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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r 11. 2023

<스즈메>와(가) 잃어버린 것을 옹호하며

피난민: 누가 우리에게 이런 재앙을 내렸을까요?

아드리아: 자, 문으로 가자! 시간이 없단다!

-게임 <디아블로 3> 중에서-


<스즈메의 문단속>을 포스트 3.11의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포스트 3.11이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공존의 논리를 따른다고 가정한다. 그 이유로는 첫 번째. 포스트 3.11은 기억되어야 할 사건이라는 점이다.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 사건에서 어떠한 교훈을 얻거나 사상자를 추도하는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허나 무엇보다 중요한 두 번째는 그러한 사건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으로, 3.11의 여파였던 도쿄전력 사건은 앞으로 수백 년간 우리와 함께하게 될 문제이다. 이는 사건이 벌어진지 10여 년이 훌쩍 넘은 현재에도 사건이 아직 종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한편, 사건에 대한 기억이 단순히 추도인 것만이 아닌 현실 세계에서도 뚜렷이 드러나 있는 하나의 지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는 다 끝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질적으로 그렇지 않은 경우를 자주 목격한다. 한국의 경우 전쟁이 이에 해당하는데, 교과서 등지에서는 1950년이라는 시간을 명확히 가리키지만 현실 세계에서 전쟁은 징집, 예비군, 민방위 훈련 등의 형태로 우리 곁에 공존한다. 이에 따라 한국은 국제 분류에서 항상 긴장 상태로 지칭되었으며 한국이 동아시아의 화약고가 된 것은 그 때문이다. 특히 이는 그 외부적 시선에서 한국을 설명하는 요점이 되기도 했는데, 전 축구국대 감독 슈틸리케는 “한국은 분단국가이기에 줄곧 경계 태세이며 이런 상황이 국민의 기질에도 반영돼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발언을 두고 설왕설래할 생각은 없지만 그럼에도 확실히 말해둘 수 있는 사실 하나가 있다. 끝나지 않는 사건이 있으며 그것은 하나의 긴장상태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공존’한다는 건 같은 공간에 함께 존재한다는 뜻이다. 잘 알지 못하더라도 그것과 우리는 함께한다고, 공존은 그렇게 말한다.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더라도 상호 간에 간섭이 없는 상태라면 우리는 그걸 두고 공존이라 말한다. 바꾸어 말해 우리가 공존을 택하는 논리는 상대방에 이해가 우선시되어서라기보단 오히려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해할 생각이 없다면 간섭할 이유도 없으며, 나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면 딱히 손을 댈 이유도 없다. 이런 측면에서 3.11은 인간이 자연을 이해할 수 없다는 불가침의 성격을 강조하고 또 그런 의미에서의 공존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은 자연 앞에 작은 존재일 뿐이고 인간이 그 거대함을 이해하기란 어렵다고, 사람들은 생각해왔다. 그래서 죽음 또한 같은 맥락에서 설득되어왔고 사람들은 죽음과의 공존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포스트 3.11의 정동은 인간이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공존의 논리가 주류를 이뤘다. 이는 90년대 인간에 의한 테러가 다다른 결론과 유사하지만,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증오할 수도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지와 마음은 방향을 잃고 말았다.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일본 영화는 그러한 이해를 ‘닥쳐오는 것’이자 ‘전염되는 것’으로 설정했으며, 이는 표면적으로는 이루어진 회복이 속으로는 여전히 불간섭을 전제함을 보여줬다. 예를 들어 기요시의 <산책하는 침략자>는 어떠한 언어적 개념을 강탈당하면서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변모시킨다. 외계인들의 목적은 단순히 지구인과 공존하는 것이며 하지만 이 여정은 예상치 못하게 종료되고야 만다. 여기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그 상실이다. 이는 어떠한 표현의 수단을 상실함과 동시에 ‘이해’받기를 포기한다는 점에서, ‘공존’은 이해하는 것도 이해받는 것도 모두 포기해야만 가능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는 ‘죽는 것도’ ‘죽이는 것도’ 모두 포기해야만 공존이라는 이름의 생존이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포스트 3.11의 자기 위치 상실은 그러한 맥락에서 등장해왔고, <너의 이름은>이 죽는 것을 포기한다면 <날씨의 아이>는 죽이는 것을 포기한다. <너의 이름>이 타키를 죽지 못하게 한다면 <날씨>는 호다카를 죽이지 못하게 한다. 타키는 죽음의 문턱에서 과거와의 연결고리를 발견하고 호다카는 총을 손에 쥐어 들지만 결국 사람을 향해 쏘지는 못한다. 정리해두자면 이들은 이 세계에 자신이 받아들여지는 방법으로, 이해받길 요청하진 않는 ‘공존’을 택한다. 하지만 포스트 3.11의 사회에서 공존은 좋은 선택이었을까.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말이 ‘언제라면’ 죽을 수 있다라는 말을 내포하는 순간 공존의 논리는 궤변이 되고야 만다. 그래서 <스즈메>는 자신이 죽을 자리를 찾아가지 않으며 오히려 그런 세계와 공존하기를 포기한다. 


*


사람이 죽는 것에 이유가 없다면 사람을 구하는 것에도 이유가 없어야 한다. 영화는 정확히 이 논리에서 출발한다. 예전에 사랑의 감정으로 표현되던 끌림은 더 큰 차원에서의 인력으로 대체되며 이는 포스트라는 문구가 벌려놓은 간극에 행해진다. 따라서 잘생긴 남자에 끌려간다는 간솔한 설정이 그에 의문을 제기하는 게 될 수는 없다. 이 영화의 사랑은 둘 만의 사랑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세계]가 아니라,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여정에 동참하기 때문이다. 이 여정은 본래 가졌던 감정을 회복하는 과정만큼이나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진 이해를 되찾는다. <스즈메>는 여행길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며 그들 모두에게 호의적인 대우를 받는다. 솔직히 모두가 착한 사람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은 이 장면들에서 우리는 왠지 모르게 ‘슬픔’이 덮여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이 인상은 마치 영화와 디제시스 사이를 연상케 하는 묘사, 스즈메가 창문 밖으로 ‘빨간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그게 자기 눈에만 보이는 경험을 한 이후에서 파급되어온 것이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재앙의 징조는 마치 미디어 매체를 통해 전파되었던 3.11의 프렉탈을 연상케 한다. 따라서 직후의 전개는 닥쳐올 재난을 모르는 이들이 아니라, 이미 현실에 공존하는 재난이 ‘일상’이 되어버려서 어떠한 반응을 할 줄 모르게 된 이들의 모습처럼 보인다. 분명 영화는 이들의 모습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 대목을 염두에 두면서 스즈메가 마을 속에 일상으로 변모해버린 폐허를 찾아다닌다는 점을 떠올려야만 한다. 폐허는 그 흔적으로만 사유된다는 점에서 일방적으로 이해를 통용하는 장소이며, 이는 마치 이해받는 것과 이해하는 것 사이가 단절된 모습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폐허의 범람은 이해받는 것이 일상화된 현실을 보여준다 보아도 좋지 않을까. 그런데 무슨 이해? 분명 3.11은 현재진행형의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해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너무 일상화되어버린 일은 우리가 그걸 이미 잘 알고 있고, 또 이해하고 있다고 여기게끔 한다. 그러나 사랑의 개념을 빼앗긴 후로 줄곧 사랑에 대해 되묻는 <침략자>들처럼, 영화가 보여주려는 건 타인에 대한 이해의 재배치일지도 모른다. 스즈메와 그녀 어머니의 자매간의 관계, 소타와 친구 사이의 관계 등. 이 부분에서 신카이는 세계의 불가해성을 인간의 것으로 가져온다. 그의 말처럼 [세계]가 이해할 수 없지만 결론적으로는 잘 작동한다면, 여기서 ‘이해’가 개입할 이유는 없으며 이것을 잘 가꾸어 보존하는 일이 더 우선시될 뿐이다. 


특히나 ‘포스트’라는 용어에 담긴 엔트로피계의 설정은 그렇게 사라진 것들이 돌아올 수 없다고 말하는 듯 보이지만, 영화는 그것이 ‘상실’된 게 아니라 ‘유실’된 것뿐이라고 말하면서 되찾아오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는 본래 있던 걸 찾아오는 것뿐이기에 수복되는 것이 어떠한 회복의 서사로 들어서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가령 <스즈메>가 일기장을 열어 기억을 되찾았을 때 이 장면은 어떠한 회복의 조짐을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낡아빠진 일기장은 이미 우리가 치유되었음에도 줄곧 상처와 치유를 논하는 상황 자체가 ‘논외’라고, 즉 비일상적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에 이해받을 수 없는 자신을 대입하는 일은 그 논리의 연장에서 죽어버린 것들에 죽어가는 자신을 목격하는 일에 그친다. 다시 말해서 상처를 논할 시기는 한참 지났고, 지금 일본 사회가 논해야 하는 건 우리가 가진 이해를 ‘공존’의 맥락 밖에서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신카이는 말한다.


*


<스즈메의 문단속>을 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크게 두 부류다. 첫 번째는 “3.11 이후를 사유하는 영화”라고 말하면서 미래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때”를 외치며 포스트 3.11을 뉴노말의 관점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둘 다 3.11을 인정하고 되돌릴 수 없는 사건으로 간주한다는 점에 그 공통점이 있지만, 엄밀하게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상이라는 말은 그러한 사고의 내재화를 뜻하며, 이 맥락에서 ‘바깥’은 단연코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반면 3.11 이후라는 표현에는 ‘이전’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는 그러한 ‘이전’이 발생하는 순간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이후’를 살펴보고자 하는 정지의 욕망과 연결된다. 말하자면 ‘이후’라는 것은 우리가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이라 부르던 불멸의 속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사진 이미지에서 불멸은 포착된 대상과 바깥 사이의 엇갈림을 전제한다. 사진 안의 풍경과 바깥의 시공간이 어긋나기 시작하면 그러한 풍경은 절대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진’의 프레임은 어디론가 향하는 문처럼 여겨졌고, 문턱을 넘어서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은 인상을 주었다. 헌데 그렇다면 ‘문’이라는 건 일종의 결론을 전제하는 행위인 것은 아닐까. 본래 영화에서 사진적 이미지가 회화의 연장선에서 도입되어왔음을 떠올려볼 때, 이 이미지가 연극 무대에서의 장을 구분하는 것에 사용되었던 건 우연이 아니다. 연극에서 장(Chapter)은 어떠한 순간과 함께 막을 내림으로써 이를 토대로 ‘이후’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관객은 연극의 장마다 이야기의 흐름이 바뀌리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었고, 그와 동시에 ‘장’은 대상과 풍경을 분리하면서 대상을 다음 풍경으로 이주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는 즉 ‘문’이 제시하는 결론은 어떤 면에서 다른 세계로의 입구가 되어준다기보다는 ‘이번 세계의 끝’이 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하나의 세계가 끝나면, 다른 세계로 이주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그동안 탐험의 성격으로 이해했던 영화의 성격을 결론으로부터의 내쫓김으로 이해할 단서가 된다. 앞날을 알 수 없어서 미래가 열린 게 아니라, 과거를 잘 알고 있기에 미래를 닫을 수가 없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3.11을 생각하는 일은 3.11의 이후를 사유할 수 없어서 미래를 열어두는 것이 아니라, 3.11을 지울 수가 없기에 그 문을 열어둔 채로 지내야만 한다는 점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3.11은 사람들을 하나로 엮는 종속절에 해당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성장해야만 한다는 압박 이전에 유예의 시간을 준다. 


성장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일이 어떠한 것과 이별하는 일이 되는 것은 유년기의 애착인형을 버리는 일에 비견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별=성장이라는 공식이 세워지며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일은 곧 성장의 증표가 된다. 하지만 이를 따라 이별에 애착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그것이 성공하지 못한 애도라는 인상을 준다. 문을 열고 나가지 않는 일은 마치 어른이 되길 거부하는 것처럼 묘사되고, 이러한 비판은 그들의 과거를 청산해야 할 것으로 만든다. 문제는 사진적 이미지의 탈구된 시간이 불멸의 속성을 지닌 것만큼이나 유예된 시간은 불사의 속성을 지닌다는 점에 있다. 이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몸으로 증명하는바, 포스트 3.11에서의 포스트란 바쟁이 말하는 ‘미라화된 조형’으로서 3.11을 통해 죽음에 저항하려는 욕구임을 보여주기에, 이 대목에서 우리는 죽음에 관한 윤리적 비판을 제기할 수 있다. 


어떤 대상이 스스로 ‘죽을 수 없다’고 단언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자발적으로 차단할 때, 그것은 ‘이후’를 내재화하는 일상화의 방법론이 된다. 왜냐하면 사고가 벌어진 이후는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일은 포스트를 특정 순간의 지속으로 사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일상’이라는 말은 세계를 미라화하는 것, 무엇을 위해 자신은 죽을 수 없게 되었는지에 관해 생각해보게끔 한다. 그리고 생각해보건대 이는 <스즈메>가 묘사하는 ‘문’의 비유가 열림이나 닫힘의 한 운동체계로만 이해될 수는 없다는 점으로도 이해된다. 문은 닫고 나와야 하는 것도, 밀고 들어가야 하는 것도 아니며 어떠한 특정 상태로만 규정될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문은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유예의 형식이며, 이는 궁극적인 재앙의 방어는 불가하며 단지 도래를 유예할 뿐이라는 ‘봉인된 시간’의 미학과도 맥을 같이한다.


뉴노말이 새로운 일상을 의미하듯이 포스트 3.11에서 일상이라는 키워드는 오히려 일상의 바깥을 들여다보려는 것에 사용된다. 이는 즉 이러한 일상이 단지 의미 없기만 한 반복이 아닌, 어떠한 결론을 알고 있기에 그에 도달하지 않으려는 유예의 움직임이라는 걸 보여준다. 또한 이런 의미에서 문단속의 행위는 문을 여닫는 것보다는 그러한 문으로 가는 것에 더 주안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을 닫는다’는 행위에 우선하는 것은 문이라는 대상에 사건 종결의 지점을 부여함으로써 이 사태에 결론을 만들어두는 일이니 말이다. 이른바, 이 영화의 이야기는 그런 의미에서의 출구전략처럼 보이며 오랜 시간이 지나 3.11이 제대로 언급되거나 혹은 기억에서조차 잊혀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가 되었을 때의 결론을 선가정한다. 이에 따라 포스트 3.11은 어떠한 미래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끝장난 세계에서 실종자를 찾는 일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풍경에서 빗겨나 유예의 상태에 접어든 불사적 존재들을 위로하는 장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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