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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Feb 27. 2023

잃어버리는 자기를 대하는 문제

<스즈메의 문단속>(2023)


포스트 3.11의 영화가 자기위치의 상실로 대변된다는 가정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신카이가 만든 재난 3부작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자기위치의 상실을 지적하고 싶다. <너의 이름은>에서 황혼의 공간은 좌표계의 상실을 통한 만남을 제공하며, <날씨의 아이>의 도쿄는 공중부양과 허공에서의 추락을 통한 방위의 실시간 갱신을 제공한다. 전자가 같은 현실 안에서 다른 시간으로 이동하는 장치가 된다면 후자는 알고리즘과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현실의 Z축을 드러낸다. 그리고 <스즈메>는 그 둘 모두를 제공한다. 이 영화에는 황혼의 공간도 있고 추락 장면도 있다. 이 영화는 현세와 저승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공간의 대안으로 문턱을 제공하며, 스즈메는 그 문턱을 넘나드는 과정에서 Z축의 변화를 겪는다. 같은 세계임에도 높낮이에 따라 보이는 영역이 달라진다는 것, <날씨의 아이>에서 히나와 호다카가 일을 구하면서 SNS를 적극 활용했던 것을 떠올리면 SNS는 현대 사회가 얼마나 개인의 눈높이에 맞는 시야를 제공하는지를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스즈메>는 스즈메의 여정에서 SNS를 적극 활용하는데, 카나메이시의 현신 형태인 다이진이 시민들에게 목격되면서 남기는 발자취가 트위터의 해쉬태그 검색으로 금세 드러나는 장면이 그렇다. 이는 모두가 자기만의 공간을 소유한다는 개념이 SNS에 적용되면서 ‘공간’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두는 광장의 역할만이 아니라 같은 자리에서도 서로 다른 세계선을 살아간다는 공존의 개념을 내세운다. 혹자는 Z축을 운운하면서 공존의 가치를 내세우는 건 다소 뜬금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를 통해 지적하려는 건 ‘공통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의식의 부재이다. 모두가 자기만의 공간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말은 같은 곳에 있더라도 서로를 보지 못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서로를 보지 못하기에 자기위치도 알 수 없고, 이를 따르자면 다원화하고 개인화된 현대 사회는 명실상부한 ‘상실’의 시대이다. 특히나 하루키 붐으로 잘 알려진 이 상실의 감각은 인간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흔적뿐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고독에서 벗어나고자 필사적으로 흔적을 남기며 또한 그걸 쫓기도 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반문을 하나 해보자. 재난 3부작을 거치며 신카이의 영화는 점점 대중친화적이 됐고, 그 과정에서 신카이 개인의 성질은 버려졌다. “보다 국민에게 다가서는 작품을 만들겠다.”는 신카이의 선언은 국민작가로서의 입지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더 많은 이들이 좋아할 수 있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은 덜어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논리는 한 명을 희생한 덕분에 백만을 구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영화의 논리와 유사하다. <날씨>에서와의 정반대 행보인 이 선택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면서 <스즈메>는 전작의 발언을 철회하는 듯 보인다. <날씨>가 “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세계가 어찌 되든 좋다”라고 말했던 것은 실수라고, 신카이는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 <날씨>에서 인터넷 커뮤니티에 히나의 선물을 골라달라는 질문글을 남긴 호다카는 그들에게서 “네 멋대로 해라”는 답변을 받는다. 다소 무책임해 보이기도 하는 이 댓글은 한편으로 작가론에 관한 설명이기도 하다. 작가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과정에서 고유의 수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날씨>는 자신을 선택했고 이 과정은 호다카와 히나가 공중에서 떨어지는 과정에서 몸의 균형이 맞춰지는 묘사로 이어진다. 


<너의 이름>에서의 Z축이 운석의 낙하라는 일방적인 파열이었다면, <날씨>의 Z축은 상실된 위치가 추락의 과정을 통해 고쳐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부분은 <스즈메>도 마찬가지여서 스즈메 또한 소타를 구하는 과정에서 추락을 경험한다. 하지만 <스즈메>는 세계를 방치하지 않는다. <날씨>의 결말이 히나를 선택하며 도쿄를 버리는 것이었다면, <스즈메>의 결말은 소타를 구하면서 도쿄 또한 구하는 것이다. 특히 이 영화에서 추락의 이미지는 두 번 경험된다. 첫 번째는 관람차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에서 소타가 미미즈로 추락하는 것, 두 번째는 지맥의 괴물인 미미즈를 누르는 봉인석이 된 소타를 구하러 가는 장면에서 저승 세계로 추락하는 모습이다. <날씨>에서의 추락이 히나를 구하기 위한 호다카의 일방적인 것이었다면 <스즈메>에서 이 추락은 세계를 구하면서 그런 세계를 다시금 구하는 방식이다. 말하자면 180도 뒤집힌 것을 다시금 180도 뒤집으면서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놓는 게 이들 추락의 방식이다. 


히토 슈타이얼의 빈곤한 이미지를 연상하면 이 추락이 왜 위치 상실과 연결되는지를 알 수 있다. 자유낙하의 이미지는 그 자기위치의 상실을 통해 세계와의 연결고리를 끊는다. 중요한 건 ‘끊는다’라는 말이 단절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 무엇과도 연결되지 않기에 방위를 갖지 않는 이 이미지는 그 무엇과도 연결될 수 있다. 그런데 ‘연결되지 않는다’라는 말이 고독의 감정을 연상케 하는 것은 우연일까. <스즈메>가 전작에서 발전했다고 보는 것은 이 대목이다. 이 영화는 고독의 감정을 밖으로 돌린다. “연결되지 않는다”라는 180도의 추락을 다시금 돌려 “연결된다”는 360도 회전으로 돌린다. <스즈메>는 자기만의 영역을 전개한다는 세카이계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전작과의 차이가 있다. 고독은 신카이 작품의 특징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스즈메>는 어떤 타협의 결과물이다. 신카이는 대중작가가 되기 위해 개인의 색을 버려야 했고 그 과정에서 잃은 게 있었지만 얻은 것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획득의 결과물은 자기위치의 상실을 통해 묘사된다. 


전작이 소와 대의 가치는 좌표상실의 평면에서 같은 크기로 보여질 수 있다고 말한다면, <스즈메>는 SNS에 네비게이션의 기능을 부여하고 재난 문자를 통해 동시다발적인 전파를 보여주면서 <너의 이름>의 안내방송보다 구체화된 연결을 가정한다. 특히 이 연결은 코로나 판데믹에서 제기된 비대면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것은 모두가 같은 공간을 점유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것이 소통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하나의 일상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하면 이 가정을 이해하기가 쉽다. 3.11이라는 날짜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이 영화가 사건을 정확하게 마주 보는 상황에서, 우리는 지진의 발단과 실황 모두가 미디어를 통해 전파되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전화보다 더 빠르게 생존 소식을 전달했던 것은 트위터였고, 개인화된 영역이었던 트위터는 그 자신의 계정을 유지하면서도 생존자의 세계로 개인을 연결했다. 현실 세계에서 피난민을 수용하는 공간이 평면적으로 부족했다면, 온라인에서 생존자의 수용은 Z축으로 적층되어 얼마든지 하나의 공간을 모두가 점유할 수 있다. 그리고 이 Z축은 세계가 추락을 향해가더라도 되려 그 추락이 개인의 위치를 짚어준다는 점에서, 참사를 딛고 일어날 힘을 준다. 


물론 이런 식의 해석이 작가의 영역을 양보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신카이 개인에 관한 기분 좋은 소리로만 들리는 것은 경계하고 싶다. 포스트 3.11의 정동을 곧바로 건드리는 이 영화가 특정 시대와 개인에 호소한다는 점은 확실히 비판되어야 할 지점이다. 이는 특히 오래전의 재난이 단지 신화적인 것에 불과했던 전작의 설정들과는 달리, 실제로 벌어졌던 두 개의 사건을 판타지 서사에 끌고 온다는 점에서 개인의 시대적 참여의식에 호소하는 게 되고야 만다. 가령 영화가 일본의 설화를 가져와 작품에 적용하는 방식에서 “일본의 국토를 잇는 하나의 지맥이 있다”는 사실은 재앙은 어디서든 벌어질 수 있다는 경고, 혹은 모두가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는 희망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모두는 연결되었다는 것이며 이 안에서 자기상실의 지위가 어떤 양상으로 이행되고 진행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는 게 이 영화의 고찰할 만한 지점이다. 이 변화를 끌어내는 건 소타와의 의도치 않은 만남이며 이 만남은 국토 횡단으로 이어진다. 개중에 설명할 만한 지점은 지맥의 균열이 다시 봉합되어야 할 것으로만 설명되지 않고서 단지 눌러놓을 뿐인 것으로 묘사된다는 점인데, 이는 일본 사회가 가진 잠재적 갈등 요인들이 완전하게 해소될 수는 없으리라고 말하는 듯하다. 


여기서 반문, 그렇다면 그것이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고 말하는 일은 개인의 감정적 해소와 얼마나 연관이 있는가. 개인의 상처를 치료하는 일로 전체적인 문제와 구조가 해결될 수 없다는 건 누구라도 잘 안다. 그럼에도 한때 일본에 심리치료모임이 유행했던 것은 옴진리교와 같이 언제라도 터져 나올 수 있는 사회적 문제를 우리가 예측하거나 방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말하자면 “죽음이 우리 곁에 함께한다”는 비관적 서사의 일시적 봉합에 귀인하는 것이었다. <스즈메>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도 그런 식의 봉인 서사이며, 이를 트라우마적’이라고 말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섬뜩한 것은 2011년 3월 11일을 직접 묘사하는 재현이 아니라 스즈메가 자신의 예전 집에서 발견한 일기장이 온통 까맣게 칠해져 있는 ‘침묵’의 묘사이다. 근본적 해결은 불가능하고 단지 문을 닫는 행위만이 가능하다는 이 현실에서 일기는 가장 적절한 해결책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어린 스즈메가 그 일기장을 보며 “잊고 말았다”고 자신을 자책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망각이 잠시나마 가능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너의 이름>이 ‘잊고 말았다’는 식의 자책으로 재난에 관한 대응 방식을 모색하는 반면, 이 영화에서 침묵의 묘사가 시대적 참여의식과 연결되는 대목은 “우리가 그걸 잊으려 한다”는 어떠한 시도가 아니라 억눌렀던 것이 터져 나옴에 따라 이어지는 여러 연결의 서사다. 슬플 땐 울어야 하고 기쁘면 웃어야 한다는 식의 감정 해소가 적절히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영화는 지적한다. 그 점에서 3.11이라는 날짜만을 남긴 일기장의 검은 화면은 함구령이라기보다 볼드체의 일종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시금 Z축으로 돌아와서 빈곤한 이미지의 소실 가능성에 관해 언급해보고 싶다. 자기위치의 상실이라는 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위치의 상실이 주체의 상실이라는 말로 등치되진 않는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 검은 화면을 깊은 어둠이 아니라 스마트폰 화면을 껐을 때 보이는 반사적인 암부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지하는 현실 축의 변화로 제시됨과 동시에 그것이 저승이라는 점에서 좌표계의 상실로도 이해되지만, 억눌렀던 것이 줄곧 돌아오려 한다는 점에서 단지 트라우마의 발작적 재발인 것만이 아니라 나눌 수 없는 연결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이 연결, 가장 멀리서부터 오는 지금 여기, 사이버네틱스 세계로의 진입 과정이 항상 현실과의 접속 중단에서 시작하는 것은 우연일까? 


*


위키백과에 따르면 공존의 의미는 다음처럼 정의된다. 두 가지 이상의 것이 함께 있는 것, 서로 도와서 함께 살아가는 것. 명석한 사람은 양쪽 모두에 ‘함께’라는 표현이 있음을 알아차렸을 텐데, 신카이의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라면 ‘함께’의 속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가령 세카이계에 관한 정석적인 해석은 ‘너와 나’라는 교집합을 전제하며 이 경우 세계는 “두 사람 모두가 함께하는 곳”이다.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세계는 성립하지 않으며, 이에 따라 ‘세계’란 어느 하나만일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신카이의 재난 3부작은 크고 작게 세카이계의 경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지만, 그럼에도 ‘함께’의 가치를 지킨다는 점에서 여전한 경향 안에 있는 듯 보인다. 특히 이는 재난 3부작이 포스트 3.11의 정동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부분인데, 화법이 소소하게 달라져도 결국에 신카이의 영화는 ‘함께’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스즈메>와 같은 영화에서 남녀가 서로에게 한눈에 반한다는 서사를 이해하기 위한 초석이자, 포스트 3.11의 세계가 지향하는 함께의 가치를 말하는 것에도 필수적이다. 


서태지는 소격동이라는 노래의 작곡배경으로 “아름다운 동네의 무서웠던 한때”를 염두에 두었다고 말한 바 있다. 소격동은 군부정권에서 국군기무사령부가 자리했던 곳으로, 서태지의 해당 발언은 해당 장소에 ‘두 가지 이상의 것’이 공존함을 밝힌 것이다. 마찬가지로 <스즈메>의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지진에 관한 이야기이자, 지맥을 통해 국토를 연결한다는 점에서 어떠한 연결을 가정한다. 이 연결은 어디서든 지진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논리를 전한다. 가령 스즈메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보이는 아름다운 장소가 바로 저승이라는 점은 어떠한 특수한 현실로서의 구현이 아니라 일상에서 볼 수 있는 문처럼 쉽고 친숙하게 드나들 수 있는 장소라는 점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 영화의 연결은 “아름답지만 사실은 무서운 곳”이라는 두 개 속성의 공존을 뜻하고, 지맥의 활동이 단지 억누르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죽음이 극복의 대상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이 영화의 주된 장소가 폐허인 것은 그 때문일 테다. 폐허는 ‘아름다웠던 동네의 무서운 현재’이니 말이다. 


스즈메는 소타와 함께 여행하며 여러 폐허를 방문하는데, 소타는 문을 봉인하는 방법이 눈을 감고 이곳의 행복했던 한때를 떠올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연출인 듯 보이는 이 묘사는 사람들의 염원을 보여주는 것만 같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일 뿐이며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현재일 뿐이다. 쉽게 말해 이 영화는 자연의 불가항력에 대항한다기보다는 그것이 피할 수 없고 ‘어쩔 수 없는’ 일임을 받아들인 듯 보인다. 이는 과거로 가서 운명을 바꾼다는 <너의 이름>이나 기성 시대의 문제는 구시대에 묻어놓자는 <날씨의 아이>와는 또 다른 화법으로, 모든 문제는 우리 현실과 공존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문제란 세계와 동떨어진 무언가가 아니며, ‘삶’이라는 것은 그 두 개가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므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헌데 문제는 이런 식의 사고가 트라우마에 기반한 것이고 상처와의 ‘함께’를 말한다는 점에 있다. 지맥의 연결을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미미즈가 문을 뚫고 나오려 한다는 걸 떠올려보자. 문은 기본적으로 ‘들어간다’ 말고도 ‘나온다’로도 기능한다는 점에서 어느 한 쪽에만 걸쳐있지 않으며, 말하자면 양쪽 모두와 ‘연결’돼 있다. 이는 분할의 불가능성을 의미하며, 소타의 말처럼 잠시 억누르기만 할 뿐 그것이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점을 뜻한다. 


이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를 마주했을 때 우리가 그것을 대하는 태도, 혹은 그 극복의 방법에 ‘공존’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이 언제든지 죽을 수 있으니 사건 사고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보다는 문이 열렸을 때 우리가 다시 돌아올 장소가 있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같다. [나니아 연대기]나 [오즈의 마법사] 같은 문학에서도 줄곧 강조되듯이 ‘문’은 기본적으로 탈출구일 수도 있지만 열림과 닫힘 모두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어느 한 쪽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문 안쪽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은 연결의 맥락에서 사실상 불가능하며, 이는 우리가 그곳에 간다 한들 작금의 현실과 끊어질 수 없어서다. 이 논의의 연장선에서 영화가 스즈메의 고향을 최종 목적지로 삼는 것은 포스트 3.11에서 현실은 어디까지나 사건이 발생한 지점이어서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도 그렇듯이 이들은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 장소로 가며 그곳에서 자신의 현실을 마주한다. 이들에게 ‘삶’은 이야기가 시작된 곳이며 그 이외의 곳은 모두 죽음이나 마찬가지기에, 무엇보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건 죽음이 극복의 대상이 아닌 덕택이다. 죽음과의 공존이 가능케 하는 건 삶 이외 영역의 확장이고 그러한 점에서 <스즈메>의 지맥은 영화(삶) 밖의 영역에도 뿌리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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