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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08. 2023

소년과 함께 선로를 걷기

어른과 아이에 대한 언급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고 싶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소년소녀 연령대를 주인공으로 자주 채용하는 것은 흔히 일본 애니의 장르적 요소로 이해돼왔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른의 역할이 부재하며 이를 따라 현실 사회와는 다소 동떨어졌다는 비판이 존재해왔다. 사실 이는 서구권 문화에서는 소년소녀가 등장하는 작품이 ‘하이틴’으로 구분 지어지기 때문이기도 한데, 일본 애니에서는 소년소녀를 다루는 게 표준이며 이를 따라 연령을 문법으로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일본 애니에는 세카이계, 열혈계처럼 작품에 붙일 수 있는 태깅(tagging)이 더 와 닿는다. 캐릭터성의 면으로 이해되는 모에와 조합의 논리에서 연령은 작품을 전개함에 있어 단순한 조합의 요소일 뿐 이야기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주요 뼈대가 되어주진 않는다. 어쩌면 그 소년성은 작품이 시작되는 과정에서 관객이 거쳐야 할 시작의례처럼 보이기도 한다. 원초적 욕망에 몸을 맡기는 유아기나 현실적인 고민을 해야 할 시기인 성년기를 제외하고 나면, 꿈을 꿀 수 있는 건 오직 청소년기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애니메이션은 영화처럼 현실적이지 않기에 더 꿈의 원초적인 형태를 그릴 수 있고 여기에는 운반책으로 청소년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소년성은 현실의 원초적인 형태를 그리는 매체인 영화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애니메이션과 영화의 매체적 성질을 구분지으려는 건 아니지만, 소년성을 묘사하는 방식에 있어 두 사례 모두를 점검해보는 건 도움이 된다. 영화에서 소년성은 주로 현실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이 소속된 곳에 어떠한 변화를 주기 힘든” 어른에 대한 예외로서 존재한다. 소년은 아직 되지 못한 자이면서 무언가가 되어가는 자라는 점에서 불확실성을 긍정할 만한 위치에 놓인다. 이때 특기할 만한 건 매체가 작품에 동조하는 방식, 또는 물성을 통해 세계의 바깥을 암시하는 일이다. 가령 현대 사회를 액체로 파악하는 지그만트 바우만에게 [세계]란 물성에 대한 언급을 통해 유동성의 성질을 갖는다. 이와 유사하게 매체에서 물성을 언급하는 일은 그 자신이 무언가를 포함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무언가에 의해 포함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최근 김병규가 씨네21에서 홍상수의 작품을 지적하며 서술하듯 이러한 시도는 벡터가 아닌 좌표를 변형한다는 점에서 곧바로 결론에 도달하는 경향이 있다. 벡터값의 변형이 어떠한 과정을 내포한다면, 좌표값의 변형은 상대방의 몸에 빙의하거나 시점의 변형이 익숙하다는 점에서 으스스하고 기이한 경험을 자아낸다.


물성은 매체를 담고 있는 물리적 매질의 성질을 가리킨다. 필름영화의 거친 표면이나 셀 애니메이션 특유의 질감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맥락에서 소년성은 단지 소년 매체를 담고 있는 사례로써의 젊은-어린 육체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별 다른 고민 없이 서술하자면 이것은 캐릭터를 의미의 운반체로 사용하는 일이다. 가령 혹자는 <너의 이름은>이 보여주는 신체 교환의 서사에서 <날씨의 아이>로 이어지는 중력의 변화를 발견하곤 한다. 그리고 이 변화는 <스즈메의 문단속>에 가서 현실을 마주하는 일로 이어진다. 백년 전에 문을 여는 행위가 <오즈의 마법사>나 존 포드, 혹은 아키라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 이 문은 3.11의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내가 지적하려는 건 그러한 복귀가 우리가 일본 애니에서 발견했던 소년성과는 어딘가 다르다는 점이다. 보통 소년소녀가 아직 꿈을 꿀 수 있는 위치로 이해됨을 고려할 때, 이 작품에서 문은 ‘닫힘’을 통해 꿈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때 그 과정은 벡터값을 변형하는 게 아니라 단지 자신이 잊고 지내던 것을 발굴했을 뿐이라는 점에서의 접속, 즉 ‘과거 좌표값 수색’을 보여준다. 이때 소년소녀의 육체는 그러한 시스템에 접속하기 위한 인형탈에 불과하고 실질적으로 이걸 나이또래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은 이상하거나, 가능하다고 해도 그렇게 흥미롭지는 못한 게 된다. 


그러니까 이를 요약해서 말하면 “물성은 의미의 운반체다”쯤이 된다. 사회적 맥락이나 윤리에서 영화가 물성을 응용하는 방식에 관해서도 써볼 수 있겠지만, 물성이 작품에 동조하는 형식을 고찰해보고 싶다. 먼저 <마미>에서 자비에 돌란이 화면비를 슬라이드로 개방하는 장면을 떠올려볼 수 있다. 이 장면은 ADHD 환자인 아들이 한 명의 어른으로 성장하는 미래를 묘사하는데, 여기서 소년성은 그러한 열림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비에 돌란의 이 연출은 화면을 전환하는 게 아니라 줄곧 화면을 이어감에도 좌표를 현재에서 가공의 미래로 바꾸며, 이는 관객이 특정한 이행의 과정을 상상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더라도 곧바로 그러한 입장에 이입하는 효과가 있다. 이와 유사하게 <에이티식스>의 22화는 인물의 과거와 주마등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레터박스를 불투명-반투명-투명의 절차로 이행시키면서 물성을 의미의 운반체 삼는다. 이별 후에 다시 서로를 재회하는 이 중요한 장면에서 물성은 둘 사이에 가로막힌 청각적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심리에 곧바로 관객을 다이브시킨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것은 작품의 전반부에서 레나가 신에게 동조장치로 원격소통했던 것의 매체적 반복이다. 



이는 해당 장면에서 기체를 필두로 가로막힌 서로의 모습을 통해서도 서술될 수 있다. 기체 안에 있는 신이 레나를 볼 수 있는 반면, 바깥에 있는 레나는 안쪽의 신을 볼 수 없다. 즉 신만이 레나를 볼 수 있고 이 둘 간에는 물리적으로 음향이 통하지 않지만 전반에서와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동조장치를 통해 직접 말을 건네는 게 가능하다. 특기해야 하는 건 이 장면에서 드러나는 물성인데, 세로 자막을 화면의 우편에서 드러내는 연출은 무성 영화 시기의 한자 자막을 떠올리게 하며 이것은 어떤 면에서 시게히코식의 변주를 연상케 한다. 영화 평론가인 하스미는 형식은 장면을 위해 봉사할 뿐이라고 말하면서 ‘숏’의 우위를 말한 바 있다. 이를 근거로 그는 무성영화야말로 가장 고전적인 것이자 표준이라고 말하는데 이런 생각의 근간은 영화 매체는 이미지이며 ‘소리’는 필름에 부가되는 변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마치 다르덴의 영화들에서 소리가 등장하는 소년소녀의 침묵을 대변하듯, 물성은 소년소녀에 봉사하며 이들 사이에 곧바로 소통할 수 있을 동조의 계기를 제공한다. 이 장면에서 작품이 드러내는 물성은 무언가를 직접 말하지 않고서도 매체의 외부를 통해 작품에 직접 이입할 수 있게끔 해준다. 


혹은 그런 면으로도 볼 수 있다. 이 장면에서 신은 시청의 일방성으로 인해 관객의 위치에 선다. 영화나 애니메이션이 일방적으로 관객에 의해 관찰된다고 보면, 우리는 스크린을 단지 관찰하고만 있을 뿐 그에 직접적으로 공감하거나 이입하는 건 불가능한 게 된다. 이 부분은 작품에서도 다른 면으로 지적되고 있는데 가령 작품 전반부에서 에이티식스 팀원들이 말하는 대목이 그렇다. 그들은 원격으로만 말을 건넬 수밖에 없을 레나에게 “우리들이 벽 밖에서 원하지도 않는 전투를 수행하고 있는데 벽 안에서 편안하게 지내는 당신의 말은 어떻게 해도 위선이 될 수밖에 없다.”는 비판을 듣는다. 여기서 벽을 스크린이나 모니터에 대입하면 그 말은 매체와 관객 사이에 자리하는 물성에 관한 한 가지 블랙 코미디처럼 들린다. 어떻게 하든 물성이 두 세계를 마주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에 동조될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 정보의 왜곡이나 간섭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다른 시각에서 이는 작품을 바라보거나 해석하는 일은 처음부터 매체의 물성에 의해 부정확하게 왜곡되거나 변형되므로 신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에이티식스와 지휘관의 관계가 서로 대등한 인간 대 인간의 인격적 소통 관계라 하더라도 결국 일방적인 지휘관계처럼 보이는 걸 피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여기서 양쪽 세계는 서로 간에 바라보아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벽에 가로막혀 완전히 바깥에 있다. 성별이나 인종, 국가처럼 근본적인 물성의 문제에서 우리는 ‘자신이 몸담은’ 곳을 피해 갈 수 없으며 결국에 근본적으로 이에 대응하는 건 물성에 최대한 변화를 주는 방법 말곤 없다. 그리고 그런 변화는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라 끝자락에 갈수록 점점 더 교합하기 어려워지므로, 어떤 면에서 소년성이 자주 소환되고 또 그에 호응하는 일은 몹시 자연스럽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간에 애기들은 모두 귀엽게 생겼다는 걸 떠올려보자. 여기에 작용하는 건 모성애나 부성애 같은 생물학적 설계라기보다 우리가 대상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상에 품는 두려움이 인식의 바깥이나 예측의 불확실성에 온다면, 대상에 대한 애호나 선호 또한 그러한 인식의 바깥에서 오는 셈이다. 아직 무언가가 되지 못한 상황은 우리가 그에 접근하기 쉽게 하며, 바꾸어 말해 이러한 바깥은 어른과 마찬가지의 용례임에도 우리가 그에 직접 이입하기를 선호하게끔 한다. 대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에 혐오하는 게 어른이라면, 아무것도 모르기에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아이들인 것이다.  


캐릭터를 단순히 의미의 운반체로 사용하는 것은 캐릭터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지만, 관객이 인물에 동조하지 못할 때 이들을 단순한 관찰자로만 후퇴시키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런 후퇴를 의도할 수도 있겠다만 무엇보다 물성을 통한 동조는 후퇴가 감소를 뜻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많은 경우 관객은 서사에 봉사하는 인물에게 동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입장이나 처우를 어느 정도 포기하기 마련이다. 이해심이 깊다고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세계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소년으로 만드는 이런 일은 현실도피나 퇴행의 일환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곧바로 동조한다는 좌표 수색의 과정에서는 관객이 자신을 조각할 필요가 없으며 이야기 속 인물도 마찬가지다. 세계의 불가능성에 침식된 상황에서 양자가 서로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체의 물성을 매만지는 일은 그릇의 크기가 아니라 어떤 그릇에 포함된 것일지를 고민하게 한다는 점에서 [세계]의 바깥을 자연스레 전제하고 또 그러므로 여기서 미지와의 조우는 신비로 변형된다. 그러니까, 이것은 말 그대로 “꿈을 꾸는 것은 아이의 특권”이라고 할 만한 이유이고 또 왜 어른이 아이를 지켜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한 가지 답변이기도 하다. 


*


<에이티식스>의 철로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9화에서 생존자 5인은 영토를 넘어 바깥으로 향한다. 이 장면에서 선로를 따라가는 과정은 레기온과의 전쟁으로 끊겨버린 교류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이야기가 바깥으로 향하는 분기가 된다. 선로를 따라가면서 자연스레 이웃나라의 영토에 진입한 이들은 과거와 이별해 새 삶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적이나 입은 옷이 달라졌을 뿐 이들은 아직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를 따라 선로는 ‘약한 연결’을 상징하는 물건이 된다. 중요한 건 이 약한 연결이 작품의 후반부로 이어지는 연결점이 된다는 점에 있다. 영토의 경계가 되는 이 선로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지휘관에게 마지막 무전을 남긴다.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기약하자는 상투적인 문구는 지배적 영토의 ‘바깥’이 사실상의 무법지대라는 점에서 사망선고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진다. 실제로 아무런 보급 없이 운용되는 5인 부대는 적과의 조우에서 물자를 계속 잃는다. 그러던 중 주인공 신은 부대원을 살리기 위해 마지막으로 남은 자신의 기체로 적과 조우하며 이후의 전개에서 부대는 전멸한다. 그러나 운 좋게 신과 부대원은 죽지 않았고, 되려 이웃 나라의 영토 안에서 발견되어 구제되었다는 게 후반부의 시작점이다. 


신은 망령이 되어 떠돌던 형을 구제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이를 수행하고 난 뒤에 사라졌던 목표는 핸들러인 레나와의 약속을 통해 다시금 메워진다. 이 장면에서 신은 죽음을 택했다기보다 자신이 떠나온 곳인 ‘기원’을 다시금 만들어두었다는 점에서 이를 출발점 삼는 것에 가깝다. 여기서 죽은 형을 다시 만나 모든 것을 끝낸다는 목표는 “끝나지 않고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죽지 말자.”는 것으로 바뀐다. 열차가 다니지 않는 철로는 사람들 간의 끊긴 교류를 보여주면서 목적이나 의식은 줄곧 존속함을 보여준다. 즉 신과 부대원은 약한 연결을 유지하며 바깥으로 나오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후반부에서 이야기의 무대는 산마그놀리아에서 기아데로 바뀌지만 신과 부대원은 여전히 전장에 나가고 싶어하며, 이는 삶이 선로처럼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다는 한 가지 증명의식에 가깝다: 전쟁에 이야기 다수를 할애하지만 사실 작품의 근간은 일본 라노벨에서 흔히 보이는 보이 미트 걸의 구도이다. 신은 레나를 만나 형의 죽음 이후를 모색하며 마찬가지로 레나도 신을 만나 삶의 방향을 수정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끊기지 않은 선로처럼 완전히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삶에는 바깥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신은 형과 얽힌 가문의 문장에서 형의 이미지를 분리해내는 일에 성공하며 레나는 인간을 대하는 일에서 중요한 건 개체가 아니라 개인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정작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말은 고진식의 고유명을 암시하며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강덕구가 피셔에 대해 말하는 방식인 ‘존재의 근간을 흔드는 방식’이다. 존재는 이름을 부르는 방식이 아니라 존재가 교란되는 형식에서 그 떨림을 겪으며, 이는 존재를 붕괴시키지 않으면서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바깥은 의식의 너머가 아니라 의미를 실현시키는 존재를 찾아가는 여정에 가깝다. 죽음이나 종말 이후의 삶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전쟁을 넘어선다. 한편으로 이는 전쟁에 어떠한 이야기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해 전쟁은 이야기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전쟁은 살아있는 한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삶의 지속능력은 곧 전쟁의 수행성과 동일하며 이는 삶을 끝내는 일이 전쟁의 목표라는 점에서도 증명된다. 신을 포함한 부대원이 기아데에서도 여전히 종군을 원하는 건 그들의 삶이 과거에 머물러서가 아니라 삶이 여전히 이어지고 존속되기 위함이다. 그동안 자신들과 교류했던 핸들러와 이별하는 과정에서 선로는 구세계를 판가름하는 도구가 된다. 


우리는 신과 부대원들이 다시금 전장에 뛰어드는 일이 레나와의 재회로 이어졌다는 점을 떠올려볼 수 있다. 레나는 신과 재회하기 전에 선로의 끝자락에 마련된 추모비를 방문하며 두 사람이 재회한 후에는 위의 약속을 언급하기도 한다. 선로의 너머에서 다시 만나자는 것, 그것은 어떠한 형태의 결말을 뜻하지는 않았지만 반대로 전쟁의 지속에 관한 믿음이 있었기에 바깥을 꾀할 수 있었다. 전쟁은 종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바깥을 지정하지 않지만, 부재는 목적의식을 이끌지 않으며 이를 따라 중심에는 항상 무언가가 ‘존재’해야만 한다. 몇몇 부대원들의 진술에 따르면 핍박받는 처지에 있는 에이티식스 부대원들이 산마그놀리아에 협력하는 이유는 죽어간 이들에 대한 예우이지 지배와 핍박에 대한 저항이나 연민은 아니다. 여기서 인류애와 같은 코스모폴리탄적 의식은 없으며 오히려 존재의 양상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다. 이들에게 전투는 죽어간 이들에 대한 예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바깥’으로써 산마그놀리아에 대한 탐색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되려 여기서 중심은 레나를 만나면서 받는 인간적인 대우에 관한 부정교합,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떨림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이야기의 시작점이 신과 레나의 만남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두 사람은 보이 미트 걸이라는 형식 안에서 서로를 목표 삼는다. 이때 특기할 만한 건 두 사람은 처음에 서로를 바깥에 두었다는 점이다. 서로를 지향점으로 삼으면서 그에 도달하려던 시도는 후반부의 만남에서야 비로소 내부로 전환된다. 그와 동시에 의미는 실현되어야 할 가치가 아니라 존재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전쟁은 무슨 역할을 하는 걸까. 이 작품에서 전쟁은 그에 반대하거나 하는 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인물의 동선을 설계하고 이를 따르게 하는 것에 사용되고 있다. 전쟁을 단순히 소재로만 이용했다는 뜻이 아니라, 장르로서 전쟁이 기능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런 약한 연결이 되려 강한 존재감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전쟁은 인물의 캐릭터성 수행이 아니라 존재가 교란되는 형식과 그에 따른 연결의 구도를 위해 설정된 배경처럼 보인다. 달리 말해서 이곳의 전쟁은 수행되기 위함이 아니라 교란을 위해서만 존재하며 어쩌면 이는 작품에서 음악이 서사의 한 형식을 이룬다는 점에 부합하는 것 같다. 가령 사와노 히로유키의 사운드트랙에 의존한다는 평을 듣기도 하는 이 작품에서 서사는 단순한 뮤비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음악은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해 서사의 분위기를 환기하고 감정선을 연장하는 등의 활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나 음악을 활용한 연출이 음악의 활용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이미지에 대한 존중을 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음악은 모든 것을 망쳐놓는 듯 보이기도 한다. 고다르가 음악을 두고서 ‘파괴적’이라는 수사를 붙였을 때, 우리는 음악이 평탄화하는 영상의 표면들에 관해 생각했다. 이 말은 문맥에서 떨어져나와 ‘파괴’의 측면만이 강조되곤 했는데 물론 고다르는 무성영화를 옹호하고자 그렇게 말한 건 아니었다. 고다르의 영화에서 음악은 거친 편집점을 치유하며 이는 칼은 칼을 통해서만 갈릴 수 있다고 보는 고다르의 관점에 의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음악의 폭력성은 이미지를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지를 서로 화해하게끔 할 요령으로 존속한다. 이미지의 표면 질감은 오직 음악을 통해서만 재생될 수 있다고 고다르는 믿었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음악이 이미지를 지배하는 일에 관해 생각해보고 싶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음악의 적절한 투입은 조미료와 같은 역할을 하곤 한다. 음악이 없었더라면 심심했을 장면들에서 음악은 이미지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을 바꾸어 놓으며 더 나아가서는 이질적인 것을 하나로 봉합하기도 한다. 예컨대, 음악은 일종의 연설가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음악은 무언가를 말하지는 않지만 이미지의 전반을 타고 흐르면서 레기온의 목소리에 잠식당하는 신의 처지를 어느 정도 보듬고 있다. 


연설가는 전장에 서지는 않지만 사람들 인식의 최전선에 자리하며, 연상작용으로 이미지를 가져온다는 가정하에 이미지의 혼성과 틈입을 가능케 한다. 말하자면 음악은 존재를 교란하며, 그런 관점에서 이 음악의 파괴적 작용은 이미지를 망쳐놓기 위함이 아니라 인물에 중심을 부여하고 이를 중심으로 서사를 재편하기 위한 연결의 과정이다. 이를 따라 이 작품에서 음악이 옹호되어야 한다면 그에 대한 대표적인 이유로는 22화에서 신과 레나가 재회하는 장면을 들 수 있다. 22화에서 신과 레나가 만나는 장면은 이전까지의 서사를 종합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빌드업으로 볼 수 있는데, 이 관점에서 음악은 이전까지 이루어졌던 것들에 대한 폭발이다. 하지만 분명하게도 이곳에서 음악은 두 사람의 재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균열에 봉사한다. 신이 레나에게 건네는 말이 기계를 중심으로 가로막힌다는 사실이 그러한데, 이 장면에서 음악은 여태까지 진행되었던 이야기를 풀어놓는 듯 보이지만 격벽에 가로막힌 사실로 인해 오직 이미지만을 투과한다. 소리는 귀에 장치된 통신장비를 통해서만 부분적으로 전달되며 이는 음악과 마찬가지로 감정선을 평탄화하는 효과가 있다. 


말하자면 이 장면은 이미지와 음악이 서로 맞부딪히는 장소이고 그 점에서 양측의 폭력성이 중화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작품은 이야기의 전개 동안 양측 진영 간의 차이를 간접적으로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작품의 주제의식인 건 아니다. 오히려 이 둘 간의 차이는 신과 레나의 재회에 동조하는 경향이 있다. 산마그놀리아가 “유색인종을 안으로 들일 바에는 차라리 멸망하는 게 낫다”고 말한다면, 레기온은 “아이들을 희생시켜야만 승리할 수 있다면 그런 나라는 차라리 멸망하는 게 낫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양측의 폭력성은 극과 극이라는 점에서 대비되지만 그게 한자리에 모일 때 중화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전자보다는 후자가 훨씬 인도적이고 이상적이라는 점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한 현실주의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작품에 현실을 가져오는 순간 현실의 폭력성은 작품의 폭력성과 부딪히면서 모두를 망쳐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음악은 현실주의자가 되지 않고서도 작품에 현실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이곳엔 우리가 아는 현실이 없으며 음악은 그런 현실을 지배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음악은 신이 듣는 망자의 목소리처럼 줄곧 세계에 존속하면서, 이들 이야기가 살아가는 토양과 자양분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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