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Mar 26. 2023

블루아카이브와 소년성


2004년 허문영이 씨네21에 작성한 “한국영화의 ‘소년성’에 대한 단상’”은 오늘날 한 편의 정전이 되었으며, 심지어는 2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텍스트로 읽힌다. 이 글을 인용하는 필자들의 의견은 대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거나 고뇌하지 않는” 인물상을 지적하면서, 이들을 ‘고아’로 규정하는 방식으로 가족에 입문하는 경향을 지적하곤 했다. 짧게 요약해서 “아버지의 부재, 여성의 탈락, 형제애의 찬탈”로 서술할 수 있는 이 소년성은 한국 영화를 서술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었으며 이를 따라 어른의 도식도 출몰했다. 여기서 어른의 도식이란, 몸은 다 컸지만 속은 아직 유년기에 머무른다는 것으로써 “선진국이지만 아직 시민의식은 미성숙한” 것을 지적하는 일에도 사용되었다. 이는 소위 말하는 2010년대 중반의 ‘헬조선’ 담론을 뜻하는데, 이 시기의 영화들에서 ‘소년성’이란 특정 인물이라기보단 영화 자체에 적용되는 한 가지 대명사와도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느껴지는 대목은 베르그손의 말처럼 물질과 기억 사이에 시간 차가 자리하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우리가 헬조선을 뉴스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영화 안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거나 혹은 모호했다. 정작 그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더는 ‘뜨거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을 때 본격적으로 영화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사회적 담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세월호 이후 변해버린 한국사회의 분위기가 곧바로 영화 매체에 드러나지 않았다는 걸 잘 안다. 평자들은 그에 대해 “애도의 기간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서술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건 마치 허문영의 소년성처럼 한국사회가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과정에 관한 것처럼 보인다. 


세월호 시기 한국사회에 출몰해 온 문구는 “어른들이 미안해”였다. 어른이 아이를 보듬는 게 사회의 의무라고 말하는 이 문장이 함의하는 바는 명확하지만, 정작 ‘어른’의 정의가 모호하다는 것에 의문을 품어보아야 한다. 어른이란 무엇일까? 결혼할 나이를 어른이라 한다면 30대 중반, 투표권을 기준으로 하면 만 19세가 정도가 된다. 사회적 조사에 따르면 30대 초반까지는 여전히 자신을 어른이라 인식하지 않는 사람의 비율이 꽤 높다고도 하며, 이를 따라가면 책임감 있는 ‘어른’의 수는 가히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지적을 따라서 ‘미안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이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고도 볼 수 있을까. 달리 말해 여전히 소년이기를 자청하는 이들에게서 ‘미안해’라는 감정은 회피되거나 혹은 생략된다. 미안해, 라는 말을 꺼내기 어려운 이들에게서 책임감을 찾기란 어려우며 한편으로 이는 우리가 책임의 범주를 굉장히 넓게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다. 단순히 아이와 어른이라는 이분법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지 않는”다는 소년성의 문제로 되돌아가서 한국사회는 책임의 문제를 고등한 차원의 것으로 넘겨짚는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마치 숭고의 기능과도 같아서 한국사회는 ‘책임’이라는 말을 어려움의 한복판에서 등장한, 이해되지 않는 무언가로 파악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직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않는 이들에게서는 자신을 ‘책임을 짊어질 수 있는 존재’ 즉 ‘부모’로서의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의 ‘소년성’이 파악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부모의 문제는 애석하게도 저출산 사회와도 긴밀히 연관된다. 


사회 전반으로 문제의식을 확장할 의향은 없다. 하지만 저출산 사회가 의미하는 것은 탄생의 행위 자체가 점점 희귀해짐으로써 우리가 그걸 경외심 담긴 무언가로 바라보게 됨을 뜻한다. 마치 <칠드런 오브 맨>의 세상처럼, 참된 의미의 공동체는 현실에서 찾기 어려운 유토피아가 되었으며 이곳에서 ‘어른’은 새로 태어나는 생명의 부재로 인해 그 의미를 잃고야 만다. 소년/소녀의 반대항으로 어른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어른’이라는 말은 그 책임의 대상을 개인에 돌리며, 자기 자신을 책임지지 못하는 사회에서 ‘소년성’은 방향상실의 감각만을 갖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 이는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우를 사회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그저 자신의 탓으로만 돌리는 일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책임감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그 자신을 돌보기에 더 바쁠 뿐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어른들이 미안하다”라는 말은 어떤 면에서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며, 사회 전반에 관한 책임이라기보다는 분노와 공포 앞에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 즉 ‘책임’이라는 숭고의 행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어른’은 경외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 점에서 “어른들이 미안하다”라는 말은 어른으로서의 사과 표시라기보다 “되지 못한 자”로서의 슬픔을 공유하는 것에 더 가깝다. 그러니 이런 표현이 사용 가능하다. 소년들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고. 소년들은 공동체에 헌신하고 싶었다고. 하지만 바로 그 책임은 마치 숭고와도 같아서 쉽사리 파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소년들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고 말하면서, 소년의 성질을 예비가 아닌 ‘잔존’의 맥락으로 파악했다. 


세월호 이후의 한국사회에서 ‘소년’은 가능한 주체가 아니었다. 소년은 살아남은 자로서 영원히 숭고에 도달할 수 없는 존재였고 이를 따라 ‘~된다’라는 수식언을 사용하는 게 불가능해졌다. 이는 들뢰즈식의 가능언이 아니라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처럼 늘 미완에만 그친다는 점을 뜻한다. 이른바, 한국사회에서 소년성은 책임이라는 말을 수행 불가능한 과업으로 여기면서 그 앞에서 멈춰버린 이들의 자조적인 형태에 가까웠다. 요컨대 ‘어른들이 미안하다’라는 말은 자신을 어른에 소속시키는 게 아니라, 어떤 어른이 있고 그게 되지 못하는 사실 자체를 일컫는다. 이는 몸이 아직 정신을 따라가지 못하는 상태에서 벌어지는 참극들, 명석한 두뇌에 비해 행동력이 따르지 못하는 비참한 현실을 가리키며 소위 말하는 ‘총을 다루지 못하는 이미지’로써 풀이된다. 발기부전에 빗대어지곤 했던 이 발포불능은 사정을 하지 못하는 신체, “사춘기 이전의 소년”을 직시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소년성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이 소년성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 게 아니라 “어른이 되면 자연스레 해낼 수 있을 줄 알았던” 자신에 대한 무기력함으로 이어진다. “어른이 되면, ~을 해야지”라는 희망찬 다짐은 이제 “우리가 꿈꾸었던 미래는 이런 게 아니었다”는 식의 자조로 뒤바뀐다. 이 소년들은 미래에 덩그러니 남겨져 버렸고, 과거로의 여행과는 달리 미래로의 여행에서 미숙한 몸은 현실 상황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이는 ‘미래’가 우리 모두의 것, “공동”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면서도 모두가 같은 미래를 맞이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회에서 지배적인 현실이란 무엇일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그러니 “어른들이 미안해”라는 말이 유행을 탈 무렵 헬조선에 관한 담론이 한창 부흥했던 건, 어떤 면에서 어른의 가치를 살려보려는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헬조선은 오직 자신만을 책임질 수 있는 사회에 관한 문제의식이었고 그 안에서 한국은 명확한 지리적 특성이 있었다. 그러나 201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헬조선에 관한 담론이 사라질 무렵, 이제 한국은 책임의 주체나 대상 모두가 모호해져 버린 상태로 남게 되었다. 헬조선에서 조선이라는 말이 빠지면서 그냥 지옥이라는 추상적인 공간으로만 설명 가능해졌다. 그렇다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 건 누구의 잘못일까. 이런 일에는 책임을 묻는 게 불가하고 또 책임을 지는 일도 불가하다. 그러니 사람들에겐 그러한 책임을 져줄 어른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어른들이 미안해”라는 말은 바로 그 ‘어른들’을 호명하는 목소리였던 것이다. 한때 사람들은 책임을 질 수 있는 어른이 바로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통감했지만, 이윽고 사태는 지옥으로 변하면서 그 누구도 책임을 질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책임은 숭고의 가치를 갖게 됐고 ‘어른’은 세계를 구원할 용사의 역할로 지칭됐다. 사람들은 어른이 등장하기를 고대하면서, 그런 어른들에게서 제때 등장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했다. 무엇보다 사과 이전에 어른의 존재 자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어른들은 미안해한다”는 말로써 가공의 주체를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여기서 ‘소년성’이라는 말은 일종의 슈퍼히어로 서사에 비견된다. 사람들은 영웅이 진짜 있는지에 관계없이 이 사회에 영웅이라는 게 정말 있기를 바란다. 대가 없이 책임만을 지는 존재 말이다. 


*


혹자는 바로 그렇게 책임만을 지는 존재를 두고서 부모나 선생 같은 성질을 떠올리고, 이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상향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어른’은 현실이 아닌 곳에서 등장해 오곤 한다. 가령 서브컬쳐 등지에서 목격되는 ‘마망형’ 인물의 등장은 우리가 ‘등가교환’의 시대를 벗어나 어떠한 교환비가 아닌 목격 이전의 무언가를 바라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들은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허락된 일방적이고 원초적인 사랑을 원하고, 여기에는 성적이거나 이성의 면모는 크게 고려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을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존재, 혹은 아무 곳에 가지 않고 항상 여기에 있는 존재를 원할 뿐이다. 여기서 하나의 사례로 들어볼 만한 [블루 아카이브]는 청소년 불가 게임이면서 동시에 소년성을 갈망하는 게임이다. 이는 특히 작품의 주된 이야기가 학생과 선생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또한 그 관계가 선생은 학생이 나쁜 길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해준다는 점으로 인해 확언된다. 작품의 주제의식은 “아이들의 고통에 책임을 지는 어른이 아무도 없었다”라는 대사로 요약되는데, 일본 서브컬쳐 문화의 영향 아래에 있는 이 게임이 근본적으로 한국 개발사의 작품이라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왜냐하면 어른과 아이의 관계는 허문영이 지적했듯이 한국사회에 떠도는 소년들의 모습, 혹은 우리가 구하지 못했던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월호 이후의 달라진 소년성에 관한 한국사회의 일면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소년소녀’는 자신이 직접 책임을 마주하려 들기보다는 그런 책임을 짊어질 어른을 필요로 한다. 


<블루 아카이브> 자체를 비평의 텍스트로 삼을 만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야기를 담기에 그릇이 너무 얇고 넓다는 게 그 이유다. 하지만 게임의 기본 전제인 어른과 학생의 관계에서 우리는 세월호 이후 달라진 한국사회의 소년성을 목격한다. 이는 단순히 ‘학생’을 다룬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선생이라는 단어의 표현 방식에 관한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선생이라는 단어의 용례를 떠올려보자. ‘선생’이라는 말은 무릇 존경할 만한 인품을 가진 사람, 혹은 학생을 가르치는 직업인에 관한 일반대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에게 섣불리 충고하는 이에게 “선생질하지 마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게임의 선생은 “이 세상에 대해 책임이 있는 사람”을 뜻하고, 의미의 범주는 그런 세상을 만든 사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선생은 그저 책임을 지는 사람일 뿐이며 여기에는 결과만이 있을 뿐 과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선생은 책임에 관한 원초적인 무언가이며 이는 한국사회가 선생을 일종의 ‘마망’형 인물로 바라본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게임에서 선생이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예수를 모티브 삼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추측은 더욱 신빙성 있다. 모든 책임을 지는 존재로서의 어른은 마치 예수처럼 모든 사건과 감정을 짊어지고서 그들의 감정을 대리하는 존재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사회의 소년들이 책임을 마주하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비판을 제기해볼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이 직접 문제를 해결하기를 거부하고서 모든 책임을 어른에게만 떠넘기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어른은 일종의 책임회피 용도로 발명된 개념인 게 아닐까. 


물론 게임 안에서 선생은 어른이라는 말과 사실상의 동의어로 파악되고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학교로 설정된 무대에서 선생은 유일한 어른이며, 그 외의 어른은 학교 소속이 아닌 적대 세력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특기할만한 점은 작중 등장하는 어른이 모두 [세계]의 밖에서 출몰해왔다는 점이며, 세계를 인식의 한계로 규정하는 전통 철학에 견주어볼 때 어른은 일종의 개념적 발명에 가깝다. 어떤 만화 장르에서 용사가 이세계로의 소환을 겪듯이 이 게임에서도 선생은 다른 세계로 출몰해온다. 바꾸어 말해 학생과 책임을 다루는 이 게임에서 선생은 말 그대로의 예수, ‘책임감’이라는 원죄를 모두 짊어지고서 세계가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돕는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어른’과 ‘선생’을 분리해 보아야 할 필요성이 대두한다. 어른이 단순히 아이의 바깥에 해당한다면, 어른은 아이들이 책임을 회피할 요령으로 만들어낸 ‘피터팬 증후군’의 일환일 것이다. 하지만 선생의 경우라면 아이들을 끝까지 믿고 따라가는 자로서 그 어떤 사례에서도 학생을 세계의 끝으로 인도한다. 따라서 학생들의 요구에 부응한 선생은 아이들이 세계를 외면한 결과로 탄생했다기보다는 “아직 이곳이 살만한 세상이라는 개연”으로 보아야 한다. 폴 리쾨르는 이야기의 개연성을 두고서 “견디기 힘든 세계는 결국 살 만한 세계라는 문제의식의 테두리 안에서만 성립”한다고 적었다. 이를 따르자면 우리는 ‘바깥’은 내부에 대한 하나의 요청이 아니라 오히려 내부야말로 바깥의 틀 안에서만 성립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어른’은 처음부터 아이를 보듬는 존재였으며 학교라는 무대의 설정은 이들의 관계를 세계의 끝으로 연장하기 위함이었다. 


게임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도자’라는 말은 길을 잃었을 때 방향을 알려주는 일을 뜻하면서도, 세상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세계가 다 끝나버린 채라면 언젠가 길도 끊길 것이므로 인도자라는 직책은 유명무실하니 말이다. 이는 선생의 역할이 단순히 책임을 지는 존재인 것만이 아니라 세상이 아직 살만하다는 개연을 내보이는 것임을 말해준다. 이른바, 선생이 외부에서 출몰해왔다 한들 이러한 내부는 멸망한 외부에 보호령으로 존속하기보단 여전히 나아갈 수 있는 ‘바깥’을 확보하는 것에 불과하다. 세계는 아직 끝장나지 않았으며 따라서 개인의 책임은 밖으로 미루거나 버려둘 수 있는 성격은 아니다. 게임의 무대가 되는 세계는 헬조선처럼 탈출해야하는 성격의 장소가 아니며, 아이들만이 존재하는 사회에 어른의 역할을 가져오면서 ‘이 세상’의 범주를 재설계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세상의 경계를 그리는 일과 책임의 한계를 부여하는 일을 한 가지 기준으로 병합하는 것이 가능하다. 앞서 말했듯이 세계의 크기가 곧 인식의 한계라는 점에서 책임의 가능성을 열어둔다면, 바깥에서 등장해온 선생은 가능세계의 인도자로써 개인을 다시 세계의 범주로 돌려놓는다. 왜냐하면 개인은 자신이 세계를 책임질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세계에 소속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어른의 역할이 아이에게 동심을 쥐여주는 것이라면 선생의 역할은 학생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험지를 주행하지 않도록 계속해서 바깥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세계는 어떤 점에서의 꿈과도 같다. “우리가 꿈속에 있는 동안에는 현실처럼 느껴진다.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깨어났을 때뿐이다.”


이때 매체를 두고서 관객이나 독자의 상상된 세계로 가정하는 일은 꿈에 관한 해석을 돕는다. 게임 속 캐릭터가 게임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꿈의 세계를 연상해보자. 캐릭터는 게임이 끝남과 동시에 그곳 세계에 버려지며 오직 플레이어만이 바깥으로 탈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플레이어의 탈출을 두고서 ‘무책임’하다고는 말하지 않는데, 이는 게임이 내보일 수 있는 걸 모두 보여주었을 뿐이기에 그렇다. 즉 게임에서 끝이라는 말은 인식의 한계를 의미할 뿐 세계의 멸망에 대입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는 멸망해야 한다. 꿈은 박살나기 위해 자신을 세계에 내보이며, 꿈이라는 가능세계는 버려진 의식을 수면으로 올린다는 점에서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것들의 총체이다. 어떠한 인식을 따라가는 일에서 세계는 결코 개연성 없는 무언가로 느껴지지 않으며 이는 기본적으로 꿈이 책임과는 거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개연성은 우리가 그걸 책임져야 할 때, 즉 그들의 세계에 개입해서 아직 살만한 곳이라는 점을 말해주기 위해 사용되는 것일 뿐이다. 물론 여기서 꿈은 책임을 저버리면서 일탈을 허용하는 장소일 뿐, 그 본질에서 책임을 회피하거나 버려둘 요령으로 설계된 공간은 아니다. 꿈은 세계의 바깥이라는 점에서 책임과는 거리가 있고 하지만 언젠가는 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현실 세계로 동행하지는 않는다. 바로 이것이 어떤 소년들이 스크린 안에서만, 그 매체의 틀 안에서만 잔존해야 하는 이유이다. 한국영화에서 소년성이 줄곧 되풀이되는 이유는 단지 그 가능세계에서만 소년들은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


한국영화라는 말을 “한국이라는 영화”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한국영화의 소년성을 두고서 한국사회의 소년들을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이 생각은 ‘소년’이라는 말이 한국사회에서 변화되어 온 과정을 짚어냄으로써 발전시키는 게 가능하다. 먼저 나는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 중인 [신의 탑]을 언급해보고 싶다. 2010년부터 연재를 시작한 이 만화는 ‘탑의 바깥에 버려진 소년이 탑을 오른다’는 [헌터헌터]식의 전개로 시작됐다. 여기서 소년은 탑의 ‘바깥’에서 왔다는 점이 강조되며, 작중 인물들에게서 이는 신비의 대상이다. 왜냐하면 살면서 탑을 한 번도 나가볼 수 없는 사람이 대다수고, 특히나 탑의 밖에서 온 인물들은 모두 탑의 원리법칙에 지배되지 않음으로써 탑의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탑이라는 체제에 소속되지 않은 이만이 탑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을 말해주는데, 눈여겨볼 만한 건 주인공 소년이 일종의 생존자라는 점이다. 소년은 부모가 살해당한 채 탑의 바깥에 버려져 있었고 함께 버려져 있던 친구를 따라 탑을 오른다. 그런데 이러한 시작점은 탑의 바깥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애초에 탑의 바깥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탑의 주민들이 탑의 바깥을 떠올려볼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인 반면, 주인공 소년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상실되는 ‘바깥’은 탑을 완전히 올라야만 수복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바꾸어 말해 소년은 탑을 무너뜨리기 위해 탑에 올랐지만 정작 그 과정에서 ‘바깥’은 이야기의 시작점이 아닌 그 이전으로 넘어가 버린다. 전개를 따라가면, 소년은 탑의 안쪽에 있다가 밖으로 버려졌으므로 어쨌거나 모든 이야기는 탑의 안쪽에 갇혀있다는 점이 밝혀진다. 


[세계]의 바깥을 동경하는 이야기가 인기를 끌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2013년에 <진격의 거인>의 애니메이션이 출시되고 나서 모종의 논란으로 인기가 사그라지기 전까지 인기를 끌었던 이유 말이다. <진격의 거인>은 공중파 뉴스에 나올 정도로 전 국민에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었고, 사람들은 미지의 거대 생명체와 맞서 싸우며 ‘바깥’을 동경하는 모습에 열광했다. 이 만화에서 인류는 벽 안에 갇혀 ‘최후’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중이었으며 이 과정은 마치 ‘바깥’을 수복하는 것과도 같았다. “예전에는 인류도 벽 바깥에 살았었다….”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에서 독자는 어느 순간 “모든 이야기가 벽의 안쪽에 갇혀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집 안 지하실에 숨겨놓았다는 비밀을 찾아가는 이 여정은 내부의 배신자를 색출하는 과정과 그에 따라 자신의 거인화 힘을 발달시키는 서사와 결탁한다. 그런데 2014년에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면서 ‘안쪽에 머무르는 것’은 위험한 가치가 되었고, 사람들은 이제 바깥으로의 탈출을 꿈꾸게 된다. 특히나 세월호 사건을 관통하는 말인 “나오지 말고 가만히 기다려라”는 ‘안쪽’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사람들 사이에 심어줌으로써 계속해서 밖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 점에서 벽 밖의 자유를 찾아가는 [진격의 거인]의 서사는 영화 같은 한국, 또는 ‘한국영화’를 살아가는 소년 사이에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했다. 생존의 층위가 제거된 만화 속 세상은 오직 ‘바깥’에 대한 갈망만을 남기면서, 이제 소년들은 이 나라를 뜨기를 원했다. 이른바 2014년에 시작되어 2015년에는 공중파에 입성한 ‘헬조선’이라는 단어의 출몰이다. 


헬조선은 지옥+조선이라는 두 단어가 결합해 만들어졌다. 이는 ‘지옥불반도’라는 다른 표현으로 응용되기도 했는데, 지옥과 조선 간에는 ‘벗어날 수 없다’는 무기력함이 자리했다고 볼 수 있다. “헬조선은 뜨는 것만이 답이다.”라는 말은 “이 나라를 치유하거나 되살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식의 절망이 담겨있고, 이는 이곳이 이미 실패한 세계이므로 다른 세계로 넘어가야 한다는 점을 의미했다. 즉 사람들은 어느 쪽이든 간에 [세계]의 바깥으로 나아가길 추구했으며, 하지만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처럼 여기서 중요한 건 대상의 양태이지 주체의 방향성은 아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양태, ‘어디’로 가야 한다’라는 마음가짐이 아니라 “바깥으로 간다”는 내부의 목소리가 이들의 근본을 차지했다. 소년들이 한국사회를 침몰하는 배로 규정하면서 떠올렸던 것은 “어찌 되었든 간에 밖으로 탈출해야 한다”는 자기구호였다. 그러니 여기에는 마땅한 방향성이 있을리 만무하다. 소년들은 [세계]의 개연에 의구심을 풀었지만 되려 그러한 세계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탈출을 체념하고야 만다. 그리고 이는 세월호 이후 잠시나마 불었던 헬조선 붐이 꺼지는 이유가 됐다. 소년들은 세월호 참사를 통해 탈출을 꿈꿨지만, 정작 그 바깥은 바다 한복판이라는 점으로 인해 갑판에만 머무를 뿐이었다. 바꾸어 말해 소년들은 한국사회는 반도라는 지리적 공간으로만 규정되는 게 아니라 사회적 태도와 경향, 혹은 관습 그 자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부산행>(2016), <반도>(2020)). 결국 소년들은 과거처럼 마땅한 투쟁의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살아갈 세상을 선택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세계의 간극을 파괴하는 길로 나아갔다. 


세월호와 헬조선 간에는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단서가 연결고리로 붙어있다. 두 단어는 탈출을 중심으로 그것이 가능한 세계를 가정하고 또 서술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가 “탈출이 가능했더라면”이라는 가정을 세운다면, 헬조선은 그런 가정을 실험해본 결과물을 내놓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가능세계의 완전한 멸망, 전제와 결과가 완전히 들어맞아 버려서 일말의 간극조차 없는 디스토피아였다. 이게 바로 대안이 없고 가능하지도 않은 멸망 세계이다. 멸망 세계는 폐허로 이해되기보다는 어떠한 구상도 침투할 수 없다는 점에서의 부정함이 실현되는 공간이다. 그리고 헬조선 이후의 한국이 가족, 국가, 친구처럼 사회와의 연결고리가 실현되는 구체적인 방향성을 상실하면서, 소년들은 이제 세계가 어떻게 되든 우리는 ‘바깥’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게 된다. 예를 들어, [신의 탑]의 소년은 이제 탑을 오르는 게 아니라 탑을 무너뜨릴 요령으로 세상과 싸운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세계를 구한다는 말은 ‘탈출’이 불가한 상황에서 오직 세계를 박살내는 것을 통해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진격의 거인]의 2부는 일본만화라는 본질에도 불구하고 안락사라는 단어를 통해 포스트 헬조선 사회와 결합한다. [진격의 거인]의 2부는 확장된 세계의 범주는 어디를 가든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를 그려냄으로써 가능세계를 유토피아화한다. 주인공은 적성국을 방문해 화해와 대화의 가능성을 찾지만, 그곳에서의 목격담은 정해진 [세계]를 바꿀 수 없으며 오직 간극을 해체하는 것만이 진정한 ‘탈출’일 뿐임을 말해줬다. 그래서 이 만화에는 두 가지 입장이 있다. 하나는 내부를 배제하는 것, 하나는 바깥을 추방하는 것. 


소년병의 입장으로 시작한 이 만화는 가족과 민족을 거쳐 국가와 세계의 문제로 의식을 넓혀간다. 그러나 가족의 선에서 해결되었어야 할 문제가 점진적으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종착지인 세계조차 마땅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한다. 이를 따라 [세계]는 확장의 영역이 아니라 탈출의 영역으로 변모하며, 구제의 영역이 아니라 폭파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다시 말해서 소년들이 안락사라는 단어에 반응했던 건 모든 가능성을 배제했을 때 남은 경우의 수는 오직 자신에 대한 가능만이 있어서다. 자살이 자신에 대한 행위이기에 법적인 처벌 근거의 바깥에 자리하듯이, 자기의 문제는 세계의 바깥에 있으며 이를 따라 자기 자신이 더는 확장이 불가해질 때 그곳엔 오직 탈출하는 것만이 가능해진다. 이때 우리는 앞서 말했던 문장을 한국사회에 적용해볼 수 있다. 한국사회에 어떤 문제의식의 확장이 불가할 때 그곳엔 오직 탈출의 가능성만이 제기된다. 하지만 [세계]에 간극조차 사라진다면, 마지막으로 남은 에어포켓마저 사라지고야 만다면 이들에게 생존은 곧 세계를 박살내는 것 말고는 없다. 바로 이 점에서 [한국이라는 영화]에서 소년성이란 소년병의 문제와도 같다. 한국사회가 자신을 설명할 방법으로 영화라는 수사를 택할 때, 영화라는 가능세계가 한국이라는 현실 사회에 따라잡혀 더는 간극이 사라져버렸을 때. 대안이 없고 미래가 없는 세계에서 소년들이 택하는 건 자기살해의 문제, 즉 [세계]의 안락사다. 이들에겐 그러한 꿈을 세계에 강림시키려면 기본적으로 현세계는 파훼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 아주 오래된 시뮬라크르 이론을 가져오면서, 인식의 크기가 곧 한계인 매트릭스는 환상의 일종이라고 말이다. 

이전 23화 불안까지도 무국적일 수는 없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