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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13. 2023

SNS와 자전적 비평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를 보며 한 생각은 비평가와 SNS였다. 그리고 이 생각의 시작은 영화를 같이 관람한 이의 취향이었다. 한국영화와 코미디 장르를 선호하는 관객에게 이 영화가 볼만하게 다가온다는 건 생각지 못했다. 더군다나 근래에는 점점 더 단편으로 끝내기 어려워지고 있는 마블 영화에 어떠한 이해를 기대하는 일은 몹시 이상해 보였다. 물론 ‘이해할 수 없기에’ 코미디 장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사실 코미디는 여타 장르보다 국가적인 성향이 크다는 걸 생각해야 한다. 코미디가 다루는 유머에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기능이 있다는 걸 떠올려보자. 우울함은 유머와 반대되며 이에 따라 유머 없는 삶은 우울함의 증세를 낳는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적으로 지적하기도 했던 이 대목은 인간에게 잠이 갖는 역할과도 같아서, 유머는 계속해서 수행되어야만 인간의 삶이 유지된다. 요컨대 코미디는 뇌를 주기적으로 청소한다는 점에서 잠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고, 이는 곧 영화를 잠에 빗대었던 기능적인 수행과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사실 코미디 장르야말로 영화를 두고서 ‘마비’에 빗댔던 부정적인 시선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좋은 방법인 건 아닐까? 코미디는 뇌를 세척해서 다음을 살아가게 해주는 기능적인 장르가 아닐까? 


이를 따라 코미디는 다음의 두 갈래로 파생된다. 찰리 채플린처럼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신체 기능에 관한 게 있다면, 자크 타티처럼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사회 기능에 관한 게 있다. 이중 후자의 경우 위에서 말한 국가적인 성향에 해당해서 한 나라의 문화나 사회에 소속되지 않으면 이를 이해하기 어렵다. 기본적으로 지식의 범주를 넘어 체화의 영역에 있고, 이는 머리로 학습한 것만으로는 유희할 수 없는 부류다. 바꾸어 말해 이는 우리가 차가운 게 아닌 뜨거움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을 뜻하기도 한데, 쉽게 말하면 코미디는 무엇보다 ‘감성’적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영화를 언어로 파악하는 일의 한편에는 이에 포섭되지 않는 영역이 분명 있다는 점에서 코미디의 역할은 특수하다. 그렇다면 코미디의 이러한 기능은 현실에 공존할 수 없는 영역을 수면에 들여온다는 점에서 일종의 정신분석학적 작업에 빗댈 수 있지 않을까.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마비라는 점에서 이성적인 사고가 기능을 멈추는 몇몇 순간에 관해 말해보고 싶다. 이야기라는 게 결국 언어화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언어화에 실패하는 일은 이야기하기의 실패로 간주되곤 하지만, 그러한 실패를 의도할 때 우리는 적절한 수준의 마비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코미디는 미지와의 조우이지만 불쾌감 앞에서 멈춰 서기에 골짜기에 빠지진 않는다. 난간 앞에 걸친 채플린의 스케이트나 쓰러지는 집에 속한 키튼의 경우처럼 코미디는 손상을 의도하지 않는다. 이성이 완고함을 제공한다면 감성은 숨 쉴 구멍을 제공하며, 마비는 중단이 아니라 틈새를 뜻한다. 이는 정신분석학이 말하는 실재가 아니라 보다 현실적인 측면에서의 틈새다. 술을 마시는 게 의도적으로 현실을 마비시키는 일이라면 코미디는 현실이 이상적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의도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감각의 교란을 대리하는 장르다. 헌데 이 감각의 교란은 나원영이 지적했던 대체 현실의 한 면인 듯 보인다. 나원영이 『대체 현실 유령』에서 지적한 시계열의 교란은 늘 이상을 꿈꾸지만 가끔은 바깥을 들여다보고 싶은 이들에게 허락된 일렁임의 현실, 혹은 감각의 혼선이다. 어느 한 쪽에 소속되고 싶진 않지만 그럼에도 어딘가를 들여다보고 싶을 때 우리는 휘청이는 감각을 택할 수 있다. 쉽게 말해 VR이 의도적으로 지평좌표계에서 이탈하는 장르라면 코미디는 지평좌표계의 혼란을 의도하지 않는 미끄러짐의 장르이다.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중심을 잃지만 금세 현실로의 균형을 찾는 이 장르는 예외로 빠지지만 길을 완전히 잃지는 않는다.


왕가위가 <동사서독>의 제작에 어려움을 겪을 때 <동성서취>를 제작했다는 사실은 코미디가 휘청임의 장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코미디의 가장 큰 장점은 늘 결론으로 돌아온다는 점이며 그런 결론이 항상 옳다는 점에 있다. 그러니 우리는 코미디 장르를 보며 결론내기를 우려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영화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에겐 늘 복귀 가능성으로의 틈새가 주어져 있으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가오갤 3>가 어떤 이에게 코미디 장르로 이해된다는 점은 내부적으로 볼 때 가족으로의 귀환 서사가 성공적으로 안착해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이 어차피 가족으로 돌아온다면 중요한 건 가족의 결론이 아니라 기원과 과정일 것이며, 여기서 ‘가족’이라는 테두리는 전체적인 서사의 지평좌표계가 된다. 어쩌면 이 점이야말로 <가오갤>이 기존 마블 영화와는 달리 독립적인 위치를 갖는 이유일 텐데, 행복한 결말이 예정된 상황에서는 어떤 시행착오도 모두 희극을 위해 설치된 장치에만 불과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항상 가족의 테두리에 엮여있었고 이는 길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 어떠한 시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장르가 영화 전체를 견인하는 특성이라는 점을 드러냄과 동시에 이런 견인의 행위는 이야기를 합리화하는 게 아니라 성공적인 결론의 지점을 만들어두는 일이라는 걸 뜻한다. 


작품 하나를 즐기기 위해 다른 매체의 파생 상품을 구매해야 한다면, 작품을 즐기는 일은 꽤나 힘들어진다. 이거 하나 보려고 굳이 시간을 더 들여야 한다는 마음가짐이나, 이거 하나로 모든 걸 다 즐기고 싶다는 마음은 작품에 대한 ‘가성비’를 따지게끔 한다. 문제는 작품 하나만 보고 모든 걸 파악하는 건 물론 표현하는 쪽에서도 불가하지만 보는 쪽에서도 불가능하다는 점인데, 그 말인즉 이야기는 늘 흩어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에.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두는 것엔 특정한 좌표값이 필요하며 여기서 장르가 그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러니 코미디는 적어도 가성비에도 한 다리 걸쳐있다. 코미디는 안전한 결론을 제시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이야기를 망설이지 않게끔 한다. 이른바 성공적인 결론, 지평좌표계, 이런 의미에서라면 비평의 장르는 코미디가 되어야만 한다. 비평은 글 한 편에서도 그렇고 담론 안에서도 길을 잃을 수 있지만 이 안에서 자세를 완고히 할 필요는 없다. 논리의 완결성은 흠결은 남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세련되지만, 반대로 볼 때 방어적인 자세와 적대적 태도를 뜻하기도 하므로 늘 특정한 양의 마찰계수를 갖는다. 반대로 비평이 코미디 장르가 될 때 우리는 결론에 대한 고민 없이 이곳을 완주하는 게 가능하다. 


비평가에게 SNS의 역할이 바로 자신을 결론으로 제시하는 일이라고 본다면 이런 생각은 더욱 흥미로워진다. 비평가에게 글이 정제된 논의 즉 이야기를 따라가는 일이라면 SNS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그건 개인의 일상일 수도 있고 기고된 글에 관한 추가 논평일 수도 있는데 어쨌거나 이는 비평가를 더 많이 알아가기 위한 속성이라는 점에서 의미있다. 이는 마치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서 이에 파생되는 다른 파생 작품이나 인터뷰 기사 등을 찾아보는 것과도 마찬가지로, 재미있는 점은 <가오갤> 시리즈처럼 다른 파생 없이 본작으로도 충분한 완성도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비평이 한 편으로 완결되지 않을 때 좌표는 흔들리고 사람들은 독자는 길을 잃는다. 그래서 SNS는 대개 독이지만 약간의 휘청임 정도라면 이는 코미디 장르를 세우는데 기여할 수 있다. 가령 SNS는 발화주체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지만 어쨌거나 그러한 발화가 어떤 주체에서 나왔는지를 확언하기에 읽는 이에게는 안전한 결론으로 도착한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했는지에 따라 다른 의도로 다가오는 상황에서 SNS는 비평가에게 도달하는 가장 안전한 길이 된다. SNS는 우스꽝스러운 희극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그조차도 코미디의 속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이 어질어질함은 비평 담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비평이 지닌 가족의 속성은 비평가의 측면에서 가족 만들기로도 풀이되는 것 같다. 비평가는 자신의 의견을 지지해줄 사람들, 또는 자신을 좌표 삼아 유사성을 지닌 이들 간의 가족 공동체를 만들고자 한다. 어쩌면 카르텔이라는 표현이 사용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이러한 모임에서의 흔들거림은 그 자체로 세상을 비딱하게 바라보면서도 결국 세상을 떠나지는 않는 안전함을 선보인다. 그러니까 비평가에게 SNS는 역설적으로 자신을 세상에 결론으로 제시함으로써 세상을 떠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굳건한 다짐일 수 있다. 즉 SNS는 세상을 감염시키는 바이럴 작업이라기보다 오히려 비평가에게 더 필요한 작업일 수 있다. 존재의 위협을 겪는 과정에서 비평가는 대안적 가족 꾸리기에 몰두하며 그 과정에서 필요한 건 SNS의 테두리인 것이다. 여기서 SNS는 마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처럼 어떠한 프렌차이즈를 표방하는 일로 여겨지며 그와 동시에 장르적 성질을 유지시킨다. 이 장르가 바로 코미디로, 코미디는 비평가의 사상을 언어화하는 작업인 비평에서 포섭되지 않는 나머지를 실체화하는 작업을 동반한다. 즉 SNS는 언어를 이탈하지만 다시금 언어로 돌아온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물론 그 가족적 성질에 관해서도 무시할 수는 없고 말이다. 가족은 그저 형식일 뿐이고 중요한 건 언제나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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