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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04. 2023

모든 언어는 고립감의 변주에 불과하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모든 영화는 무성영화의 변주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던바 있다. 이 문장만으로도 할 수 있는 말이 있지만, 반대로 이를 통해 확언할 수 있는 말이 있다. “어떤 영화는 유성영화의 원본에 불과하다.”라는 것. 하스미가 무성영화에서 ‘토키’의 역할을 대사와 변사의 측면에서 지적했음을 떠올리면, 우리는 유성영화의 변사를 악단으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가령 초기 무성영화에서는 스크린의 주변부에 항상 피아노와 바이올린 등의 악단이 대기하고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성영화란 “‘무성영화’와 그 주변부의 것이 하나로 통합된 것”으로 파악된다. 바꾸어 말하자면 유성영화에서 순수 이미지 이외의 것, 목소리와 음악은 ‘어쿠스메트로(Acousmetre)’틱한 것으로써 영화라는 정의에서 항상 주변부에 자리해있다. 그러니 영화의 이미지란 그 자체로 고유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주변부를 통솔하는 기능적 맥락에서의 원본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하스미의 말은 그런 뜻이다. 영화에서 음악의 역할이 판본과 깊이 연관된다면 모든 유성영화는 저마다의 고유함을 지니기 마련이다. 영화에서 이미지가 하나의 원본으로 기능하듯이 그런 원본을 결탁하는 유성 또한 그 자체로 하나의 원본이다. 


엄밀히 정의를 분류하기보다는 넓은 시야를 취해보고 싶다. 유성영화를 소리의 범주에 넣을 때 우리는 이를 ‘발화’만이 아니라 ‘발단’으로도 바라보게 된다. 가령 음악이 시작된다는 건 어떤 사건이 시작된다는 것이자 국면이 바뀐다는 뜻이기도 하다는 점을 떠올리자. 이 순간은 무엇과 바꿀 수 없다는 점에서의 원본이자 자기만의 것이라는 점에서 고유다. 마찬가지로 음악이 들어오고 나가는 타이밍에 따라 영화의 이미지는 원본에서 벗어나며, 이를 따라 모든 유성영화는 이미지에 대한 변형이라는 점에서 무성영화의 변주일 수밖에 없다. 즉, ‘영화’를 이미지에 두고 소리를 ‘있는 것’에 둘 때 음악과 목소리가 들어올 수 있는 영화의 디제시스는 무언가가 벌어지기 위한 무대, 순간이 시작되는 장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영화에서 음악은 ‘순간’을 만들어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처럼, 음악은 영화를 다른 무언가와 교환할 수 없게끔 하며 이는 영화가 무성영화의 변주일지언정 고유이기를 포기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가 음악을 활용하는 방식이 하나의 침투력이기도 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데, 가령 다음과 같은 경우에서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작곡가로서 참여한 영화를 보면 그 음악은 대개 인물의 고독감에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 <마지막 황제>(1987), <철도원>(1999), <토니 타키타니)(2004), <분노>(2006), <레버넌트>(2015), <남한산성>(2017), <애프터양>(2021) 등의 영화에서 음악은 대개 인물이 침묵하는 상황에서 그러한 침묵을 대신한 목소리로 기능하곤 한다. <전장>에서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는 인물 사이를 가로지르거나, <철도원>에서는 철도를 떠나보내는 설원 속을 떠다니거나, <토니>에서는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인물의 실어증을 대변하면서, <분노>에서는 피해자를 대신해 발언대에 서는 역할을 하고, <레버넌트>에서는 배신당한 이의 감정을 억누르면서 그와 동시에 생존의식을 고무시키고, <남한산성>에서는 패배주의를 의식하면서도 결코 인정해선 안 된다고 말하며, <애프터양>에서는 이미 작동하지 않는 기계의 입을 대신해 시간을 작동시킨다. 말하자면 인물이 스크린의 형식적 틀 안에서 영화적 이미지로 내보여지는 한편, 그렇게 ‘무성’으로써 침묵하는 인물을 대신해 음악은 발화한다. 음악은 영화의 이미지인 인물을 ‘변주’시킴으로써 그를 보편자에서 단독자로 이송한다. 


이제 인물은 영화 속의 인물이 아니라 ‘영화의 인물’로서만 존재하게 되어, 이 순간을 위해 나머지 모두를 교환할 수 있는 영화 세계의 단독자가 된다. 바꾸어 말하자면 모두는 바로 이 순간에 영화 세계의 단독자로 빠져든다. ‘나머지 모두’인 어쿠스메트로가 디제시스를 단독화함으로써 프레임은 스크린의 사각 틀에 가까워지며, 이때 영화는 바로 이곳-저기가 아니면 획득될 수 없는 감정을 제시한다. 또한 이렇게 제시된 감정은 역설적으로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역할을 하는데, 왜냐하면 인물의 목소리로 제시된 것이 음악이라 가정할 때 그 감정은 스크린의 틀을 넘어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영화가 무성영화의 변주라면 그 영화들은 어떠한 이미지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고, 나는 류이치의 영화가 ‘고독함’의 무성영화를 변주한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고독함은 스크린 안에서만 존재하는 방 안의 코끼리 같은 무언가지만, 음악은 이러한 상황 혹은 이미지를 표면화하고 이를 공유가능한 형태로 언어화한다. 즉 음악은 유성이며 어떠한 언어화의 순간을 지시하는 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스크린 안의 주체를 혼자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 나는 꼭 류이치의 음악만이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어떤 음악이든 무성을 유성으로 변주하는 일은 가능하다. 하지만 적어도 확언할 수 있는 사실은 류이치는 음악을 통해 주체를 표면화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이다. 류이치는 언어화되지 않는 주체에 대해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류이치는 작곡가로서 영화의 이미지를 혼자 두지 않았으며 더 나아가서는 현실에서 영화의 위치를 고독하게 두지 않았다. 어쩌면 류이치는 신학의 관점으로 영화와 현실을 관계를 파악, 그러니까 영화와 현실이 모두 단독자로 자리한다면 그 사이를 이어주는 건 세계에 만연하는 ‘음악’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양쪽 모두의 고독함을 하나로 이어주는 건 유성, 즉 소리를 내어 서로에게 가닿는 일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생각해보건대 이 말은 류이치가 작업한 작품 속의 인물에게도 쉬이 적용될 수 있을법하다. 만약 침묵을 지키는 인물이 있다면 그의 고독함은 자기적인 문제일까 아니면 세계적인 문제일까. 서로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분위기가 우선되어야만 비로소 외로움과 고독은 걷힌다. 정확하게는 서로를 언어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부터 세계와 주체 사이에는 하나의 문장이 구성될 수 있다. 


뻔한 이야기지만 관계의 출발점은 나와 상대 사이에 공통의 언어가 통용되고 있음을 알아차릴 때다. 즉 내가 A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상대방도 눈치챘을 때 비로소 둘 사이에는 하나의 문장이 성립하고 또 소통이 가능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소통이 시작되는 순간을 류이치의 음악에서 목격한다. 이 음악은 물 밑으로 오가는 감정 교류를 가시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고독에 사로잡힌 듯 보이나, 어떠한 문자 안에 그들을 가두어두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더 자유롭다. 대표적으로는 <전장>에서 이들 사이에는 표면적으로 아무런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있다. 간수와 포로의 역할에서 겉으로 어떠한 ‘감정’이 실체화되지는 않지만 되려 그 역할이 유성에 넘겨짐으로써 이들 간의 감정은 특정한 정의에서 벗어나게 된다. 음악은 그들 사이를 이어주면서도 동시에 무엇으로 정의하기를 시도하지 않지만, 이들 간에 관계가 맺어지는 순간은 세계와 사물 간에 연결고리가 생겨남으로써 발생하는 언어화의 순간을 가리킨다. 이른바, 무성영화를 유성영화로 바꾸어놓는 건 이들 간의 관계에 관한 고유성과도 같았으며 그건 류이치 개인도 마찬가지였다. 


류이치가 참여한 영화들은 류이치의 영화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류이치는 영화 언어의 일부와 연결됨으로써 참여자로 실체화한다. 작곡가는 음악으로 말한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이는 사실 작곡가가 직접 무언가를 말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적확한 문장이 될 수 없다. 다만 영화에서 음악은 이미지에 관한 한 가지 변주 시도라는 점에서 우리가 이들 세계와 맺는 관계의 일정 부분을 담당하며, 이를 따라 작곡가는 영화에 직접 참여하진 않더라도 영화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는 입장으로 작품에 참여한다. 결국 ‘류이치의 영화’라는 표현은 어느 정도 타당한데, 류이치의 시선으로 매개된 세계라는 점에서 이 이미지는 류이치에 의해 재생산된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 이미지가 고독한 처지에 있는 것만큼이나 서로의 입장이 고립돼있다는 걸 잘 알기에, 이들 영화를 류이치의 것으로 지칭하지 않는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우리는 이 영화를 ‘자기만의 언어’로 소유하려 들었을 것이다. 작곡가가 된다는 건 확실히 영화적 측면에서 그런 의미가 있다. 류이치가 자신을 두고서 ‘코다(Coda)’로 소개한 만큼이나 이들의 관계는 자신이 변주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되니 말이다.


생각해보건대 음악가의 이름은 늘 항상 크레딧에서만 발견된다. 얼굴로 목격되는 배우나 사전에 홍보로 접하는 감독과는 달리 작곡가의 이름은 상대적으로 열세에 있다. 물론 촬영장의 다른 식구들도 그렇겠지만 영화의 표면을 조작하는 것치고는 확실히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편인데, 그건 어쩌면 변주의 한 면모이기도 할 것 같다. 카메라도 그렇고 작곡을 한다는 건 세계의 관찰자 입장에 선다는 것이므로 우리가 세계를 언어화하는 동안 작곡가는 말해질 수 없는 것과 맞닥트린다. 그리고 여기서 그러한 이미지에 대한 판단은 내적 고립을 낳는다는 점에서 외로움의 신호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되려 음악은 그 자체로 함의가 있는 게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를 잇는다는 점에서 라깡 식의 무의식 편지와도 같다. 특히 지젝의 말처럼 부정한 것으로의 주체가 주체화가 실패하는 지점에서 자신을 공백으로 드러낸다면, 우리는 작곡가가 왜 영화의 코다에 머물러야 하는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작곡가는 특정 주체로 그곳에 서 있지만, 그가 하나의 주체가 아니여야만 비로소 세계는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류이치의 영화들에서 발견되는 고립의 정체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가 벌어지기 위해선 공백이 있어야 하지만 그런 공백은 주체가 실패한 자리에서 마련되는 시작의 순간이다. 하지만 이 시작의 순간은 관객들이 자기만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에 실패하도록 유도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실패들이 하나의 철자로써 기록되어 끝끝내 단어와 문장이 되게끔 한다. 혹은 그런 재밌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분명 극장은 좌석을 경계로 다른 관객과 분리하기 마련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영화를 본다는 인식 안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해석을 관객에게 제시하고, 또 표현하고 싶어한다. 이른바, 영화 속의 이미지가 그 자체로 고립돼있지만 음악을 통해 다른 요소와 관계 맺듯이 관객 또한 음악을 통해 그런 이미지를 변주하고, 또 자기만의 유성을 만들어내 ‘발화’가 시작되는 최초의 토키를 만들어갈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여기서도 모든 영화는 무성의 변주라는 표현을 되짚고야 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상 “모든 주체화/언어/관계는 고립감의 변주에 불과하다”라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판데믹에서 배웠던 게 그런 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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