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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17. 2023

의미없는 세계가 공동체를 지시하는 방식

글로벌 시대에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무엇일까? 세계화? 그와 반대로 로컬리티에 관한 물음이 대두하고 있다. 왜냐하면 홍보 무대의 장이 세계로 넓혀진 상황에서 국적은 하나의 개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몸을 얼마든지 옮길 수 있는 시대에 경계는 지리적인 개념이 되었고, 온라인상에서 사람들 사이를 구분하는 건 언어가 아닌 문화다. 그리고 그 문화가 바로 어떤 나라, 어떤 민족의 것으로 표상된다는 점에서 ‘국적’은 자신을 남들과 구분하는 개성이 되었다. 물론 이런 구분조차 엄밀하지 않은 듯하지만 적어도 로컬리티의 전개에 관해서는 말해둘 수 있을 테다. 가령 사람들이 자국의 문화 콘텐츠에서 ‘한국적인 것’을 찾을 때, 혹은 일본의 콘텐츠 성공 비결로 ‘일본적인 것’을 발견해낼 때 이것은 하나의 구분지점을 요구하는 일이다. 다른 콘텐츠와 다른 무언가가 여기에 있다고 말하면서 이를 차별화의 지점, 즉 ‘돌출’로 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혹자는 한국에서 만들었는데 한국적인 요소가 없다거나, 혹은 영화가 너무 일본적이라서 해외에서는 공감의 코드가 약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전자가 로컬리티를 ‘요청’한다면 후자는 ‘로컬리티’에서 빠져나올 것을 요구하는 셈이다. 이처럼 로컬리티에 관한 물음은 개성을 요구하거나 또는 빠져나올 것을 요청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런 구분을 토대로 하여 로컬리티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먼저 이야기를 꺼내고 싶은 건 후자의 사례에 해당하는 영화다. 2020년에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한 <사냥의 시간>에 관한 비평문에서 안시환은 “이 의미없는 세계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 바 있다. 근 미래의 한국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한국’이라는 점은 폐허의 무장소성을 통해 다소 퇴색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 전후로 개봉했던 <승리호>나 <반도>의 경우에도 이것은 한국영화나 한국적인 상황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포스트아포칼립스적 상황을 바탕으로 한 이들 영화에서 ‘한국’은 ‘지금-이곳’으로서의 기능이라기보다 배우들이 사용하는 언어, 또는 주요 투자자와 제작진의 국적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였다. 이는 글로벌 시장을 노리고자 한다면 적당히 세계화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개성을 지워야 했다는 사실로 이어졌다. 세계 시장에서 먹힐 만한 작품을 만들려면 적당히 희석되어 어느 나라에든 실정이 맞아떨어지게끔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말이다. 확실히 이 말은 옳지만, 우리가 상기해야 할 건 ‘의미없는 세계’라는 무장소성이다. 왜냐하면 ‘장소’란 이야기가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무장소는 이야기가 없는 곳을 뜻하며, 결국 ‘의미없는 세계’라는 말은 “이야기가 의미를 갖지 못하는 세계’라는 점을 뜻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런 점에서 ‘로컬리티’는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소속감, “이야기를 통해 의미를 갖는 세계”에 대한 호응으로 이해된다. 


다시금 ‘의미없는 세계’라는 대목으로 돌아가보자. 이 말은 영화가 묘사하는 공간에 관객이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묘사하는 세계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들 세계가 어떤 걸 묘사하든 ‘이곳’과 ‘그곳’은 서로 다른 세계일 뿐이기에 두 세계를 같은 선에 놓는 건 불가능해진다. 역으로 두 세계가 다른 곳이므로 어떤 묘사를 하든 서로 간섭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관객은 자신이 소속될 이유가 없는 공간에 머무를 이유가 없으며 이는 관객이 영화에 제대로 이입하지 못하고 떠나가는 원인이 된다. 요약해서 말하면 ‘의미없는 세계’란 살아갈 이유가 없는 곳인데, 로컬리티에서 빠져나오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그런 ‘세계’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 영화는 그 세계가 살아갈 곳이 못 된다고 말하면서 로컬리티에서 빠져나올 것을 권한다. <사냥의 시간>의 한국이 더는 ‘살아갈 장소’로 묘사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영화는 되려 그곳이 한국이 아니라고 말해야만 비로소 의미를 찾는다. 이 영화의 포스트 아포칼립스적 배경이 폐허의 무장소성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계]를 묘사하는 게 아니라, 그런 세계에서 극장에 있는 관객들의 세계 즉 ‘이야기를 통해 의미를 갖는 곳’으로 연결되기 위한 발판이었다. 폐허가 이야기를 발설하지 않기에 장소가 될 수 없다는 말은 로컬리티의 부재를 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로컬리티가 특정성과 연관된다면 폐허는 설명될 수 없고 특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가장 세계적인 장소이다. 많은 이야기가 특정한 맥락 안에서 작동하는 반면, 폐허는 살아갈 곳이 아니기에 관객의 이야기를 작동시키지 못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폐허는 어떠한 비교 대상이 아니기에 의미작용에서 자유롭다. 폐허는 그 자체로 이야기를 서술하는 곳이 아니라 어떠한 삶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배경적 장치에 가깝다. 이른바, 폐허는 흑이 아니라 무(無)에 가까우며 그렇기에 포토샵의 레이어처럼 현실을 단일 오브제로 누끼따고, 또 다른 배경이나 사물에 쉽게 배치되도록 돕는다. 결국 이 맥락에서 <사냥의 시간>의 폐허는 인물로 하여금 탈출 서사를 작동시키는 시동점에 가깝다. 이들 폐허에서 인물은 어떤 이야기로 재배치되고 그런 별개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로컬리티라 부르는 지협성을 갖는다. 이 사례에서 로컬리티란 관객 개인에게 작용하는 것으로. 이야기의 전권이 관객에게 넘어감으로써 [세계]란 다름아닌 관객이 살아가는 곳에 관한 게 된다. 이렇게 전달된 로컬리티는 관객에게 이곳이 살아갈 의미가 있다고 말해줌과 동시에 이야기를 다시 서술하는 장소로서의 현실을 지정한다. 즉, 이들 영화의 폐허는 이야기가 서술되어 의미를 찾는 곳은 어디까지나 현실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자신은 [세계]가 되기를 포기한다. 결국 영화에서 로컬리티의 상실은 부재가 아닌 파종의 맥락에 더 가닿는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말하고 싶은 건 신카이 마코토의 재난 3부작(<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 <스즈메의 문단속>)이다. 이들 영화는 비교적 지명이 뚜렷히 묘사된다는 점에서 로컬리티에 부합하며 위에서 말했던 전자의 사례에 속한다. 신카이에 따르면 재난 3부작은 ‘일본적인 것’을 요청받은 결과에 따라 만들어졌으며, 이를 따라 일본 국민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성격이 있다. 헌데 이는 일본의 바깥에서는 다소 그 공감대가 약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스즈메>의 경우 일본의 국내와 해외에서 비평의 지점이 달리 나타나기도 했다. 가령 <스즈메>에서 일본 황궁 터를 발견하는 것은 주로 국내의 평이었으며 해외의 평자들에게선 무시되거나 혹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는 신카이의 3부작이 과연 ‘로컬리티’에만 한정된 것이었는지를 물을 수 있다. 이 영화들이 로컬리티에 머물렀다고 하면 일본의 바깥에서는 그 의미 전달이 원활하지 않았을까? 이 영화는 분명 로컬리티의 문맥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 자체가 로컬리티에만 머무르는 건 아니다. <기생충>의 수상 과정에서도 수없이 제기되었던 이 문제는 영화에서 로컬리티를 작동시키는 것은 관객의 입을 빌려 말해질 때 이야기를 사유화하는 것, 즉 특정한 의미를 갖고서 관객의 이야기에 스며드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서 이야기는 발화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으로써, 관객은 영화의 세계에 온전히 이입할 수 없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새로 쓰기 작업을 수행한다. 


한 가지 물음에서 이야기를 출발해보고 싶다. 특정 국가의 문화를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영화가 있다면, 그 영화는 외부에서 어떤 맥락으로 받아들여질까. 아마도 본래와는 동떨어졌거나 혹은 아주 새롭게 받아들여질 테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본래의 의도와는 정반대되는 의미에 안착함으로써 소위 말하는 ‘원작’과의 반발이 일어날 경우다. 반나치 메타포를 담은 영화에서 “저 사람 멋있다”고 말해버린다거나 하는 일을 생각해보자. 맥락을 아는 사람은 그 말을 들으며 기겁하겠지만, 아는 사람만 알 정도로 코드화된 이미지에서 그러한 심층 해석을 끌어내는 건 무리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라 유비이며, 연상을 하든 말든 이미지를 떠올리고 구현하는 일에 윤리적 잣대를 들이밀어선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야기가 재미있으면 그만이지 뭐가 더 중요하냐고 말이다. 이게 너무 수위가 센 발언이라면 다음과 같은 경우로 순화해보자. 이야기가 자신의 원류로 삼은 실제 사건이나, 작중에서 인용된 여러 밈이나 은유를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런 건 작품의 표면이 아니라 심층에서 작용하므로 ‘의식’적인 한에서는 그냥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영화는 시작에서 끝까지 별개의 이미지고 그렇기에 그 생성의 원리 또한 현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마치 겉모습은 사람이지만 속은 다른 외계인을 보듯 영화도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미명하에 다루는 게 가능하다. 


사람이 아니니 막 대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작동 원리가 다르므로 원리의 진행을 달리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사례는 우리에게 한 가지 교훈을 전달한다. 특정 대상 A가 있을 때 그에 대한 생각은 각자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마치 미술관의 자유관람 행위처럼 대상은 언어의 발화점에 불과하며 그 속내는 각자 다르게 흐를 수 있다. 영화에서 문화의 역할도 그렇다. <기생충>의 흥행에서 주로 지적되었던 건 한국영화의 세계화가 아니라 문화적 상황이 자국의 상황과 연결되는 대목에 관한 고찰이었다. 어느 곳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풍경이기에 어느 나라에서나 공감대를 얻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은 ‘어느 곳에서나 같은 풍경을 본다’는 점에서 황무지 같은 느낌을 준다. 어딜 가든 같은 풍경을 내보이는 건 황무지 혹은 폐허에 가까운 장소일 테니 말이다. 즉, 영화에서 세계화라는 말은 이런 점에서 무장소성과 연결되며 이것은 장소를 특정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모두가 같은 곳에 놓였다는 분화 이전의 원류를 가리킨다. 마치 인류 초창기의 아프리카 대륙이라고나 할까. 이곳에서 문화는 인류의 공동체를 묘사할 뿐 국가적 특색을 따라가지 않으며 더 나아가서는 이야기를 진행하는 무대에만 불과하다. 위에서 신카이의 영화들에서도 여기에 동일본 대지진과 이후의 삶이라는 일본적 정서가 발견되지만, 딱히 그걸 모른다고 해서 영화를 이해하기 힘든 건 아니다. 오히려 이 경우 영화는 더욱 잘 관찰된다. 


영화에 이입할 수 없다는 건,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면서 일본 국민이 아니라는 비(非)존재의 양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기들의 현실에 그러한 로컬리티를 ‘요청’함으로써 영화적 시간에서 현실의 영화를 발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시간을 따라 이야기가 성립한다고 보았던 리쾨르의 관점에서 영화적 시간, 그 영화의 이야기가 현실의 시간으로 연장된다는 점에서 둘 사이에 연속성의 일종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가령 현실과 영화는 서로 다른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둘 사이에 이야기는 이어질 수 없겠지만, 현실과 영화 모두에서 관객적 지위로 자리한다면 ‘이야기’라는 것은 이들 모두를 아우르는 메타적 관점일 뿐 매체를 통해 구획되는 게 아니다. 또한 이러한 관찰자적 지위에서 로컬리티란 ‘글로벌’의 측면으로 바라보는 ‘메타’에 대항하여 자신을 세우는 것, 즉 ‘사적 자기’의 발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국적이 자신을 표현하는 개성이 되었다는 말은 “네이션이라는 표현이 더는 공통 사건을 통해 형성된 사회적 인식과 분위기를 공유하는 집단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로컬리티를 요청하거나, 빠져나오는 일은 네이션의 정의가 아니라 영화/현실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그러한 ‘시간’을 소유하면서 이야기를 서술해가는 경험이다. 또한 이러한 시간의 소유는 이야기의 생성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드러내며 그것은 곧 공간의 형성을 뜻한다. 


여기서 공간에 대한 세부적인 정의가 필요해진다. 영화가 내보이는 이야기 측면에서의 공간은 관객이 서술해가는 이야기 측면에서의 공간과 같아 보여도 결국은 서로 다른 공간이다. 다만 관객은 이야기하기를 통해 영화의 안에서 밖으로 재배치될 수 있고 또한 영화의 공적 시간을 사적 시간으로 변환할 수 있다. 이때 로컬리티는 ‘영화’의 관객이 아니라 영화의 ‘관객’을 조명하는 용어이고 ‘~적인 것’이라는 말은 ‘사적인 것’으로 뒤바뀐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화에 대해 ‘~적인 것’을 묻는 일을 멈춰야 할까? 대다수의 관점에서는 로컬리티가 한 나라의 정체성과 개성을 형성하며, 이를 토대로 내셔널 시네마라는 개념을 이해하고자 하고자 시도하곤 한다. 내셔널 시네마란 영화의 국적성에 관한 것으로, 주로 이민자 문제를 다루거나 그러한 국적의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을 뜻한다. 특히 이 용어는 그동안에 모호하게 혼합서술되었던 로컬리티와 네이션의 개념을 달리 바라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데, 세계화 시대에는 지역과 국민이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 개념을 상세히 구분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하였기 때문이다. 같은 논리에서 그러한 공간과 시간이 서로 구분되어야만 한다면 전자인 ‘이야기가 머무르는 곳’과 후자인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도 분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서술된 이야기는 어딘가로 파종될 수도 있고, 혹은 이야기가 머무른다고 해서 그게 무언가의 단어로 정의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무언가의 단어로 정의될 수 없다는 말이 바로 오늘날 사적 자기로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개별자로서의 관객을 가리킨다. ‘정의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건 시간을 사적으로 소유할 수 없다는 말을 의미하며 한편으로는 영화가 관객을 전적으로 포섭할 수 없다는 점을 뜻하기도 한다. 물론 사적 시간의 발달이 사적 이야기의 발달, 이를테면 사소설과 같은 부류를 가능케 했다고 보는 관점을 고려해야만 한다. 그러나 시간을 사적으로 소유할 수 없다는 말은 ‘자기만의 이야기’를 서술해가는 한편, 그런 이야기는 온전히 자기만의 것이 아니며 다시금 [세계]에 이야기를 환원해주어야 한다는 점을 뜻한다. 이는 책임의식을 짊어지라는 게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이 세계에 큰 빚을 지고 있어서다. 의미없는 세계에서는 절대로 어떠한 의미가 도출되어 나올 수 없으며,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가 의미를 도출하는 이 세계는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곳,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다. 생각해보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이야기를 서술할 수 있을 리가 없기 마련이다.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사실은 바로 그 대상에 관해 잘 알고 있어서이듯, 의미없는 세계를 발견하는 일은 우리가 이미 세계의 의미에 관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야기를 쓰기 위해 이미 우리가 세계를 살아가고 있음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그게 의미없는 세계가 공동체를 지시하는 한 가지 방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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