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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21. 2023

버튜버적 정체성과 파국의 비평


비평이나 평론으로 인정받는 일에 실패했다고 느낀다. 그리고 어떠한 일에 벽을 느끼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을뿐더러, 그런 벽에 소외감을 느낄 뿐이라면 구태여 할 이유가 없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건 빌렘 플루서의 어느 서술이다. 그는 “나는 벽 바깥으로 걸어 나가 세계를 얻음으로써 나 자신을 잃을 수도 있다. 아니면, 나는 벽 안에 머물면서 나 자신을 찾음으로써 세계를 잃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사물과 비사물』). 그러니까 벽을 넘는다는 건 자신을 잃어버리는 행위에 가깝고, 이런 맥락에서 평론에 벽을 느끼는 일은 마치 고집처럼 느껴진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벽을 넘지 않는 사람을 두고서 무어라 불러야 할까? 단순히 ‘맞지 않는다’는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현실에 안주하기를 택하는 건 아닐까. 여기서 물어야 할 건 벽을 넘을만한 능력이 되는지를 자문하는 게 아니다. 그 벽을 두고 갈라지는 세계에서, 양쪽 모두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자아가 곧 세계의 크기만큼 비대해진다고 해서 “나=세계”가 성립할 수 없듯, 세계가 아무리 거대하다 한들 자신을 대체하진 못한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평론가는 비평의 체계를 세운다는 점에서, 그러한 ‘나’와 ‘세계’ 사이를 가늠하여 벽을 쌓는 사람이다. 


그 점에서 비평이라는 행위는 어떠한 투사와 삼투의 체계로 기능한다. 비평이 비교하고 평하는 행위이고, 평론이 비평을 체계화해 세운 건설물이라고 가정해보자. 비평은 무언가를 투명하게 꿰뚫는 힘이 있어야 하기도 하지만, 세계의 압력에 저항하는 단단함이 있어야 하기도 한다. 만약 세계에 저항하는 힘이 없다면 그곳에 자신의 생각이란 없다. 따라서 비평은 세계에 동화되지 않으려고 자신의 몸을 벽처럼 단단하게 해야 하고, 반대로 그런 벽을 넘어야만 비로소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그리고 몸을 단단하게 한다는 건 그만큼 껍질을 벗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므로 비평가는 항상 ‘벽’에 대한 기준을 세워야만 한다. 평론의 역할은 아마도 그곳에 있다. ‘나’와 ‘세계’사이를 표준화하는 작업은 가늠자를 만드는 것처럼 어떠한 현상에 대한 ‘바라봄’을 규격화한다. 단순히 고정해두는 게 아니라, 이용하기 편리하게끔 가공함으로써 많은 이들이 저 너머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즉 비평의 역할이 투사와 삼투라면 평론의 역할은 그러한 시선이나 관점을 소비가능한 형태로 가꾸는 것이다. 


소비사회에선 모든 게 소비가능한 대상이 된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평론은 비평을 소비재로 만들어두었다는 점에서, 소비사회에서만 가능한 부류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는 ‘물’을 사 먹는 것만큼이나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정보다. 어떤 것은 너무 흔하지만 눈에 보이고 손에 쥘 수 있는 형태로 가공되어야만 비로소 체계 안으로 편입되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비평은 평론으로 가공되지 않으면 단지 자연계의 원소로만, 혹은 날 것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바로 이 점에서 평론은 비평에 관한 하나의 지표가 된다. 평론은 이곳에 비평이 있거나, 혹은 비평이 있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지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비평’을 영광화하고 또 이를 파국의 한 징표로 응용한다. 즉 평론은 비평을 하나의 흔적이자 지시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이곳에 무언가 닥쳐오고 있다는 신호를 발산한다. 물론 그 비평은 재앙의 징조는 결코 아닐 것이다. ‘파국’은 어떠한 사태가 급변하고 있음을 말할 뿐 세계가 끝장났다고만 말하는 건 아니다. 파국은 두 세계가 한 자리에 맞닥트린다는 점에서 차이와 반복이 실패하는 지점이다. 이때 폭발이 일어나지만, 여기서는 고작 체계가 재정립되기만 할 뿐이다. 


그러니까 파국은 실패의 지점이라는 점에서 비평가가 느끼는 ‘벽’과 유사해 보인다. 비평가가 자신을 유지하면서, 세계를 들여다볼 요령으로 ‘벽’을 설정하는 건 세계에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파국은 비평이 투사하고 삼투당하는 통로를 세계에 관한 자신의 관점 삼지만, 그것과는 달리 오직 흔적으로만 관찰될 뿐이다. 즉, 여기서 비평은 그런 흔적을 보전하는 정도에만 그친다. 파국은 비평으로 하여금 세계에 흡수되지 않도록 적절히 거리를 두게 하는 효과가 있다. 파국이 이미 하나의 지표가 되었기에 비평은 벽을 넘어서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자신일 수 있다. 양쪽 세계 모두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은 파국에 의해 극복되며, 이를 응용하여 체계를 쌓는 이가 바로 평론가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평론은 생존의 체계로도 이해되는데, 다른 편에서도 자신으로 있기 위함이 아니라 “두 세계 사이에서 자신이 분열되지 않기 위함”으로 보면 그렇다. 이 둘의 차이는 주체이고, 후자의 경우는 가만히 있어도 멀어지는 세계에 관한다. 어느 날 갑자기 세계가 둘로 찢어져 버린다면 아래에 생겨난 구덩이를 피해 가야 하지 않겠는가?


벽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벽을 단순한 차단막으로 여기기보단, 실재의 커튼과 같은 식의 일렁임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세계에서 나를 감춘다. 하지만 나는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이중적인 움직임을 표현하는 게 바로 커튼이라면, 벽은 결코 극복의 대상은 아니다. 왜냐하면 벽은 문화이론에서 말하는 ‘제4의 벽’과 마찬가지로 사실상 ‘창’이라 보아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통일성을 위해 계속해서 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자. 이 용어를 관철했을 때 우리는 비평가의 이중 정체성에 대해 논할 수 있게 된다. 가령 비평가가 평론을 행하는 주체라고 가정할 때, 비평가는 평론을 함으로써 평론가가 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서 비평가는 평론을 벽 삼아 그쪽 세계에서도 자신이기를 시도한다. 이 덕분에 비평가는 평론가가 되어서도 여전히 자신일 수 있으며 이 덕분에 ‘비평적 글쓰기’로의 평론은 성립한다. 비평가의 시점이 ‘평론’이라는 대중화된 시점의 형식과 공존할 수 있는 건 이 덕분이다. 비평가의 시점을 세계화하면 평론이 되지만, 이때 자칫 사라져버릴 수 있는 비평가의 정체성은 바로 그것이 평론이라는 점 덕분에 그 세계에서도 여전히 살아남는다.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부류의 이야기는 다른 현장에서도 목격된다. 이를 위해 나는 두 가지 예시를 들 것이다. 첫 번째는 스파이더맨이다. 어쩌면 히어로물의 클리셰이기도 할 정체성 고민은 ‘나’와 ‘히어로’간의 양립에 관한다. 양쪽 세계 모두에서 자신일 수 있는지를 묻는 건 양쪽 세계 모두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기’로 이어진다. 이 둘은 서로 같은 시공간에 있지만, 다른 ‘세계’를 살고 있어서 어느 한 쪽을 택하면 다른 하나는 자동으로 버려지는 관계에 있다. 이때 ‘벽’은 히어로의 코스튬과도 같다. 굳이 옷을 입지 않아도 능력을 쓸 수 있겠지만, 옷을 입음으로써 히어로는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분리하고 히어로 세계에 뛰어들 수 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구한다’는 것과 ‘히어로’라는 말은 정확히 비평과 평론의 관계에 있다. 누군가를 구하는 방법이 자기만의 것일 수 있겠지만, ‘히어로’는 그러한 방법을 세계로 환원함으로써 ‘구원의 체계’를 세운다는 점에서 영위된다. 히어로는 특정한 개인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정체성을 가리키며, 그러한 점에서 자아와 행동 등의 체계로 이해되는 평론에 해당한다.


히어로에게 요구되는 마음가짐은 자신이 곧 세계 전부일 수는 없다는 것, 다시 말해서 세상 어디에서나 자신이 존재할 수 없고 이를 따라 모두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들에겐 적절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그렇게 해야만 이들은 진정으로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고, 또 세계에 매몰되지 않으며 그 사이를 적절히 활보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점이 되어주는 게 바로 히어로들의 코스튬, ‘옷’이다. 인간이 옷을 입음으로써 자연에서 분리되듯, 비평에서 벽은 일종의 문명적 체계이며 주체를 세계에서 분리한다. 비평은 벽을 세움으로써 세계 안에서도 자신이기를 잃지 않고, 애초에 벽이 없다면 주체는 와르르 무너져 형태를 잃고야 만다. 그리고 형태가 없다면, 자연스럽게도 관점도 와해되고야 만다. 따라서 평론이 비평적 관점을 대중화한 것으로 본다면 여기서 ‘소비’라는 관념은 정확하게 체화를 가리킨다. 마르크스는 자본을 두고서 어떠한 관계에 빗대었는데, 교환가능한 문화자본이 있다면 체화된 자본은 문화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교환 형식에 해당한다. 마찬가지로 특정 주체에서만 발현되는 관점은 비평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교환 체계인 듯 보인다. 


대중적인 정의에 따르면 히어로는 자신의 몸을 지키고 남은 힘을 타인을 구하는데 쓴다는 특징이 있다. 그렇다면 이때 힘은 일종의 잉여자본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꼭 태어날 때부터 힘을 갖고 태어난 게 아니라는 점에서, 이러한 힘을 ‘체화’하는 과정은 자신이 지닌 잉여자본을 교환하는 일련의 과정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히어로에게 히어로가 된다는 건 자신의 힘을 더 잘 다루게 됨을 뜻하고, 이는 ‘비평가’에게 있어 ‘비평’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체계이다. 이 맥락의 연장선에서 나는 두 번째 사례를 언급해보려 한다. 아즈마 히로키는 버츄얼 유튜버에 관한 기존의 입장들에서 ‘양립설’을 부정하고, ‘버튜버’를 단독자로 제시한다. 버튜버는 그 안의 연기자나 바깥의 캐릭터 둘 중 하나로만 풀이되기보다는 이를 종합하는 차이와 반복의 다음, ‘버튜버적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상호 독립하는 2가지 존재자의 중첩”이라고 지칭하는 이 상황은 우리가 위에서 말한 “차이와 반복의 중첩으로서의 파국”처럼 보인다. 버튜버 캐릭터는 안 사람을 지시하기만 할 뿐 존재를 확증하진 않으며, 이때 안 사람은 단지 흔적으로만 파악될 뿐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버튜버와 안 사람 모두가 끝장난 것은 아니며, 여기서는 단지 버튜버적 정체성이 정립되고만 있을 뿐이다. 


버튜버는 단순한 롤 플레잉일까? 그렇다면 그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연기하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인가. 버튜버의 아이러니한 점은 버튜버를 이해하는데는 가공의 설정이 요구되지만, 정작 버튜버에 대한 욕설이나 비난은 안 사람의 것으로 취급된다는 점에 있다. 이는 버튜버에 이입하기를 요구하면서 RP(롤 플레잉)을 철저히 지킬 것을 당부하는 것과는 달리, 캐릭터에 대한 공격은 곧 안 사람에 대한 공격으로 치부된다는 점에서 두 존재를 실질상의 한 존재로 바라보게끔 한다. 그렇다면 이때, 안 사람과 캐릭터는 서로의 어디가 같고 또 다르다고 보아야 할까? 우리는 버튜버를 두고서 “연기자가 ‘연기’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버튜버를 연기자로 지칭하는 건 RP에 어긋나는 일일 수 있겠지만, 안 사람의 관점으로 캐릭터를 ‘해석=바라본다’고 이를 확장해서 대중적으로 넓히는 일은 비평의 저변이 대중화되는 것, 즉 비평가가 ‘평론’에 다가서는 일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를 토대로 이야기해보자면, 우리가 버튜버를 두고서 정말로 ‘가상의 캐릭터’로 여기지 않는 것에는 ‘판떼기’에 대한 불신이 깔려서가 아니다. 이는 의도된 실패로써 비평가에게 벽과 같은 역할을 한다. 캐릭터를 연기하는 안 사람은 버츄얼의 육신을 갖고서 특정한 관점을 세울 수 있으며, 이는 야생 상태로 존재하던 문화 코드를 특정 관점으로 가공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즉, 버튜버에게 캐릭터는 연기의 표면이기도 하지만 문화적 코드를 벽 바깥으로 수출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버튜버는 서브 컬처와 같이 흩어진 제반 시장에서 매력적인 코드를 자신의 것으로 가공 및, 제공하는 벤더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평론가에게 ‘벽’이 자신을 세계에서 버틸 수 있게 해주듯, 버튜버에게 이러한 코드는 자신이 세계에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세포벽이 되어준다. 이 점에서 아즈마가 버튜버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바라보려는 시도는 “모두를 구할 수 없다는” 히어로의 마음가짐만큼이나, 양쪽 세계 모두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면 양쪽 세계를 잇는 존재가 되자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버튜버는 소비가능한 정체성이지만 와해되지 않는 단단함이 있고, 비평가 또한 소비가능한 체계인 평론을 제공하면서 그런 자신이 소비당하(삼켜지)지 않을 수 있다. 고래에 삼켜진 피노키오가 끝내 고래를 운송수단 삼아 다음 세계로 넘어가듯, 소비라는 말은 흡수된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며 소비는 단순한 바로 세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버튜버는 그 정체성을 소비하는 이들에 의해 세계 안에서 더욱 공공연하게 지시되며 여기서 ‘흔적’은 부재의 증표가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의 기다란 늘어짐으로 이해된다. 비평도 그렇다. 비평에서 평론으로의 전회는 관점에 대한 무분별한 개발과 소모가 아니라 주체를 바로 세우면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세계를 암시하는 게 아니라 뒤따를 수 있는 거대 세계의 그림자를 실시간으로 재현한다. 그렇게 보면, 이미 죽은 자들의 유산이 아니라 추종 가능한 이들에 대한 동경의 마음을 품을 수 있게 해주는 게 바로 평론의 역할이기도 하다. 이는 비평과 평론이 갖는 결정적인 차이로써 비평이 대상에 가능성을 보여준다면 평론은 대상이 타인에게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게끔 한다. 그래서 평론은 때때로 체계를 미끼 삼는다는 비판을 듣곤 하지만, 어쨌거나 오배의 가능성 또한 평론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만약 오배를 원한다면 후자에 배팅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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