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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an 20. 2024

장르로 매듭짓기: 서울의 봄×블루 아카이브


데스크탑 컴퓨터의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두고서 이미지론에 접목한 연구가 있다. 채집에서 포스트 프로덕션까지 모두 디지털 운영체제 안에서 작업하는 영화들을 다룬 연구들인데, 이 관점은 ‘영화적 경험’을 ‘컴퓨터의 사용 경험’에 일치하거나 녹아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새롭다. 이 관점에서 ‘영화’는 오브제의 배치를 따라 구성하는 미장센을 UI 창틀과 바탕화면 아이콘의 배치, 모니터와 프로그램들 사이의 상호 연결에 적용하는 일에 사용한다. 즉, 데스크탑 시네마론은 세계를 포착하여 재현하는 일보다는 들뢰즈가 이루어놓은 유산인 ‘뇌=영화’를 갖고서 작업한다. 데스크탑 시네마론은 영화를 사유하거나 기억하는 방식은 데스크탑 UI를 다루는 것처럼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여러 이미지를 뷰어에 띄어놓고 이들 간에 초점을 분산시키는 일은, 대상을 평면에서 분리해 내 누끼를 따고 이를 포토샵의 레이어에 적용해 카메라의 심도계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시민 케인>의 작업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공간의 활용에서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데스크탑 UI의 제작목표가 작업 테이블이었다는 걸 고려하면, 인터넷 창이나 프로그램, 탐색기, 애플리케이션 등을 다양하게 띄워놓고 작업하는 일은 여러 작용이나 공간들과 협업하는 일에 다름없다. 그리고 이런 작용이 ‘의미’라거나 ‘세계’로 확장될 가능성 또한 충분하다. 


그런 점에서 게임 [블루 아카이브]의 최종장 ‘모든 기적이 시작되는 곳’을 재감상하며 한국의 역사 정치물인 <서울의 봄>을 떠올렸다. 이 둘을 같은 자리에 놓고 볼 수 있을 독자가 많지 않으리라 생각되지만, 설득이나 논증에 중점을 둔 글이 아니니 묵묵히 따라와 주길 바란다. 이야기 자체가 비교적 30대 전후에 호소하도록 짜였거나 하는 일에서는 ‘늙은 오타쿠’에 대한 감상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건담을 늙다리 취급하거나 하는 식의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하면서도 그런 세대차이가 어쩌면 게임의 주제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미국의 서브 컬처가 ‘가상의 적’을 만들어내지만 일본의 서브 컬처가 ‘가상의 친구’를 만들어낸다는 논의(『좀비 사회학』)는 [블루 아카이브]가 본류를 둔 일본향 서브 컬처처럼 해석해볼 여지를 제공한다. 게임에 등장하는 많은 여고생을 친구로 여기기보다는, 이야기를 끌어가는 과정에서 플레이어의 모든 선택과 수행이 집결되는 존재로서의 ‘선생’이 스스로 모든 걸 판단해서 끌고 가야 하는 어른으로서의 속성을 연상케 한다는 것이다. 가공의 마망 캐릭터에 안기기를 바라는 일도 있을 수 있겠지만, 선택하는 일에서는 항상 버려지는 것이 존재하고, 그런 선택에서는 설사 자신이라 해서 예외일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니까 요는 이렇다. 나란히 두는 것들에서 의미와 세계로 확장되는 일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이 윈도우들 간에는 하나의 테이블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을까? 


서브 컬처로서 [블루 아카이브]에 대한 평가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야기 볼륨에서 게임의 이야기는 다소 ‘맛있다’고 표현할 법하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적절히 잇는 방식은 이야기가 시작되는 일이 곧 끝을 예측하게 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완결성을 지닌다. 누군가는 수미상관이라는 말로 간단히 표현하겠지만, 이야기가 줄곧 업데이트되거나 후행 패치로 수정될 수 있는 라이브 서비스 방식에서 ‘수미상관’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가령 <내언니전지현과나>는 정상적인 서비스가 되고 있지 않은 게임인 [일랜시아]를 조명한다. 운영진도 방치해버린 이 게임은 무언가 시작될 리도 없고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그냥 하나의 월경지처럼 되어있다. 유저들은 삶이 지칠 때 잠시 게임에 접속하여 길드원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들에게 [일랜시아]는 삶과는 동떨어졌지만 어쩌면 삶의 일부이기도 하다. ‘삶’이란 끝이 보이지 않으면서 기약할 수 없는 결말을 약속하는데, [일랜시아]는 모든 게 멈춰버렸기에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일랜시아]는 그냥 멈춰버린 곳이고 그런 점에서 연속되지도 않으며, ‘월경지’라는 표현은 그 점을 가리킨다, 그런데 월경지란 달리 보았을 때 본국과는 국경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작’이나 ‘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월경지에 그어진 경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가 아니라 순수하게 영토 자체에 그어지기만 할 뿐이다. 


영화의 역할이 그렇다. 영화를 본다는 건 잠시나마 삶을 떠나있을 수 있다는 것, 월경지에 들어선다는 것이다. 영화는 스크린이라는 영토에서 의미화의 작업을 이루어내며 이때 영화와 삶 사이에 경계를 설정하는 일은 개인이 영화에 이입하기보다는, 영화가 현실 쪽으로 발산되는 형태에 더 가깝다. 소위 말하는 ‘탈주’의 기능으로서 영화는 개인에게 삶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며, 이런 점에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일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야기가 끝나야만 비로소 미련없이 돌아설 수 있기 때문이다-끝나지 않는 이야기란 삶을 살아가는 것 하나만으로도 족하다. 영화를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영화관을 나오는 일에 대한 감각이다. 물론, 절대적으로 ‘마무리를 짓는 일’에 집착하기보다는 수미상관의 구조가 선사하는 풀려남의 감각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어떤 이야기에 사로잡혔다가 풀려나는 순간은 어떤 쪽이든 간에 작은 감동과 약간의 충격을 선사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스즈메가 검게 빗금 쳐진 일기장을 마주하는 장면에 대해 신카이 마코토는 “영화가 줄곧 판타지의 세계를 묘사하던 일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라고 언급한다. 이를 위해 그는 현실에서 존재하는 몇몇 레트로 J-POP송이 흘러나오도록 했고, 노래를 흥얼거리던 와중에 풀려나던 현실은 스즈메가 마주한 바로 그 장면에서 완전히 현현하게 된다. 


3월 11일을 마주하는 대목에서 <스즈메>의 이야기는 모종의 정합성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스즈메가 잘생긴 남자를 따라가는 여정이 어딘가 철없게 보인다면, 이 순간 이후로는 ‘돌아간다’라는 일 자체에 방점이 찍힌다. 그러니까 나는 <스즈메>가 사실 <유레카> 같은 작품들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한다. <유레카>는 어른이 아이를 끌어안으면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하지만 지금 이 자리로 돌아와야 해”라고 말하는 작품이었다. 버스 납치 사건의 당사자였던 세 사람이 버스를 타고 여행을 떠났을 때 이 여정은 그런 트라우마에서 자기를 풀어놓기 위한 게 된다. 이른바, 로드 무비의 성격은 인물이 출발했다가 돌아오는 과정에서, 변한 게 아무것도 없어 보이더라도 그 안에서는 미묘한 차이가 생겨난다는 점에 의의가 있기 마련이라는 걸 떠올려보자. 영화를 보러 갔다가 다시 나오는 과정에서 우리는 월경지로서의 영화를 마주한다. 이 과정에서 삶은, 잠깐의 일탈을 이루지만 지루하고 무료한 일상으로 복귀해야만 한다. 따라서 ‘다녀왔을 때’ 삶이 어떤 의미를 갖고자 한다면 영화는 무언가를 풀려나게 해야 하고, 그런 점에서 관객의 삶으로 무언가를 풀어놓아야만 한다. 결과적으로 <스즈메>나 <유레카>나 형식은 끌어안는 것이지만, 관객에게는 ‘풀어놓는다’라는 쪽이 되는 셈이다. 


발걸음을 옮겨 <서울의 봄>을 들여다보자. 영화의 결말에 대통령(권한대행)은 하나회의 압력에 못 이겨, 사후재가의 형태로 보고서를 결재한다. 이 결재에 대해 대통령 나름의 처신이라는 의견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후대에 정치적인 책임과 과오를 남기지 않으려는 ‘회피’였을 뿐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에 자리한 이 장면은 누군가에게는 현실의 몇몇 사건을 연상케 했을 것이다. 영화가 다루는 건 역사지만, 기억은 역사를 초과하기 마련이며 내내 선택의 순간들을 마주하던 영화는 마지막에 가서야 현실의 영토로 돌아오게 된다. <서울의 봄>을 보며 어떤 고구마적인 순간들에 분노하는 일은 정해진 결과가 도래하는 것을 지연시키기만 할 뿐, 문제를 해결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주지 못하며 이 점에서 결말은 자칫 무기력하거나 허무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서울의 봄>이 여전히 뜨거운 영화로 남을 수 있던 건 영화가 유예하는 판단들이 오히려 영화에 경계를 세우지 않았고, 이로 인해 영화는 현실에 풀려나는 쪽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영화는 의미작용만이 있을 뿐 그 자체로 어떤 의미를 품고 있지는 않다. <서울의 봄>은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에서 캐릭터성을 내세웠고 이 과정에서 인물의 행동은 주변 상황이나 맥락이 아닌 캐릭터성을 따라갈 뿐이기에, 여기에는 실제 사실이나 도덕적 판단 등이 개입하지 않는다. 즉, <서울의 봄>은 어떠한 책임이나 결과를 끌어안고서 관객에게는 장르만을 풀어놓는다.


<서울의 봄>의 결말은 사실 무엇보다 뻔했다. 역사를 갖고서 작업했다는 말은 이미 결말이 알려졌다는 점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렇다면 이 안에서 ‘선택’은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이미 결말이 정해졌다면 그 안에서 무언가를 선택하는 일을 두고서 자유의지라고 볼 수 있을까? 이런 의문에 가장 손쉽게 답할 수 있는 건 게임이다. 게임은 이야기의 전개와 방식에서 세세한 부분까지 설계되어있으므로 유저의 선택은 모두 ‘기획의도’에 포함된다. 영화에서는 장르라고 볼 수 있을 이 구속은 어떤 면에서 유저가 개발자의 손아귀에 놀아난다는 느낌이지만, 반대로 이건 원래 ‘그런 이야기’이므로 유저가 추구하는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기도 한다. <서울의 봄>이 인물의 캐릭터성을 내세울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 덕택이다. 결말이 정해졌기에 아무런 선택도 하지 못한 채 암울하게 주저앉는 것만이 장르의 역할은 아니다. 장르의 역할은 고통이나 슬픔을 작품이 껴안고서 남은 현실을 안전하게 돌려주는 것이다. 영화를 보며 현실이 침식당하거나 하는 우려는 장르의 생존자인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지 작품 자체에 대입될 만한 잣대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는 “모두 자신에게서 비롯된 이야기”라고 말하는 <진격의 거인>의 사례를 떠올려보고도 싶다. 정해진 것 안에서 무언가를 선택하는 일은 <서울의 봄>의 사후재가처럼 그저 책임회피에 불과한 것일까? 에렌이 자신을 학살자로 자칭했을 때, 이 선택은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만 돌려질 수 있을까? 원래부터 그런 이야기였을 뿐이라고 말하는 일은 무엇보다 ‘자기’가 선택한 일이기에 수미상관의 구조가 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다시금 [블루 아카이브]로 돌아오면, 쿠테타가 작중 사건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이 이야기에서 무언가 ‘한국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여기서 한국적이라는 표현은 K라는 국적이 아니라 한국의 역사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사건들의 지리적 배치에 따른 영토성이 게임 내에서 발현된다는 소리다. 가령 에덴조약 편에서는 스파이 색출 작전으로 시작해 미사일 포격으로 범국가적 혼란이 벌어지는 것으로 줄거리가 이어진다. 그리고 이 줄거리에서는 지휘체계가 붕괴하고 이를 주변부에서부터 복구해가는 방식이 중점으로 부각되는데, 이는 <강철비> 같은 한국 작품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상상력이다. <지정생존자> 같은 드라마가 연상되기도 하지만, 확실하게 말해둘 수 있는 건 캐릭터를 구축하는 힘이 일본향 서브 컬처 문화에 있다면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여기서 나는 설득력 있는 근거를 내밀지는 못하겠지만 왜 하필 그런 이야기들을 끌고 가는 게 학생들을 책임져야 할 선생인지, 그리고 ‘어른’인지를 자문하고 싶다. 단순히 ‘프로듀서’나 ‘트레이너’ 같은 식으로 학생으로 설정된 캐릭터들에 대한 오너로서 게이머의 자리를 만들어두었다기보다는, 작중에서 메타 캐릭터인 골콩트가 말하듯 ‘이런 이야기’에서는 당연하게도 ‘선생’이라는 역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중중첩상태라는 컨셉으로 등장하는 방주는 여러 확률적인 공존 상태를 하나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고정’의 속성을 갖는다. 그리고 해석이 고정된다는 건 결말이 정해졌다는 뜻이고 별다른 대안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최종장의 이야기에서 간혈적으로 제시되는 ‘선생’이 존재하지 않는 미래는 ‘책임’을 질 어른이 사라진 세계, 혹은 여러 선택지에 따라 분기될 수 있는 평행세계들을 보여준다는 걸 떠올려보자. 이런 세계들에 하나의 결말로서 제시되는 선생과 프레나파테스의 모습은 게이머의 선택에 따라 분기되었던 미래가 비가역적인 지점에 이르렀음을 지적한다. 그러니까 에덴조약 편에서 보여주는 게 여러 인물의 선택이 하나의 거대한 결말, 행복한 결말로 나아감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최종장에서는 어른이 갖는 ‘책임’의 무게가 성공과 실패 모두에서 비가역적인 사태로서 제시된다. 쉽게 말하자면, 반려동물을 한번 가족으로 들인 이상 그 어떤 미래에서도 우리는 이들의 죽음을 마주해야만 한다. 나에게서 시작된 이야기는 모든 다중 우주에서 하나의 결말로 귀결된다는 것, 여기서 그런 결말에 자기를 고정하는 것은 책임이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이야기’란 수미상관의 구조에서 ‘자기’의 형태를 견인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최종장에서는 학생회장이 말했던 ‘책임을 지는 사람’의 의미가 회고되어, 키보토스를 침공한 색채의 프레타파테스 또한 학생을 책임질 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자기’의 형태를 견인한다는 점에서는 여러 세계로 분열되어버린 딸을 찾아가는 여정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같은 영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는 다중중첩상태가 되어버린 딸이 빌런으로 등장하는데,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직 자살이다. 이에 대해 그녀의 어머니는 “모든 우주에서 널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한번 시작된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를 마주하는 게 바로 책임을 진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한편 [산나비]에서는 “중요한 건 어떻게 끝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끝으로 가는 지다.”라는 주제가 언급되면서 게이머를 모든 무대의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연출이 사용된다. 여태까지 해왔던 여정을 복기함에 따라 이야기는 수미상관의 형식이 되지만, 그 과정에서는 바닥에 고인 물에 주인공의 ‘실제’ 모습이 비쳐지는 등의 반전이 이어진다. [블루 아카이브]의 최종장에서도 이러한 반전은 ‘색채’라는 이름으로 등장해 인물의 고유명을 ‘신비’에서 ‘공포’로 반전시킨다는 설정으로써 제시되는데, 특징적으로 볼 때 여기서 말하는 공포란 ‘결말’을 마주해야만 하는 일을 가리키는 것일 테다. 왜냐하면 자신이 시작한 이야기란 것은 수미상관의 구조이기에 어느 정도 예측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서울의 봄>은 하나회의 계획을 막을 수 없었다는 쪽보다는, 인물이 선택한 것들에서 ‘탈락되었다’라고 볼법한 사태들이 모여 이루어진 게 영화의 결말이라는 인상을 제공한다. 역사가 하나회의 승리를 선언하는 일은 사건들의 정교함이 아니라 장르적인 속성을 따라간다고 말하는 게 이 영화의 화법이다. 즉, 시작된 순간부터 이미 결말이 정해졌다면 그 안의 시나리오를 따라가 보는 게 여기서는 오히려 안전한 방식이 될 것이다. 이처럼 자기를 대하는 문제는 어떤 모습이 되고 싶은지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캐릭터를 구축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캐릭터의 구축은 장르의 성격과 마찬가지로 ‘된다’의 과정이 생략되어, 원래부터 그냥 그렇다라는 식의 설명을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블루 아카이브]의 이야기는 캐릭터가 이야기에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이야기가 굴러가기 위해 캐릭터를 도구적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서울의 봄>을 닮아있다. 가령 에덴조약 편에서도 타임라인을 토대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사태가 언제 끝날지를 예견함에 따라, ‘시작’된 것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볼륨감을 형성하며 이는 곧 어느 정도 이야기가 수미상관이 될 것임을 암시한다. 아리우스 스쿼드를 메인 빌런으로 삼은 이야기는 선생의 역할에 따라 아이들을 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구원받을 것인지’를 논한다. 그러니까, 결말이 정해졌다면 거기까지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야기적인 정합성을 제공하는 게 장르의 역할이다. 안전함에 머물도록 하는 이 예견과 암시는 ‘결말은 무조건 행복하게’와 ‘밝고 건전한 이야기’라는 두 개의 원칙으로 작동하는 이 게임에서 ‘불행’하게 시작했다면 그것을 어떻게 반전시킬 것인가, 라는 화두를 던진다. 


이후 최종장에서는 사태의 개전이 쿠테타라는 점에서, 특히나 핵심 권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총학생회장 대행의 입지가 위험해지고 이를 토대로 외부 세력이 난입한다는 점에서 <서울의 봄>을 연상케 한다. 물론 단순한 인상들을 비교하는 일에 불과하지만, 이 둘은 같은 운영체제가 제공하는 테이블 위에서 서로 다른 창으로 켜져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이 둘을 병렬 배치해서 세계와 의미를 확장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이를 따라 책임을 진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흔히 아이와 어른을 구분 짓는 것은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는지로, 법령에서는 성인의 기준을 두고서 모든 법적 권리를 스스로 행사할 수 있는 자로 규정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주인공의 역할을 선생으로 규정하는 일은 ‘주인공’이기에 가능한 몇몇 특권들, 죽지 않는다거나 아니면 항상 주인공에게는 행복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장르적 법칙에 기대고 있다. 즉, 이 게임에서 선생은 무언가를 선택해서 실현하는 존재라기보다는 최종장에서의 리오와 마찬가지로, 어떤 선택들이 실현되는 일에 연루되면서 이에 따라 무언가를 선택하지 않으면서 그에 대한 책임감만을 돌려받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니 이를 두고서 대속이라 부른다면 어떨까. [블루 아카이브]의 선생을 두고서 종교적인 존재에 빗대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러한 대속의 기능은 앞서 언급한 영화의 기능과 연결되는 것 같다. 기적이라던가 의미라던가 하는 것은 모두 자신에게서 마무리되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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