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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Sep 27. 2022

불안까지도 무국적일 수는 없다

<사이버펑크: 엣지러너>


1. 


푸코에 따르면 철학은 어떠한 것들의 사이에서 드러난다고 한다. 바꾸어 말해 이 세상에 우연한 건 없다. 우연이라는 게 어떠한 사건적 발견이라면, 철학은 늘 사이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의미는 작품 자체에서 드러나는 게 아니다. 우리와 작품 사이에 의미가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볼 때 대상이 직접 재현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런 대상과 우리 사이를 통해서만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셈이다. 물론 이런 말이 작품의 본질을 흐리고, 담론을 밖으로 환원해버린다는 비판을 받을 수는 있다. 허나 그럼에도 우리가 이러한 관점을 지지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단순히 독자와 작품 사이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작품과 인물 사이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작품을 바라보는 태도는 그곳 세계와 인물 사이의 철학에 관한 게 될 수도 있다.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가 작품을 이해하며 살아가기란 굉장히 어렵다.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그런 이해에서 한 가지 분기를 제공할 수 있는 작품이다. [사이버펑크: 2077] 게임 세계관을 기반으로 만든 이 작품에서 인물의 삶의 방식은 모종의 철학이다. 제작사 트리거는 사이버펑크 세계관을 토대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달라는 CDPR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단순히 게임의 설정만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게임을 구동해 그 안에서 갈 수 있는 장소를 찾아냈다. 이와 더불어 작품의 이야기에 잘 어울릴 만한 인물을 설정했고, 이는 일종의 후일담처럼 게임 세계에 그려졌다. 플레이어는 <엣지러너>에서 사망한 데이비드의 이야기를 [2077]의 서브퀘스트로 발견한다. 플레이어는 [2077]에서 <엣지러너>의 이야기가 바로 일년 전의 사건이라는 점을 알아차리고는 이 가까운 과거를 궁금해한다. 


2. 


<엣지러너>는 [2077]의 파생작이지만 [2077]이 <엣지러너>를 가져온 방식은 추가 패치 적용을 통한 후일담이다. 이 과정은 마치 처음에는 없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아직 알지 못했던 세계가 점진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상으로 보면 플레이어가 <엣지러너>를 별도로 감상하도록 하는 이런 설계는 <엣지러너>의 모든 것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엣지러너>를 보는 이들에게 [2077]의 모든 것을 알고 싶게 한다. 그렇다면 이들 작품에서 이야기는 우리들 현실에 견주어 볼게 아니라 그들 현실을 통해 바라보아져야만 한다. 이들 작품의 철학은 그곳과 이곳이 아닌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통해 묘사되고 또 드러나니 말이다. 즉 둘 사이의 관계에서 철학을 발견하는 쪽은 <엣지러너>인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그런 작품과 세계 사이에서 철학이 드러나는 것뿐이다.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 개인에 따라 재발견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바로 하나의 정보로만 취합될 수 없는 ‘살아가는 방식’에 관한 앎의 욕구이다. 이를 통해 철학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발견될 뿐이라는 점이 설명된다. 애초에 이들은 살아가는 중이었고, 우리가 단지 그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같은 논리에서 <엣지러너>의 삶은 새로이 창조된 게 아니라 원래부터 살아가던 삶의 이야기가 된다. 아이러니한 건 <엣지러너>의 주제의식이 S.존슨의 명제를 뒤집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닌 어떻게 죽느냐”라는 점이다. <엣지러너>는 계속해서 우리 현실에 살아남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마지막 장면과 함께 끝나버리는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는 <엣지러너>를 바라봄에 있어 우리들 현실이 아닌 [2077]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들 현실이 끝날 리 없으니 말이다.  


3. 


그렇다면 [2077]의 현실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사이버펑크다. 사이버펑크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 사이버펑크 장르가 무엇보다 미국적이라는 점에 주목하는 이는 많지 않다. 흔히 사이버펑크가 초국가적이고 범지구적인 네트워크를 묘사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사실은 간과되는 것 같다. 하지만 사이버펑크는 그 장르의 기원만큼 너무나 미국적이며, 이는 곧 웨스턴 장르가 곧 미국적의 대명사인 것과도 마찬가지다. 사이버펑크 장르를 형성한 『뉴로맨서』가 1984년의 미국에서 처음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자국 경제를 추격하는 일본 경제와 오일쇼크 등의 자본주의 파탄은 사이버펑크가 일본을 가져오는 방식을 잘 설명한다. 정체불명의 히라가나와 한자, 한글 등이 병기된 사이버펑크 세계관의 몇몇 작품들에서 우리는 동아시아에 관한 의문을 품지만, 이런 의문은 금세 장르적 속성으로 이해되고야 만다. 


물론 우리가 팍스 아메리카나를 살아가는 만큼 세계의 여러 면에서 미국의 영향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많은 장르가 미국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중에서도 느와르, 웨스턴, 좀비 등과 같은 유명한 장르는 무수히 많다. 문제는 이런 장르가 보편적인 세계관으로 이해될 때, 그 안을 살아가는 우리 또한 미국적인 가치와 속성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이는 기술이 만든 디스토피아가 당대 불안이 가진 개념들의 극단화였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이버펑크 장르의 보편화는 미국적 질서의 고도화와 그런 체제가 가진 몇몇 문제들이 단지 미국의 것만은 아니게 되었다는 점을 뜻한다. 네트워크가 처음 개발된 게 미국이라 한들 오늘날엔 범지구적인 세계가 되었듯이, 말하자면 불안도 그렇게 되었다. 레나타 살레츨의 말처럼, 오늘날 불안은 누구의 것도 아니게 되었다.


4. 


전통적으로 사이버펑크 장르는 기술과 인간 사이의 트랜스 휴머니즘을 다루는 경향이 있었고, 이에 따라 비교적 철학적인 장르로 이해되어왔다. 나름의 무게감이 있었고, 이는 곧 느와르와 같은 장르와 섞어 먹기에 좋은 바디감을 제공했다. 느와르가 미국의 대공황 시기를 거치며 주로 등장한 양식이기에 자본주의의 고도화를 다루는 사이버펑크 장르와도 잘 어울렸다. 말하자면 사이버펑크의 디스토피아는 ‘저기, 미래’가 아닌 ‘여기, 지금’이었던 것이다. 디스토피아가 다루는 건 언제나 미래가 아닌 현재였고, 사이버펑크도 마찬가지다. 사이버펑크는 항상 기술이 고도화된 미래를 가정하지만 ‘오늘날’이 겪는 불안을 묘사하는 장르다. 그런 점에서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철학과는 거리가 먼 듯 보인다. “로리는 무조건 등장해야 한다”는 제작사의 말처럼, 불안과 거리를 두며 장르적 쾌감만에 집중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엣지러너>를 이해하는 것에는 한 가지 단서가 필요하다. 그건 바로 신체 절단 및 훼손의 쾌감이다. [사이버펑크 2077]의 세계관을 무대로 한 이 작품에서 유기적 신체는 대체가능한 범주에 속한다. 병원에 가서 부러진 다리를 고치는 것보다 기계로 대체하는 게 더 저렴한 세상은 유기적 신체의 가치를 바닥에 떨어트린다. 바꾸어 말해 <엣지러너>에서 유기체와 기계의 차이는 없거나 약하며, 이에 따라 신체는 통제할 수 있는 몸의 범위라는 하나의 범주로 통합된다. <엣지러너>에 철학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신체 훼손과 절단에 방점이 있다. 가령 <엣지러너>에서 유기적 신체를 버리고 몸에 더 많은 기계 파츠를 장착할수록 사이버사이코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걸 떠올려보자. 신체가 더 많은 절단면을 지닐수록 인간성 또한 더욱 많이 절단된다. 유기적 신체야말로 인간성의 근원이라고 작품은 말하는 듯하다. 


5. 


그런데 이게 정말일까. 생각을 재고해보도록 하자. 유기적 신체와 인간성 사이의 비율 고려는 사이버펑크 장르의 전통적인 주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을 정의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고민이 장르의 최대 화두다. <엣지러너>라고 해서 별 다를 바는 없다. 작품은 큰 줄기에서 인간의 가치를 따라간다. 데이비드는 엄마의 유지를 받들어 아라사카 타워의 정점에 서고자 한다. 약간은 다른 방식이지만, 어쨌거나 데이비드는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신체의 범위를 확장해가면서 어른이 되는 경험을 한다. 이는 <아키라>의 그것과 비슷한 과정으로서, 기계와 같은 외부적 대리물을 통해 보다 직접적인 확장의 경험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미성년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이들에게 신체의 성장을 내부적인 생리가 아니라 외부적인 환경에 맞춰갈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엣지러너>의 캐주얼함은 보다 현실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엣지러너>의 1화에서, 데이비드의 어머니가 화장되어 자판기 캔처럼 사출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사설 구조대는 자사의 서비스 인원이 아닌 그녀를 지나쳐 가고, 이후 어찌저찌 병원에 이송되지만, 고급 의료시설이 아닌 음침한 시설에서 데이비드의 어머니는 사망하고야 만다. 아들의 출세를 위해, 혹은 가난의 대물림을 피해 기업 아라사카와 에스컬레이터식으로 연결된 아카데미에 무리하게 아들을 입학시킨 그녀는 손쉽게 사망한다. 이후 데이비드의 학교 친구는 불법으로 번 돈으로 공부하는 게 정상적일리 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이는 데이비드가 사회 밖으로 밀려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사건을 계기로 데이비드는 평소 보던 감각 포르노(브레인 댄스, 약칭 BD)에서 접했던 산데비스탄을 장착하고, 이는 데이비드의 가장 첫 번째 신체 개조가 된다. 


6. 


요컨대 사이버펑크는 불안을 신체에 접목시켜 신체를 훼손하는 방식으로 그런 불안을 드러낸다. <엣지러너>가 사이버사이코가 된 군인의 감각-포르노로 시작하는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데이비드는 어머니의 유품인 군용 산데비스탄을 물려받으면서, 그것이 자신에게 가져다줄 여러 쾌감을 상상한다. 처음에 데이비드는 자신이 BD에서 보았던 미치광이의 말로를 우려하지만, 아카데미의 학교 친구에게 한 차례 왕따를 당하고 난 뒤에는 생각이 바뀌어 미치광이이길 택한다. 하지만 데이비드가 BD의 재현을 택했다고 해서 인간성을 상실하기로 마음먹은 건 아니다. 신체를 기계로 대체하는 게 생활양식의 일반적인 표준이 되었다면 이런 세계에서 절단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데이비드는 어머니의 사망과 얽힌 이 불안을 신체에 장착함으로써 그러한 불안과 한몸이 된다. 오히려 인간성이 증폭되는 셈이다. 


신자유주의에 기업 자본주의로 얽힌 세계에서 불안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것으로 취급된다. 그렇게 본다면 불안감이란 오히려 인간성의 증표이며, 이러한 사실은 불안이라는 말을 동시대성의 하나로 만든다. 따라서 [사이버펑크]의 세계관이 제공하는 신체 훼손의 편리함은 실질적인 자해로 기능한다. 자해하는 환자들이 자기파괴적 행위를 통해 느끼는 고통으로 자기 신체의 영역을 구획하듯이, [사이버펑크]의 사이버웨어란 그 탈부착에 있어 영토화와 탈영토화를 제공한다. 쉽게 말해 사이버웨어는 작중 배경이 되는 나이트시티처럼 유기체와 기계의 차이를 지우는 방식으로 동작하고, 이 과정에서 세계의 불안은 곧 주체의 불안이 된다. 그런고로 주체의 영역을 설정하는 사이버웨어 이식행위가 그들 세계의 활동영역을 증대하는 행위가 되는 건 그리 이상하지 않다. 


7.


<엣지러너>의 인물들은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은 사이버웨어를 장착한다. 여기서 생존은 단순히 전투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이루고자하는 이상향과의 싸움도 뜻한다. 데이비드는 부모님의 유지를 이어받아 아라사카 타워, 이 세계의 높은 곳에 올라가고자 하며 이러한 이상은 아카데미의 퇴학을 통해 합법적 영역 안에서는 불가능해진다. 이와 동시에 데이비드는 자신에게 ‘합법적’으로 주어진 본래 신체로부터의 이탈을 감행한다. 데이비드가 자퇴를 결정하며 자신을 괴롭히던 아카데미 학생을 두들겨 패던 순간이 바로 산데비스탄의 위력이 발휘되는 순간인 것은 그 때문이다. 산데비스탄은 신경계에 작용해 인식량을 증대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가속한다. 덧붙여서 면역억제제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유지하기 힘든 사이버웨어다. 그러니 산데비스탄이란 가속이란 문맥에서 가속주의가 될 수 있진 않을까. 


세계를 신경처럼 연결하는 네트워크 안에서 자신과 맞지 않는 양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겐 본래의 유기적 신체로 돌아가고자 하는 면역반응이 일어난다. 그렇게 보면 사이버웨어의 과잉장착으로 인한 사이코화는 면역계 이상으로 보인다. 정확히 말해 이러한 면역계 이상이란 유기적 신체와 기계 간의 불완전한 결합을 뜻하고, 세계를 점령한 ‘불안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게 바로 사이버사이코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작중에 아라사카의 사냥개인 아담 스매셔가 전신을 사이버웨어화하고도 사이버사이코가 되지 않는 이유는 명쾌하다. 아마 그가 자본주의의 정점에서 이탈하는 불안들을 치유하는 일종의 백신 프로그램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무국적의 자치구인 나이트시티에서 신체는 인간이라는 형식만을 제공하는 듯 보이지만, 그러한 불안까지도 무국적일 수는 없다는 점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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