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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22. 2023

버튜버/영화는 일정 정도의 현실을 필요로 한다



생각해보건대, 버츄얼 아이돌과 영화 간에는 기묘한 구석이 있다. 흥미로운 상상에 가깝지만 이렇게 반짝이는 생각을 그냥 내버려두기엔 아깝다. 이를 따라 우상숭배에서 버츄얼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방식을 먼저 살펴보고 싶다. 먼저 버츄얼 아이돌에 대해 말해보자면, 한국에서 이는 크게 오디션 프로그램의 연장선에서 파악된다. 슈퍼스타K와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2010년대 초에 유행했고 이후 2016년에 프로듀스 101의 흥행으로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이 유행하게 된다. 이후 인터넷 방송인 우왁굳이 2021년에 런칭한 이세계 아이돌 프로젝트는 한국의 버튜버 업계에 아이돌 붐을 일으켰다. K/DA와 같은 게임 캐릭터를 통한 아이돌 그룹이 언급됨과 함께 메타버스와 같은 가상의 공간에 대한 관심은 ‘아이돌’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어졌다. 그 말인즉, 아이돌은 우상인데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버츄얼’이 어떻게 우상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아닐게 아니라 버츄얼 아이돌이라는 분과는 아이돌이라는 컨셉만 차용했을 뿐, 현실에 존재하는 그 무엇과도 닮지 않았으며 오히려 기존에 존재하던 부류의 노래 방송을 그룹화한 것에 가까웠다. 쉽게 말해 버츄얼 아이돌이라는 분과는 사실상 여러 세계관을 그룹화해서 이들 간의 관계성을 확보하고, 관객을 횡단하게 하는 공연 작업이었다. 


‘세계관’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버츄얼 방송에는 특정한 배경이 필요하다. 인간에게서 공간을 지우고 캐릭터에 집중하게 하는 그린스크린이 있듯, 현실에서 자신을 지우고 가상으로 들어가는 버츄얼 스트리머에게 ‘세계관’은 가상에 비쳐지기 위한 그린스크린이다. 현실의 스트리머에게 그린스크린이 자신을 드러내는 누끼라면, 버츄얼 스트리머에게 그린스크린은 현실에서 자신을 은폐하는 하나의 무대다. 이 둘은 서로 현실에서 이탈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배경에 차이가 있다. 현실 스트리머가 가상의 세계로 진입하는 한편 버츄얼 스트리머는 세계의 가상을 배제하고자 한다. 전자가 일종의 몰입이라면 후자는 세계가 어떤 형태로든 구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이는 기본적으로 매체의 문제이기도 한데, 전자가 매체의 형식을 컨테이너로 삼는다면 후자는 매체의 형식을 지움으로써 세계에 매개(Media)되기 때문이다. 이는 현실 스트리머가 실시간성을 동시대성에서 끌어오는 것과는 달리, 버츄얼 스트리머의 경우는 실시간 방송이 동시대성을 증명하지 않는다는 점에 귀인한다. 실시간이 동시대를 규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시간이 공간으로 확장되려면 그 매체의 형식은 허물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현실 스트리밍의 가장 큰 특징인 실시간은 소위 상호작용에 관계됨으로써 시청자와의 소통을 내세운다. 시청자는 다양한 형태의 후원을 기능화하면서 스트리밍의 실시간에 침투하고, 이는 둘 사이에 어떠한 장벽도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스트리머는 모니터나 소형기기의 프레임 안에 존재하므로 그곳에 갇혀있다는 인상이 있는데, 시청자는 댓글을 남기는 것에 앞서 후원 ‘기능’을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프레임에 개입할 수 있다. 즉 스트림은 어떠한 흐름이며 [세계]는 이를 가둬놓는 것, 한정된 관측 상황 안에서 벗어나 ‘안쪽’ 공간에 진입하는 형태로 구성돼있다. 그러니 현실 스트리머의 방송 구조는 자신의 세계를 증명받는 게 아니라 영토의 일종이며 이주의 가치를 갖는다. 이 대목에서 현실 스트리머는 버츄얼 스트리머와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소위 버츄얼 스트리머의 시청자층이 서브 컬처에 익숙한 향유 계층이라는 점이 그러하다. 서브 컬처 장르의 문법은 장르라는 점에서 어떠한 특징과 유행을 따라가는 듯 보이나, 사실은 개인의 취향을 확고히 한다는 점에서 네이션에 가깝다. 바꾸어 말해 서브컬처의 청자는 어떤 이주의 경향에서도 개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며 이는 버츄얼 스트리밍이 기본적으로 시청자를 가둬둘 수 없다는 점을 뜻한다. 


버츄얼 스트리머는 버츄얼 아바타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현실의 자신을 숨기는 것 같지만 오히려 이를 연기하는 사람이 확실하다는 점에서 현실에서 자유롭지 않다. 여기서 버츄얼은 ‘그들’의 세계가 ‘우리’의 세계와 분리하는 것에 사용되며 여기서는 인위적인 흐름의 단절이 관측된다. 버츄얼은 개연성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벗어나 딱히 개연적이지도 않고 되려 충분히 그럴법하다는 핍진성이 지배하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서브 컬처의 위치는 주변부가 아니라 허물어진 경계를 토대로 평탄화되며 이는 곧 컬처 자체, 문화적 혼종성을 낳는다. 특히 버츄얼 스트리밍이 국적에서 비교적 자유롭다는 건 홀로라이브와 같은 사례에서도 발견된다. 영미권이나 일본 등의 버츄얼 스트리머를 키리누키해서 자막을 붙여 올리는 채널의 인기는 버츄얼 스트리머에는 국적이 아니라 언어만이 장벽으로 자리할 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버츄얼 스트리밍 연기자의 실제 국적이 문화적 혼종성 안에서 세계의 핍진성으로 녹아들기 때문인데, 쉽게 말해 버츄얼 안에서 국적은 현실 지구가 아니라 가공의 세계 혹은 평행한 세계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버츄얼 스트리밍은 비교적 언어에 구애받지 않는 음악의 속성과 더 잘 어울린다. 


한편으로 이는 버츄얼 아바타 연기자의 신분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곤 한다. 온라인과 디지털의 장점을 살리는 과정에서 절대다수의 시청자를 확보하는 방법은 언어를 확보하는 일이다. 그래서 MCN 등에 소속된 기업세 버튜버들은 주로 2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하는 경향이 있으며, 개중에는 혼혈이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 두 개의 국적은 최소 두 개의 언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할 수 있으며 또한 양쪽 모두에 팬층을 둘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자신을 교집합 삼는다. 현실이라면 어느 하나에도 제대로 소속될 수 없다고 비관하는 면도 있을 수 있겠지만 버츄얼의 세계는 ‘하나’를 위한 하나를 요구하지 않으므로 이는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버츄얼에서 하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연기의 정체성 또한 하나가 아니다. 버츄얼 스트리머는 신의상 발표나 여러 다른 모드를 선보임으로써 가면을 쉴 새 없이 바꾸는 게 가능하다. 물론 여기서 가면은 국적을 옮기는 것과 같은 식의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무대의 어떤 양식을 가꾸는 일에 가깝다. 소위 컨셉을 잡고 행동한다는 점에서는 연기의 양상을 띠지만, 하는 쪽과 보는 쪽 모두가 그러한 행동의 진의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이는 놀이의 일종으로 파악된다. 이 점에서 버츄얼은 경계를 허문다고 볼 수 있으며 ‘서브’는 자신의 위치를 옮기지 않고서도 세계 안에서의 변위를 겪는다. 


앞서 버츄얼 방송에 배경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던 것은 바로 이렇게 위치를 옮기지 않기 때문에 요구되는 사항이다. 어떠한 세계 안으로 더 잘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현실의 그린스크린과는 달리, 처음부터 배경 없이 캐릭터의 형태로 조립된 버츄얼 아바타는 리깅과 트래킹 작업으로 현실 연기자와 연결된다. 리깅이 2D 표식을 조립해서 하나의 유기적인 형태를 만든다면, 트래킹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물면서 주체의 변위를 끌어낸다. 연기자는 리깅을 통해 현실의 위치를 잃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서브의 위치로 변위하며 여기서 세계는 주류도 서브도 아닌 문화 그 자체로만 남는다. 물론 이러한 버츄얼 스트리밍 작업이 완전한 현실의 일부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한 건 이러한 변위는 단지 연기자만이 아니라 청자에게도 영향을 미치며 이러한 부유가 그 자체로 하나의 유희라는 점이다. 현실 스트리머의 방송과 마찬가지로 버츄얼 스트리밍에서도 ‘흐름’은 단지 프레임을 통해서만 들여다보이지만, 그린스크린을 통해 은폐된 현실에서 프레임은 경계가 아니라 포착의 도구일 뿐이다.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면 그제야 보이는 특수한 것들, UV 광선을 활용하는 과학수사대처럼 프레임은 버츄얼함을 포착하는 도구이다. 


버츄얼함을 포착하는 도구가 곧 프레임이라는 말은 어떤 점에서 현실의 흐름에서 순간을 잘라낸다는 카메라의 광학적 시선을 연상케 한다. 촬영의 순간을 중심으로 어떠한 현재가 분리되어 나온다는 점이 아니라, 어떠한 경계를 통해 공존하지만 보이지 않던 것을 평면에 나열하는 해체의 테크닉이 바로 카메라에 있었다는 걸 염두에 두자. 카메라는 영화를 두고서 현실의 어떤 공존을 드러내는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이를 따라 발굴의 속성을 갖게 되었다. 현실은 분명 존재하지만 흐름 안에 있기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카메라를 통해 이러한 무더기를 저버릴 수 있다고 말이다. 여기서 영화는 그러한 발굴을 하나의 대안으로 전위하는 이들의 의견을 통해 하나의 우상이 된다. 이야기를 믿음으로 만들고 그러한 핍진성을 실체화한 우상은 현현의 일종이었기에 대부분의 종교에서 금지되곤 했는데, 이것이 재현에 대한 금지 이전에 이미지를 존속시키는 투입의 과정에 관한 것이었음을 떠올리면 영화 만들기의 과정이 왜 우상 숭배이기도 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영화는 버츄얼과 현실 간의 경계를 허물어 평탄화한다는 점에서 우상이었으며 또한 그린스크린, 이것은 ‘영화’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어떠한 세계에 소속되어버린다는 점도 그러했다. 이른바, 영화는 가상의 흐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버츄얼 스트리밍이었던 셈이다. 


영화는 과거를 흐름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베르그송의 맥락으로 기억을 보여주는 단서가 됐지만 그러한 과거가 현재보다 뒤에 있진 않았다. 과거는 기억의 한 형태라는 점에서 그 형식을 갖는 게 중요했으며 이를 통해 과거는 현재와 다른 곳에 배치되곤 했다. 하지만 경계가 허물어지는 자리에서 과거는 저장과 확보의 방식으로 불려 오는 게 아니라 침투하고 횡단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를 통해 현재는 보다 직설적인 의미에서의 현장이 되고 기억은 여러 다른 것들이 어울리는 가능성, 즉 흐름 안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하나의 문화적 판본으로 이행한다. 그러한 점에서 현실 스트리머가 인플루언서로써 흐름 안에 지지자들이 모일 예외지대를 설정하는 한편, 버츄얼 스트리머는 항상 흐름 안에 있으며 그러한 흐름을 정체성 삼는다. 여기서 네이션은 특정한 지리적 기반을 두지는 않지만 비슷한 문화적 요인을 향유하므로 스트림을 따라 이동하고, 또 산포하더라도 언제든 집합하는 게 가능하다. 영화와 버츄얼 스트리밍에서 우상-아이돌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는 바로 그렇게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문화적 공유지를 만든다는 점에서 기묘한 일치가 있다. 


*


지난 5월 21일 저녁에는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점에서 버츄얼 아이돌의 팬미팅이 있었다. 스텔라이브 소속 아야츠노 유니의 팬미팅은 영화관의 스크린을 빌려 진행되었고, 팬들은 한 자리에서 방송을 시청했다. 팬미팅은 유튜브를 통해 방송을 송출하고 이를 다시금 스크린에서 보여주는 방식이었는데 단순히 일방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실시간’이라는 온라인 송출의 이점은 오프라인의 사운드를 온라인에 투입할 수 있게끔 해주었다. 온라인에서 스트리머가 반응하면 오프라인에서 호응하는 식의 소통이 이루어졌다. 단순한 팬미팅에만 불과할 수 있는 이 사건에는 몇 가지 특기할 만한 점이 있는데, 첫 번째는 영화관의 스크린이 하나의 거대 화면처럼 사용되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영화관이 온라인 유저들의 모임 장소가 되었다는 점이다. 전자의 경우 스크린은 유저들이 평소 사용하던 모니터나 스마트폰, 태블릿 등의 화면이 확장된 형태라는 점에서 영화에 대한 본질을 일깨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보여주는 매체이며, 그러한 ‘봄’을 통해 현실을 매개한다는 점이 그렇다. 그런데 화면이 커질수록 한 번에 여러 부위를 보는 일은 힘들어진다. 의식적으로 들여다보아야 할 구석이 커지면서 화면을 섬세하게 톺아볼 수 없고, 이를 따라 재관람이 권장된다. 


문제는 스트리밍의 기본이 실시간이라는 점에서 ‘재관람’은 힘들다는 것이다. 실시간 방송의 특징 중 하나는 단일성 즉 지금 보고 있는 이미지는 작금에만 존재한다는 점에 있다. 이를 따라 스트리밍을 큰 화면으로 즐길수록 더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들을 기억하는 건 점점 어려워진다. 즉 큰 화면일수록 점점 더 현재는 소중해지며 현존은 값져진다. 그러니 위에서 말한 후자의 사례를 이 맥락의 연장으로 바라보는 게 가능한데, 유저들의 ‘모임’이라는 점에서 현존의 양상을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버튜버의 경우 연기자가 실존하고 또 특정되지만 화면으로만 만나보는 게 강제된다는 점에서 오프라인 팬모임은 유저들의 순간을 교차시킨다. 버튜버가 온라인이라는 공간에 리얼리티의 근간을 빼앗겼다고 가정할 때, 이러한 논리얼리티는 2D 그림의 활동 기반이 되지만 반대로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듯 보이기도 하므로. 이들이 목격하는 순간의 크기를 키우면 팬들은 화면의 각기 다른 부위를 동시다발적으로 목격함으로써 하나의 화면을 그려내는 게 가능해진다. 즉 큰 화면으로 무언가를 본다는 건 존재의 정밀도를 높이는 것과도 같으며 이를 모두와 함께하는 건 그만큼의 현실을 확보하는 일이다. 


현실을 확보하는 건 영혼의 자리를 만들어두는 일이다. 일반적인 견해에 따라 몸과 영혼의 상관관계를 고려할 때 영혼은 항상 자신이 돌아갈 몸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가령 이집트 미라의 경우 미라화의 근거는 영혼이 훗날 부활할 때 돌아갈 곳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망자는 현세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필요로 하며 이는 곧 미라가 단순히 몸의 일각을 현세에 남겨두는 것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준다. 같은 맥락에서 버튜버는 모니터와 같은 비실존의 맥락에서 존재하지만 반대로 2D 리깅과 같은 작업을 통해서만 아슬아슬하게 현존한다. 리깅이 2D 그림 뭉치를 현실의 움직임에 대응하게끔 해준다면, 이러한 작업은 버츄얼이 얼마나 힘겹게 현실과 연결되어있는지를 보여준다. 버튜버는 금방이라도 끊길 듯한 아슬아슬함으로 존재해있다. 이로 인해 얼마든지 존재의 원리를 의심받으며 그 현실의 입지는 모니터와 같은 좁은 프레임에만 종속된다. 이는 즉 단순히 영혼으로만은 이루어낼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잔다르크의 수난>에서 화면에 꽉 들어찬 얼굴이 존재의 숭고함과 실존을 드러내는 것처럼, 버튜버는 화면의 크기를 키움으로써 최대한 현실에 가까이 가닿는다. 말하자면 버튜버는 세계의 바깥으로 나갈 수 없지만 반대로 프레임의 크기를 키워놓을 수는 있다. 


버츄얼 스트리밍은 역설적으로 세계의 크기를 줄여야만 자신을 세상에 내놓는 게 가능하다는 점에서 프레이밍과 깊은 관련이 있다. 버튜버는 안의 사람이 정말로 존재한다고 믿어야만 비로소 참여 가능한 놀이에 가깝다. 버튜버는 이러한 놀이의 규칙을 통해 자기만의 세계를 견고히 하고, 시청자는 버튜버라는 허위의 세계에 몰입하기 위해 바깥을 철저히 배제한다. 이 과정에서 화면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버츄얼 스트리밍은 철저히 외부와 고립됨으로써 시청자 또한 그렇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시청자가 화면을 들여다보는 만큼 화면도 시청자를 들여다본다. 여기서 영화관이 등장한다. 영화는 시작되기 위해 문을 닫는 일을 요구하는데 특히 영화라는 매체가 암실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떠올리자. 사진기의 원리에서 암실이 요구되었던 건 그렇게 해야만 빛이 하나의 점으로 응집되기 때문이었다. 이 암실은 망막의 원리와 마찬가지로 얇은 광량을 한 점에 집중함으로써 시야를 선명히 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무언가를 보는 일에서 대상은 단순히 눈에 비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바라보여지게끔 대상에 구애한다. 팬미팅 장소로 선택된 영화관은 그 점에서 심도가 맺히는 초점이 된다. 영화관이라는 같은 관심사를 지닌 사람들이 한데 모이는 곳이 아니라, 이들이 발견되게끔 하는 초점이 된다. 


버튜버는 자신의 존재를 선명히 할 요령으로 현실과의 얕은 연결을 유지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최대한 현실과 멀어지는 일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시청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자기의 현실과 멀어지는 과정을 겪는다. 즉 현실에서 멀어진다는 점에서 자기의 생활기반이 되는 땅에서 점점 떠오르는데 이런 일이 심해지면 결국 지구에서 이탈해버린다. 존재가 붕 떠버리고야 마는 것이다. 이때 영화관과 같은 장소는 현실과 분리되어있지만 폐쇄된 장소라는 점에서 영혼이 부유하지 않게끔 해준다. 버튜버는 연기의 속성에서 실존하는 인물을 제거했으므로 현실성을 자발적으로 헌납하지만, 반대로 자신을 프레임 안에 한정킴으로써 그 원리를 존속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버튜버가 현실에 등장해올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마치 물고기가 육지에 나오기 위해 어항이 있어야 하듯 버튜버는 일정 정도의 현실을 필요로 한다. 적당히 현실과 단절돼있으면서도 어쨌거나 현실과의 연결을 잃지 않는 곳, 영화관은 아마도 이런 버튜버의 팬미팅이 진행되기에 적절한 장소일 것이다. 여러 많은 것들이 중계되는 영화관은 단순히 원리적으로만 교류하는 채팅창을 넘어 무언가를 살아가게 하기에 적합하다. 그리고 사람의 삶이 겹쳐지는 이 장소에서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실이 등장한다. 


다시금 영화관이라는 장소로 돌아가면 극장은 단순히 큰 화면에만 불과하지 않다. 코로나 이후의 극장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연결하는 징검다리처럼 이용된다. 가령 코로나 시기 영화관은 상영할 영화가 없다는 한계로 인해 일반인에게 대관을 진행한 바 있다. 극장의 거대한 화면으로 게임이나 영상등을 보자는 이 대관은 상영관 하나에 인원 네명 정도가 들어간다는 점에서 막대한 공간 낭비처럼 보였다. 이는 마치 비행기에 승객이 한두 명만 탄 것과도 같아서 평소였다면 있을 리 만무한 일이었지만, 코로나 시기엔 그런 게 가능했다. 코로나 시기에 극장은 월드컵이나 롤 경기 등의 중계방송을 진행했으며 이는 코로나 이전 시기에 진행되었던 GV의 프로그램의 다양화와는 다른 맥락이었다. 극장 프렌차이즈는 집에 있는 사람들을 밖으로 불러내기 위해 스마트폰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을 ‘굳이’ 더 크게 보고 싶다고 말하게 해야 했다. 이후 코로나 점차 진정되고 거리두기가 해금되면서 영화관은 전반적으로 축소된 산업을 되살리는 과정을 거쳤는데 스크린의 위용이 여기서 빛을 발했다. 스크린이라는 큰 화면은 무언가에 몰입하면서 화면 상의 존재를 선명히 한다는 점에서 특수했다. 특히나 버튜버의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의 연결이나 믿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어떤 경우, 사람들은 현실에서 도피할 요령으로 다른 세계로의 모험을 택한다. 영화를 보면서 마음에 위안을 얻었다는 시네필이 있는 한편,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것으로 위안을 얻는 게이머도 있다. 이들 모두는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에 몰입함으로써 현실의 무게를 지우고 존재를 붕 띄운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이러한 취미는 적절히 즐기면 현실을 다시 살아갈 용기를 주었지만 너무 빠지면 다시 영혼을 붙잡지 못하는 대참사가 벌어지곤 했다. 그런데 모임 장소의 맥락에서 영화관은 그러한 화면에서만 볼 수 있는 존재를 보러가는 곳이다. 사람들은 눈앞의 것 이외를 생각하지 않고서 현장의 분위기에 휩쓸릴 수 있다. 이른바, 현실에서는 자신을 전면에 드러내지 못하던 이들은 영화관처럼 현실과의 분리를 겪는 장소에서 자기 존재를 전면에 내세울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존에는 무언가의 뒤에 숨었다는 게 아니다. 단지 버튜버가 전면에 드러나는 공간인 스크린에서는 그들을 관찰하기 위해 몰입하는 행위가 자신 또한 전면에 나서게끔 해줄 뿐이다. 즉, 영화관의 이러한 면은 코로나 이후 숨어버린 스크린의 은폐가 사냥꾼들의 허위가 아닌 대중이 모여 의견을 나누는 공론장이 될 가능성을 제기한다. 


버츄얼 스트리밍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애호처럼 보인다. 연기자가 정말로 현실에 존재한다는 걸 알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거나 또는 거리를 두려 한다. 이런 모습은 마치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대지를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즉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이 잠시 육신을 떠나있기를 원하면서 버츄얼 스트리밍을 보는 것만 같다. 하지만 영혼이 없을 때 사람들은 육체에 매료되기 마련이다. 버츄얼 스트리밍은 사람들에게 버츄얼함에 관한 환상을 제공하지만, 오히려 그런 환상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사람들은 육체에 매료되는 것이다. 이른바 버츄얼함과 아이돌함이 영화관에서 이루어지는 것에서는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사람들이 영화를 보면서 현실을 등지려 하는 게 아니라 붕 떠버린 존재의식을 집중할 요령으로 영화관을 택한다면, 이때 영화관은 일종의 대피소가 아니겠느냐고. 이 경우 바깥이야말로 되려 중력이 작동하지 않는 공간일 테다. 그렇다면 영화관은 존재하지 않는 걸 있게끔 해주는 특수의 공간이 아니라 존재의 특정 양상을 제공하는 장소이다. 이는 영화관이 더는 영화를 우상으로 만들지 못하는 상황에서 영화의 가상성이 어떻게 현실 기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겐 일정 정도의 현실이 필요하다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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