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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03. 2023

소년성을 계승하기


“이 우화는 우리의 주인공 ‘텅 빈 장소’와 함께 시작된다(그러나 이 장소를 인물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장소는 “몸들이 제각각 저 자신을 사라지게 할 자를 찾아 나서는 처소”다.” -디디 위베르만, 『색채 속을 걷는 사람』-


[블루 아카이브]의 1부 최종장, 색채에 물든 평행세계의 선생은 이쪽 세계에서의 선생과 만난다. 싸움에서 진 그는 “자신의 학생”을 부탁한다고 말하면서 어른의 카드를 그에게 넘긴다. 소년만화에서 자주 사용되는 클리셰인 ‘계승’을 적절히 사용한 이 장면에서 우리는 가능 세계를 연장한다. 게임이 말하듯 ‘선생’이 어떠한 인격의 확장된 버전에 해당한다면, 자신이 실패한 세계선에서 메인 세계선으로 역할을 넘기는 이 장면은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실패란 없으며, 가능성의 범주는 어떠한 경계를 두고서 성립하지만은 않는다고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영화나 드라마 같은 매체들에서 경계의 역할은 그 자신을 실패로 지정하면서 우리에게 남은 현실을 ‘계승’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달리 말하자면 소년은 작품의 형식 안에서 그 결말과 함께 성장을 중단하는 게 아니다. 소년이 줄곧 소년으로만 남게 되는 건 그 세계가 미완으로 끝나서가 아니라 계속되는 여정의 일부에 있어서다. 


소년성과 선생의 관계를 확대적용하는 일에 상당한 위험성이 따른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이 의견은 분명 말해져야 할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가장 기초적인 문제의식이 우리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가령 허문영이 한국영화에서 소년성을 발견한 사실은 비단 2000년대 영화에만 불과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이 가설은 한국영화에서 소년성이 형태만 달라졌을 뿐, 언제나 그곳에 존재해왔다고 말한다. 임권택이 1983년에 만든 <짝코>를 떠올려보자. 이 영화는 젊은 시절 빨치산을 일부러 놓쳤다는 누명으로 경찰을 관둔 사내가, 세월이 지난 어느 부랑자 갱생 시설에서 해당 빨치산과 재회한다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때 시설에서 만난 사내와 빨치산의 대화는 유치찬란하기 짝이 없지만, 그 속내는 명백한 이데올로기 갈등에 기반을 둔다. 이는 즉 이데올로기와 같은 심각하고 진중한 문제가 장난스러운 소년성의 면모로 악화 및 순화되어 제시되는 것이다. 


이 장난스러운 소년의 면모가 바로 위장의 일종이다. 소년성은 그 속내를 감추기 위해 자신을 위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년성의 정의는 어른이 되지 못해 소년으로 남은 게 아니라,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이들이 소년이기를 연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소리다. 이러한 해석은 허문영이 ‘성장하지 못한 것’의 사례로 소년을 꼽은 것과는 달리, 성장의 결과를 부정하는 것으로의 소년성이 성립할 가능성을 제기한다. 몸은 다 컸지만 정신이 아직 따라잡지 못한 이 상황은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불일치를 겪는 한국사회의 면모, 즉 ‘선진국’이면서도 동시에 ‘후진국’의 면모를 보이는 것에 관했다. <짝코>가 만들어질 무렵 한국 사회는 아직 군부정권의 슬하에 있었다는 걸 염두에 두자. 사회적 분위기가 검열과 같은 행동명령에 순응할 것을 명령하는 한편, 어른들에게는 아직 소년성이 남아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년들은 어른이기를 연기했을 뿐 아직 진정으로 어른의 역할과 책임을 부여받지는 못했다. 


여기서 ‘어른’이라 함은 법적이거나 생물학적인 정의가 아니라 어떠한 책임의 끝에 다다른 이를 가리킨다. 조선시대에 결혼을 한 이가 상투를 틀었듯이, 현대에서도 결혼을 하고 가족을 책임지는 나이가 되었을 때 진정으로 어른이라는 인식이 생긴다는 조사가 있기도 했다. 단순하게 보면 결혼하지 않으면 어른이 될 수 없다는 건데, 이 문장은 그 인식의 구조상에서 뜯어볼 면이 있다. 성장하지 못한 게 소년이라면, 책임지는 사람이 바로 어른이라면, 성장을 해야만 비로소 책임의 능력이 생기는 것인가? 우리는 미성년자에게도 주어지는 대표적 법적 권리인 자기결정권을 떠올려보아야 한다. “나는 나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 이를 따르자면 소년과 어른의 차이는 책임의 범주를 어디에 두는지일 뿐, 자신을 책임지는 것까지 포기하지는 않는다. ‘소년성’에서 미숙함이라는 것은 적어도 자기 신체의 바깥에 적용된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어른들이 세계와 신경계로 연결돼있다면, 소년은 아직 미분화의 상태에 있다. 


*


세계와 신경으로 연결되는 일은 인지의 측면에서 감각 세계(몸의 세계)를 가능 세계(세계의 몸)로 바꾸는 효과가 있다. 여기서 가능 세계는 다시금 감각 세계를 요구하는데, 미분화라는 말은 어떠한 가능성이기 전에 세계를 인식하는 범위가 몸에 국한된다는 점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소년’이란 2차 성징 이전이나 겪는 중의 몸이라는 점에서 몸의 형태가 곧 세계의 형식일 때이고. 그래서 어른이 소년을 연기하는 일은 세계 안에서 쪼그라들기를 택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몸을 더 잘 다루기 위해 선택하는 ‘집중’의 구도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소년성은 현실도피의 구도보다 현실인식의 구도에 더 잘 어울린다. 소년은 현실에서는 어른이어야만 하는 이들이 소년으로 남을 수 있는 유일한 매체 안에서만 존재한다. 이들은 일종의 퇴행을 겪는 게 아니라 신경계와의 연결을 끊는 것으로 다시금 소년의 입장으로 돌아간다. 재-시동을 위해 말이다. 


그렇다면 어른들은 왜 소년성을 택했을까. 세계와 면밀히 연결되기를 포기하는 일은 떠올려 보건대 과잉반응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일이다. 감각이 너무 깊게 연결된다면 우리는 세계에 손을 뻗는 일조차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우리는 적절히 통증을 차단하고, 잠시 소년이 되어 세계를 걷는다. 이는 어른이 세계의 몸으로 풀이된다는 점에서 정말로 지켜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일이라 보아야 한다. 어떤 대상의 중요도를 재는 게 아니라 내부와 바깥을 구분지을 때 바깥을 내부로 들여오는 하나의 방식이 바로 소년성이다. 세계를 단절하거나 역전, 혹은 반역을 저지르지 않고서도 양측을 바꾸는 게 바로 이러한 소년성인 것이다. 이를 따라 우리는 발견된 소년성을 두고서 미묘한 무중력 지대라고 이름 붙여볼 수 있다. 이 무중력 지대는 신체를 바로잡는 규칙이 없다는 점에서 어느 방향으로도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어느 방향도 제시해주지 않는 단점이 있기도 하다. 


비유적 의미에서 사용한 이 무중력이라는 말이 일종의 치외법권처럼 이해되지 않았으면 한다. 오히려 무중력은 잘 짜여진 통제하에 들어간다는 점에서 자기 규칙에의 귀속에 가까우며, 만약 아무런 규칙도 없었다면 무중력은 주체를 우주 안에 유기하게만 될 뿐이다. 가장 쉬운 비유를 들자면 소년성은 시뮬라크르의 세계에 속한다. <매트릭스>의 사이퍼처럼 혹자는 다시금 시뮬라크르 안에 들어가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바깥을 내부로 들여올 때 내부는 여전히 바깥으로만 존속할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매트릭스 안으로 도피하기를 택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 시뮬라크르는 우리에게 세계에도 최후가 있다는 하나의 목적을 심어주었다. 사람들은 모든 것에 최후가 있다고 믿었기에 최후의 생존자가 되기를 바랐고, 투쟁했다. 그러나 세계가 끝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았을 때, 책임의 범주는 모호해지고 모든 것을 끌어안는 희생조차 불가해진다. 


여기서 [예수]라는 은유적 단어도 불가해진다. 모든 외부를 모든 내부로 엮는 이 대속의 관점에서 책임은 어떤 의미에서의 방임이 되고야 만다. 어떠한 존재자가 세계의 죄를 짊어진다면, 애초에 그 죄는 방임의 결과물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즉 모든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애초에 죄의 의미는 벌어진 사태에 후속하지도 않고, 또 어떤 현상에 대한 하나의 사건적 지평을 갖지도 못한다. 죄는 그저 인지 가능한 범주 안에서 발휘되고 또 그대로 벽에 막혀 소멸되어버리고야 만다. 그러니까 이런 맥락에서 소년성은 책임의 경계와 범주를 나누고, 확정하는 한 가지 방식일 수 있어 보인다. 어른이 어떠한 규율 안에서 완성된 표본으로서 기능하고, 또 그것이 하나의 부품으로써 예측 가능성을 전제로 한 대체 가능성을 가리킨다면. 소년은 나눌 수 없는 가능성에 저항하면서 경계를 넘지 않고자 한다. 왜냐하면 경계를 넘어가는 순간 경계는 있는 그대로 확정되어버리면서 지난 세계를 뒤로 돌려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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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만화의 공식은 소년성을 내세워야 한다는 것이며, 여기서 인물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모종의 순수를 간직해야만 한다. 이는 물론 소년만화(12~15세 이용가)보다 더 진중한 분위기를 다루는 청년만화(17~20세 이용가)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확실한 건 이들 소년에게서는 외부와 괴리된 순수가 하나쯤은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들이 특정 서사의 ‘주인공’일 수 있게 해줌과 동시에 작품에 특정 경계를 설정하는 효과가 있다. ‘순수’는 특정 이데올로기와 섞이지 않는다는 점에서의 순수이지만 그 이야기의 표현방식에서 때 묻지 않은 소년의 이미지와 결탁한다. 특히 소년만화에서 순수는 그런 의미에서 세상 사람들이 지켜내지 못한 무언가일 수도 있지만, 세상에 어울리지 못할 괴팍한 성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가령 전자의 경우는 <귀멸의 칼날>, 후자의 경우는 <체인소맨> 같은 걸 떠올려볼 수 있다. 전자가 강한 마음을 바탕으로 강한 위기를 이겨낸다면, 후자는 사회화되지 못한 자아로 사회적인 것을 이긴다. 


순수는 다른 것이 침투할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하나의 생태학적 관점으로 이해된다. 어떠한 법칙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은 채 그대로 적용되는 게 바로 [세계]라면, 이때의 [세계]는 생태학적이며 또 그런 의미에서 순수하다. 즉 소년만화의 주인공은 자기만의 원리원칙을 유지하면서 그것이 외부에 직접 영향받지 않는 ‘상태’를 유지한다. 말하자면 소년만화에서 주인공이라는 말은 서사의 중점이 된다는 점 이외에도 순수의 상태를 가리키는 하나의 고유명사다. 같은 맥락에서 소년성은 어떠한 시대나 세월에 구애받지 않고서 계속해서 자신일 수 있는 능력 혹은 양태를 가리킨다. 이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의 하울처럼 늙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데스노트>나 <진격의 거인>처럼 내외적인 단절에도 자신이길 계속할 수 있는 이들이기도 하다. 단지 아름답고 곱상한 것만이 순수일 수만은 없는 것이다. 또한 그 점에서 우리는 ‘소년’의 모습이 마냥 미숙함의 표상은 아닌 것임을 추측해볼 수 있다. 


앞서 해보았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처럼 된다. 첫 번째, 소년은 특정한 순간성과 결합하는 게 아니라 어떠한 [세계]로서 유지되는 하나의 기원이다. 두 번째, 소년은 하나의 기원을 갖기에 외부세계에서 자신의 존재원리를 찾지 않으며, 이는 소년이 어떠한 계승의 양상으로 나아가는 것에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 결국 (한국)영화에서 소년성의 경우도 특정 시기와 연대를 구분하기보단 (한국)영화 전체에 등장해올 수 있는 하나의 인물양식으로 보아야 한다. 소년성은 자신이기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순수한 자기의 한 형태이므로, 생물학적 관점에서 후대에 유전자를 남기듯이 ‘자기’라 불릴만한 구분의 요소를 이어받은 누군가에게 이름을 물려주는 게 가능하다. 이를 따라 ‘계승’의 형태가 등장한다. 서로 다른 형태의 소년들을 이어주는 건 소년성, 시대를 구분하지 않고서 항상 [소년]일 수 있는 자기 지칭의 요소이다. 소년들은 서로 다른 이름으로 등장했지만 신경계와의 연결을 통해 같은 유전자 풀에 뛰어든다. 


가령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같은 만화에서 계승의 방식이 그러하다. 만화의 후반부에 미도리야에게 개성을 물려준 올마이트가 “다음은 너다.”라고 읊조릴 때, 만화는 단지 개성만이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는 마음까지도 계승의 범주에 넣는다. 그리고 이후의 전개에서 혼수상태에 빠진 미도리야는 선대 계승자들을 만나 그들의 의지와 기술을 하나둘 확보하면서 점점 강해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최초의 선대가 말하길, 원포올의 의지는 언제나 같았고 그것이 어떤 형태로 쓰이는지는 모두 개인의 선택에 달렸다. 이는 원포올을 계승할 만한 이가 적절한 때에 등장해오는 게 아닌, 어느 시대나 국가에서도 소년들은 항상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개성은 단지 표현의 수단일 뿐임을 말한다. 요컨대 개성이 딱히 없었더라도 사람들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방식은 달랐을 것이며, 이는 작중에서 무개성이었던 미도리야가 자기 신체를 먼저 움직이는 대목에서도 확인된다. 결국 소년성은 신체의 문제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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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는 개인의 범위를 확정하는 기준 혹은 제한이 된다는 점에서 모종의 준거점이 된다. 따라서 ‘소년’은 성별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면모를 부각하는 것에 더 가까운데, 이는 어린아이일수록 아직 신체의 범주를 확립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즉 소년은 아직 어디까지 손을 뻗을 수 있는지, 자신이 어느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한 상태이며, 이는 대개 미숙함으로 드러난다. <나히아>의 출발선도 정확히 그곳에 있다. 올마이트에게서 힘을 물려받은 미도리야가 처음으로 해야 했던 게 체력단련이었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신체를 얼마나 정교하게 움직이는지의 문제가 개성의 활용도를 결정하기에 일차적으로 신체를 단련해야만 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는 소년이 되어가는 과정, 이미 완성된 신체에 부여된 새로운 소년의 성질에 맞춰 자신의 몸을 후천적으로 성장시키는 ‘3차 성징’이다. 소년성이 소년만이 갖는 성질이 아니라 계승될 수 있는 건이라는 점이 이를 통해 확인된다고 볼 수 있다. 


소년성이 신체의 문제이고 계승 가능한 부류라면, 마찬가지로 (한국)영화에서 소년성을 재론하는 건 그리 이상하지 않다. 일단 소년성은 계승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존재하고, 그러므로 특정 시기에 성장이 멈추는 것만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소년들이 항상 늙어가고 병드는 존재, 즉 불사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소위 마법소녀 장르에서 소년성의 요건으로 순수를 요구하곤 하는데, 그것은 신체적인 순수가 아니라 침투 불가한 것, 견고히 닫힌 생태계에 종속된 부품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소년성은 원치 않은 계승으로 이해되는 면이 분명 있다. 가령 <진격의 거인>에서 진격의 거인이 에렌의 아버지에 계승되는 과정은 “언제 어디서나 진격의 거인은 자유를 추구했다”고 말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계승의 끝에서 시조 거인의 힘으로 이루어진 강압적 폭거였다. 진격의 거인은 시조거인으로 가는 미래를 열어주는 하나의 운반책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에렌은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현재가 정해져 있었다고 말한다. 현재가 정해져 있었다는 말은 성장의 기준을 현재에 둔다는 점에서 성장의 불가능성을 암시한다. 반대로 살펴보면 이는 여태까지 성장의 도중을 보여주는 것이었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 성장의 불가능성으로 변모하는 점을 뜻한다. 소년만화였던 <진격거>는 이제 순수를 상실하고 비순수의 길로 접어들고, 소년성은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사라져야 할 무언가로 바뀐다. “더는 자신이 아니게 돼 버렸다”는 에렌의 말은 이제 [세계]가 소년에 직접적으로 대입되지 않는 과정을 가리킨다. 이러한 맥락에서 계승은 그 중간과정이 절단되거나 할 때 [세계]를 폭파하는 게 아니라, 소년성과 [세계]를 분리함으로써 다음 후계자를 찾는 것뿐이라는 점이 밝혀진다. 그렇다면 [세계]는 소년에 기생한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시조거인이라는 [세계]는 진격의 거인이라는 소년에 기생해왔다고 말이다.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서 소년성을 계승하는 문제는 우리에게 남은 현실을 계승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절단의 지점을 만든다는 매체 방법론을 따라간다. [세계]가 한번 ‘절단’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그런 [세계]를 저버리는 게 아니라면, 특정 작품이 소년성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일에서 그러한 소년성의 붕괴는 작품 전체를 뒤흔들만한 하나의 사건이 되지는 못한다. 오히려 이러한 완결성, 순수가 깨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소년에서 벗어나 어른으로 튕겨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른은 그 자신을 미래로 넘기는 게 아니라 자신이 구해야 할 이들을 끝까지 인도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결코 순수할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소년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세계]를 잃음으로써 비로소 소년이기를 포기한다. 그렇다면 행여나 세계를 잃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자신으로 남고자 할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다. 바로 그것이 계승의 끝에서 자신이기를 포기하는 사례, 소년성에 관한 자기 살해의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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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진격의 거인>을 두고서 해변에 다다른 모습을 ‘인류 최후의 체제’에 빗대었던 적이 있다. 이 논의에서 나는 후쿠야마의 논의를 따라 작품의 전반부에 보여지는 해변을 종말에 빗대었으며, 그것은 이제 인류가 맞서 싸워야 할 것이 [내부]로 바뀌었음을 뜻했다. 이는 해방 이후가 표면적으로의 승리의 양상을 띠지만, 궁극적으로는 방향성의 상실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최후의 인간은 독자 생존한 게 아니라 세계의 마지막을 눈으로 목격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종말을 마주하는 일이 좋다고만 할 수는 있을까. 최후에 살아남은 결과가 세계의 종말이라면, 우리는 세계를 바꾸려 하기보다 자신을 바꾸려 할 공산이 크다. 바꾸어 말해 최후의 인간은 세계를 밀어내기보단 내부를 밀어낼 공산이 크다. 외부의 폭발적인 축소에 맞서려면 안에서 바깥을 향해 힘을 가해야만 쪼그라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소멸에 저항하는 일로 풀이되는데, 일반적으로 ‘해방’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일을 연상케 하지만 실질적으로 개인에 한해서는 드넓은 곳에서 길을 잃는 일을 초래해서다. 


남극의 백야가 만연하는 빛으로 아무런 방향도 찾을 수 없게 해버리면서 결국 제자리에만 머물게끔 하듯, ‘해방’은 자유라기보다 방향상실에 더 가까웠다. 어둠 속을 걷는 사내는 빛을 마주했을 때가 자유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세계의 확장은 되려 우리의 몸을 감옥으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공통의 적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내부로 눈을 돌리면서 자신에게 원인을 찾으려 한다. 근래에 생각 중인 건 <진격의 거인>을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최후로 사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이다. 먼저 작품의 1부에 마지막에 해변을 언급했던 대목을 떠올려보자. 기존에 벽을 중심으로 나뉘었던 세계는 섬 내부의 거인을 구축하면서 무대를 외부로 확장한다. 이 과정에서 벽은 안과 밖을 나누는 하나의 기준이 되었고 그와 동시에 ‘거인’은 ‘누구나’ 잠재적으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점을 통해 국가를 관통해 존재했다. 거인은 에르디아 민족이라는 혈통으로 이해되면서 지리적 개념을 초월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바깥’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규율하는 것은 불가해졌다. 


섬 밖에도 동포가 있으며, 그런 동포들 중 일부 혹은 섬 내부에서도 의견이 다른 이들이 있기에 세계는 점점 더 분열에 이른다. 이에 따라 ‘벽’은 세계의 확장이라기보다 자아의 방어선에 가까워지며, 벽을 넘어 존재하는 해변은 최후의 인간이 아니라 축소하는 세계의 유지장치가 된다. 그러니까 내 의견은 이때의 해변이 더는 경계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벽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벽처럼 급격한 단절을 겪기보다는 해변처럼 서서히 침식되고 퇴적된다. 여기서 벽은 이제 인간의 최후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모래사막의 폭풍을 막아내는 것과 같은 부류의 방벽으로 작동한다. 벽의 바깥으로 나간 인간이 해변에서 점점 자신을 잃어버릴 때, 벽은 어디까지가 자신인지를 확립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진격의 거인>의 핵심 사유는 바로 그러한 벽이 세계를 멸망시키는 하나의 장치가 된다는 점이다. 벽을 경계로 나뉘던 안과 밖의 개념은 이제 벽이 무너져내리면서 민족적 지위를 상실한다. 


벽 안의 동포와 벽 밖의 동포를 구분 짓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자아를 방어하기란 어렵게 된다. 이를 따라 에렌은 ‘나’가 더는 ‘나’일 수 없는 경험을 하고, 시조거인의 힘을 발휘해 벽 안의 거인을 해방한다. 작품의 결말에 진행되는 이 땅울림은 벽을 해제하면서 인식의 한계를 지우지만, 자아의 확장이 세계의 수축을 넘어서는 과정에서 [바깥]은 오히려 자신을 지시하는 게 되고야 만다. 이른바, ‘해방’은 더는 자신이지 않을 권리가 된다. 물론 자신을 무언가로 규정하는 일은 삶의 의도와 목적만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다. 자신이 세계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자신이기를 포기함으로써 세계에 소속되는 걸 포기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바깥]의 상실로 이어지면서 경계를 지우는 일은 세계를 통합하는 게 아니라 되려 후퇴에 가까운 쪽이 된다. 혹시나 그렇다면, 인간들 사이엔 수축을 적절히 막을 벽이 필요한 건 아닐까. 세포벽처럼 형태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거리는 필요하다고 말이다.


*


우리는 세계의 멸망을 눈으로 목격하는 일과 그런 세계의 끝에 다다르는 일 중 무엇이 우선시되어야 할지를 늘상 줄저울질하곤 한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에반게리온>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람들 사이엔 마음의 벽이 있어야만 한다고. 무엇보다 <진격의 거인>에서 벽의 숨은 진의는 그 안에 거인들이 숨어있었고, 이 거인들은 내부가 아니라 바깥을 향해 행진하는 것이었음을 명심해둘 필요가 있다. 혹자는 이 이야기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근본적인 화합의 불가능성이 가리키는 미래 방향으로의 고정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에 우선하는 건 왜 자신을 파괴하는 일이 내부가 아니라 바깥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실행되었는지를 떠올리는 것이다. 애초에 이 이야기는 재생산의 금지였을 뿐 즉시 자살이 아니었으므로, 역사의 답습을 왜 유전에 빗대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지크의 말을 빌리자면, 역사의 과오를 기억하는 일은 어떻게 계승이라는 말과 연결되었을까? 


예전에 사람들은 어떠한 벽을 가정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벽이 사라지고 나면 이 이야기는 끝난다고 보았었다. 마왕성을 오르는 이야기나 미로를 탐험하는 이야기의 끝은 모두 실제 시간과 일치했다. 하지만 폴 리쾨르가 말하듯 인간에게 죽음이란 게 존재하기에 역사는 인간의 것이 되기 마련이다. 즉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기에 이야기를 기록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를 통해 기억을 전승함으로써 한편의 역사를 꾸려간다. 결국 역사는 인간이 이야기를 통해 기억을 구전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세계의 바깥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소속될 수 없는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었고 그러한 의미에서 불멸을 획득한 셈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지크는 계승을 말한다: “내가 짐승을 계승할게.” 지크는 역사의 과오를 지우는 방식으로 인간의 역사가 끝나야 한다고 말하면서, 단지 인간 개인의 죽음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특정 민족 전체가 끝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전자 단위에서의 말살 말이다. 


지크의 맥락에서 계승은 선대의 능력이나 기억을 흡수하는 차원에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구전과는 다른 맥락을 지닌다. 특히 지크가 안락사를 주장하는 대목은 현실 세계에서 나치의 폭력과 직접 연결되며, 세계에서 특정 민족의 기억을 뿌리 뽑겠다는 말은 바꾸어 말해 세계의 모든 곳에 기억이 연결되어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즉 [세계] 자체를 바꿀 수 없다면 차라리 그들을 연결하는 하나의 기억을 제거해야만 한다. 그 기억이 바로 유전자 단위의 인간인 ‘민족’이고, 역사를 죽음에 몰아넣음으로써 근본적인 유전 가능성을 배제해야만 한다고 그는 말한다. 애초에 시작부터 잘못된 일이라면 그 끝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조차 잘못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 대목에서 지크의 주장은 연속성을 지닌 계승이 아니라 자기 민족의 죄를 [세계]에서 내부로 추방한다는 의미에서의 대속으로 뒤바뀐다. 지크는 [바깥]을 자신의 내부로 추방하면서 [세계]를 점진적으로 후퇴시키고, 종국에는 소멸하기를 바란다. 


지크의 이야기는 부모님을 스스로 군에 고발하면서 자기 존재를 살해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는 이제 소년이기를 포기하고 역사의 끝에 오직 자기만이 남아있기를 바란다. 이렇게 시작된 최후의 인간은 세계에서 배제되어야 할 건 벽 바깥이 아니라 오히려 벽의 안쪽이라고, 죽어야 할 건 그들이 아니라 우리라고 말하면서 본격적인 소멸의 길을 간다. 하지만 계승의 진정한 의미란 이야기의 힘을 빌어 [세계]의 범주를 상상할 수 있는 것에 넣는 일이 아니다. 계승은 ‘지켜야 할 것’과 ‘지켜내야 할 것’을 구분하면서 그런 수비의 범주에 자기 또한 넣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소년이 어른이 되길 바라는 것은 “어른이 되면 무언가를 능숙하게 해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어른은 자신이 지닌 이야기의 상상할 수 있는 형태가 현실에 구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소년과 어른은 어떠한 경계로 구분되는 존재가 아니다. 이 둘은 이야기를 계승하기 위해 상시 무릎을 꿇을 준비가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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