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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Sep 02. 2022

수메르: 꿈의 아이들을 위한 꿈-영화 입문

원신 수메르 지역으로의 입문을 다루는 마신 임무 3장 2막에서 유저는 꿈에 관한 한 가지 제언을 받아든다. 그건 바로 시간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화신 탄생일 축제에 참가한 여행자가 타임루프를 눈치채면서 이를 파훼하는 게 3.0버전의 마지막 이야기다. 하지만 이 시간은 꿈속의 시간이어서 엄밀히 말하자면 현실 자체가 순회하는 건 아니다. 현실 같은 꿈을 보여주면서, 정상적으로 시간이 흐르는 현실로 나오는 게 이 이야기의 주된 목표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많다. 최근 개봉한 <매트릭스: 리저렉션> 같은 영화나 더 멀리 가보면 <뷰티풀 드리머> 같은 만화를 떠올릴 수 있다. <반교>나 <사일런트 힐> 같은 게임을 언급할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어쨌거나 이런 루프계 장르는 공통적으로 현실을 최후의 지점으로 설정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이번 장에서 지적할 만한 건 이런 부분이다. 


현실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게 꿈속이라는 점은 꿈의 ‘바깥’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이야기상의 명확한 진행지점을 만들어준다. 즉, 무찔러야 할 바깥이라는 점에서 독자에게 이야기를 전달하기 쉽다. 한편으로 이때의 대립구도는 “현실=바깥=마주하고 나아가야 할 곳/꿈=내부=정적이고 멈춰있는 곳”이라는 측면으로 작동한다. 꿈에서 현실로 나아가야 하는 게 곧 스테이지의 목표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수메르 지역에서 꿈은 허공 단말기를 연결하는 어른이 되면 더는 꿀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이는 수메르 지역의 허공 단말기가 꿈=의식을 하나로 연결해 지식의 보존과 연산을 담당하는 하나의 거대 컴퓨터(허공)에 사람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어딘지 모르게 굉장히 SF적인 설정인데, 핵심은 어른이 되면 자신의 꿈을 사회에 헌납해야 한다는 현실에 있다. 


모든 인간을 의식에 연결함으로써 지식은 하나의 총체가 된다. 3장 2막의 스포일러에 해당하는 이 사실은 개인의 의지를 빼앗아 이들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하는 식으로 묘사되었다. 일반적인 이야기라면 이런 의지는 세계를 향해 ‘맞서 싸운다’는 쪽으로 이해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꿈을 꿀 수 없는 세상에서 꿈을 꾸는 일은 부끄러운 게 되고야 만다. 따라서 ‘맞서 싸운다’는 일반론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게 된다. 맞서 싸우는 일이 부끄럽거나 튀는 일이 되는 세상에서는 오히려 무언가에 맞서는 일이 더욱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 된다. “무언가에 맞선다=꿈을 꾼다”는 조항이 성립하는 셈인데, 이는 현실에서 꿈에 맞서는 것에 견주어 볼 때 꿈을 꾸는 장소가 바로 현실이라는 점에서 일련의 모순으로 이어진다. 어떻게 해서든 간에 이들 모두가 현실의 바깥으로 나설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꿈은 바깥일 수 없다, 는 게 이번 이야기의 요지다. 수메르 이야기의 핵심은 현실은 꿈의 기반이 아니라 꿈과 현실 사이의 모호한 혼합이 바로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꿈이 현실의 잔여물이라면 결국 그런 현실에서 꿈을 꾼다는 건 남은 현실이 두 개나 있다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즉 꿈은 이상적으로 다다르거나 성취하는 단계가 아니다. 수메르 이야기에서 루프의 범위는 성 안으로 적용되고, 이 범위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점이 알려지지만 이런 것은 결국 ‘바깥’의 실존이 아니라 현실로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를 설정할 뿐이다. 그래서 이런 설정은 마치 렌더링 범위 안에서만 상호작용할 수 있는 게임의 세계, 그런 세계에 몰입해서 정신적 시간의 반복을 겪는 유저를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식 가능한 크기의 총량이 바로 세계[월드]라는 점에서, 꿈의 무대는 곧 인식하는 현실의 한계이다.   


여기서 원신은 유저가 현실로 돌아와야만 할 이유를 반복되는 루프로 인해 점점 쇠약해지는 사람들의 몸으로 설정하고 있다. 몸은 정상적으로 시간을 겪지만 정신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점점 병약해진다. 바꾸어 말하자면 의식의 무대인 몸은 움직일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한계를 갖는다. 시간이 흐르는 절대적 현실이 있으며, 이런 절대적 현실에서 ‘바깥’은 오히려 이쪽이 아닌 그런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가 현실에서의 무빙 이미지인 것처럼 인간 또한 무빙 메모리로 빗댈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게 실존한다면, 그런 실존은 사람의 기억을 토대로 간접 경험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결국 우리가 짚어야 할 건 그러한 과정상의 것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다. 시작과 끝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 삼아 이를 정의해야 할까? 


*


한국어에서 영화라는 단어는 보다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영화란 “일정한 의미를 갖고 움직이는 대상을 촬영하여 영사기로 영사막에 재현하는 종합 예술.”, “밖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운 색채.”, “어떤 사물이 신령스럽게 됨. 또는 그렇게 되게 함.”과 같은 뜻이 있다. 이때 우리는 후자의 두 개 항목이 묘한 느낌으로 전자에 맞아떨어짐을 느낀다. 영화는 스크린 밖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운 색채이면서, 우리가 신령스럽게 여기고자 하는 무엇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영화를 지칭하는 단어 중에는 그것과 비스무리한 한 게 있다. 그건 바로 꿈이다. 꿈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언가에 대한 지향이면서 밤중에 꾸었던 것이 현실에서도 잔존함을 가리키는 단어로 쓰였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하기 전부터 우리는 꿈의 이중적 성격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꿈이 현실에서 탈락된 것, 즉 ‘무의식’의 발현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그 순간이 아름답고 신령스럽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과의 마찰에서 떨어진 조각인 꿈을 수면으로 불러내고자, 즉 꾸고자 노력했던 셈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시간과의 마찰에서 떨어진 조각인 영화를 스크린으로 불러내면서, 이를 꿈과 유사한 형태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바꾸어 말하자면 영화란 순간이지만 이를 위해서는 순간이 사라져야만 했다. 영화란 지속의 흐름에 있으면서도 그러한 지속을 지우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시간적이면서도 비시간적인 매체였던 셈이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다. 지루함의 연속에 대항하여 순간을 찾던 영화는 이제 순간의 연속에서 벗어날 지루함을 찾고 있다. 폭발이 선형적 시간에 제동을 걸던 과거가 있다면, 오늘날은 폭발에 제동을 걸 수 있을 만한 선형성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금 원신을 가져와 보자. 반복 상영, 혹은 재관람이라는 주제를 언급해보고 싶다. 원신의 작은 쿠사나리 화신은 아카데미아가 사람들의 ‘어제’를 지우는 방식으로 반복을 만들어낸다고 언급한다. 이 말인즉슨 이러한 반복에서 사라지는 건 사람들의 미래가 아니라 어제라는 게 된다. 즉 기억이 퇴적되지 않기에 오히려 하루는 새롭다는 점. 그런 하루를 기억하는 건 오직 몸뿐이다. 다시 말해서 이곳에서 몸은 일종의 ‘바깥’에 해당한다. 시간이 의식이 아닌 몸과 연결됨으로써 의식이 퇴적되는 곳은 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헌데 ‘바깥’이 의식이 퇴적되는 곳이라면 오히려 의식은 과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알다시피 몸은 시간 안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나’라는 인간 세계의 순간이다. 이 몸적 세계, 폭발적 사건을 다시 세계와 돌려놓는 것은 즉각이 아닌 시작과 끝의 시간이다.  


게임의 자유분방함이 유저의 현실을 순간화함에 따른 것임을 떠올려 보면 영화를 순간처럼 여기면서 현실을 자유분방하게 만드는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거에 영화는 표리부동한 자였다. 영화를 보길 원하지만 정작 이를 위해서는 영화를 보고 있다는 인상이 없어야 한다는 이중성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논리를 꿈에도 적용할 수 있었다. 우리는 꿈을 꾸길 원하지만 정작 이를 위해서는 꿈을 눈으로 볼 수 없어야 한다는 이중성이 있었다. 허나 몸적 세계에서 이런 모순은 오히려 그런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필요조건이다. 영화는 관람이라는 점에서 지속인 것 같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를 보았다는 순간으로만 사유되며, 역설적으로 바로 그 점이 영화를 한 편의 맺음으로서 기억이 될 수 있게 한다. 결국 꿈을 기억으로 사유하는 일은 꿈을 꾸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야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른이 되면 자신과의 기억을 잊어버린다는 바란나라의 규칙이란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아이들에겐 거의 모든 하루가 새롭게 느껴진다. 아이들의 세계에서 몸은 의식의 주체다. 몸은 기억의 성장을 겉으로 드러내어 준다는 점에서 세계의 바깥과도 같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가면서 반복은 점점 더 즉각적이고 폭발적인 반응으로 이해된다. 이런 상황에서 시작과 끝의 경계는 사라지고 개인의 기억은 ‘바깥’으로 지정된다. 반복에 관한 사유는 이 대목에서 도출된다. 우리의 의식은 생각보다 휘발적이고, 이러한 맥락에서 몸은 기억의 잔여분을 쌓는 외부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기억의 용량이 개인을 초과하는 세계에서 기억은 언제나 의식의 바깥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화, 게임과 같은 것을 어떻게 개인의 기억으로 가져갈 수 있을까? 이 문제가 바로 원신의 수메르가 고민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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