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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10. 2023

깊게 심취한 사람, 혹은 착란의 열기


오타쿠와 시네필의 관계를 생각하며 아이돌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오타쿠라는 말의 의미가 “특정 문화에 깊게 심취해있는 사람”의 정도로 합의된 상황에서, 시네필은 ‘영화애호가’라는 순화어 외에 ‘영화 오타쿠’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돌이라는 단어는 ‘우상’이라는 본뜻처럼, 실체 이외의 대리물을 경배한다는 의미에서 영화 관람 문화를 설명한다. 하지만 생각을 이어보고 싶은 건 다른 쪽이다. 예를 들어 <러브라이브!>는 아이돌을 주제로 한 애니메이션 프렌차이즈다. 폐교 위기에 처한 학교를 ‘아이돌 데뷔’로 살려내자는 로그라인은 아이돌을 과연 무엇으로 여기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아이돌 데뷔로 팬이 생기면 자기가 다니는 학교에 관심이 늘어나니 예산이라던가, 여러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일까. 이런 서브컬처에서 아이돌은 “무대에서 빛난다”라는 점을 극대화한 형상을 하고 있다. 실제 무대에 오르는 엔터네이너로의 아이돌과 학교와 같은 집단에 소속되어 이를 부흥시킨다는 ‘무대’의 소속인원으로서의 역할이 중첩된다. 즉, 아이돌은 부흥문화와 자아실현의 두 가지 맥락이 있다.


그런데 이런 부흥문화와 자아실현은 오늘날의 오타쿠들이 처한 상황과 유사해 보인다. 잔혹하거나 냉혈한 이미지에 대한 악역으로서의 킬러 캐릭터만큼이나,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시기를 보내는 아이돌 캐릭터에 대한 소비는 “높은 곳에 올라 주목받는다”는 이미지쯤으로 소비되는 것 같다. 이른바, 서브컬처의 아이돌은 캐릭터에 대한 기호와 성애적 소비의 대상이기 이전에 “무대를 살려내고” “그 위에 오를 수 있는 자신”을 상상한다는 점에서 관객 일반에 이입 대상이 된다. 오늘날 시네필의 입지와 역할도 매한가지다. 자신을 두고서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영화애호가의 심리는 “자신은 영화를 지킬 수 없다”는 의식에 관한 회피성향이다. 영화/문화를 살려낼 수 없기에 영화를 좋아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그들은 ‘애호’라는 말에서 ‘부흥’을 분리하지 못한다. 이들에겐 좋아하기 때문에 살려보고 싶지만, 반대로 살려낼 수 없기에 좋아할 수 없다는 마음도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시네필에게 필요한 건, 위와 같은 ‘아이돌 데뷔’는 아닐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아이돌은 서브컬처의 단골 주제 중 하나이며 지금에 와선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고 있다. 세간에 착한 일진과 나쁜 일진이라는 짤방이 돌았던 것처럼, 환생형 아이돌이나 이세계 아이돌, 버츄얼 아이돌이 계속 늘어나는 현상은 아이돌에 대한 장르적 규정을 보완한다. 장르로서의 아이돌은 예쁘고 끼가 많은 만능형 엔터테이너라기보다 춤과 노래를 통해 팬을 끌어모은다는 컨셉에 더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현실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듯 보이지만, 장르로서의 아이돌은 단순히 팬의 입장에서만 올려다보아지는 현실의 아이돌과는 달리 스크린과 관객의 형식에 제한된다. 이들 간에 유대와 관계가 오가는 과정에서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의식은 일종의 콘서트에 비견된다. 콘서트가 현장의 분위기로 양측 모두를 옭아매듯 아이돌은 팬과 함께 어떠한 세계를 살아간다. 핵심은 양측만이 존재하는 고유의 세계라는 점에 있다. ‘바깥’이 어떻든 간에 아이돌은 아우라를 중심으로 자장을 펼친다는 점에서, 또한 팬들로 하여금 이러한 자장에 소속되기를 원하게 한하게 한다는 점에서 ‘합의’로서의 장르적 성격을 띤다.


여기서 ‘장르’란 인물의 컨셉이 뒷받침되는 배경사항이나 설정의 흐름적 배치를 뜻한다. 장르론에서 말하듯, ‘장르’라는 건 우리가 따로 세계를 학습하지 않더라도 배경과 설정이 관객에 자연스레 전달될 수 있는 화법이다. 즉 장르는 우리가 미장센이라 부르는 연극에서의 배치가 그 상연에서 드러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우 장르는 미장센에 시간이 결합한 것이며, 우리는 배치가 드러나고 풀려나는 일을 통해 인물의 행동이나 성격을 간접적으로 보조받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장르는 영화와 관객 사이의 합의를 전제한다. 장르적 관습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에 통용되는 기호들은 모두 무력화되고야 만다. 다른 한편 이는 장르라는 말이 어느 정도 무장해제를 전제한다는 점을 뜻한다. ‘장르’란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기보단 합의와 양보의 역할을 강조한다. 따라서 관객을 무대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장르 관습은 관객이 그러한 배치를 거부할 때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된다. 그러니 생각해보건대, 서브컬처에서 아이돌 장르는 거진 그러한 의미에서 작동하는 듯 보인다.


엔터테이너와 팬의 관계를 다루는 아이돌 문화는 소위 말하는 ‘덕질’에서 관계의 측면을 강조하는데, 장르에서는 좀 다르다. 장르에서 아이돌은 일종의 영역 전개, ‘세계관’을 구축하는 일과 관련 있다. 아이돌은 무언가 그럴듯한 인상을 주기보단 독자와 팬층이 참여하고픈 설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장르로서의 아이돌은 아이돌 개인과 무대, 독자 모두가 하나의 배치로써 동작하므로 독자가 참여를 거부하는 순간 ‘아이돌’은 장르로서 동작하기를 실패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돌에게 팬을 끌어들이는 일은 중요하며, 매력은 그 과정에서 십분 발휘된다. 팬이 없다면 아이돌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관객이 없다면 영화가 ‘존재’한다고 볼 수 없듯이. 아이돌이 어떠한 세계관을 전제하는 이유는 살아갈 만한 세계가 있어야만 비로소 삶이 존재할 수 있어서다. 즉, 아이돌 문화는 근본적으로 영토화이며 여기서는 단지 현실에 기반(AR)할 것인지 아니면 대체현실(VR)을 염두에 둘 것인지만이 선택지로 남는다. 말하자면 여기엔 다음과 같은 물음이 있다. “꿈은 덧씌워질 수 있는가? 혹은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는가?”


누군가는 부흥이라는 말을 두고서 재건이라는 표현을 쓴다. 기존에 있던 걸 고쳐보자는 쪽이 있다면, 기왕 망가졌으니 새로 짓자는 쪽도 있다. 이 사례를 각각 AR과 VR에 빗대어볼 수 있을 것이다. 아이돌이라는 장르는 현실을 재매개하는 창구가 될 수도, 혹은 현실을 재발명하는 시도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에서 ‘현실’은 무대로 사용되고 있다. 아이돌은 이러한 이유로 고유명사화되는데, 아이돌을 수행하는 쪽이나 보는 쪽이나 모두 아이돌을 ‘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의 꿈과 세계, 의식을 한데 어울리게 하는 이 현실은 아이돌의 세계, 또는 무대이다. 그래서 장르로서의 아이돌은 등장하는 인물 개인의 목표와 심경을 작품 전체, 보는 이의 마음까지로 확대한다. <러브라이브>와 같은 장르적 시도가 보여주는 건 ‘살려낸다’라는 마음이 한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와 ‘모두’가 살아가는 이곳에 적용될 수 있음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네필은 ‘우리’와 ‘모두’라는 단어가 공통으로 자리할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한 것으로 보인다. 다양체가 분열체로 이해되는 현실 말이다.


장르로서의 아이돌이 ‘데뷔’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이는 관심받기를 표명하기보다 모두와 함께라는 측면이 더 강하다. 정확하게는 모두와 함께 주목받기를 원한다는 점에서 아이돌 장르는 부흥과 애호를 분리하지 못한다. 이와 동일하게 ‘우상’으로서의 영화를 사유하는 시네필 문화는 기본적으로 ‘모두’를 전제한다. 그렇다면 이들에겐 영화 문화가 좌절되었다고 보았을 때 두 가지 선택지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AR이다. 이미 존재하는 것 위에서 점진적으로 의견을 개진하자고 보는 시선이 있을 수 있다. 영화 문화는 자생한다고 말하면서 공동체의 관점을 설파하는 이들에게 영화는 “모두의 무대”이다 다른 하나는 VR이다. 이들은 대체 현실을 구상해서 그곳에 떠나버린다. 이들에게 현실은 하나의 장르이며, 이를 따라 상호 간에 합의된 규칙을 바탕으로 각자의 세계에 몰두한다. 그런데 대체 현실이 개연성과 핍진함을 근간에 둔다고 보았을 때, 현실을 넘어선 현실이란 대체 있을 수나 있는 것일까?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은 대개 꿈에서 시작되는데, 그 꿈은 어디까지나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에서 시작하기 마련이다.


시네필 문화와 아이돌 문화의 공통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을 시네필로 소개하지 않는 이유를 앞서 “영화를 지킬 수 없다”는 마음 탓이라고 말했었다. 이는 달리 말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상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모두를 행복하게 하고 싶지만, 정작 그로 인해 자신과 주변이 불행해진다면 그 목표에서 ‘나’는 주변부를 생략하고 세계와 곧장 연결되고 마는 것처럼, 영화와 직접 연결될수록 주변부에 대한 고찰은 심해질 수밖에 없다. 삶은 살아가는 문제 인식 안에서만 비로소 완성되므로. 그리고 영화란 기본적으로 살아가는 문제라는 점에서, 무대에 오르는 건 ‘주인공’이지만 ‘나’와 세계가 연결되는 방식은 어디까지나 무대에 오름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시네필이 된다는 건 영화에 대한 애호나 성애의 감정이 아니라 무대와 카메라를 의식하는 일에서 비롯된다. 비록 그게 왓챠나 레터박스에 인스타용으로 멋들어진 한 줄 평을 남기는 일일지라도, 무대와 연기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영화를 본다는 것에서 좌절과 부흥은 일어날 수 없다.


다른 한편 <최애의 아이>는 죽어버린 영화를 소재로 하는 아이돌 장르의 애니메다. 모 인기 아이돌의 죽음에 관해 파해치는 과정에서 그녀의 자식들은 세간에의 진출을 택한다. 특히 딸의 경우, B코마치라는 어머니의 생전 소속 그룹을 그대로 계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쩌면 오늘날 시네필 문화는 이렇게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부흥이라는 말은, VR처럼 영화를 대체현실로 인식하기보다 AR처럼 “객관적으로 인식가능한 현실”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무대를 잃는 순간 배우가 직업을 잃는 것처럼,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이들을 잃을 때 우리는 문화를 잃게 된다.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리와 영화는 주변부를 잃고 세계 그 자체가 되고야 말 것이다. 하지만 세계 자체로서의 영화란 우리가 영화를 살아갈 수 없다는 점만을 말해주기에, 현실에 대한 절망만을 안겨줄 수밖에 없다. 되려 우리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보여주고, 또한 보여진다는 점을 전제함으로써 다시금 시네필로 ‘데뷔’할 수 있다. 이름만 시네필인 게 아니라, 공연장에 모여 현실을 오인하는 착란의 열기를 즐겨보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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