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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Dec 29. 2022

개성과 신경계의 동력원에 관한 단상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를 구성하는 주제의식은 개성이다. 어느 날 인류에게 특수능력이 발현되는 초능력 사회를 가정하는 이 만화는 <엑스맨>보다는 한 세대 더 나아간 미래를 그리지만, 주인공을 통해 개성의 발현부터 성장까지를 그린다는 점에 초점을 둔다. 허나 소년만화로 분류되는 이 만화의 가장 큰 특징은 독자가 인물에 이입하게 하는 방식이다. 만화는 개성이 보편화된 사회에서 개성 없이 태어난 소년을 주인공 삼으며, 소년이 어떠한 이유로 개성을 물려받으면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때, 무개성이던 소년이 개성을 물려받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고찰은 용어 그대로의 흐름과 결탁한다. 사람을 해치는 저주가 아니라 개인의 특별함과 자질로 보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정착된 개성이라는 용어는 능력주의 사회를 시사한다. 능력자 사회에서 능력이라는 말이 “주어진 힘으로 세상을 바르게 한다”는 히어로물의 클리셰와 결합하고 나면, 바르게 될 수 없는 능력 따윈 없어져야 마땅하다고도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소년만화의 플롯에서 독자는 무개성이던 주인공이 개성을 배워가는 과정을 눈여겨본다. 왜냐하면 능력이 없다고 느끼는 건 소년들의 주된 심리이며, 따라서 개성을 후천적으로 얻고 노력해서 발전시킨다는 말은 그들 또한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건 ‘강해진다’는 거의 모든 소년만화의 공식을 따른다. 허나 초능력에 개성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은 이 만화에서 ‘강해진다’라는 구석보다 더 중요시되는 건 그러한 개성을 받아들이는 방법이며, 이는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포용의 가치와도 무관하지 않다. 콕 집어 소수자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더라도 이 과정에는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 자신인 것과 자신이 아닌 것을 명확히 하는 구분의 서사가 내포되어 있다. 가령 우리가 “모두를 구할 수는 없다”고 말할 때 ‘모두’의 범주는 어디까지인 것일까. ‘모두’를 설정하는 것엔 자신이 소속된 집단에 의식이 있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선제적으로 존재했던 <엑스맨> 시리즈가 흑인해방운동에서 영감을 얻은 점을 고려하면, <나히아>는 능력주의 사회의 어떤 표본을 제시하는 듯 보인다. 실제로 이 만화에는 ‘개성’이라는 의례적 표현을 이능력이라는 최초의 멸칭으로 되돌리면서 이를 토대로 해방을 꾀해야 한다는 사상이 있다. 개성과 이능력이라는 표현이 서로 부딪히는 셈인데, 양쪽 다 다름을 인정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 어쨌거나 인식의 토대는 같다고 볼 수 있다. ‘다름’이 출현했을 때 우리가 그걸 받아들이는 책임은 시스템이 되어야 할까, 아니면 개인이 되어야만 할까.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게 중요한 이유는 말 그대로 모두를 구할 수는 없어서라는 걸 떠올리자. 시스템 안에서 ‘나’는 언제든지 ‘내가 아닌 것’이 될 수 있으므로 개인의 희생은 개인을 위한 이유가 아닌 것으로 정당화된다. 반면 책임이 개인에게 있을 경우 개인은 항상 ‘나’로 남으므로 ‘내가 아닌 것’을 구해야만 할 이유도 확실해진다. 


물론 이런 말을 하면서 빌런 집단을 옹호하려는 건 아니다. 생각해보았을 때 만화에서 가장 와 닿는 것은 헨리 카빌의 <슈퍼맨> 영화 시리즈처럼 능력을 받아들이고 소화해가는 과정이다. 고등학교를 주 무대로 하며 능력의 발현과 성장을 중점을 내세우는 이 만화가 ‘히어로 양성 교육’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은 <스파이더맨> 코믹스가 하지 못하는 부류이다. 무엇보다 주인공 미도리야 이즈쿠는 남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손발처럼 사용하는 개성을 걸음마 단계부터 배워야 하며, 이는 정작 그가 지닌 게 ‘완벽한’ 능력인 원 포 올이라는 점에서 대비된다. 선대 원 포 올 계승자인 올마이트가 완벽한 영웅상을 보여주는 가운데 그런 완벽함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백퍼센트의 출력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은 인간의 내적 재능은 어디까지나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는 훈련을 통해 발현되는 것이지 주어진 그 자체가 완벽하지는 않다는 점을 말해준다. 


바꾸어 말해 <나히아>가 독자를 서사에 이입시키는 방식은 주어진 것의 완벽함을 다루는 과정을 보여주는 일이다. 누구나 재능은 있지만 그것을 발현하고 운용하는 과정에서 두각이 드러나는 것이지 완전한 재능이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 이는 능력이라는 말이 재능이 아니라 기능이라는 말과도 같다. <나히아>의 개성은 올포원과 원포올이라는 개성의 이전 가능성을 통해 그 선천성에서 벗어나며 동시에 개성을 하나의 기능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그 말처럼 만약 개성이 인체의 손발처럼 하나의 기관이라면, 이것이 없거나 비대하더라도 별다르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이야말로 개성이라는 말의 본뜻일 테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히아>의 개성은 일종의 자동차 운전과도 같다. 자동차는 운전자의 불안이 차체에 그대로 전달된다는 점에서 신체의 확장임이 확인되는 기계다. 마찬가지로 개성은 그 범주에서 신체의 연장선에 있는 기능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걱정해야 할 건 ‘재능없음’이 아니라 ‘다루지 못함’이 아닐까? 어쩌면 이는 단순히 재능의 범주에만 국한될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영화를 두고서 숏의 기능적인 면을 논할 때, 이것은 세계의 확장으로 보여야 하지 영화 자체의 재능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카메라는 마치 클러치처럼 동력의 전달을 끊고 잇는 장치에만 불과하지 어떠한 것을 새로이 창조하고, 기막힌 우연의 순간을 포착하고 드러내는 장치가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카메라라는 것을 인간 시야의 기능적인 확장(Exterier)으로 이해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카메라를 다루는 방법일 뿐이고 우리 세계는 처음부터 그 자체로 고유하다. 이 점에서 영화에 존재론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일은 사실상 이상하거나 차별에 가깝게 보인다. 영화를 상대화하며 현실을 논하는 일은 그 능력적인 면에서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분하는 입장에 가까우며, 이는 카메라가 모든 것을 기록할 수는 없다는 말과도 같으니 말이다. 


다른 한편 <사이버펑크: 엣지러너>의 산데비스탄 장면은 그러한 의미에서의 능력주의를 묘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경계 가속기구인 산데비스탄을 사용할 때 신경계로 신호가 전달되는 장면을 내거티브로 발현하는 이 연출은 자동차의 클러치를 밟는 것처럼 보인다. 평상시에는 기능적으로 장착만 하던 것을 신경계에 연결하는 순간, 발현된 기능은 세계에 자신을 다이브시키며 이는 ‘나’와 ‘내가 아닌 것’ 사이의 경계를 해체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능력이라는 것은 자신일 수 있는 것과 자신이 아닌 것 사이를 허묾으로써 가능성과 불가능성 간의 경계를 지운다. 막연하게 모두가 재능이 있다고 말하는 긍정론을 설파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동력의 전달과정에 개입할 수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주어진 것을 응용함에 따라 다른 효율을 낼 수 있다는 말은 어쩌면 찾아온 행운에 관한 하나의 증폭법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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