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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Nov 08. 2022

수메르 아카데미아: 사이버펑크와 현실의 인상

원신을 플레이하면서 느끼는 점 중 하나는 동시대에 관한 인상이 이야기에 녹아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은 전적으로 제작사의 몫이지만, 어떤 점에서는 사람들이 단서를 찾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그런 ‘만들기’의 일환인 것 같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발견한 것을 서로와 나누어 공유하길 좋아하며 이런 행위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이는 원신의 주요 업데이트 주기가 1년 단위여서 비교적 이야기를 가꾸고 확장해갈 여지가 있다는 점에 귀인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온라인 서비스의 장점 중 하나로 제시되는 ‘수정 가능성’은 이야기의 변화나 변경을 꾀하기에 쉽다는 것이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이야기를 쓴다면 당연하게도 동시대성은 강화될 수밖에 없다. 이미 끝나버린 게 아니라 계속해서 이어져야 할 이야기라면 우리는 이를 ‘투비컨티뉴드’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이 글에서 나는 그러한 ‘지속시키려는 인상’으로의 동시대성을 논해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이야기라는 것은 시작과 끝으로 완결된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간 안에서 하나의 종속절로 배치돼있다. 그러니까 동시대성의 핵심은 그것이 우리와 함께 움직인다는 점에 있다. 마치 같은 버스에 탄 것처럼, 아니면 같은 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동시대성의 핵심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을 전하는 것에 있으며, 이는 우리가 작품을 우리 삶 속의 ‘하나’로 여기거나 혹은 작품에서 출발해 우리 삶으로 빠져나올 수 있음을 뜻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오즈 야스지로나 나루세 미키오의 작품 등을 볼 때마다, 이런 이야기는 지금 우리 현실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인상을 받곤 한다. 이들의 작품 속에서 이야기는 한참 전에 끝났지만, 그들의 대화가 우리의 현실에 속삭일 때 이야기는 현재로의 출구를 찾는다. 그렇다면 이때의 이야기는 닫힌 방이 아니라, 그들 시대에서 우리 시대로 사람들을 이어주는 하나의 버스노선과도 같을 테다. 


마찬가지로 나는 좋은 작품이란 우리들 기억에 하나의 접속 포인트로 남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든지 기억에 접속해 이를 현전시키는 게 바로 문화적 속성으로의 동시대성이다. 이는 우리가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는 게 아니라, 그 시대와 우리 시대가 여전히 함께한다는 점을 느낀다는 점에서의 동시대성이다. 일차선과 이차선을 나란히 달리는 중이라고나 할까. 이곳에서 손을 흔들면 저쪽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손을 흔들어줄 것만 같은 인상은 ‘연결’ 시대에 사라지는 존재적 희미함을 보완해준다. 몸담은 곳은 달라도 방향은 같다는 점. 네트워크는 오히려 모두가 각자의 이상을 품는다는 점에서 하나로 합치되지 않는 것에 따른 고독감을 유발하기도 하는데. 초연결이라 불리는 이 네트워크 시대에 되려 너무 많은 존재의 파편으로 인한 자아의 분산이 어떤 방식으로 보완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일. 동시대성이란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나”가 아니라 “어디에나 존재하는 세상과 나”라는 동반자적 관계이다. 


전자의 경우는 내가 그들 세상 모두를 커버해야 한다는 점에서 자아에 막중한 부담이 가해진다. 당연하지만 이는 우리가 모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그래서 <에반게리온>의 신지처럼 모두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연결을 수행할 수도 있는데, 죽음조차 극복해버린 네트워크 세상에서 그리 행동하는 건 좋지 않다. 과거에는 고립되는 일이 곧 죽음으로 이어졌지만, 근래에는 고립된다고 한들 죽는 것도 아니어서 되려 혼자서만 줄곧 고통받기만 할 뿐이다. 말하자면 이 시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사람들 앞에 나서고, 고민을 토로하고 고통을 분담하는 식의 소통에 더 유리하다. 의식이 끊기지 않는 자살이 죽는 것만도 못하듯, 죽지 않은 채 고립되는 일은 스스로를 감금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네트워크는 관종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네트워크 시대에 사람들은 의식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표현하고 또 발산해야 한다. 


한편으로 후자의 경우는 이를 계몽, 교화, 포섭, 동조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저 함께하는 관계로 설정함으로써 얻는 이득이 있다. 다중우주라는 설정 등에서 이게 잘 드러나는데, 여러 세상과 함께하면서도 이에 간섭할 필요가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라는 점이 그렇다. 다중우주는 연결을 유지하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한다. 또한 다중우주는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다 희망과 연결되어 있기도 한다. 미디어에 따라 다르지만 다중우주는 보통 선택의 분기점에서 나뉜 세계를 계속해서 이어가기 때문에 이들 중 버려지는 세계가 없다. 즉, 무언가를 위해 다른 하나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며 이는 우리가 직접 살아가는 메인스트림의 세계가 단순한 시점의 차이일 뿐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요컨대 다중우주의 동시대성은 기본적으로 고립이란 게 존재하지 않고, 죽음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두와 연결되기에 최적화된 구조다. 


이러한 맥락으로 보면 게임이 왜 동시대성에 강점을 발휘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게임은 유저가 캐릭터를 직접 조작해야 한다는 점에서 소설이나 영화가 발휘하는 시점의 문제와는 또 다른 성질을 지닌다. 게임은 유저가 직접 이야기의 진행에 가담한다는 점에서(캐릭터의 신체를 조작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단순한 시점의 차이로만 이해되지 않는다. 게임은 유저가 앞으로 나아가야만 할 이유를 세계 안에서 제시해 줘야만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게임은 사실 주어진 세계를 탐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유저로 하여금 자신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또 조합할 수 있다는 착각을 심어준다. 이른바 능동성의 착각, 어쩌면 이는 우리 세계가 하나의 구조에 불과하며 이 안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모두 착각에 그친다는 비관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이 착각이야말로 오늘날의 게임이 우리의 현실과 결탁하는 동시대적인 면이라고 생각한다. 


일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스탠리 카벨이 말하는 영화의 자동기계적인 속성이 정확히 이런 부류에 속한다는 점을 먼저 말해볼 수 있겠다. 이를 따르자면 영화의 주된 속성은 슬픔이며, 이는 우리가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한 강제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영화가 시간의 속박에서 풀려나는 일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를 되찾는 게 아니라고 말이다. 하지만 내가 게임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 ‘해낼 수 있다’는 착각을 심어준다는 점에 있다. 게임은 유저로 하여금 무언가를 직접 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지만 사실은 개발자와 디자이너의 의도에 따를 뿐이며, 이를 따르자면 ‘자유의지’란 건 착각이거나 기만에 불과하므로 이곳에서 행복함 따윈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가정할 때, 이것이 착각으로 운용되는 세계란 기만적 행복으로 운용되는 하나의 조건적 삶은 아닐까? 행복한 결말이라는 장르에서처럼 말이다. 


여기서 잠시 주제를 점프해보자면 사이버펑크 장르에선 행복한 결말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한 가지 관점이 있다. 『멋진 신세계』, 『1984』 같은 원형적 소설에서부터 <매트릭스>, <블레이드 러너>같은 영화, [디트로이드: 비컴 휴먼]이나 [사이버펑크: 2077] 같은 게임에 이르기까지 사이버펑크 장르의 특징 중 하나는 행복한 결말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나마 <가타카>나 <칠드런 오브 맨> 정도가 행복하게 끝났다고 볼 수 있지만 이런 사례가 손에 꼽을 만한 정도라는 걸 생각하면 사이버펑크 장르의 특징 자체가 그렇다고 보아도 좋을 테다.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사이버펑크 장르가 왜 행복한 결말을 마주할 수 없는지를 궁금해했고,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사이버펑크 장르가 불행에 빠지기 쉬운 것은 그것이 일종의 가속을 다루기 때문이라는 점을 알아냈다. 미래 사회로의 가속에서 우리가 사소하게 놓친 것들이 점점 거대한 균열로 다가오는 일이 바로 사이버펑크라는 점에서, 이 세상은 비가역적인 손상을 입었다.  


이런 의문은 원신을 플레이하면서도 동일하게 재현되었다. 원신의 수메르 지역을 플레이하며 들었던 평 중에는 나라 전체가 사이버펑크 같다는 게 있었다. 수메르 지역은 허공이라는 지식 네트워크를 컨셉으로 하며, 이를 토대로 지식의 공유과 발전을 꾀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아는 사이버펑크의 감상을 갖는다. 그러나 수메르는 세계수를 토대로 한 우림 지역이라는 점에서 완전히 기술적이지는 않다. 요컨대 이 지역에서 사이버펑크를 찾아낸 것은 허공이라는 네트워크를 통해 인간의 삶이 지배된다는 점 때문이었지 전미래적이거나 가타카나와 한글, 한자가 뒤덮은 스카이라인 때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수메르 지역을 두고서 왜 사이버펑크라는 감상을 떠올렸던 걸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 이유는 이곳이 바로 행복한 결말에 실패하는 장소라는 점이 예견되어서다. 특히나 이 행복한 결말은 초연결 사회에 던지는 화두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단순한 사이버펑크이기 전에 기술화되어가는 현실을 나란히 한다. 


수메르 지역의 로그라인은 “세상이 날 잊어”인데,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생략된 부분을 채우고 나면 이는 “세상이 날 잊어주길”로 변한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의도적으로 생성한 노이즈를 헤쳐가는 이 여정에서 우리는 수메르 아카데미아가 허공을 이용해 백성들의 하루를 반복하는 일을 목격한다. 그리고 이렇게 반복한 하루에서 수집된 꿈은 허공에 상납되어 아카데미아의 신 만들기 프로젝트에 유용된다. 이 이야기 구조는 바로 전 지역인 이나즈마 지역에서 이루어졌던 최종 전투를 떠올리게 하는데, 사람들의 꿈을 모아 적에 대항하는 방식이 그러하다. 이를 따르자면 사람들의 꿈으로 신을 만든다는 아카데미아의 논리는 사실 신에 대항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기만의 신을 만드는 일도 그렇지만, 새로 취임한 신이 전대만도 못한 능력을 지녔다고 판단하여 이를 유폐하는 일이 그렇다. 신이 죽은 자리에 신의 환생이 탄생했지만 아카데미아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녀를 유폐했다.


수메르 이야기의 종장에서, 오염된 세계수의 의식에 접속한 룩카데바타를 떠올려보자. 수메르는 위대한 지혜의 신 룩카데바타가 죽은 이후로 사실상 신이 부재하는 상황이었다. 전대 신을 그리워하며 그 능력을 숭상했던 아카데미아에게 신은 재건하거나 복원해야 할 대상이었고, 이를 위해 사람들의 꿈을 수집하였으며, 그렇게 모인 꿈은 유사하게나마 신의 일각을 재현할 만한 정도는 되었다. 이러한 수메르 이야기의 묘사는 <에반게리온>이나 <강철의 연금술사>처럼 인간이 저질러서는 안 될 금기 중 하나인 환생이라는 주제를 강하게 암시하며, 그와 동시에 환생과 윤회의 차이를 언급하면서 몸과 정신이라는 사이버펑크의 철학적 문제를 다시금 불러온다. 이른바, 같은 설계로 이뤄졌더라도 그것을 사용하고 응용하는 방식에 있어 정신과 관념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전대 신 룩카데바타가 나히다에게 말하듯, “같은 뿌리를 공유하더라도 가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뻗을 수 있다.”고 말이다. 


룩카데바타의 말에 따르면, 세계수는 금단의 지식으로 오염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세계수와 연결된 자신 또한 오염되었으므로 “이 사태의 최종적인 종착지점은 전대 신인 자신을 사람들이 잊어야만” 해결된다. <매트릭스> 트릴로지의 3편에서의 네오를 떠올리게 하는 이 행적은 허공이라는 네트워크에 감염이라는 생물학적인 개념을 대입함으로써 작품 속의 이야기가 단순히 내적으로만 소비되지 않는 계기를 제공한다. 행복한 결말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이버펑크 장르를 따라가면 처음에 “세상이 날 잊어 (…)”라는 문장은 모종의 아쉬움이나 원망처럼 들리지만, 되려 이것이 “세상이 날 잊어주길”이라는 문장으로 완성될 때 이는 행복의 기준을 달리함으로써 역설적으로 행복한 결말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니까 네크워크의 시대에 초연결되는 개인이 모종의 발전 가능성이 있으려면, 즉 ‘수정’ 가능해지려면 되려 자신을 네트워크에서 단절해야 한다. 그런고로 사이버펑크 장르의 핵심요인인 ‘가속’이 여기서도 재현된다. 


사건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세계는 어떻게 될까? 사이버펑크 장르가 주로 되묻는 것은 그러한 가속에서 의식과 물질 사이의 분리가 일어나고, 이런 분리를 통해 우리는 세계에 대한 선제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선제타격, 사실 사이버펑크 장르 자체가 미국의 1970년대가 가정하는 하나의 분기점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는 모종의 다중우주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리고 다중우주론이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것을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버려두진 않았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우리는 사이버펑크가 갖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사이버펑크 장르는 최초에 어떠한 미래를 묘사하는 것에서 출발했지만 이제는 우리가 그들보다 더 미래가 되어버렸고, 그렇기에 이들은 선택받지 못한 채 쓸쓸히 잊혀질 뿐인 과거가 되어버렸다. 이들로서는 아무리 미래로 달려봐야 우리 현실에 수렴할 뿐이라는 역설을 마주하게 되며, 바로 이게 행복한 결말이 갖는 실패의 성질이다.


하나로 수렴하는 시간 안에서 우리가 뚜렷한 미래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모든 것의 끝이 하나의 보편타당한 규율로 제시된다면 그것 외의 별다른 이야기는 그러한 ‘커다람’에 삼켜지고야 만다. 따라서 사이버펑크는 그러한 실패를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현실과의 관계를 끊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로 연결된 네트워크 안에서 미래는 가속에 의해 확정된 상태로 여겨지며, 이는 개인에게도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인은 중심점을 찾을 수 없을 것이며 미래 또한 방향을 잃을 것이다. 이렇게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버린다면 ‘꿈’이란 건 개인이 아니라 네트워크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잊어야만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에게 꿈을 돌려주겠다고 말한다. 룩카데바타는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하는 일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게 영원(memorial)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미래에 존속시키는 것이야말로 영원이라 말한다. 


수메르 사람들에게 룩카데바타는 그녀 외에 그 어떤 것도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수메르는 금단의 지식에 대항할 요령으로 설계된 허공 네트워크로 존속했으며, 세계를 하나로 잇는 이 네트워크는 단순한 신의 지혜 이상이었다. 그러나 모든 이의 삶과 운명이 네트워크에 소속될 때, 개인의 존재적 의미는 하나로 응집되지 못하고 네트 전체에 풀어진다. 개인이 세상을 잊지 않으려 할 때 되려 세상도 개인을 잊지 않는다는 점에서 개인은 항상 네트워크에 의해 주목받는 상황에 놓인다. 여기서 꿈의 역할이 바로 우리가 위에서 말했던 자유의지에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자신에게 의존하지 않고서 인간의 힘으로 스스로 무언가를 해내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이라고 말이다. 즉, 사이버펑크에서 행복한 결말이 없는 이유는 되려 행복을 스스로 쟁취할 만한 힘과 의무가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과거는 기억하거나 기념해야 할 대상이라기보단 현실을 지속시키는 인상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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