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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06. 2023

[스타레일]을 하며 생각한 것

[붕괴: 스타레일]을 하며 생각한 건 영화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비평의 속성으로써 영화에 관해 생각했다. [원신]을 재밌게 하는 입장에서 마주한 이 게임은 이야기의 진행에서 유사점이 있었는데, 세계를 구하면서 줄곧 다른 곳으로 나아간다는 점이 그렇다. [원신]이 특정 [세계]를 이루는 일곱 개의 나라를 여행하며 그 안에 작은 이야기를 분포시킨다면, [스타레일]은 은하열차를 타고 종착을 향해가는 과정에 여러 내릴 곳을 만들어둔다. 그러니까 전자가 좀 더 극장이라는 [세계]에 속박된 반면 후자는 OTT와 같은 부류에 더 가깝다. 중요한 건 이들 게임의 이야기는 ‘작은 세계’를 차례로 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다. 어떤 면에서 이는 “세계를 구한다”는 의식이 작용하지 못하게 된 현실을 가리키는 듯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대 서사의 종말’이라는 이 주제의식은 우리에게 [세계]는 성취될 수 없는 무언가임을 보여주었고 이를 대신해 자기만의 이야기가 새로 등장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뚜렷이 끝나버리는 이야기보다 끝이 나지 않는 이야기를 더 선호하며, 이 과정에서는 ‘작은 것’을 구한다는 의식이 대두한다. 


특히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경우 이러한 작은 이야기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살아있는 세계를 만드는 것보다 ‘살아가는 이들’을 조망하는 게 더 어렵다고 말하기도 했다. 살아가는 이들을 보여주는 것. 이는 이야기 만들기 과정과 유사해 보인다. 두 게임은 어떠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는 있지만 정작 그 안에서 주류인 건 세계를 모험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많은 동료와 지인을 사귀며 그 안에서 인물의 관계가 형성되는데, 이들 관계는 플레이어의 행동을 제약하면서도 어떠한 방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른바 핍진성이라 불리는 ‘그럴듯함’이 생겨나는 셈이다. 핍진성은 현실성과는 다른 것이어서 전적으로 [세계]의 규칙을 따라간다. 낯선 나라에서는 다르게 행동한다는 말이 있듯이 이들 세계는 각각 다른 이해관계를 지니며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과는 ‘어떤’ 방식으로 연결된다. 여기서 이 ‘어떤’이라는 대목이 게임의 구성에 있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낯선 이해관계를 서로 관철하는 게 바로 주인공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서사적 장치로도 볼 수 있을 이 속성은 주인공이 출동하면 그 어떤 일도 해결된다는 점에서 실없어 보이기도 하나, 무엇보다 이야기를 구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작은 이야기를 통솔하는 게 바로 주인공, 플레이어라는 점은 [세계]를 구성하는 건 어디까지나 이 안에서 살아가는 자신임을 보여준다. [원신]이 [세계]에 자리한 나라들을 탐험하는 과정은 각각의 나라에 얽힌 사연과 컨셉을 따라감으로써 작은 이야기를 구하는 형식이고. 기본적으로 이는 콘텐츠 실황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라이브 서비스에 최적화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장’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분절의 형식으로 볼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이 분절의 형식은 게이머에게 횡단의 속성을 부여하는데, 단순히 주어진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것과는 달리 직접 정보를 모으고 해석한다는 점에서 [세계] 속의 실황을 제공한다. 특히나 여러 나라를 탐험하며 하나의 진실에 도달한다는 이 컨셉은 계속해서 실황을 갱신해가는 선형성을 통해 추리의 연속성을 부여하고, 정보를 취합하는 주체로써의 게이머를 형성한다. 세계를 구하는 대신 실황을 갱신하는 것만이 가능해진 세상에서 게이머는 이야기꾼보다 더 우수한 인재로 발탁된다. 


거대서사는 불가능해졌지만, 그러한 서사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횡단한다는 점에서 선형적 이야기는 더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 이 횡단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몸을 움직인다는 점에서 직접 이야기를 몸에 들러붙게 하고, ‘이야기하기’의 불가능성은 여전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이야기하는 게 가능한 것이다. 즉 발화가 아니라 체화로서의 이야기, ‘구한다’가 아닌 ‘살아간다’가 성립한다. 생각하건대 이는 오늘날 우리가 비평에 떠올릴 수 있는 한 가지 단서인 듯하다. 영화가 ‘보는 단계’에서 ‘횡단하는’ 단계로 넘어갔다면 이러한 사실이 의미하는 건 어떤 면에서 새로운 세계의 생성일 수도 있다. 거대서사가 붕괴했기에 여러 개인의 서사가 생겨났다는 게 아니라, 횡단을 통해 생겨나는 세계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기호들의 연속으로 분석되는 세계가 아니라 자신을 직접 세계에 배치하고, 또 이를 통해 의미구조 사이에서 마주하는 것들에서 어떠한 이야기가 생겨난다. 여기에는 직접 서술되진 않지만 세계 안에 있어야만 비로소 성립하는 좌표가 있고, 또 이를 통해 계속해서 자신을 확정받는 관객이 있다. 


관객은 이미지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영화 안에 자신을 참여시킴으로써 그 세계에 대해 말할 권리를 얻는다. 바꾸어 말하자면 비평은 이미지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마주하는 것들에 주어진다. 그렇게 생각하면 비평은 처음부터 일단락된 결정이 아니다. 여정을 따라가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만이 아닌, 좌표값의 갱신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기존을 갱신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세계를 파악하는 게 불가하다는 말이 세계를 여행하며 작은 이야기를 살아가는 일로 바뀌어버린 현실에서, 마찬가지로 비평도 특정한 의미체계를 세우기보다는 이야기를 세우고 또 그들 관계를 엮어가는 방식으로서만 현실을 살아간다. 그리고 영화는 여기에서 하나의 세계를 합의하기 위한 틀에 불과할 뿐 어떠한 체계로 접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른바 영화를 횡단의 무대로 바라보는 일은 이야기의 역할을 감독이 아닌 관객으로 옮겨두며, 이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논하는 게 주된 논제가 된다. 그렇다면 비평의 문제란 결국 버츄얼에 관할 수밖에 없다. 소위 아바타와 같은 식의 횡단성은 우리가 어떻게 큰 세계와 작은 세계 모두에 관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버츄얼 유튜버와 같은 사례에서 우리는 이것이 특정한 세계에 동참하기를 요구하면서 정보의 양을 한정 짓는다는 점을 발견한다. 이는 허구이지만 합의된 것이기에 진실로 여겨지는데, 가령 소꿉놀이 등을 생각해보면 이를 이해하기란 쉽다. 소꿉놀이에서 우리는 상대방의 신분에 동의하고 또 그런 동의를 거쳐 일련의 합의에 이른다. 이때, 우리는 가공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걸 유희하는 게 바로 자신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놀이 중에는 그러한 바깥의 사실이 절대로 개입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버츄얼함을 지속시키는 건 ‘그럴듯함’의 사례가 아니라 외부를 통한 의도적인 정보의 제약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버츄얼이 추구하는 건 리얼리티가 아니라 블랙룸이며, 이는 곧 영화가 왜 고도로 발달한 기술적 산물인 게 아닌지를 설명한다. 영화는 바깥을 떠나 특정한 방에 자신을 감금함으로써 정보의 제약을 택하고, 또 이를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한다.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영화를 단순히 바라보기만 하는 게 아니며, 관객되기를 요청받으면서 여기에 관할 것을 요청받는다.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지를 줄곧 질문하면서, 그에 따라 자신을 연기할 것을 요청받는다.  


이 대목에서 영화에서 버츄얼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경우를 살펴보자면, 대개는 VR 시네마와 같은 외부적인 요인밖에 없을 것이다. 버츄얼 리얼리티라는 이 현상에 관해서 우리는 이를 ‘영화를 보는 방법’의 문제로 삼는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영화를 일종의 유령 같은 것으로 가정했을 때, 이들 영화는 모두 ‘버츄얼’하거나 또는 그런 속성이 있다고 밖엔 말할 수 없다. 가령 영화를 두고서 재현의 연장선에서 파악할 때 우리는 ‘그럴듯함’의 속성으로 영화를 버츄얼로 바라본다. 여기서 버츄얼이란 가공의 산물로써 주어진 현실로 일구어낸 하나의 성취로 이해된다. 즉 버츄얼은 정말로 있는 것을 재배치한 결과이므로 이 안에서 기막한 우연의 일치가 발생한다 한들 별반 이상하지 않다. 영화를 보는 문제에서 관객 되기란 바로 그러한 우연을 통제하려는 움직임의 일환이다. 우리는 이런 우연을 두고서 ‘영화 같다’는 표현을 사용하곤 하는데, 영화의 자리에 자신을 대입하는 일은 영화를 살아가려는 마음가짐과도 같으며 이 경우 영화란 결국 배치를 통해서만 발생하는 일련의 구조적 환상에 해당한다. 


이러한 관점이 영화를 일종의 구조주의에 놓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를 통해 말하려는 것은 영화가 재현의 산물이 아니며 따라서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는 점이다. 영화는 지박령이 아니라서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온전히 고정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계속해서 현실을 빗겨나간다. 오히려 현실을 고정하는 건 우리의 계산에 불과하며, 영화는 그 자체로 정확한 고정 좌표를 갖고 있지는 않다. 이를 따르면 영화가 늘 해석의 다양성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영화는 특정한 성취의 대상이 아니고 또 물리적 실체를 갖는 게 아니므로 전적으로 이해의 산물이 될 수밖에 없다. 즉, 영화는 발생하는 것이므로 오직 관측하는 것만이 가능할 뿐 우리는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파악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이를 두고서 영화에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영화를 버츄얼의 문제로 바라보는 일이 영화를 탄생 이후에 놓는다는 것, 즉 어떠한 관측의 행위만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깨달아야만 한다. 영화는 관객을 전제하는 게 아니라 관객이 관측되도록 하는 것이다.  


영화를 버츄얼의 맥락에서 바라보는 일은 영화를 버츄얼의 맥락에 두는 게 아니라 영화에 바깥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영화가 정말로 실존하는 사건을 바탕으로 했는지, 아니면 관람 방법에 따라 그 해석의 방식에 차이가 발생하는지와 같은 문제는 별반 중요치 않다. 영화는 ‘이해’의 산물이며 이는 기본적으로 뿌리를 둔 연극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예를 들어 <더 웨일>처럼 연극을 기반에 둔 영화를 보면 이러한 사실이 뚜렷한데, 이들 영화는 집을 배경으로 외부에서 끊임없이 들어오는 인물을 묘사함으로써 ‘무대’라는 고정장치를 확보한다. 이들 영화는 그러한 무대를 확보함으로써 어떠한 이해의 근간이 되는 고정좌표를 확보하고, 인물은 마치 침투하듯 무대에 들어오며, 관객의 판단은 전적으로 이를 따른다. 이른바 관객이 주어진 정보를 따라간다는 과정이 표면에 드러나는 셈이다. 그런데 이는 영화가 정확한 고정 좌표가 없다는 점에 귀인하는 것으로, 지리적 현실의 재배치를 통해 바깥을 인식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버츄얼은 현실감각의 상실, 뜀박질을 위해 대지를 포기하는 일이다. 관측을 하려면 하늘로 날아야 하며, 그러니 우리는 바닥에서 떨어지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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