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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15. 2023

낙원의 형식으로서의 영화

낙원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다양하게 탐구되고 합의된 정의가 있다. 하지만 줄곧 제기되어야 할 문제의식은 낙원의 위치와 장소에 관해 묻는 일이다. 가령 우리가 낙원에 도달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람은 이미 자신이 소속된 것에 물음을 보낼 수 없으며, 그건 타자의 시선에 의해서만 관측 가능하다. 그런데 그 타자는 정작 낙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므로 낙원에 속한 이는 자신이 속한 곳이 낙원임을 확인해줄 근거를 찾지 못한다. 이를 따라 낙원은 그 안과 밖에서 모두 자신의 위치를 지우며 또한 어떠한 중심이 될 수 없으므로 장소(place) 또한 될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낙원은 인간의 의식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에 오히려 그런 바깥인 실재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헌데 실재가 인간의 의식이 존재하기 위해 수반되는 하나의 항상성에 해당한다는 걸 고려하면 낙원은 언제나 인간의 의식에 함께한다고 보아야 한다. 즉, 당근을 머리에 단 말처럼 인간에게 낙원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식의 범주를 의식으로 설정한다면, 낙원은 우리의 의식이 자리하지 않는 곳이라는 점에서 ‘바깥’이라 여길 수 있을 테다. 어떤 점에서는 라깡의 도달하지 않는 편지를 과학의 시대에 걸맞은 인공위성으로 변환한 것으로도 보여진다. 인공위성은 지구의 저궤도를 돌면서 ‘중력’에 이끌리지 않는 정도, 즉 절대적으로 내부에 끌리지는 않는 경계에서 내부를 관찰한다. 그리고 지구의 문명 대부분은 인공위성을 토대로 소통하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전파가 어떻게 지구 반대편에 도달하는지를 알지 못하거나 혹은 의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공위성은 그 자신이 추락하지 않도록 계속해서 저궤도에 자신을 올려놓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공위성은 중심이 될 수 없고 또한 우리가 될 수 없는 ‘타자’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인공위성은 그 이름처럼 자연에 소속되지 않은 것, 그렇기에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줄 수 있는 타자에 속한다. 


그렇다면 영화는 그런 부류의 위성이 될 수 있을까. 대중문화로서의 영화는 동시대를 말하는 주요 조건 중 하나로 여겨졌다. 영화는 자연을 묘사했지만 자연에 소속된 것은 아니었고, 그렇기에 주체가 존재를 발견하는 한 가지 단서가 되어주었다. 카메라를 통해 초점의 평면화를 일구어낸 이들이 그 안에서 보이지 않던 ‘공존’을 발견했듯이, 영화의 발명은 세계를 평면화하면서 초점을 고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심도계를 통해 바깥을 발견하는 일로 이어졌다. 이른바, 영화는 안과 밖을 한 자리에 두는 평면화의 방법론을 제공했으며 여기서 의식과 무의식은 그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한 자리에 공존하는 게 가능했다. 요컨대 영화라는 형식은 그러한 모순, 혹은 이율배반을 한 자리에 엮는 것이기도 했다. 희망과 비희망, 또는 진실과 거짓, 신뢰와 불신처럼 영화는 논쟁을 종식하고 평화를 불러올 하나의 기구처럼 이해됐다. 어떤 이야기든 간에, 기본적으로 ‘영화’라면 모두가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하지만 오늘날 기구로서의 영화는 그 입지가 위태로우며, 최초의 조약은 해체 직전에 몰렸다. 카메라로 무언가를 찍어서, 극장에 앉아 주어진 시간을 보낸다는 이 관습이 영화를 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영화를 가능케 하는 공간으로 변모함에 따라 ‘영화’는 실존하는 세계가 아니라 보호령의 일종이 되었다. 문제는 그러한 보호령의 세계가 바티칸처럼 현실에 에워싸인 영세 중립국이 아니라 유토피아처럼 현실에 존재하지 않고 단지 담론 상에만 존재하는 낙원으로 규정됐다는 점이다. 포스트 휴머니즘의 세계에서 인간의 의식이 외부로 확장되는 만큼이나, 혹은 포스트 인터넷 사회에서 시야가 수직 원근법에 의존하는 것만큼이나 영화라는 형식은 어떠한 ‘조약’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이제 영화는 엄격한 계율을 지키기보다는 어떠한 계약으로만 규정되었고, 그러한 문장을 수행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영화라 불렀다. 바꾸어 말해 영화는 그 자신의 특색을 잃었고, 안과 밖을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영화는 ‘어디’가 되었다.  


영화는 어디에 있을까?라는 물음이 세계의 확장과 관련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면, 자연스레 우리는 ‘전지구적’ 상황을 만들어낸 우리 세계의 이야기가 ‘심도’를 제거해버렸다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세계의 심도는 이제 구글 맵스와 같은 평면으로 탈바꿈되어 서로에 관한 심도 깊은 논의를 막는다. 서로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는 어떤 점에서 웹 ‘서핑’이라는 미끄러짐의 행위를 더 수월히 하기 위한 보조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타인에 관한 불가능성을 한층 더 강화하는 효과를 낳았다. 정보사회의 흐름은 그 세계의 지평을 확장했지만 반대로 그 심도는 낮추었으며, 이는 영화적 세계의 확장이 그 담론의 깊이와 연결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이야기의 핵심은 세계의 확장이 오히려 최후의 체제로 기능하면서 더는 ‘바깥’을 떠올려볼 수 없게 되었다는 모던론의 복기에 있다. 눈에 띌 정도의 변화가 눈에 띄는 것만이 확보할 수 있는 변화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모든 것은 항상 최후다. 


이 세계에서 최후란 허무주의의 일종일 수밖에 없다. ‘최후’라는 말은 어떠한 개념적 원리의 변방에 밀려난다는 점에서 항상 결론이기를 요구하고, 그건 또 대안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 대안의 부재는 멸망해가는 세계의 절망이 아니라 모든 길이 하나로 수렴된다는 숙명론 혹은 회의론의 성격에 더 가깝다. 과정보다 결론, 또는 과정이 결론을 앞서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에서는 행동이 생각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생각이 행동을 요구한다. 즉 생각은 그 자신의 가능 세계를 위해 먼저 움직일 것을 요구하며 이 과정에서 영화는 현실을 목격하고 재현한다는 자기만의 미메시스를 상실한다. 결국 이 시대에 영화는 행동하는 것일 수밖에 없고, 또 그런 의미에서의 전위일 수밖에 없다. 낙원은 애둘러 가야 하는 곳이 아니라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로 비쳐진다고 오늘날의 영화는 말한다. 바꾸어 말해 오늘날 영화에서 전위라는 말은 그 형식상의 새로움이 아니라 직관을 가리킨다. 


낙원은 어떠한 결론이 아니라 과정에 있다고 보는 관점이 있는 한편, 낙원은 어떠한 결론으로써 제시되면서 그곳을 향해 가는 여정이 필수적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다. 그러나 직관은 이 둘 모두를 부정한다. 가령 랑시에르의 말을 빌리면 낙원의 상실은 가능 세계의 종말, 즉 ‘대서사’의 소멸과 관련있다. 소위 말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에 상실과 종말의 가치는 우리가 이야기를 꾸려갈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야기하기 능력의 상실은 위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마주하는 것이 늘 새로운 게 되어버렸을 때 그에 관한 발언을 삼가야만 하는 한계상황 탓이기도 하지만. 근원적으로는 최초의 인류에서 갈라져 나온 현생인류처럼 이데아에 관한 사상과 감정도 그렇게 분화되어왔기 때문이다. 저마다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는 과정에서는 필연으로 영역에 대한 침범이 이루어지므로, 그런데 또 그러한 침범이 의미하는 바는 직관에 의해 수직에서 이루어지는 정밀타격이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이 발언은 폴 리쾨르와 같은 저술가들에게서도 나타난다. 리쾨르의 경우 시간의 흐트러짐으로 인해 그에 결부된 이야기하기의 능력 또한 상실되었다고 말하면서 이야기를 다시 세우려면 시간적 질서로의 회귀가 필요하다 말한다. 그는 이를 위해 근대적 시간, 혹은 과학적 시간으로 불리는 엔트로피계를 탈출할 것을 요구하면서, 모든 것이 소멸에 이를 뿐인 허무주의를 탈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논의에 따르면 ‘낙원’은 어떠한 이야기하기의 능력에 따라 서술할 수 없는 시간, 즉 ‘바깥’에 해당하는 것을 지시하고자 만들어진 시간이며 이를 따라 바깥의 소멸은 곧 이야기의 망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지적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만한 건, 오늘날 영화와 현실의 구분을 두고서 극장이라는 공간이나 관객 주체와 같은 공동체에서 ‘영화’라는 기구를 도출해내는 일이 특정한 이야기를 서술하진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여기서 영화의 역할은 낙원의 위치를 지정, 아니 ‘특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영화에 낙원을 덧입혀서 영화를 통한 낙원의 위치 찾기를 수행하는 건 아니다. 영화와 낙원의 유사성은 그 자체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어떠한 이야기하기를 위한 선행조건, 혹은 근간이 된다는 점뿐이다. 다만 이 둘 사이에 있는 흥미로운 유비에 관해서는 언급할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영화를 구성하는 것이 스크린이라 가정할 때 우리는 자연스레 스크린이 곧 영화의 좌표계를 구성한다고 여기지만, 정작 우리가 머릿속으로 영화를 회고할 때 이미지는 어떠한 프레임에 갇혀있지 않다. 오히려 영화는 우리의 직관 안에서 그 형식을 잃으며 이 경우 영화는 자신의 안과 밖을 지우고 다시금 세계에 소속되었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이때의 영화는 우리가 시간의 끝에서 마주한 결론이 아니라 주체를 따라 다시금 세계의 중심에 소속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영화는 우리의 현실계에서 엔트로피계를 따라 늘 변방으로 밀려나지만 꿈과의 연결에서는 타인을 잃고서, 다시금 세계의 중심에로 복귀한다. 


*


<더 글로리>나 <지금 우리 학교는>과 같은 학폭 장르의 드라마를 보면서, 영화가 일종의 고립주의를 꾀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들 드라마는 학교폭력의 구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완전히 분리해 바라보는데, 특기할 만한 건 가해자는 피해자를 용서할 수 없고 또 피해자도 가해자를 용서할 생각이 없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한편으로는 <모범택시>나 <D.P>처럼 추리물의 형태를 띠면서도, 법의 테두리 밖에서 사적 제제를 꾀하거나 혹은 법의 테두리 밖으로 나간 이를 사적으로 잡아오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들 장르의 공통점은 어떠한 것을 경계로 고립돼있고 이 구도 밖으로 오가는 건 모두 ‘사적인 것’을 통한다는 점에 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다소 무리를 하며 구도를 다음처럼 나눠보고 싶다. 이러한 공과 사의 분리가 의미하는 바는 ‘공적인 역사’가 바뀔 수 없음을 말하면서 ‘사적인 나’를 대두시키는 일이 아닐까? 이 경우 이들 드라마는 다큐멘터리의 작법을 응용 및 변형하는 게 된다.


다큐멘터리 장르에 여러 정의가 있지만, 대개는 사적 자아로 공적 역사 바로 쓰기를 행하는 게 주류를 이룬다. 다큐멘터리 장르에서 시선은 ‘감독-나’의 것으로 진행되며 여기서 [세계]는 사적인 것의 무대가 된다. 바꾸어 말해 이들 장르에서 [세계]는 사적 자아, 혹은 ‘감독’의 시선을 통한 [세계]로서의 영화가 성립하기 위한 기본 조건이므로 근간은 단단해야만 한다. 문제는 이러한 구도에 변형이나 침입의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가해와 피해의 인과관계가 뒤바뀔 리 없다는 걸 감안해도 가해자의 갱생 불가능성과 피해자의 회복 불가능성을 말하는 이들 장르에서 [세계]는 그저 배경에 그치는 듯 보인다. 말하자면 이들 드라마는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설득하기보단 그러한 결론이 과정을 어떻게 합리화하는지를 보여준다. 폭력이라는 결론에서 출발하는 이들 장르가 인물의 자아를 자신의 무대 위로 끌어들일 때, 근본적인 이야기하기 통로가 무너지면서 벌어지는 일은 퇴로를 막는 ‘고립’의 서사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오래 전에 보았던 <목소리의 형태>를 떠올리며 들었던 생각은 이 영화가 스스로를 고립에 몰아넣는다는 점이었다. 폭력의 가해자가 다시금 피해자가 되고, 당시의 피해자가 과거의 가해자와 사랑한다는 내용이 끔찍하리만치 장난스럽게 보일 때. 이 영화가 비난이나 비판의 논리를 거치기 전에 이미 ‘공적인 것’을 전제한다고 느꼈다. 여기서 ‘공적’이라는 말은 이미 대외로 공표되어 바뀔 리 없는 특정적 사실, 즉 표면 질감을 뜻한다. 이를 따르자면 이 만화의 ‘그’는 ‘쓰레기’라는 말에 앞설 수 없을 것이고 또한 그렇기에 ‘사적인 나’만이 그를 구원할 수 있다. 정사에서 우리는 주류 흐름을 벗어날 수 없지만 반대로 인물 단위의 소소한 변형을 일으킬 수 있듯이, 어떤 이야기는 고립을 자처하며 주류 흐름에 갇힐 때 되려 인물의 사적인 삶을 드러낸다. 물론, 그 드러남은 특유의 고립주의로 인해 작품의 결말에 다다름과 함께 [세계] 안에 사라지고야 마는 것이다.


이처럼 낙원은 어떠한 도망의 형식이기보다 고립에 더 가깝다. 또한 낙원이라는 말은 그 표현과는 달리 선택받은 이들의 입구가 아니라 선택할 수 없는 이들이 빠진 하나의 출구다. 영화를 두고서 낙원에 빗대는 일은 그런 점에서 ‘고립’주의가 아니라 고립’주의’로 보아야 한다. 이야기의 퇴로를 삭제함으로써 영화에 고립되는 일은 이곳을 최후의 현실로 만들려는 게 아니며, 이들은 공적 세계에서 유일하게 바뀔 수 있거나 또는 뚫고 들어갈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자신뿐이라고 말하면서 그들 자신의 연결을 위해 스스로를 세계와의 유일한 다리, 즉 ‘고립’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를 낙원으로 이해하는 일은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되려 낙원의 자리가 영화의 자리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가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면 그곳에 항상 행복이 있으리라고 믿는 것처럼, 우리가 낙원을 찾아 떠날 때는 항상 그곳이 영화일 수밖에 없다. 영화야말로 공적 세계에서 사적 세계로 가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이따금 어떤 영화는 그 자신을 현실에서 고립시킴으로써 다시금 중심에로의 복귀를 꾀한다. 그리고 이들은 대개 자기만의 낙원을 꾸리면서 외부를 배제하려 든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하나의 장소로 매듭지으면서 이 안의 이야기를 외부와 소통하지 않거나, 혹은 검열하려 든다. 그런데 이렇게 영화를 외부와 고립시키는 일이 낙원을 꾸려가는 일과 어떠한 상관관계를 맺는다고 볼 수 있을까. 아마도 영화에서 시작과 끝의 양상을 제거하는 일은 꿈의 형체를 흩뜨려 놓는 것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영화는 현실과의 경계를 잃고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과 유연하게 연결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연결이 영화와 현실의 혼합이 아니라 단지 경계를 알 수 없게 되었을 뿐이라는 점에 있다. 단순히 연결지점만을 모를 뿐이라면, 우리는 여전히 영화와 현실의 경계에 서 있고 또 이야기하기의 행위는 멈추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꿈의 형체가 허물어지더라도 이야기가 계속된다는 점에서 형체는 ‘형식’이 아니다.


형체는 형식이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가 영화에 어떠한 ‘포착’을 하는 일이 곧 영화를 특정한 형식으로 규정하는 건 아니다. 이는 무언가를 관찰해서 순간을 드러내는 일이 구조주의의 일환으로 서사를 포섭하는 게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오히려 영화에서 순간포착의 역할은 리니어를 끊어내어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것을 잠시나마 살려보려는 노력에 가깝다. 즉 ‘존재할리 없는 기적’을 선보이면서 이것이 실제로 가능함을 증명하려는 일에 가깝다. 그 점에서 꿈의 형체를 흩트려 놓는 일은 시작과 끝을 설정하면서 영화를 현실에서 고립시키려는 낙원과는 다르다. 낙원이 자신을 고립시키면서 하려는 일은 꿈의 경계를 다시 세우면서 소통과 검열의 기준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낙원은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장소라는 점에서 탐색이 도달하는 곳이 아닌, 절대적 화합의 증표로서 이야기하기의 가능성으로 이해된다. 바꾸어 말해 낙원은 단일 기호이면서 모든 것의 시작점이다.


낙원은 어떠한 것으로 말해지면서도 동시에 어떠한 것으로도 말해질 수 없는 상태다. 왜냐하면 단 하나라나는 점에서 유일하지만 반대로 보면 단 하나밖에 없기에 그걸 설명할 방법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걸 마주했을 때는 그걸 설명하기에 곤란한 처지에 놓인다. 다른 무언가에 견주어 볼 수 없기에, 그걸 단독으로 마주했을 때 직관을 내세우는 일도 불가하다. 애초에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태에서 우리 스스로는 ‘외부’에서 배제돼 단독적 사태 안에 갇혀버리므로, 이 생각의 연장선에서 ‘낙원’은 영화로서 그 현실을 배제하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른바, 낙원으로서의 영화는 낙원을 자처하면서 존재할리 없는 기적을 불러 모으고자 하며 여기서 ‘낙원’은 일종의 발명된 개념이다. 단지 내부를 확정하는 것만으로는 어떠한 생명활동이 시작되기 힘드므로 낙원이라는 이름으로 시작점을 지정해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태라는 점에서 낙원은 서술 지점이 될 수 없어 보인다. 낙원으로서의 영화는 현실에서 도피해오는 지점이 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떠한 대안적 현실이 될 수는 없다. 가령 이 이야기를 꾸려감에 있어 무엇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지와 같은 문제가 그렇다. 낙원은 우리가 그곳을 찾아가는 여정을 제공할 뿐이지 그 자체로 결론이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애초에 결론을 낼 마음이 없거나 혹은 낼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라면 어떨까? 말해지기 위해 존재하는 몇몇 사실처럼 영화로서의 자신을 현실에 드러내고자 하는 상태가 있을 수 있다. 그 영화는 이곳에 낙원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게 진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작금의 이들에게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목적을 선사해준다. 그 점에서는 되려 이 영화가 현실의 이질적인 대목이 되어야 마땅한데, 무언가를 찾아가는 여정에선 항상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지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구분해야 할 게 있다. ‘길을 잃지 않는다’라는 말이 뚜렷한 길이 있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한 건 탐색의 과정이지 특정한 결론을 찾아가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낙원은 외부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구획하기에 외부에서 테두리를 따라가면 낙원에로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낙원은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무언가인 게 아니라 외부를 배제하면서 자신의 협소함을 체험해가는 일련의 엔트로피계에 가깝다. 낙원은 이해받기를 요구하지도, 혹은 요구받지도 않으며 단지 그 자신을 고립계의 일원으로 만드는 것에 몰두할 뿐이다. 이 점에서 모든 영화는 부분적으로 낙원의 성격을 지닌다. 시작과 끝으로 완성되는 영화라는 형식은 그 안에서 외부를 배제함으로써 내부에 열중하기를 요청한다. 이때 그 영화는 자신을 엔트로피계로 위치 지으면서 외부 현실을 끌어들이려 할 수도 있는데, 그건 압력차로 인해 영화의 공백에 현실이 밀려드는 일을 가리킨다. 즉, 그것은 물리적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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