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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11. 2023

<블루 아카이브>의 선생과 에덴조약

[블루 아카이브]는 어떤 의미에서든 성인 게임이다. 게임 분류 등급이 성인이라는 점에서, 작품이 기독교를 모티브로 했다는 점에서, 어른의 의무를 핵심 주제로 다룬다는 점에서 그렇다. 첫 번째가 성적인 요소 혹은 연애 요소를 의미한다면, 두 번째는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자기희생 혹은 대속을 뜻하며, 세 번째는 어른이 아이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 또는 해야 할 의무를 가리킨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서로 얽힐 일이 없어 보임에도 같은 단어를 사용하면서 하나로 귀결되는 면이 있는데, 가령 캐릭터 서사에서는 남성향 게임의 요인을 내보이면서도 이야기 플롯에서는 어른의 측면이 부각된다는 점이 그렇다(이는 플레이어가 이입하는 ‘선생’의 성별이 따로 지정된 바 없음에도 별반 다르지 않다). 선생을 두고서 학생을 책임지고 이끄는 존재, 혹은 그런 역할의 극의에 다다른 자로 묘사하는 이 게임에서 ‘선생’은 완전무결하게 묘사된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인물 간의 관계, 그러니까 플레이어가 선생에 이입하는 코드적 맥락에서 선생은 그러한 코드를 수행하는 존재가 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게임에서 선생은 아이들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를 품게끔 묘사된다. 심지어 선생은 프라모델 같은 소소한 취미나 즐기면서 성적인 접근 혹은 그에 준하는 성애적인 면은 일절 내비치지 않는다. 단지 선생은 학생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그들과 만나고 조우하며 돕기만 할 뿐이다. 


특히나 이는 전자가 철저히 게임의 바깥에서, 그러니까 게임 내적으로는 성적인 코드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플레이어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보인다는 점에서 유의 깊다. 이는 선생을 성인의 반열에 올리면서 동시에 성인이길 바라는 이율배반적인 면모로 보이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상업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로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이율배반적인 면모가 게임을 다채롭게 만들어주는 듯한 인상도 있다. 예를 들어 이런 부류의 가챠 게임이 캐릭터 서사와 세계관 서사를 별도로 구축한다는 점을 떠올리자. 세계관에 벗어날 정도의 캐붕이 일어나진 않지만, 그럼에도 캐릭터 서사는 미시적인 측면을 조명함으로써 주류 서사에 드러나지 않는 관계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런 관계성은 게임 내의 모모톡과 같은 시스템을 거쳐 강화되며, 캐릭터 개인 스토리를 본 게이머는 캐릭터 개인에 관한 애정을 쏟게 된다. 이 경우 선생은 플레이어가 게임에 자신을 대입하는 인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반면 세계관 안에서 선생은 흠결무고한 자로서 진영과 이념에 관계없이 학생을 대한다. 또한 학생을 지휘할 때 그 능력적 진가가 드러난다는 설정을 통해 학생을 서포트하는 존재로 설정된다. 이를 통해 그 어떤 사건에서도 선생은 활약할 수 있고 또 풀리지 않을 갈등과 문제도 원활히 봉합한다. 말하자면 미시적인 면에서 선생은 플레이어의 이입 대상이지만 거시적인 면에서 선생은 ‘범접할 수 없는’ 이상향이다. 


게이머의 입장에서 선생은 게임 속 세상과 연결되기 위한 통로에 불과하다. 어쩌면 남성향 게임의 흔한 하렘형 주인공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세계관 안에서 선생은 세계의 근간이 되는 존재이며, 선생이 없으면 세계가 멸망한다는 사실이 공적으로 확인된다(1부의 평행세계). 단적으로 말해 게임에서 선생의 역할이 책임지는 존재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세계에서 ‘책임’은 단순히 무언가를 응집하고 규율하는 것만 것 아니라 그것이 바르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 게임이 곧바로 끝나버린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리고 게임이 끝난다는 말은 현실 사회에서 비가역적인 국면으로 이해되지만, 게임이라는 매체적 형식 안에서 ‘RE’의 단서를 채득하며 이는 1부의 결말인 ‘모든 기적이 시작되는 곳’으로 이어진다. [블루 아카이브] 1부의 결말은 평행세계를 설정함으로써 선생이 부재하는 세계선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어떠한 게임의 ‘종착지’를 보여주는데, 게이머가 즐기는 주류 세계선에서는 항상 리세마라와 투비컨티뉴의 가능성이 존재하고 이를 따라 주류 세계는 종착지가 될 수 없다. 달리 표현하자면, 게임에서 주인공의 의미가 바로 ‘죽을 수 없다’는 불사의 속성임이 여기서 확인된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 ‘선생’은 재림예수와 같은 형태의 무고함이라기보다 ‘죽을 수 없는 형태’로 만들어진, 무고의 필요성으로 요청된 하나의 ‘형식’일 수도 있다. 이 경우 선생은 게임 안과 밖을 잇는다는 점에서 이율배반적임이 허용된다. 


어떻게 하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 한데 어울릴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건 ‘세계인 나 혹은 나인 세계’를 바라봄으로써 성립하는 건 아닐까? 이 경우, 우리는 어디까지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이고 할 수 있는 일인지를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 이와 유사하게 게이머는 하렘형 인물로의 선생과 책임을 지는 존재로의 선생이 서로 상충되는 게 아닐지를 의심하게 된다. 게이머는 학생들을 마주하며 이들 각각에 자신의 이상형을 투영할 수 있지만 정작 세계 안으로 들어가면 절대적인 이상이 불가하다는 사실만을 직면할 뿐이다. 이른바, 미시적 세계가 자기만이 사랑받는 세계라면 거시적 세계는 자신만이 사랑할 수 있는 세계다. 이 둘은 확실히 다른 테이블에 놓인 듯 보이므로 같은 층위에 공존하는 건 뭔가 이상하게 느껴진다. 이 대목에서 에덴조약을 다루는 1부 3장의 이야기를 다뤄보자. 에덴조약은 보는 관점에 따라 평화조약이면서 군사협정이기도 하므로 에덴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이율배반성이 있다. 서로 대립하는 양측의 군사기구를 하나로 연합한다는 이 조약은 군사적 행동을 독단으로 하지 못하게끔 제약함과 동시에 하나로 지지받는 독단이 등장했을 때는 통제 불가능한 사태에 빠진다는 한계가 있다. 말하자면 에덴조약과 선생의 공통점은 ‘이상’을 전제로 만들어졌다는 점이고, 전자가 ‘에덴’이라는 말로써 곧바로 표시되는 것과는 달리 선생은 그냥 처음부터 흠결무고한 존재라서 이 상황은 이율배반이다.  


에덴조약은 계약과 계율을 절대적으로 따른다는 점에서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작중에서 묘사되는 바처럼 목적에 과정을 끼워 맞추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래서 그 목적과 과정은 서로 상충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조약의 성격은 이율배반이 된다. 다른 한편 계약과 계율이 선험적으로 제시된 상황은 ‘주어진 것’으로의 존재를 묘사하며, 여기엔 원래부터 그냥 그랬다는 결론적인 설명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바로 이 점이 선생과 유사하다고 보여진다. 게임의 프롤로그에서 작중 세계로 전입해온 선생은 외부인에 해당하는데, 게임은 기억상실이라는 설정으로 이전의 이야기를 말해주지 않는다. 결국 게임의 시작이 곧 선생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점에서 선생은 대외적으로 ‘도래한 것’, 원래부터 그렇게 제시된 흠결무고한 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조약과 선생 사이의 이러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방향성의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에덴조약이 상대를 믿을 수 없기에 근본적인 봉합의 가능성을 제외하고 곧바로 결론에 도달해버린 한편, 선생은 상대를 믿어야만 하기에 근본적인 분열의 가능성을 제외하고 곧바로 결론에 도달해버린다. 여기에는 별다른 증명의 과정이 필요없는 게 아니라 그러한 증명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렸으며, 왜냐하면 그런 증명이 이미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 즉 ‘세계 자체의 존재 원리’로 기입되어있어서다. 


3장에서 줄곧 강조되듯 타인의 진심을 아는 문제가 “진심을 아는 상황에서는 타인이 아니고, 타인인 상황에서는 진심을 알 수 없다”는 이율배반에 부딪힐 때, 마찬가지로 에덴은 이름으로 지칭되지만 정작 그 존재를 확증하는 게 불가하므로 어떠한 실제적 지표를 드러내지는 못한다는 문제를 마주한다. 그러므로 안숭범이 제임스 그레이의 <잃어버린 도시 Z>를 두고서 대문자 Z로 실재를 지적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 에덴을 대문자로 볼 수 있다. 에덴이 실존하는 장소든 아니든 간에, 중요한 건 에덴이라는 꿈 안에서만 살 수 있는 탐험가의 모습이며, 그건 바로 꿈이 아니라면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작중 화자 세이아의 태도와도 닮아있다. 정확히 말해 자각몽을 너무 많이 꾸었기에 현실과 꿈의 경계를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는 세이아의 태도는 그러한 실재의 범주를 ‘대문자’로만 축약하면서 ‘바깥’을 상정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결론은 ‘바깥’을 상정하지 않기에 그 자신을 세계의 존재원리로 만든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안에서는 바깥을 인식할 수 없고 바깥에서는 안쪽을 인지할 수 없다”는 인식론의 원리 논제를 떠올린다. 에덴은 상황을 파훼할 ‘바깥’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해결책이 아니며, 혹은 원초적인 의미에서의 ‘내부’라고 볼 수도 없으므로 그저 상황들을 한데 엮는 대문자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에덴조약은 이름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율배반인 것이다.


에덴이 실재를 가리키는 단어라면 에덴을 중심으로 화합을 꾀한다는 에덴조약의 정의는 그 자체로 이율배반일 수밖에 없다. 그게 바깥이든 내부이든 간에, 방향은 한 자리에만 머무르지 않을 것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맥락에서 선생이 소속된 샬레는 키보토스 전역에 전권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초법적 기구이다. 그들이 행사하는 신적 폭력은 에덴조약의 양자 간에 설정된 경계를 강제로 비집는다는 점에서 폭력적이지만, 이 폭력은 되려 에덴이라는 실재 없이도 양자 간에 무화되게끔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사용되는 희생제의는 ‘에덴’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실재에 관한 적절한 처리도 이루어진다. 장의 후반부에서 주요하게 언급되는 대사인 “혐오와 증오는 학습의 결과”라는 점은 바꾸어 말해 그러한 인식이 바로 ‘존재하지 않는 에덴’을 대물림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러한 결론이 과정을 묶어놓는다는 점에서 결론을 제거해야만 비로소 내부 혹은 바깥이라는 방향으로 과정을 꾀할 가능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에덴이 기의 없는 기표이듯 선생은 기표 없는 기의인 듯 보인다. 에덴이 단지 서로를 직접적으로 해칠 수 없다는 점을 설명하는 단어일 뿐이라면 선생은 어떤 외모로 묘사되던 모두를 공평히 대하고 학생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존재일 뿐이다. 이 점에서 선생은 특정한 개체가 아니므로 계승의 가능성이 있으며, 게이머 또한 그러한 가능성의 범주에 속한다. 


선생이 흠결무고한 자이기에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인 게 아니라, 오히려 아무런 걸림돌이 없기에 게이머가 이입하기 쉬운 존재가 된다 보아야 한다. 물론 여기에는 세 가지 층위에서 서로 다른 자기를 만들어내면서 한 자리에 공존할 수 없는 이율배반이 자리한다. 그러나 그 이율배반은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몇몇 문제의식을 건드리면서 게임과 현실 모두와 충돌한다. 쉽게 말해 이 게임은 어떤 현실을 묘사하려 들지 않으며 반대로 이 현실에 몰입하기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사실 이 게임에서 게이머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선생을 비롯한 게마트리아의 일원들, 즉 ‘외부인’의 포지션에 가깝다. 또한 외부인들에게 각각 고유의 능력이 존재한다는 걸 떠올릴 때, 우리는 선생이 지닌 지휘능력 혹은 상냥함이 하나의 특성이 아닐지를 고려해야 한다. 가장 완성된 존재라는 선생이 학생을 인도하는 일은 지금-이곳이라는 세계의 자리에서 실현될 수 없으므로 그는 외부인으로 지정되었던 게 아닐까. 반대로 그러한 이상향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세계에 부재하는 의식 중 하나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사항이라면 선생의 역할은 단순히 학생들을 보호하는 일만은 아닐 테다. 에덴조약은 존재하지 않는 장소이기 전에 그곳에 존재할 수 없는 믿음들을 다루기 때문에 항상 그 믿음이란 어떠한 현실로서 특수한 능력을 지닐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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