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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17. 2022

버튜버: 투명한 입방체 안에서


콜리그에 투고한 열 세 번째 글이다

https://colleague.co.kr/forum/view/684567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실격』은 뜬금없는 자기고백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 고백의 행위는 화자 자신의 내면을 풀어놓는다는 점에서 용기있는 것으로 취급된다. 남들에게 숨길 수도 있는 걸 굳이 꺼내어놓고, 이를 만천하에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


처음에 버츄얼 유튜버를 접했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의 얼굴 대신 가상의 아바타를 내세우는 이들의 심리란 무엇일까. 기술적으로는 ‘라이브2D’라는 서브컬쳐 경제로 간단히 설명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을 대리한 무언가’라는 점에서 숨길 것이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버츄얼 유튜버는 TV 쇼 <복면가왕>에서처럼 가면을 내세워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는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도 그렇다. 예를 들어 팬들 사이에서 버츄얼 유튜버의 ‘전생’이나 ‘안 사람’에 대한 언급은 금지된다. 아바타 자체가 모션 트래킹 기술을 이용한 것이므로 이를 연기하는 사람이 있을 건 뻔한데, 팬들 사이에선 암묵적으로 이를 ‘무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안 사람이 버튜버 데뷔 이전에 다른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더라도, 이를 눈 감아주는 게 업계의 예의다. 마치 연인 사이에 예전 애인에 대해 묻는 게 금지되듯 버튜버의 신상은 철저히 현재에 머물러야 한다.


즉 버튜버란 어떤 면에서 에이젠슈테인의 어트랙션 몽타주를 연상케 하는 감이 있다. ‘감동의 단위’라는 에이젠슈테인의 어트랙션 몽타주는 버튜버가 연기자뿐만이 아닌 연기하는 이미지의 집합체라는 점을 염두에 두게 한다. 가령 버튜버는 연기자의 인격과 내보이는 캐릭터의 인격이 결합되었다는 점에서 단순한 배우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버튜버는 이 두 가지가 한데 어울려 완성된다는 점에서, 표정 연기에서 모션 트래킹 그리고 예체능 감각을 익혀야 한다는 점에서 ‘총체예술’에 비견된다. 버튜버는 유저들과 소통하면서 모션 트래킹을 신경 써야 하고, 이와 동시에 캐릭터 연기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이미지로만 소비될 수 없다. 버튜버는 실시간으로 캐릭터와 연결되어야 하고, 이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버튜버에서 연기자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의미한다.[1] 즉 버튜버를 보는 관객들은 이를 가상의 캐릭터로만 보지 않고 캐릭터 자체를 하나의 프로덕션으로 받아들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버튜버라는 건 어트랙션과 몽타주가 결합된 하나의 이미지 구간, 혹은 상품인 게 아닐까. 혹자는 버튜버를 두고서 “고작 2D에 불과한데 뭘 이리 좋아하냐”고 말하기도 한다. 버튜버라는 개념이 라이브2D 기술에서 그 가능성을 타진한 만큼 이 말은 실제로 옳다. 버츄얼 유튜버는 가상 세계에만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2D 캐릭터와 동일한 성질을 지닌다. 이른바 평면성이라 하는 일이, 일정 정도는 대중에게 드러나는 모습으로만 존재한다는 점이 버튜버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그러나 버튜버와 2D 캐릭터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어트랙션 몽타주가 몽타주를 경험하는 관객들을 가정하듯, 버튜버는 ‘가면’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여 줄 ‘관객’이 없다면 성립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연극 무대에서 무대의 표면이 ‘제4의 벽’이라는 평면을 구성하듯, 버튜버 또한 이러한 평면 안에 갇혀만 있을 뿐 그 안과 밖에서는 서로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버튜버가 노리는 효과란 무엇일까. 권구윤이 썼던 「투명한 입방체 안에서」라는 글의 일부에 그 힌트가 있다.


“그러나 모든 예술이 z축을 점유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정방향과 반대방향의 벡터 사이에 스칼라곱을 취하면 반드시 음수가 나올 수밖에 없는 까닭으로 z축의 양단인 연극과 사진 사이에서 유의미한 진리치를 취하려면 내적(內積)이라는 벡터곱을 좇아야 할 수밖에 없으리라. “앞서 언급한 두 가지의 위험 요소들 중간 지점에서 영화는 매우 적절한 균형을 찾고 있다.” 이 내적은 두 가지 절차를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메츠는 적고 있다. 우선 미쇼트의 ‘공간 분리’ 개념에서 예증되듯 이 두 개의 시공간 벡터들 사이를 공간적으로 분리하여 관객들에게 연극적 요소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반드시 분리 뒤에는, 분리의 결과로 생산된 상이하게 분열된 두 개의 시공간 연속체(spacetime continuum)를, 그것들이 세포막 함입 뒤에 말라 죽지 않도록 노련하고 재빠르게 시간의 층위에서 편집하여 하나의 조직으로 얽어내는 사진적 압축이 요청된다.”


우선 버튜버가 기본적으로 라이브2D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회화적 성격을 띠는 반면, 기술에 의해 완성되어 보여지는 결과물은 위에서 말했듯이 연극에 가깝다. 이 점에서 버튜버는 일종의 영화적 몽타주에 가까운 듯 보인다. 다른 한편 버튜버는 영화처럼 그 시작과 끝이 마땅히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영화가 갖는 효과를 동일하게 담지하진 않는다. 이를테면 영화에서 스크린은 자연을 향해 들이대는 포착의 관점에서 이미 있는 세계를 보여주는 관찰창일 뿐이다. 하지만 버튜버는 채널을 개설하거나 트위터를 통해 정보를 알리는 식으로 정보를 전달해야만 비로소 그 자신의 스크린이 성립한다는 점에서 영화와는 다르다. 즉 영화는 그 특유의 존재감이 ‘무언가 있었다’는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에서 유발되는 반면, 버튜버는 설사 그것이 어트랙션 몽타주로 이해된다 한들 지표적 성격을 띠진 않기에 매체로써 시간의 Z축은 없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버튜버에게 연극적인 면이 있다는 점은 연극에서의 실시간 즉 시간의 Z축이 있으리라는 점을 추론케 한다. 하지만 연극과 마찬가지로 둘 사이에 실시간이라는 교량이 있더라도, 버튜버의 세계는 ‘현실’에 속해있지 않으므로 영화와 같은 분리의 속성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버튜버의 시간은 연극처럼 실시간이지만 영화처럼 분리된 시공간 연속체로 이해될 수 있으므로, 매체로서의 버튜버는 영화와 연극 사이의 무언가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영화가 사진과 연극 사이에서 태어난 매체라면, 버튜버의 경우는 연극과 영화 사이에서 이해돼야만 한다. 같은 이유로 크리스티앙 메츠가 영화를 언어로 이해하려는 시도했던 사례가 실패로 돌아갔던 건 버튜버의 사례에서 성공할지도 모른다. 영화를 언어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영화의 비언어적 속성으로 인해 실패했던 반면, 버튜버에서 비언어적인 측면을 발견해 이를 하나의 언어로 정립하는 일은 오늘날의 팬덤에서 몹시 흔하니 말이다.


버튜버는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 세계관에 동조하는 것부터 버튜버와의 놀이가 시작되며 이런 점에서 버튜버란 참여적 성격이 강조된다. 그러나 버튜버와 관객이 서로 인간이라는 점을 알더라도 버튜버와 실제로 ‘만날’ 수 있다는 점만큼은 암묵적으로 거부해야만 버튜버는 성립한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연극적 요소란 두 개 시공간의 물리적 벡터값이 다르다는 점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간단히 생각해보면 버튜버는 늘 실시간으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있었다’가 성립하지 않는다. 즉 버튜버는 움직이는 회화(일러스트레이션)에 가깝기에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무엇보다 유행에 민감해야 하고 또 실제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일개 개인일 뿐이라는 점에서 ‘리얼리스틱’하기도 하다. 누군가는 ‘모순’된다고 여길 수 있는 이 부분이 바로 버튜버에 대한 영화적 속성을 자아낸다.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어야 한다고 믿어야 하는 리얼리즘의 모순 말이다.


*


영화에서 리얼리즘의 문제는 ‘있었던 것’을 ‘있는 것’과 구분해야 한다는 한 편의 모순에서 출발했다. 이는 다름 아닌 시간과 관련 있는데, 영화가 자체적으로 분리된 시간을 갖는다는 점이 현실 세계와의 비교에 의문을 품게 했기 때문이다. 인류가 문명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게 시간 의식 덕택이었고, 이를 토대로 문자와 기록 그리고 문화가 발전했다는 점에서 인류는 시간 의식에 지배받는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회화나 문학은 시간 의식에 벗어나 있기에 인간의 의식에 복종하지 않았다. 반면에 영화는 그 자신의 시간을 내세움으로써 인간의 의식과 대결하였고 이때 모순점이 등장한다. 영화는 어떤 형태로 우리 세계에 존재하는 것일까? 단순히 공간이 분리된 걸 넘어 그 사이에 시간의 흐름이 감지될 때, 관객들 사이에선 제4의 벽 너머에 존재하는 연극 무대를 상정해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서로 다른 시간 의식을 이해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요컨대 영화의 존재론이란 역으로 그 자신이 이해받기 위해 연극 무대라는 투명한 입방체를 상정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저 또 다른 세계가 되어버릴 뿐이어서 우리 세계와 마땅히 구분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곳이 무대라 가정할 때 우리는 두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지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의 조직으로 얽히는 사진적 압축이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버튜버를 어트랙션 몽타주로 이해하는 일은 그를 무대 위의 연기자로 통찰하는 일이다. 버튜버는 화면 너머의 투명한 입방체를 무대 삼아 활동하고 이는 그 자체로 캐릭터의 구성 요인이 된다. 즉 버튜버는 연극 무대에 오르는 연기자가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는 형태에 가깝다. 버튜버는 이를 연기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모두가 알면서도, 이 공간 안에서는 암묵적으로 존재가 인정된다는 점이 연극배우와 닮았다. 적어도 가면을 쓰고 대상을 연기한다는 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관객이 있어야만 한다는 점에서는 그렇다.


따라서 이 대목에서는 “왜 버튜버를 보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사진을 보는 이유가 ‘그곳에 무언가 있었음’이라는 지표를 느끼기 위함이라면, 정지된 이미지로서의 버튜버는 아무런 함의도 없다. 버튜버는 방송을 켜서 실제로 연기를 시작해야만 그 정체성이 성립한다. 이때 중요한 건 실시간으로 방송이 이루어진다는 점이 아니라 그런 방송이 진행되는 무대가 내부적으로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트위터나 핀터레스트 같은 평면 위에 있을 때 관객과 아무런 분리조치가 없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이 투명한 입방체는 둘 사이에 격벽을 놓음으로써 두 개의 시공간을 만들어낸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헌데 만약 버튜버라는 게 관객이 있어야만 성립되는 정체성이라면, 관객이 들기 전에 버튜버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소리가 된다. 그러니까 버튜버가 일종의 자기 반영적인 이미지로 이해된다면 그 버튜버의 표면은 무엇에 반사되어 왔는지라는 의문이 남는다.


극장의 큰 스크린이 아니라 스마트폰이나 모니터 화면으로 접하는 버튜버 영상에는 마땅히 몰입감이라 할만한 게 없지 않을까? 스크린과 모니터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고정이다. 스크린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 한 편만을 틀어주지만 모니터는 Alt-Tab과 같은 동작을 통해 얼마든지 다른 화면으로 전환 가능하다. 즉 모니터의 몰입감이 상대적으로 덜하다면, 그 이유는 모니터 속 세계가 구속되어 있지 않은 세계이며 그런 의미에서의 닫힌 시공이 아니어서다. 그러니 버튜버에 몰입감의 Z축이 있을 리 없고, 그가 자신을 비춰보는 세계와의 적절한 거리감도 없다. 그렇다면 버튜버를 살아있게 하는 건 무엇일까. 버튜버는 이렇게 열린 우주에 투명한 입방체를 생성해야만 비로소 살아있게 된다. 우리가 밥 먹듯이 말하는 입체감이라는 단어가 캐릭터 자신에게 해석의 주도권을 주는 것이라면, 입(방)체를 형성하는 일은 캐릭터를 인형이 아닌 배우로 이해하는 것에 도움을 준다.


가령 소꿉놀이의 경우엔 연기(play)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놀이(play)기도 한데, 여기서는 서로가 상대의 인형이면서도 그런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버튜버 또한 관객들과의 유희 행동 자체가 하나의 연기가 된다는 점에서 입방체의 역할이 중요하다. 물론 버튜버가 라이브2D와 모션 캡처 같은 기술 발전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2세대에 들어서는 인터넷 방송문화와 결합해 자기만의 방송을 진행하는 BJ에 가까워졌다는 점도 염두에 두자. 버튜버가 방송을 진행하는 플랫폼이 롱테일 경제의 일환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버튜버는 관측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를 위해 버튜버는 자신이 관측될 수 있도록 돕는 플랫폼 서비스의 알고리즘에 몸을 맡긴다. 그러니까 버튜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관측자가 이에 참여한다는 ‘의식’이 자리하고 있을 수도 있다. 버튜버에서 몰입감을 만들어내는 건 관찰자에게 사적으로 도달함에 따른 거리감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버튜버를 대형 스크린이 아닌 소형 디스플레이를 통해 접한다는 점이 그들 무대와의 친숙함을 이끈다. 즉 무대가 더 작을수록 이들과의 만남은 사적인 게 된다. 그런데 이 사적인 만남은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주체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과 그 맥락을 함께한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 스타 시스템의 종말이 가져온 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개성’이 결여되는 것과 오직 인물 연기의 익명성만이 두드러진다는 점이었다. 이와 더불어 배우는 그동안의 연기에 대한 함축적인 기호로만 남아버린다.[2] 이와는 다른 맥락으로 버튜버는 그를 연기하는 주체인 ‘안사람’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면서 캐릭터를 연기할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자신의 ‘익명성’을 강조한다. 이 점에서 버튜버에게 생겨나는 리얼리즘의 모순은 “지금 당장 보여지는 것(있는 것)을 애초에 갖고 있던 것(있었던 것)으로” 변환하는 것에 사용된다. 버튜버가 애초에 존재했던 사람처럼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1] 키즈나 아이로 대표되는 초창기 버튜버의 경우 닫힌 시공간인 유튜브 클립 안에서만 활동했지만, 이후 버튜버 시장은 홀로라이브로 대변되는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그 대세가 넘어간다.


[2] 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 임경규 역, (서울: 문학과지성사, 2022)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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