 작품에 대한 평가를 되돌리기란 불가능하다.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러한 현실, 작품이 외적으로 받는 평가는 어떤 면에서 작품 내적의 일과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가령 <진격거> 2부의 주된 줄거리는 “결말이 정해졌을 때 어떻게 ‘바깥’을 사유할 수 있는가”이다. 파이널시즌 3부 1화에서 에렌이 “나는 자유다”라고 말하는 대목을 살펴보면, 이들의 어릴 적 꿈은 벽 바깥에 펼쳐진 세상을 탐사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그들 세계의 ‘바깥’으로서 일종의 ‘꿈’처럼 기능해왔다. 하지만 거인을 모두 구축하고 자기가 알던 세계의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기존 세계를 바탕으로 성립했던 가치관은 깨어지고 이들에겐 새로운 형태의 현실이 주어진다. 여기서 작품은 <진격거>가 외적으로 처한 상황처럼 새로운 현실로 이주한다. 즉, 그동안 자신이 가져왔던 ‘자유’의 방향성을 유지하면 기존의 것을 지울 필요는 없다는 점을 확인해두자. 이는 작품 안에서 파라디 섬에 관한 에렌의 고민으로 나타난다. 파라디를 구세계, ‘바깥’을 신세계로 가정한다면 지크의 말처럼 구세계야말로 말끔히 사라지는 게 더 나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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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조거인이 되어 미래를 결정된 것으로 파악하는 에렌은 그 현실을 역사가의 태도로 바라본다. 아직 미래가 열려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본 결말의 ‘바깥’을 주장하는 에렌은 조사병단과 마레의 거인들에 역할을 맡긴다. 시조거인이 되어 파악된 역사 모두에 존재하게 된 에렌에게 현실이 하나의 꿈처럼 기능했다면, 오히려 ‘시조’란 세계의 바깥으로서 배제되어야 할 대상이 된 것이다. 에렌이 노린 건 이렇게 사람들이 자신을 구세계로 규정하면서, 거인의 힘이 없는 신시대로 나아가길 바란 것이었다. ‘땅울림’은 그 과정에서 출몰했다고 볼 수 있고 말이다. 이 대목에서 출몰하는 흥미로운 생각은 크게 두 개의 절차를 밟는다. 땅울림이라는 학살극은 꼭 필요했을까? 또한 ‘학살자’에 고마움을 표하는 대사가 굳이 필요했을까? 전자의 연장선에서 바라보는 후자는 어쩌면 학살이라는 행위 자체가 작품의 팬들에 관한 떨쳐내기였을 수도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방향성이 결말을 지정하는 상황에서, 방향을 바꿀 수 없다면 다 때려 부수는 일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바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작가가 의도한 것은 아니더라도, 이를 통해 우리는 예측불가능성을 확보했고 그것은 만화를 현실에 연장해오던 어떤 시선의 붕괴를 초래한다. 에렌이라는 역사가는 이제 작품을 현실의 교훈을 주려는 의도에서 빗겨나가게 하고, 이를 통해 <진격거>는 완전한 대체의 현실이 된다. 


이런 가정하에 문제의 소지가 다분한 그 ‘학살자’의 출현은 오히려 작품과 현실을 끊어놓는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물론 이것이 작품 자체에 대한 옹호나 비판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식의 교훈을 주는 추가 결말에서 우리는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탐색하지만, 한 번의 폭발을 겪은 작품인 [세계] 속에서 역사는 내재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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