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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07. 2023

영화는 혐오의 순교자인가


류이치 사카모토의 타계 소식을 접하면서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던 와중, 그가 참여했던 영화가 모종의 고립감을 다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발견이라고 표현한 건 따로 생각해본 바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필모그래피에서 <분노>(2016)라는 두 글자가 눈에 들어왔고 오래전에 원작까지 찾아 읽었던 때를 떠올렸다. 영화를 재밌게 보았던 것도 있으나, 기본적으로 일본식 추리 작법을 사용하는 이 소설에서는 하나의 타임라인이 동시대적으로 분위하는 면모를 보였으므로, 영화의 어떤 순간에 인물의 상황을 직접 마주한다는 점에서 소설의 독해는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분노의 기원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추리의 양상을 띠지만 추리가 늘 그렇듯 과정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왜냐하면 추리란 김전일이나 홈즈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합의 정교함과 연계성에 중점을 두는 것이기에, 어떤 맥락으로 우리가 이에 다가서게 되었는지를 따지는 건 우선순위가 밀린다.


영화는 우리가 이미지를 마주한다는 점에서 늘 선입견을 심어줄 수밖에 없다. 소개팅에서 상대의 첫인상이 처음 3초 안에 판결 나는 걸 떠올리면 쉽다. 더군다나 현실과는 달리 영화는 줄곧 리니어함에서 이탈함으로 그러한 ‘첫’인상은 계속해서 갱신되기 마련이다. 각 쇼트와 시퀀스는 관객이 마주하는 이미지를 쉴새 없이 바꿔놓으면서 처음 정해진 인상을 뒤바꿀 시간을 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영화는 어떠한 결론을 먼저 제시하는 것이지 과정을 따라가는 건 아니다. 영화는 결론을 제시하면서 이전의 장면이 어떤 과정으로 도달하게 된 것인지를 추리하게끔 한다. 또한 영화는 어떤 결론이 예측되는 상황에서 그에 이르는 과정을 배신하는 방식으로 카타르시스를 자아낸다. 일찍이 히치콕이 영화에서의 서스펜스라 불렀던 이 개념은 “관객만이 아는 것을 영화 인물이 모르게”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영화 인물이 보여지는 경과를 관객이 알고 싶게 하는” 추리의 문맥도 분명 있다.


보여지는 경과를 알고 싶다는 것, 그건 어쩌면 서로에 대한 이해는 아닐까? 혐오라는 단어가 부상하는 근 몇 년간의 세계에서 <분노>는 서로를 미워하는 감정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분노는 자신에 대한 무력감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어떠한 것에 관한 혐오의 감정이다. 미워하고 싫어해서 상대방에 날을 세우는 일은 사실 세상을 바꿀 수 없고 자신이 바뀔 수 없다는 사실에 관한 무기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영화는 혐오의 감정과 깊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가 제시하는 쇼트가 결론으로 이해될 때, 우리는 마주한 것을 바꿀 수 없다는 무기력함에 빠진다. 그와 반대로 그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감정일 수 있도 있지만, 영화는 어떠한 현실이 아니라 현상으로만 제시될 뿐이므로 영화는 관객에게 근본적인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가령 생각해보면 우리는 영화의 어떤 재현이 두려울 뿐 영화 필름에 눈총을 보내진 않는다. 오히려 감독이나 비평가를 향한 적대적 발언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일은 모두 이미지 자체가 환영이라는 점에 귀인한다. 이미지는 어떠한 실체에 달라붙으면서 대상과 세계를 연결하는 것에 소모되므로 그런 이미지 자체를 적대하는 건 불가하다. 우리가 본드나 글루건에 비판을 보내는 경우가 없듯 많은 경우 세계는 사물의 구성이나 원리가 아닌 결론으로써만 이해된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분노>는 결론으로 제시되는 것들에 관한 피상적인 이해가 어떤 형태로 서로에게 달라붙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오키나와의 군부대 범죄와 성소수자가 겪는 생활의 어려움을 묘사하면서 이들에 달라붙는 이미지를 살인마의 등장이라는 메인 플롯에 희석시킨다. 전자가 모두 현실세계의 재현이라 할 법한 일이라면 후자는 완전한 허구이므로 여기에서 혐오는 메인 플롯을 따라 제시될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전자를 현실에 견주어 미워하는 감정을 들이밀려 할 때 플롯은 이미 관객을 배신하면서, 예측된 것으로 도달하는 혐오 감정을 모두 자신의 몫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영화 인물이 보여지는 경과를 추리하게끔 한다는 이 예측의 상황은 선제시되는 혐오 감정을 허구의 일환으로 만드는 효과가 있다. 이를 통해 인물은 정말로 있을 법하다기보단 추리의 일환에서 사용되는 단서로 축약된다. 즉, 몽타주의 형태로 구성되었던 이미지는 이제 별개의 부분과 요소로 분해되면서 쇼트는 단일성을 잃고 특정한 초점으로 분할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추리’란 예측의 가능성을 분할함으로써 혐오의 감정을 단일화하는 효과가 있다. 혐오의 감정을 이미지라는 허구에 단일화함으로써 영화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미움을 회피하고, 또한 그것이 반사되어 오지 않는 재질이기에 관객 또한 자괴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맥락에서 허구를 추리하는 일은 영화가 혐오의 대상으로 몰락하는 걸 막는 게 아닐까? 영화가 혐오의 대상으로 몰락하지 않음으로써 영화는 혐오를 다를 수 있게 된다. 둘 사이에 동일시가 벌어지지 않기에, 속도차가 있기에 감정을 따라잡기에 급급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가 어떠한 혐오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어느 정도 추리의 성격을 동반해야만 한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에는 전도의 위험이 항상 존재하지만, 추리의 성격을 동반한다면 결론은 자명해지고 또 그렇기에 과거는 현재로 자신을 구성하려 든다. 확고한 것에 모여드는 일은 기본적으로 생물이 지닌 생존의 본능과도 깊숙이 연결되니 말이다. 그러니까 영화가 혐오의 감정을 중화하는 방식은 결론을 선제시하면서 관객이 이를 뒤따르게 하는 게 아니다. 구성되는 현재의 존재원리를 탐색함으로써 감정을 우회하고, 이를 통해 관객이 혐오의 대상으로 몰락하지 않게끔 하는 것이다. 이미 결론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결정론의 면모를 따르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혐오는 영화 매체 자체의 미래결정 능력에 등치된다는 점에서 그 자신을 잃는다. 영화의 결론이 다른 한편으로 의미가 도래하는 지점이기도 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어떠한 결론이 아니라 과정으로 귀결되는 일은 관객도 그렇게 만든다.


*


하모니 코린의 데뷔작인 <구모>(1997)는 한국에서 처음 소개될 때 KINO가 ‘퍼큐 시네마’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래로 줄곧 그런 이명으로 불리고 있다. 왜 이 영화를 F word로 설명하려 했는지는 지금에 봐도 확실히 이해 가능한데, 영화는 아름답게 포장된 영상으로 추악하고 더러운 것들을 찍는 중이므로 평자들은 여기에 ‘고발’의 의미를 담았다. 쉽게 말해 아메리칸 드림과 같은 이미지조차 이상향의 ‘실패’의 측면을 부각하므로 그조차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 영화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걸 뒤로 하고 감정에 이미지를 직결하는 ‘좆까’였다. ‘좆까’라는 말은 미리 전제된 것들에 대한 복잡한 허위의식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발산한다는 점에서 전위였다. 실제로 <구모>는 해외에서는 평범한 실험영화에 가깝게 분류되어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자유롭다. 영화가 어떤 분석의 틀에 놓이지 않는다는 건 달리 보았을 때 가장 원초적인 무언가, ‘고유함’을 갖는다는 뜻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니 ‘퍼큐’라는 표현을 한다고 해서 이 영화를 특별한 무언가로 바라볼 순 없고, 되려 아무런 말도 보태지 않을 때 비로소 영화라는 표현이 성립한다. 영화는 특정한 시작과 끝을 토대로 정의된 한편의 순간이다. 한편으로 이런 전위는 영화라는 말이 어떠한 매체의 테두리 안에서만 성립하는 것인지에 관한 의문을 제기한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게 자신이라 말할 근거가 된다면, 영화는 있는 그대로를 ‘재현’하는 맥락에서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즉,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고 말할 때 영화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일까 아니면 그 형식 안에서 완결된 [내부]를 보여주는 것일까. 이 문제는 우리가 <구모>를 통해 생각해볼 자기완결의식을 초래한다. 가령 이 영화가 내부적으로 완결되었다고 가정할 때 <구모>가 보여주는 마을과 주민은 그곳에서 정말로 살아간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 바깥은 없으므로 그냥 거기에서 쭉 살아왔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영화’라는 말이 시작과 끝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영화’라고 규정하지 않으면 그들은 줄곧 그곳에서 살아왔고 또 살아갈 것이라는 소리다. 반면 우리가 <구모>를 퍼큐 시네마로 정의하면서 그 자신에게서 고유함을 앗아갈 때, 이 영화는 [세계]와 맞닿지만 정작 그 자신의 본래적 지위는 잃고 만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제기해야 할 건 심리적인 문제로, 고독한 누군가를 마주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에 다가서야 할지 아니면 내버려두어야 하는지다. 만약 우리가 그를 영화로 지정하면서 다가설 경우, 이 문제는 시작과 끝의 양식으로 고찰되므로 하나의 완결된 형태를 띨 테다. 또한 이 경우 대상은 분석의 틀 안에 놓이면서 [세계]의 일부, 바깥에 견주어 자신을 위치 지을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이 내부와 바깥의 문제는 완결된 형식으로의 영화, 그곳을 살아가는 인물들이 바깥에 자신을 견주어볼 수 없다는 점에서 끝없는 자기혐오에 사로잡힐 위험, 즉 ‘자기반영’의 문제와 연결된다.


영화를 보며 자기혐오에 사로잡히는 건 영화를 보며 현실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즉, 영화를 통해 포착된 혐오의 형태가 정말로 자기 [세계]에도 존재하리라는 믿음이 관객에게 생겨난다. 그러니 혹자는 영화야말로 혐오를 전파하거나 하진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영화에서 혐오의 문제는 자신을 들여다본다는 점에서의 혐오라는 걸 전제할 필요가 있다. 영화가 하나로 완결된 형식이라는 말은 ‘영화적 자기’로 맺음 지어진 자신을 바라보고, 또 목격하는 게 가능하다는 소리다. 우리가 티브이를 보며 세상살이를 논하지만 사실 그건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영화를 보며 [세계]를 논하지만, 그건 사실 자신에 대한 목격에 불과하다. 영화를 보며 무언가를 혐오하는 일은 실상 자신에 관하며, 이런 일은 모두 영화적 형식을 자신을 위치짓는 좌표로 사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영화/자기이기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있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영화가 그 형식에서 어떠한 결론을 늘 제시할 수밖에 없다고 가정할 때, 결론 이후에 남겨지는 우리는 그 영화의 종결과 함께 내부에 갇혀버리기 때문이다. 이 경우 자기혐오란 영화적 자기에 관한 것, 나갈 수 없기에 되돌아오는 목소리일 뿐 진정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그 자신의 내부를 종결함으로써 관객을 혐오의 무대 밖으로 내보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가 자기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자명하다. 영화는 그저 단절되기만 할 뿐 진정으로 결론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우리는 항상 영화를 떠나는 위치에만 있을 뿐이다. 영화는 특정한 추리의 결론으로 자리하는 게 아니라 추리의 과정에 있는 것을 조명하게끔 한다. <구모>의 인물이 장면이 되고 그런 장면 사이에서 아이의 목욕 장면이 유일한 고리로 튀어나오는 이유가 그렇다. 우리는 <구모>를 어떠한 연속으로 바라보지만 목욕에서 예측은 정지한다.


영화가 예측에 대한 가능성을 제공하고 이를 따라 추리의 역할이 관객에게 주어질 때, 관객은 그러한 추리를 따라 자신의 예측을 실체화하려 한다. 그러나 이 허구 추리는 그게 정말로 들어맞든 아니면 완전한 실패로 끝나든 간에 자신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강조한다. 먼저 추리가 들어맞을 경우, 관객은 자신의 예측이 결말의 일종이라는 점에서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사라져버리고야 마는 과정들을 떠올린다. 과정은 생략되고 결론만이 남는 이 현실에서 영화는 늘 어떠한 결론으로만 제시되며, 우리는 이미 제시된 것만을 진실되게 받아들일 뿐인 상태에 빠져버린다. 반면 추리가 틀릴 경우, 관객은 단일화된 혐오의 감정을 받아들이면서 영화와 관객 모두 혐오에서 벗어나지만 정작 영화라는 [세계]는 혐오의 이미지를 뒤집어쓰고야 만다. 설사 그 자신이 허구라 할지라도, 영화가 그 자체로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면 혐오의 감정은 과정이 되고야 만다. 지금을 만들어가는 순간으로서의 단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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