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Sep 15. 2021

에반게리온의 <다카포>를 보며 생각한 것


*콜리그에 투고한 여섯 번째 글이다.

https://colleague.co.kr/forum/view/563149



얼마 전 아마존 프라임에서 에반게리온의 마지막 시리즈 <다카포>가 공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21.08.13).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애니메이션이기도 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문화이기도 했던 이 작품의 마지막을 손수 보고자 아마존 서비스에 접속했다. 그렇게 감상을 끝내고 나니 알 수 없는 생각과 감정이 밀려왔다. 아쉬움이나 분노와 같은 팬심은 아니었는데, 줄곧 생각해보아도 이 미묘한 여운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에반게리온을 직접 목격한 세대가 아니며, 따라서 그들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 보지 못했으므로 어떠한 구체적인 감정 같은 게 생겨날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이 생각은 뒤집혔다. 이것은 단순한 에반게리온 시리즈가 아니라 과거의 이야기를 지금 이곳에서 다시금 ‘다카포(Da-capo)’하는 것이었다. 안노 히데아키는 십여 년 전에 만들었던 에반게리온 시리즈가 미완이라고 생각했으며, 이에 따라 신극장판을 만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은 ‘그곳’이 아니라 ‘이곳’에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 에반게리온은 2010년대에 만들어졌으며, ‘그곳’이 아니라 ‘이곳’을 살아가는 나 또한 작품에 충분히 이입할 수 있을 테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품이 ‘다카포’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이유란 다음과 같다.




다카포는 “처음으로 돌아가시오.”라는 뜻을 지닌 음악 기호다. 그리고 악보에서 다카포는 음악이 피네(fine)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아마도 다카포는 그런 끝을 피하기 위할 요령으로 고안되었을 것이다. 종말을 미룬다는 의미에서의 유예를 뜻하는 게 아니다. 다카포는 한정된 지면 안에서 같은 시간을 여러 번 기입함으로써 화성을 증폭하는 효과를 지녔다. 다시 말해서, 다카포는 리듬을 통해 화성의 주파수 대역을 늘리는 증폭기호이다. 그래서 이는 같은 연주를 반복하면서도 어떻게 음악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같은 음악을 여러 번 반복해서 듣다 보면, 어느 순간 음악의 전체적인 인상이 달리 보일 때가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여러 번 반복해서 보면 지루할 것만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영화를 여러 번 보다 보면 어느새 영화의 전체적인 인상이 달리 느껴지곤 한다. 악기(카메라)가 치고 들어오는 타이밍, 리듬(몽타주)을 구성하는 것에서의 문제, 작품의 내부 시간은 반복될지 몰라도 그 바깥에 있는 우리들의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간다는 점. 예컨대 ‘다카포’라는 기호에서 강조되어야 할 건 이 반복이 ‘그곳’과 ‘이곳’이 분리되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점이다.




영화는 늘 새로이 생성된다




우리가 처음으로 목격한 ‘그곳’은 애초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것으로 느껴진다. 즉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반복해서 보게 되는 ‘그곳’은 그 존재의 이유에 어떠한 가치가 있음을 스스로 소명한다. 이 소명 행위를 통해 그들의 배치는 자연스러움에서 인위적인 가치로 이동한다. 반복을 통해 존재의 이유가 밝혀지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다카포라는 기호는 단순한 반복만을 지시하는 게 아니다. 다카포는 한정된 지면에서 이루어진다. 단순히 반복만 할 것이라면 그냥 무수히 많은 시간을 소모하기만 하면 되었겠지만, 한정된 지면 안에서라면 그런 반복은 신중을 기해야 하는 행위가 된다.




내가 <다카포>를 보며 떠올린 것은 그러한 한정된 지면과 신중함 사이의 관계이다. 한정된 지면을 사용한다는 건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성찰될 수 있다. 첫 번째로는 영화의 문제이다. 영화는 현실을 닮았지만 지면이 한정되었다는 점에서 현실과는 다르다. 혹자는 영화가 곧 삶으로 성찰될 수도 있다고 말하지만, 모든 영화는 우리 삶보다 먼저 끝난다. 쉽게 말해 우리가 더 오래 산다. 그러니 영화를 보며 삶을 생각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모순된다. ‘그곳’은 이미 끝나버린 삶의 재생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문제를 고찰하는 두 번째 사례에서 이런 가정은 뒤바뀐다.




우리의 삶 또한 한정된 지면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태어남은 죽음을 동반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삶에서도 어떠한 다카포가 있을 수 있다. 바꾸어 말해 우리에겐 ‘그곳’과 ‘이곳’이 분리되는 감각이 있다: 기본적으로 이 감각은 지루한 일상 속에서 피어난다. 어떠한 반복에 익숙해지는 것을 우리는 루틴이라 부른다. 이 루틴이 정형화되고 나면 일상은 자동화된다. 굳이 생각할 필요 없이, 이전까지 해오던 일을 계속하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루틴이 정착되고 나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곳’이 시간이라고 느낄 만한 결절의 구역이 사라지고 나면 시간은 줄곧 미끄러지기만 할 뿐이다.




빠르게 반복되는 일상은 동일한 시간이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이 감각은 평소에 쉬이 느껴지지 않는 부류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삶이 한정된 지면임을 깨우쳤을 때, 다카포는 처음으로 돌아가기를 지시한다. 다카포 안에서 우리는 같은 순간이라도 세세한 차이점 몇 가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생각해보건대 만약 우리 삶이 영화에 빗대어질 수 있다면, 이러한 반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유한자의 인식이 아니라 다시금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다카포의 의식 안에서만 비로소 삶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물론 나는 지금 삶에 대한 인식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기쁨 같은 걸 느껴보자고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이 생각은 기본적으로 영화와 삶, 그러니까 영화를 본다는 것에 대한 감각을 의미한다. 삶을 영화에 빗대는 은유에서 결핍된 건, 어떻게 삶 안에서 영화가 목격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론인 것이다.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일시적으로 영화 안에 빨려들어가게 되는데, 이 몰입의 행위란 기본적으로 내가 ‘이곳’에 없고 ‘그곳’에 있다는 감각을 전제한다. 여기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또한 삶이라는 ‘그곳’에 몰입해만 있을 뿐, 삶을 바라보는 ‘이곳’에 대한 의식은 없을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영화가 우리에게 몰입감을 주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다. 영화는 그 진행이 전적으로 자동화되었으며 이를 통해 얼마든지 재생산될 수 있다. 즉 영화는 모두에게 균일한 영상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일상이 반복될수록 삶은 영화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자동화된 삶은 모든 시간에서 동일한 이미지를 보여주며, 아무것도 안 해도 동일한 이미지를 볼 수 있다면 구태여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다. 이 반복의 행위는 우리 자신을 삶의 중심에서 탈구시킨다. 영화라는 볼거리는 이제 갑갑한 프레임이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 이는 기계적으로 복제되는 영화가 왜 예술로 인정되었는지에 대한 해답이기도 했었다.




우리의 망막에 영화의 상이 맺힐 때, 매 순간 새로운 인상이 생겨난다. 영화가 반복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우리가 이것이 새로운 상임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어서일 뿐이다. 이를 눈치채는 데 필요한 건 위에서 말한 다카포다. 매 순간이 새로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통해서만 우리는 한정된 지면을 보다 가치 있게 사용할 수 있다. 말하자면 영화에서 필름의 역할은 영상의 설계도를 토대로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일 뿐, 이 영상이 우리와 만나 변형되는 결과물까지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영화를 반복해서 볼수록 무언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영화는 늘 새로이 생성된다.




흘러가는 시간의 문제




<다카포>에서 아스카와 신지, 레이는 멸망한 세계를 방황하다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방문하게 된다. 이 멸망한 세계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일상을 영유하고 있다. 매일이 반복되고 평화로워서 이곳이 위험하다는 생각 같은 건 할 수 없어 보인다. 그런데 사실 이 마을은 작은 결계를 사이에 두고 파국의 세상과 분리되어 있을 뿐이다. 다채색의 자연이 마을의 일상을 보여준다면, 결계 밖의 빨간 하늘은 이곳에 세계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끔 한다. 여기서 마을에 정착한 아스카와 신지, 레이는 각자 다른 태도로 일상에 임한다.




신지와 레이가 마을에 녹아드는 쪽이라면 아스카는 마을을 멀리서 지켜보는 쪽이다. 신지와 레이는 마을 공동체에서 밥값을 하고자 노력한다. 레이는 농활을 하며 신지는 탐사를 나간다. 그러나 아스카는 집에 틀어박혀 게임기를 두들긴다. 이에 의아해하는 신지가 아스카에게 “왜 공동체에 참여하지 않느냐.”고 묻자 신지는 다음과 같은 답을 돌려준다. “난 여기에 살고 있는 게 아니야. 이곳을 지키고자 머무르고 있을 뿐이야.”라고 말이다. 아스카의 이 말은 에바 파일럿으로써 언제든지 파괴될 수 있는 마을에 정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보호자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신지가 머무르는 방을 보면 그녀 또한 누군가에게 보호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신지가 에바의 주박으로 인해 유년기의 육체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녀의 의존적인 태도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 어른이 아이를 보호하는 건 적어도 우리 세계의 상식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보호받는 아이’처럼 보이는 그녀가 ‘마을을 지킨다’고 말하는 모습은 다소 흥미롭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지킨다’는 감정은 어른이 아니라 아이에 더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장난감을 갖고 노는 아이가 놀이시간이 끝났을 때 아쉬워하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그러나 우리는 어른이 되어갈수록 수집욕을 거세하기를 스스로 택한다. 어른이 될수록 포기해야만 하는 게 많아지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선택하고 독점하고자 하는 것들이 모두 이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아서다. 우리는 이를 타협이라 부르며, 다른 말로는 ‘철이 든다’고 칭한다. 그런 맥락에서 아스카가 사실은 어른의 덕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단순히 어른스럽다는 뜻이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야만 할 수 있는 어리광이 흥미롭다는 것이다: 위의 대사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니”면서도 ‘지키고자 한다”는 말은 더는 ‘아이’일 수 없으면서도 ‘동심’은 버리기 싫다는 말처럼 들린다.




계속해서 아이처럼 살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시간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불가피하게 어른이 되는 이들에겐 그러한 시간의 문제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 동심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한자 그대로 읽으면 ‘아이의 마음’이라는 뜻인 이 말은, 어른들이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는 표현과 함께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 표현은 정말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어른들의 현재가 아이였던 과거 시절과 잠시 만났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영화 이미지의 생성과도 같아서, ‘이곳’의 현재가 ‘그곳’의 과거와 접촉하여 만들어진 완전히 새로운 감정이라 할 수 있다.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지키려는 것”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이렇다. 분명 아스카의 이 말은 동심과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이는 단순히 철이 들었을 뿐인 게 아니다. 아스카의 태도는 반복의 문제에서 돌아갈 수 없음, 혹은 돌이킬 수 없음을 통해 다카포의 감각을 우리에게 되새겨준다. 아스카와 신지는 돌이킬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이들이 살아가는 곳은 ‘이곳’이 아니라 ‘그곳’이었다. 세상이 이대로 멸망해버렸다고 생각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해버릴 수도 있었지만, 이들은 오히려 그러한 멸망이 반복된다는 인식이 있었기에 세상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를 볼 때 중요한 게 시간이 반복된다는 의식이듯이,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도 반복을 인식하는 건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반복이라 함은 ‘열림’보다 ‘닫힘’에 더 가까운 뜻이지만, 반복을 인식하는 순간 그것은 닫힘에서 열림으로 이행하는 다카포가 된다. 예컨대 다카포는 처음으로 돌아감을 지시하는 기호지만 이는 원점으로 돌아가라는 초기화를 뜻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시간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런 시간을 지키려는 것뿐이라는 겁쟁이의 마음을 지적한다. 이 겁쟁이의 마음은 유년기의 시간을 지켜내려는 어른들의 순수에 대한 갈망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생성이라는 이름의 현재와의 대결의식이다.




따라서 <다카포>의 또 다른 부제인 <3.0+1.0>은 3.0이 현재와 대결하여 이루어낸 1.0의 여분으로 읽혀야 마땅하다. 반복되는 삶은 닫힘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우리는 반복을 통해 열림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게 무의미한 행동이 아닌 것도 같은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영화는 반복을 통해 열림으로 나아간다. 사람들은 영화를 여러 번 돌려보고, 여러 번 이야기함으로써 영화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발굴해낸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아무리 무용한 것처럼 보이는 반복이더라도 우리의 미래는 열려있다고 말이다.




이전 11화 에반게리온의 끝: 원작과 리메이크에 담긴 두 갈래의 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