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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13. 2024

꿈에서 깨는 죽음: [스타레일]의 페나코니에 관한 소고


"나는 영화와 비극이 서로 화합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누군가는 내가 계속해서 글을 쓰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등단이 목표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이름을 알리고 싶은 것도 아닌 듯 보이는데 글을 쓰는 이유를 당최 모르겠다고 말이다. 이런 물음에 답하자면, 기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 걸었던 길을 걷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글을 썼던 사람처럼 되고 싶어서, 그 사람이 걸었던 길을 가고 싶기 때문이다. 사상이나 이념에 대한 추종이 아니라 삶의 경로를 동경한다는 뜻이다. 가령 다자이 오사무는 아쿠타카와 류노스케를 동경했기에 아쿠타카와 상을 받고 싶어했다. 아마 그에게 이 상은, 단순한 공훈이 아니라 그가 걸었던 삶의 경로를 내포하기에 의미 있었을 것이다. 아쿠타카와를 기리는 ‘상’의 의미는, 오늘날 아쿠타카와에 대한 존경을 넘어 그의 삶과 생애에 대한 한 가지 ‘길’을 제시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어떤 상에 도전하거나 글을 쓰는 이유는, 그 길을 거쳐 간 이들의 삶과 의지를 동경해서다. 어떤 길을 걷는다는 건, 그 길의 끝에 내가 바라던 삶이 있으리라는 믿음이 아니라 이 길 자체가 하나의 풍경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동경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 아마 그 사람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한때 웹툰계에서 유행했던 ‘손민수’ 같은 사례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이보다는 조금 앞선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다. 누군가를 동경한다는 건 기본적으로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이다. 누군가를 모습이나 행위를 동경해서, 그 사람이 했던 선행을 타인에게 돌려주거나 아니면 재능을 키워 그 사람과 같은 무대에 선다든가 하는 식이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동경이란 것은, “길을 걷는다”라는 행위와 깊게 연결된다. 일반적으로 산보는 거리의 풍경을 신체에 받아들이는 행위로 이해되는데, 그런 점에서 ‘동경’은 어떠한 목적지를 되풀이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을 ‘경험’하는 일이다. 가령 관용어구로 사용되는 “같은 길을 걷고 있어요”라는 표현은, 어떠한 목적지에 대한 공유가 아니라 그에 대한 실현의 방법과 수단이 일치함을 가리킨다. 이를 따라 동경이라는 말을 이해하자면, 동경은 산보의 행위처럼 매 순간 망설임과 후회가 뒤따르지만 그만큼이나 설렘과 환희를 받아들이는 작업인 셈이다. 


미츠다 야스노리가 작곡한 게임 음악 “바람의 동경風の憧憬”을 떠올려보고 싶다. 바람의 동경은 영어권에서 Wind Scene라는 제목인데, 직역하면 ‘바람 장면’이라는 뜻으로서 한문에서의 ‘풍경(風景)’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이 제목은 ‘바람이 품은 동경심은 풍경’임을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풍경’은 ‘바람’이 어떠한 길을 걷고 싶어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말을 잇자면, 한국어에서 ‘바라다’라는 표현의 종결형이 ‘바람’인 것도 꽤 흥미롭다. 이 경우, 바람의 동경이라는 말은 속뜻을 읽지 않고서 독음했을 때 같은 뜻이 두 번 반복되는 게 되니 말이다. 즉,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되고 싶음’이란, 우리가 ‘풍경’을 두고서 ‘같은 길을 걷기 싶다’고 표현하는 일과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 순전히 시적인 연상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바라다’의 이중피동사가 ‘풍경’이라는 말은 의미가 크다. 앞서 산보에 대해 서술한 대목을 살펴보면 ‘두 번 바라는 것’을 신체에 받아들이는 일은 그와 같은 ‘신체’가 한번 ‘되기’를 수행하고 난 후, 주체가 다시금 ‘바라다’를 수행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니까 바라는 것을 바란다는 점에서 ‘산보’는 끝이 없는 행위인 것 같다. 무언가에 대한 동경은 자신이 실제로 그 자리에 올라선다 한들 해소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동경은 바라는 것 자체를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글을 씀으로써 더 나은 자신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한편으로 더 나은 내일을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일은 하루가 지면 매번 찾아오는 것이므로, 하루를 산다는 건 삶을 동경하는 일과도 같다. 결국 한 사람이 걸었던 삶의 길을 재현해보는 일은 한 사람의 하루를 떠올려보는 일과도 같다. 우리는 그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았던 아주 멋진 하루에 몸담고 싶어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호혜로 하루가 즐거웠다면, 자신 또한 다른 이에게 멋진 하루를 돌려주고자 노력할 테다. 그게 일주일이라면 일주일일 테고, 한 달이라면 한 달일 테고, 일 년이라면 일 년일 테다. 길을 걷는 일이 공간을 밀어내는 일인 것만큼이나 우리는 몸담은 세계에 받았던 것을 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말하자면 타인을 동경하는 일은 “완벽하지 않은 내일을 위해” 사는 것과도 같다.


[붕괴: 스타레일]의 페나코니 지역 이야기는 “왜 생명은 깊은 잠에 빠지는지”를 질문한다. 그리고 게임은 이에 “내일을 살기 위해”라고 답한다. 뻔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게임이 행위성의 예술이라는 점에서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하는지에 따라 경험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페나코니 지역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은 "시계공의 시계는 사실 나침반이었다"는 사실이다. 화합의 길을 추종하는 가족이 다스리기 때문에 자연스레 시계공도 화합의 일원이라고 추측했던 일은, 감옥행성이었던 페나코니의 과거가 3인의 무명객과 얽혀있다는 점이 드러남에 따라 반박된다. 이와 같은 포지션 변경은 페나코니 지역의 이야기가 말하는 시계공의 유산이 선대 개척자를 따라가는 일이었음을 보여준다. 즉, 시계공이 남긴 것은 ‘개척’이며 시계공의 유산을 물려받는다는 건 ‘개척의 길’을 걷는 것과도 같다. 이와 같은 설정은 사실 게임 밖의 각본가=엘리오와 이에 따른 개연성인 스텔라론 헌터와 개척자=플레이어의 관계에 대응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페나코니가 남기는 잔운은 작품이 말하는 잠과 깨어남의 관계에 있다. 


알다시피 페나코니의 이야기는 ‘만들어진 꿈 세계’가 하나의 테마파크처럼 펼쳐지는 일을 전제로 한다. 영화사에서도 자주 다루는 ‘황금광 시대’를 모티브 삼은 작중 무대에서 플레이어는 스텔라론 헌터인 반디를 만난다. 반디는 자신의 죽음조차 엘리오의 각본 안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생명을 원하지만 엘리오의 각본 안에서는 죽음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녀의 힘만으로 생존하기를 원한다. 그러니까 엘리오가 게임 내적으로 마스터 플랜을 작성하는 존재임을 고려하면, 그는 인간의 의지 모두가 운명 안에 있다고 보는 쪽이며 이는 곧 ‘어떻게 해서든 게임 안에 주어진 선택지만이 가능하다’는 상황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게임에서 구현된 이상의 상호작용을 할 수 없고, 이는 흔히 맵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자명한 사실에 빗대어진다. 마찬가지로 엘리오의 각본은, 플레이어에게는 개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몇몇 선택지를 연상케 한다. 어떤 선택을 하든 같은 운명에 귀결된다는 말은 <총몽>의 격언을 빌려 “운명이 미쳐 날뛰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 각본대로 게임 안에서 반디는 세 번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하든 결국 자신이 살아있을 것임을 알았지만, 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험난해서 혹시나 하는 기대를 했었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그녀에게 중요한 건, 생존에 대한 의지 자체가 아닌 ‘각본’이 어긋날 수도 있다는 기대이다. 다른 스텔라론 헌터가 엘리오가 제시한 교섭안에 얽혀 그가 제시하는 ‘연극’을 수행한다면, 페나코니의 반디는 그녀의 운명을 선택하고 싶어한다는 점에서 다소 다르다. 그녀는 ‘엔트로피 상실증’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있기 때문에 존재가 희미해지는 ‘상황’안에 있으며, 언젠가는 온 우주가 그녀를 잊고야 말 것이라는 ‘예언’에 사로잡혀있다. 따라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이와 같은 ‘최후’를 결정하는 일이며, 세상 모두가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최대한 세상을 기억하려 노력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작중에서는 ‘질서’가 ‘기억’에 앞서는 상황이 이를 잘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기억을 초과하는 신체는 세계의 예외로 취급되기 마련이므로, 그녀는 언젠가 엔트로피를 잃고서 사라지고야 말 테다.


이 점에서 아케론은 흥미로운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공허’란 모든 것을 잃고 난 최후로 여겨지는 모양이므로, 아케론은 그 자체로 죽음의 사도인 것처럼 보이며 실제로 힘도 세다. 그러나 아케론은 사람들을 마지막에 배웅하는 인물이며, 그런 그녀가 페나코니에 온 것도 어느 망자의 유언을 들어주기 위해서다. 이와 같은 점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아케론은 모든 이의 최후를 배웅한다는 점에서 반대로 모든 이에 앞서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선데이와의 결전을 앞둔 상황 이전에 아케론은 개척자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페나코니의 처음에서 끝까지가 꿈이었다는 사실로 인해, 이 장면은 아케론과의 ‘진짜’ 이별이 된다. 앞서 게임 내에서 주어졌던, “공허는 질서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라는 정보에 기반하는 이 장면은 ‘공허’가 모든 삶의 끝에 자리한다는 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준다. 공허의 사도인 아케론이 모든 죽음을 인도한다는 점과 질서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은, 플롯 상에서 이야기의 마지막에 자리하므로 어떤 면에서는 결말을 초과한 것처럼 보인다.


아케론은 생명의 최후를 마주한다는 점에서 ‘끝’에 있는 인물이다. 그런 아케론이 개척자 일행에 “앞으로 나아가라”고 명령할 때 우리는 ‘끝’을 넘어선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제 여태까지 해왔던 이야기가 깨어지고 나면, 페나코니의 전부였던 질서에서 벗어나 무명객 일행은 선데이를 마주한다. 이와 같은 점은 아케론이 개척자와 이별하는 과정을 두고서 이야기의 ‘종극’처럼 여겨지게 한다. 여태까지 게임이 보여주었던 게 어떠한 이야기의 ‘틀’ 안에 있었다면, 꿈에서 깨어나 선데이를 마주하는 이 장면은 반복되던 운명이 깨어지는 순간이다. 그런데 페나코니 지역에서는 ‘깊은 꿈’이 존재한다는 걸 떠올리자. 레이시오가 어벤츄린에게 “꿈속에서 불가능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숙면”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죽음’의 의미는 꿈에서 깨기 위한 단서가 된다. 어벤츄린은 이를 통해 ‘좋은 꿈’에서 죽음을 맞이하면, ‘깊은 꿈’에 도달할 수 있음을 알아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점은 ‘꿈에서 깨는 죽음’이라는 단서를 통해 개척임무로 이어진다. 내일을 마주한다는 건, 현재를 끝내는 일과도 같으며 이를 위해서는 ‘잠=작은 죽음’에 들어야만 한다.


이와 같은 점에서, “생명은 왜 깊은 잠에 빠지는가”의 답은 “생명이 숙면을 하는 것은, 하루의 피로를 풀고 내일을 살아가기 위함”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 점에서 레이시오의 말은 꿈속에서만 사는 사람에게는 내일이 없다는 점을 뜻한다. 꿈속에서는 하루가 계속되기에 결말을 마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끝나지 않기에 즐겁지만, 반대로 이야기를 벗어날 수 없기에 주어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와 같은 점은 이야기가 이곳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와 같은 오늘을 끝내는 게 정해진 결말의 ‘바깥’에 나서는 일임을 뜻하기도 한다. 앞서 반디가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걸 고려하면, 페나코니의 꿈은 인간이 살아가며 추구하는 행복이기보다 흩어진 엔트로피들의 무덤인 것처럼 보인다. 반디가 죽어가는 와중에도 자신의 최후를 결정하고 싶어한다면, 아케론은 죽어가는 이들에게서 최후를 결정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아케론이 혈죄령이 된 티어난의 유지를 받들어 페나코니에 입국한 일은 페나코니가 강조하는 ‘밈’의 속뜻처럼 여러 형태로 변형되어 전파된다. 


밈은 비생명의 분야에서 활약하는 유전자이므로, 어떠한 ‘길’을 전파하기에는 탁월하며 마찬가지로 아케론은 그 자신의 사명이 ‘공허’이므로 티어난의 최후를 배웅하고자 한다. 그리고 아케론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얽힌 티어난을 추적해가며 그 이야기의 끝에 미하일이 있음을 깨닫는다. 좋은 꿈을 세운 미하일은 페나코니 안에서 화합의 이명 아래 살아왔지만, 끝내 개척자이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페나코니는 화합의 안에 질서가 있다고 말하면서 여러 분쟁을 ‘조율’하는 것이 ‘좋은 꿈’의 책무라고 말한다. 그러나 ‘좋은 꿈’은 죽음의 단서를 숨기며 사람들이 진짜 자신을 숨기게 만들었다. 늘 평온한 상태만이 유지되는 것이 바로 ‘좋은 꿈’의 의무이기에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은 이 꿈속에서 각본을 벗어난 행위였다. 그러나 미하일은 잔잔한 바다에서만 항해하지 않았다. 개척의 나침반이 방향을 가리킬 때, 그곳엔 벗어난 운명이 아닌 지평선 너머가 있다. 페나코니 지역의 이야기는 그런 점에서 인간의 운명과 각본, 결말 이후의 내일에 관해 생각해보게 한다. 그리고 어떠한 길을 걷는다는 행위에 관해서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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