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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28. 2023

버츄얼과 로컬

대한제국 관료 컨셉으로 트위치에서 활동 중인 버츄얼 스트리머가 있다. 그는 최근 방송에서 “대기업(현생으로도 이미 충분히 잘나가는 사람)들이 버츄얼 판에 들어오는 게 아닌가 한다.”고 말하면서 버츄얼 스트리머 시장의 레드오션화를 말했다. 그의 말처럼 실제로 기존에 캠을 키고 방송하던 이들도 버츄얼로 전향하는 일이 늘어나는 중인데, 이는 버츄얼에 관한 일반적인 인식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버츄얼 스트리머를 두고서 신비주의, 혹은 비밀유지에 관한 것으로써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서 방송하는 게 가능하다는 점에 중점을 두곤 한다. 버츄얼은 본체가 캠으로 비쳐지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외모에 대한 진입 장벽을 없앴고,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비주얼이 부족한 이들도 방송 시장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른바 어피어런스의 최전선에 있는 외모를 제거함으로써 재능있는 이들이 방송 시장에 진출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기성 연예인, 혹은 그에 준하는 인플루언서가 버츄얼 시장에 진입하는 일이 벌어지고 나면 재능에 대한 검증절차는 생략된다. 이미 기존에 각자의 재능으로 잘 활동하던 이들이 버츄얼로 전향한다는 건, 이미 어피어런스에 관한 검증이 끝난 상태이며 이에 따라 기성 버츄얼 시장에는 하나의 폭탄이 되고야 만다. 마치 시장 골목 바로 앞에 생긴 대형마트와도 같다고나 할까. 


일종의 언더그라운드 무대였던 버츄얼 스트리머 시장이 하나의 문화요인이 됨으로써 기성 연예인들의 진입이 시도되는 이 공간은 어떤 점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소위 말하는 탈로컬화의 경향으로써, 시청자로서는 “자기만 알던 공간이 외부에 알려짐에 따라 더는 그곳에 방문하기 싫어지는 경향”, 혹은 특정 로컬에 사람에 몰림에 따라 지대의 값이 높아짐으로써 기존의 자금으로는 더는 그곳에 머무를 수 없게 되는 경향을 뜻한다. 후자의 경우, 소위 권장 소비자 가격(MSRP)라고 불리는 가격이 올라가면서 그 자신을 ‘권장’의 수준에 올려놓지 못하게 되는 이들은 해당 로컬에서 이탈하게 된다. 그러니까 재능있는 이들의 버츄얼 스트리머 시장 진입은 그러한 권장가를 맞출 수 없는 이들에게 평균적인 단가를 올려놓는다는 점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 되고야 만다. 물론 혹자는 재능의 평균치가 높아진다는 건 전체적으로 좋은 현상이 아니겠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위에서 말한 어피어런스의 제거와도 연결된다는 점에서 이는 문제가 된다. 플레이어의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지역 주민에서도 지리를 구분할 지표가 사라진다는 것은 자신이 살던 곳을 어색하게 하고, 또한 집에 가는 길을 어색하게 하는 요인이다. 쉽게 말해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을 구분하기 어려워지면서 점차 애호의 대상을 찾기란 힘들어진다. 


특히나 이는 인터넷 방송의 특성, 더 나아가면 버츄얼 스트리밍의 특성으로 분류되는 [세계]에 관한다. 버츄얼 스트리머에 관한 몇몇 분석에서 평자들은 버츄얼 스트리머가 프로레슬링의 규칙과 닮아있음을 지적하면서, 이곳에는 특정한 세계관이 있고 독자들은 그걸 유희(*연기하다와 놀이를 경유하는 독어)의 일종으로 여긴다고 말한다. 이는 버츄얼 스트리머가 각자의 컨셉을 바탕으로 자신의 세계에 이입하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또한 그러한 규칙이 깨어지면 더는 이 방송이 재미없게 된다는 점에서 합당한 것으로 보인다. 프로레슬링이 높은 폭력성이 있지만, 사실은 상호 간에 합의된 반응과 행동이라는 점에서 이들 행위는 연극에 가깝다는 것이다. 또한 프로레슬링의 팬들은 레슬러의 사생활과 연기를 분리해 바라보며, 연기자로서의 레슬러는 각자의 컨셉이나 이력을 토대로 반응한다. 마치 링을 둘러싼 테두리에 반동하는 것처럼, 이곳에는 단지 연기자만이 있는 게 아니라 관객 또한 무대에 참여해야만 한다. 예컨대 버츄얼 스트리밍의 구조는 일종의 ‘놀이=/공간’에 참여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내 것’이라는 로컬과 ‘내 것이 아닌 것’이라는 비로컬이 등장한다. 로컬이 자신이 몸담으며 고향처럼 여기는 정체성 존속의 공간이라면, 비로컬은 자신이 ‘비일상’을 원할 때 놀러 나가면서 자주 접하지는 않는 그런 공간이다. 


브뤼노 라투르는 로컬을 두고서 “살아가는 세계와 이용하는 세계를 분리해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살아가는 세계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고향이라면, 이용하는 세계는 놀이공간으로써 서로 합의된 규칙에 따라야만 하는 곳이다. 이와 유사하게 버츄얼 스트리밍은 자신이 현실에 소속되어있으면서도 해당 장소의 법칙을 따라야만 하는 이중성이 있다. 여기서 로컬은 그러한 이중성을 따라 분화되며 ‘로컬’은 방송이 중계되는 방과 채팅창 등으로 그 영역이 확장된다. 채팅창은 단순히 방송인과의 소통이나 건의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이곳이 어떠한 무대임을 바깥에 알리는 효과가 있다. 이른바 온라인 스트리밍에서 채팅은 시청자로 하여금 그 자신의 존재를 로컬화하는 지평좌표계와도 같다. 가령 지박령의 문제를 두고서 “유령은 지평좌표계의 고정을 통해 현현하는 게 가능하다.”고 말했던 궤도민수의 말은 ‘버츄얼’이라는 허구적 심상에 자신을 투입하는 시청자의 방식이기도 하다. 육체를 잃었다는 의미에서의 유령과 로컬을 잃었다는 의미에서의 이주민들이 그 현실의 공간과는 관계없이 대안적 역사 쓰기의 일환으로 선택한 공간이 바로 스트리밍 방송, 즉 ‘로컬’인 셈이다. 한편으로 온라인 스트리밍은 그 현실 육체를 저버리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선택을 하는 주체인 몸은 취향 등으로 만들어진 자신의 경향이 선택되는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청자의 입장은 해당 방송을 즐기는 팬이자 이곳의 연기를 함께하는 참여자이다. 이들은 인터넷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원주민처럼 행동하는데, 살아가는 곳과 참여하는 곳의 분리는 근본적으로 진행세계와 가능세계의 분리에서 귀인한 것이기에 그렇다. 버츄얼 스트리머와 마찬가지로 시청자 또한 진행세계에서는 물리법칙을 통제할 수 없지만. 버츄얼 스트리머와 마찬가지로 시청자 또한 가능세계에서는 자신이 직접 살아갈 세상을 선택할 수 있다. 말하자면 여기에서 로컬은 지리적으로 특정화되어 구체화한 취향의 현현이라기보다 자신이 살아갈 곳을 선택하는 문제에 더 가깝다. 가령 버츄얼 스트리밍의 특징은 그 애호의 대상이 사람에 관한 게 아니라는 점에 있다. 딱 잘라 구분하기 모호하지만 버츄얼 스트리머는 ‘안의 사람’을 언급하는 게 금지되어있고 오로지 겉으로 드러나는 아우라를 통해서만 그 어피어런스를 접하게 된다. 버츄얼 스트리밍은 그 형태에 있어 인간을 믿는 것, 지지의 형태를 한다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살아갈 곳’의 문제는 공간을 지지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이 곧 공간이 되는 일에 관해 물어야만 할 것이다. 어째서 인간은 공간이 되는 걸까: 위에서 말했듯이 인터넷 스트리밍이 1인 방송의 형태라는 점에서 어떠한 채널적 운영이라면, 버츄얼 스트리밍은 여기서 더 나아가 특정 세계를 세워둔다는 점에서 ‘인간’이 아니라 그런 인간의 세계에 집중한다고 보여진다. 


다시금 프로레슬링의 문제로 돌아가서 버츄얼 스트리밍이 스트리머와 시청자 사이의 역할극이라는 점을 재론해보자. 이 역할극이라는 표현은 연기와 놀이를 같은 자리에서 바라보는 벤야민 식의 ‘놀이공간(Spielraum)'일 수 있다. 바꾸어 말해 여기서는 놀이와 공간을 분리해 바라보는 게 불가능하고, 마찬가지로 버츄얼과 스트리머를 분리해 바라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버츄얼 스트리밍은 오직 이곳에서만 버츄얼이 가능하다고 보는 하나의 입장이며 이를 따라 버츄얼 방송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곳을 하나의 로컬로 여기게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바깥에서 더 유명한 사람들이 버츄얼 스트리머로 전향하는 일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유명세는 그를 어디에서도 볼 수 있기에 글로벌의 성향을 띠지만 ‘어디’를 지정하진 못한다. 반면 버츄얼의 세계는 오직 그곳에만 존재하기에 시청자로 하여금 방송을 찾게 하는 동인이 된다. 외부에서의 인기가 철저히 이용하는 세계라면 버츄얼 스트리밍의 세계는 스트리머 개인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또 여기에 시청자를 동참시킨다는 점에서 ‘살아가는 세계’의 역장으로 이해된다. 또한 살아가는 세계는 지형지물이나 지도 등의 요인으로만 파악되지 않고서 직접 머리에 매핑되어 있는 공간으로써, 데이터나 통계로만 구축되어 나타나는 지도가 아니라 자기 존재원리의 기반이 되는 곳이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버츄얼 스트리머 붐은 단순히 문화적 인기에 편승한다기보다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직접 선택하려는 의지일 수도 있어 보인다. 이는 스트리머나 시청자나 마찬가지로 로컬이라는 단어에 관한 하나의 합의가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특히나 버츄얼 스트리머가 서브컬처의 분과에 속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터넷 문화에서 생산된 밈이 외부로 퍼져 나간다는 점에서의 로컬도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로컬이 지역적인 의미에서 현지로 이해된다면 그곳에서 자체적으로 무언가가 생산되기 위해 특정한 세계관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해야만 한다. 문화는 다량 생산되어 하위에 공급되는 게 아니라 어떠한 세계의 경계에서 피어나 현세의 것들을 인도한다. 바꾸어 말해 이는 스트리머 개인이 공간을 장악하는 능력이면서, 동시에 버츄얼이라는 단어는 스트리머와 시청자 모두 자신의 현실 세계를 떠나 합의된 공간으로서의 로컬에 거주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니 여기서 로컬이라는 말은 양측 모두를 아우르는 인터페이스로 이해되는 게 가능하다. 인터페이스는 운영체제와 사용자가 서로 맞닿는 표면이며 어느 한 쪽에만 속하지 않는 공유지대인데, 버츄얼 스트리머에게 세계는 단순히 방송을 위해 요구되는 설정에만 불과하지 않고서 시청자가 살아가는 공간, 즉 대화 공간이기도 하다. 이 두 세계는 어느 한 쪽이 아니라 바로 그 경계를 살아감으로써 양쪽 모두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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