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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07. 2023

닫힌 세계의 젊은 비평가

근래에는 진지하게 비평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 그냥 비평이라는 일 자체에 관심이 없어졌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잘 생각하면 그보다 큰 무언가가 있다. 비평이라는 단어를 굳이 언급해야 할 만큼 특수한 경우가 아니거나, 비평 자체가 일종의 서브컬처로 전락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후자라면 상황은 좀 낫겠지만 전자의 경우는 애석하다. 언급이 잘 안 된다는 말은 결국 무관심을 뜻하기 때문이다. 쓰는 사람이나 찾는 사람이나 한정되어 있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자기네들끼리만 알아먹을 수 있는 상태가 가장 위험하다고 볼 수 있다. 닫힌 세계는 완고하지만 바꾸어 말하면 더는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이를 비평의 죽음이라는 말로 불렀지만 아예 관심도 없고 언급도 없는 상황에서 자기네들끼리 일을 잘 굴려나간다면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그냥 교류가 끊긴 것뿐이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는 독자적으로 꾸린 문명이 다른 문명과의 수렴진화를 겪을 수도 있지만, 분명하게도 이는 서로 교배가 불가능하다. 


혹자는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통하면 그만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젊은’과 ‘대중’이라는 단어를 운운하면서 이러한 무관심에 관심을 갖지 않는 일은 명백한 모순이다. 시네필리아를 위한 글을 쓴다고 자부하면서 그와 동시에 시네필리아를 양성하는 글을 쓴다고 선언하는 일은 젊은 세대의 기호에 맞는 음식을 만든다고 말하면서 젊은 세대를 양성한다고 말하는 일만큼이나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대중은 교화되거나 특정될 정도로 집단을 꾸리지 않으며, 이에 따라 시네필리아라는 집단 또한 존재할 리 없으니까. 누구나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에 자기만 영화를 사랑하는 것처럼 구는 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자의식과잉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자의식은 완고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무언가를 가능하게 하지 못한다. 비평이라는 말의 어원을 시네필리아에 두는 일은 반대의 경우에만 참이지 본래의 경우에선 어긋나며. 시네필리아는 비평을 하지만 비평은 시네필리아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비평을 말하면서 그 무관심의 원인을 시네필리아의 양성 실패에 두는 건 이상하다.


시네필리아와 비평은 독립적인 관계다. 영화 보는 게 자연스러운 집단이 있다면 생각을 표현하는 게 자연스러운 집단이 있다. 이 둘 사이에 인과를 찾는 건 모호하기 짝이 없고 어떤 면에서 이런 모호함을 중재할 요령으로 발탁된 게 ‘젊은’이라는 수사가 아닐까 한다: ‘젊은’ 비평가라는 말이 가리키는 바는 분명 새로움에 관한다. 이는 세대교체라는 표현을 통해 기존에선 나오지 못한 구석이 튀어나오길 바라는 일이었을 테다. 그러나 한편으로 ‘젊은’이라는 말은 젊은이들이 기성에 반해 자신을 위치 짓는 것이기도 하다. 즉, 무언가에 ‘반(反)’하여 이루어지는 비평의 속성이 여기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비평이 결국 텍스트에 반할 뿐이라면 영화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비평이 등장해와야 마땅하다. 무언가에 반하여 등장해오는 게 바로 비평이라면 젊은 비평가를 구태여 부를 이유도 없을 테고, 반대로 젊은 비평가를 찾아 나서야 한다는 말은 우리가 영화를 구분 짓고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반영화의 관점으로 보면 젊은 비평가는 젊은 영화와 함께 등장해오는 현상일 테니 말이다. 


젊은이라는 표현으로 우리는 연대기적 속성을 띤 영화의 배치 상황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으며, 이는 기존에 혼재하며 고정되었던 가치 회로에 가소성을 불어넣는 일종의 재배치 상황이다. 그러니까 ‘젊은’이라는 말은 시네필리아의 양성보다 재사회화에 더 가깝다. 젊은 비평가의 등장을 호소하는 일은 새로운 것을 등장시키기보다 기존의 것을 세분화하는 일에 가까우며, 이는 비평을 위해 텍스트를 먼저 전제해두자고 말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여기서 ‘영화’란 분류되기보다는 유년기에서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점점 변화해가는 과정 안에 있다. 그렇다면 시네필리아 또한 양성이라기보다는 영화를 보는 어떤 과정에서 늙어감의 표식으로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비평의 새로운 관점보다는 한 비평에 있어 무르익은 숙련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바깥’에서 외부인을 초빙하려 다니기보다는 이미 가진 자원을 더 잘 활용하는 방식을 갈구해야만 한다. 젊은 비평가는 [세계]의 바깥이 아니라 우리 세계 안에서 태어나 우리와 함께 늙어가는 중인 것이다. 


내부에서는 기성 질서를 파훼할 수 없으므로 바깥으로 눈을 돌리는데 그런 의도로 설계된 게 바로 ‘젊은’이라는 수사다. 왜냐하면 우리 우주가 탄생 이후로 줄곧 소멸해갈 뿐이라는 의도하에 ‘젊다’라는 말은 우리 우주 안에서 발견될 수 없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는 비평의 장을 소멸의 시대로 바라보는 한편 그곳에서 벌어지는 건 모두 새롭지 않거나, 혹은 과거를 답습할 뿐이라는 시선을 내포한다. 그래서 한편으로 ‘젊다’라는 수사는 그들을 외부인으로 규정하면서 내부를 결속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런 결속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간에 내부는 바깥을 지정함으로써 유지되었다. 무언가 새로운 말을 하는 것으로 다음 시대로 넘어갈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영화는 언제나 현실의 인상에 사로잡혔고, 이는 유물론도 뭣도 아닌 가장 기본적인 시대정신이었다. 물론 영화가 시대정신을 따른다고 해서 우리들의 시대가 영화에 사로잡힌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우리들의 영화가 시대정신에 사로잡혀서 ‘시대’를 통해 영화의 바깥을 꾀하려는 것은 아닐지 의문이 들 뿐이다. 


비평은 ‘젊은’이라는 수사를 통해 자신이 처한 시대를 극복하려 든다. 자신은 이미 끝났고 후대라면 이를 개선할 수 있으리라고 여기면서 자기 죽음 이후의 바깥으로 젊음을 지정한다. 그러나 젊음 이후에 성숙함이 있다. 여기서 성숙함은 자신의 젊음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선 이에게 주어지는 칭호와도 같은데, 비평의 관점은 이와 유사하게 어떤 대상이나 현상의 젊음을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지 그것을 불멸하게 만드는 게 아니다. 비평한다는 건 젊음을 성숙함과 분리해 바라보는 일이고 여기서 젊음은 어떤 것의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우리가 당장에 처해있지 않다는 점에서의 바깥에 불과하다. 따라서 죽음의 극복수단으로 젊음을 지정하는 일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생존을 이어가는 것뿐이라는 점에서 부당하다. 단지 살아남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세계를 살아가는 것에서 삶의 터전을 바꿔보려는 시도는 단순히 과거를 밀어내기만 하는 걸로는 충족되지 않는다. 성숙해진다는 건, 그런 과거를 바깥으로 밀어낸다는 점에서 젊음에 반하는 일이다. 


물론 ‘바깥’에서 무언가 해결책을 갈구하려는 시도는 역사적으로 흔했다. 가령 근대를 두고서 탈근대를 선언하는 일에는 기성 체계의 붕괴와 함께 ‘바깥’으로 눈을 돌리는 일이 뒷받침됐다. 여기서 근대적 시간이란 선형적 시간이었으며 질서는 항상성을 토대로 순환하는 가치를 의미했다. 그러나 탈근대적 시간에서 우리는 인간의 시간이라 불릴 만한 주도권을 회복했고 이에 따라 시간을 절단하고 조각낼 수 있는 기계적 시선이 발달했다. 이러한 시선의 연장선에서 서구 이성은 실패했고 이제 시간은 통제할 수 있는 자연이 아니라 정복해야 할 대상임이 밝혀졌다. 이를 따라 시간에 대한 회의가 등장하는데, 쉽게 말해 오늘날 영화는 어떠한 실패의 감정을 안고 있으며 비평 또한 그에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비평은 그러한 실패의 감정에서 피어났다는 근본적 한계로 인해 이후라던가 바깥이라는 말에 얽매이게 되었다. 통제 가능한 시간을 공언했던 영화 기술은 자신조차 통제할 수 없다는 우연성을 내세웠지만, 이는 사실 우리가 늘 무언가를 마주할 뿐이라는 점에서 젊음을 그러한 그리움으로 위치 지을 뿐이었다. 


젊은 비평가에 대한 환상은 단순한 세대교체 그 이상의 것일 수도 있다. 단순히 나이가 젊거나 신인이라는 맥락에서 사용되어야 할 이 말에는 세계가 점점 노쇠해가고 있으며, 언젠가는 이런 우주도 끝나버리라는 비관론이 자리한다. 그리고 이 맥락에서 젊음이라는 말은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했던 실패를 다시 마주하기 싫다는 어리광, 혹은 그런 반성 없는 미래를 기약하는 일이다. 아이러니한 건 실패를 경험했던 이들에게서는 본래 두 개의 성향이 있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실패를 경험했던 이들은 보통 경험을 통해 더욱 단단해지거나 아니면 과거의 실패에 매몰되어 다시 일어나지 못하거나 한다. 오늘날의 영화 비평은 아마도 후자에 더 가깝다. 이미 영화를 탄생부터 완성된 것으로 보는 시점에서 실패 이후에 세워진 영화 매체가 구태여 그런 실패를 답습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감성적 면모를 드러내는 일은 ‘전후’의 영화, 실패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인 ‘젊음’을 호명한다. 그들은 그러한 실패를 자양분 삼아 계속해서 대안을 갈구하는 처지에 자신을 놓으면서 자신의 젊음을 그리워했다. 


그렇게 보면 이 문제는 돌아갈 곳을 갈구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아는 의미에서의 젊음은 아니다. 젊은 비평가라는 환상은 오히려 “실패를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부러움이다. 문제는 실패를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건 애초에 우연성의 예술인 영화 안에서 발견될 수 없다는 점이다. 우연함은 어떠한 마주함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일상의 실패로 여겨지며, 이는 곧 영화가 실패라는 점을 뜻한다. 그러니 실패가 없었다면 영화도 없었을 테고 바꾸어 말하면 영화를 비평하는 일은 그러한 실패를 마주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결국 젊은 비평가를 호명하는 일은 애초에 실패 자체가 영화의 구성성분이라는 점에서 영화의 바깥을 모색하는 일이다. 젊은 비평가라는 환상은 곧바로 제시된 해결책과도 같으며 이 완결된 형식은 처음부터 바깥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러니 비평은 자신에 대해 말하기보다 세상에 먼저 자신을 말해야만 한다. 실패가 회복 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면, 실패가 [세계]의 범주에 있다면 이는 처음부터 예측된 것이므로 진정으로 실패는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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