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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Oct 19. 2021

에반게리온의 끝: 원작과 리메이크에 담긴 두 갈래의 길


근래에는 소위 말하는 ‘리메이크’ 붐이 있는 것 같다. 이는 과거에 흥행했던 것을 다시금 선보이는 것인데, ‘재탕’이라던가 ‘발굴’이라던가 하는 수식어가 있는 걸 보면 다소 어두운 면도 있는 모양이다. “예전에 흥했던 것이라면, 요즘에도 흥하지 않을까?”라는 “구관이 명관” 식의 사고에 의존한다고 말이다. 확실히 예전에 재밌게 보았던 것을 지금에 다시 만나는 일은, 그리움에 반갑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달갑지 않은 만남’이 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이유로는 첫 번째, 해당 콘텐츠를 접했던 시기의 ‘나’와 지금의 ‘나’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둘 다 같은 ‘나’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때보다 몸도 마음도 달라졌고 따라서 그때와는 같은 입장에서 작품을 바라볼 수 없게 된다. 그러하니, 누군가는 자신의 지난 추억이 망쳐지지 않기를 바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입장에서 더 나아가면 다음의 두 번째 가정을 해볼 수 있다. 리메이크 콘텐츠들에는 원작과 리메이크판 사이에 설명되지 않는 세월의 간극이 존재하고, 이는 관객인 우리에게 설명되지 않는다. 콘텐츠로 이를 접할 때 이런 내용이 모종의 신선함으로 다가올 수 있겠지만, 우리의 내면으로 바라보면 과거의 ‘나’가 현재의 ‘나’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이런 상황은 굉장히 당황스럽거나 또는 화가 나기까지 할 수도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둘 중 하나를 부정하려 드는 극단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두 가지 전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작품을 보는 우리의 처지를 놓고 보면 ‘현재’가 ‘과거’를 제거하려 들 수 있다. 오래전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꽃보다 남자>의 드라마판은 지금에 와서 보면 손발이 오그라들어 제대로 보기 힘들다는 몇몇 관람평이 있다. 이들에게 이 드라마에 몰입했던 과거는 일종의 ‘흑역사’ 취급될 테고, 말하자면 이는 과거가 현재에 의해 부정되는 식이다. 하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나’라는 인식이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연속성을 통해 성립하므로, 현재는 과거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에 파생되는 두 번째 사례가 바로 리메이크다. 리메이크는 좋았던 것을 다시 한번 보자는 마음에 의존하기도 하지만, 그와 정반대로 싫었던 것을 다시금 들여다보자는 마음에 의존하기도 한다.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인간이 자신의 과거를 직시하는 방법은 원본을 묘하게 변형하여 주변부의 텍스트로 번안하는 일인 것이다. 요약하자면 리메이크라는 것은 단지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고 추억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다. 어떤 면에서 리메이크란 ‘IF’를 가정하며 만들어가는 평행우주의 파생형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가정이 중요한 이유는 리메이크라는 게 원본을 삭제하고서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닌, 원본과 나란히 공존하는 지금 여기의 장소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둘 중 누구도 제거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그 모두를 떠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이러한 사고는 우리가 흔히 ‘리메이크’라는 말에서 떠올리는 과거에 대한 부정과는 다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리메이크라는 말에서 지적하는 원형이란, 자신을 희생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재탄생의 신화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줌으로써 부분적으로 자기 원형을 발현시키는 부모자식 관계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부모자식은 명실상부한 동반자 관계이며, 부모의 보살핌이 있어야 자녀가 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는 점도 유사하다. 리메이크작은 원작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으며, 원작 또한 리메이크작이 잘 만들어질 수 있도록 옆에서 계속 지켜봐 주어야 한다. 이 대목에서 내가 언급하고 싶은 건 이러한 부모의 역할이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두 개의 갈림길로 나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아이에게 사회적인 보살핌을 주는 존재라면 어머니는 심리적인 보살핌을 주는 존재이다. 이는 어떠한 성적 고정관념이라기보다 아버지가 바깥에서 밀고 어머니가 안쪽에서 당겨줌으로써 균형을 찾는 양육의 문제에 더 가깝다. 리메이크의 사례로 보면 다음처럼 서술할 수 있을 테다. 어머니는 작품을 관람하는 이의 과거를 당겨주고, 아버지는 작품을 관람하는 이가 미래로 나아가도록 밀어준다. 둘 중 하나라도 균형이 맞지 않으면, 과거에 파묻혀버리거나 미래로 등 떠밀려 넘어지고야 만다. 즉, 여기서는 적절한 균형과 그에 이르기까지의 타협 혹은 과정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리메이크 작품을 관람할 때는, 이것을 원작과 나란히 놓고 비교하기보다는 그곳과 이곳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관찰하는 게 더 중요하다.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게 바로 이것으로, 리메이크작이 원작에 비해 얼마나 뛰어나고 빼어난지와 같은 기교를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작품 하나만을 놓고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리메이크작은 원작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으며, 기본적으로 이는 둘 사이가 혈연관계여서다. 이 글에서 내가 논하고 싶은 것은 그런 작품 중에 비교적 유대가 끈끈하다고 볼 수 있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신극장판이다. 먼저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90년대 후반에 크게 인기를 끌어 하나의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는 점에서 쉬운 공감의 대상이 된다. 이에 따라 <신극장판>도 오타쿠 사이에서 큰 주목을 받았고, 특히나 이는 원작을 관람한 채로 리메이크작을 관람하게 된다는 점에서 둘 사이의 간극을 평가하기가 쉽다. 그렇다면 둘 사이의 간극이 무엇인지를 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신극장판은 네 개의 파트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각각 서, 파, Q, 다카포이다. 이 중 서와 파는 원작의 내러티브를 따라가면서 서서히 변주가 진행되는 타입이고, 나머지 Q와 다카포는 본격적으로 신극장판의 오리지널 전개가 펼쳐지게 된다. 그래서인지 많은 에바의 원작 팬들은 Q를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기본적으로 이는 설명의 불친절함 탓도 있지만 자신의 옛 추억이 더럽혀지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작품 별개로 볼 때, 에바 <신극장판>의 내러티브가 그리 좋다고는 볼 수 없다. <신극장판>의 Q는 거의 기교에 가깝다. 그러나 좀 전에 말했듯이 우리는 리메이크의 정의를 과거를 유지하면서 현재와 동행하는 것으로 정의한 바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신극장판>에서 받은 충격은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 사이에 어떤 연속성이 성립하지 않으며, 이는 과거 없이 현재가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을 거역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흑역사’의 법칙이라 부르는 것, 우리가 아무리 상처받고 모났더라도 결코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대놓고 무시해버렸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신극장판>을 둘러싼 잡음은 오히려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면이 있다. <신극장판>을 관람한 원작의 팬들은 자신의 과거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작품 내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원작과 리메이크판의 결정적 차이는 주인공인 신지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고, 그에서 좀 더 나아간다는 점에 있다. 구 에바 시리즈에서 신지가 “나는 나야.”라는 식으로 자기합리화하며 세계와 함께 사라져갔을 때, 이는 자신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세계를 자신의 안쪽으로 처박아버리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않은 채, 그것들을 내면에 담아두기만 하면 세상이 좀 더 말끔해질 것이라는 자기희생의 논리였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것은 관객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작품이 해야 할 일이다. 


작품은 자신의 내면에 세계를 담아두고서 관객으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 이게 에바 구작의 결정적인 문제점이었고 이것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나 자신만큼은 바뀔 수 있지 않겠는가.”하는 자기부정의 논리였다. 겉으로 보기엔 정상적으로 보이지만 그렇게 해서 바뀐 나 자신이 ‘바꿀 수 없는 세계’의 견본으로 취급된다는 점에서 이는 부정적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바꿀 수 없는 세상이 존속하는 반면, 바꿀 수 있는 세상인 나 자신은 그대로 멸망해버리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신지는 죽고 세상은 서드 임팩트 이후로 나아간다. 행복한 세상이 열리지만 정작 그 세상에 나 자신은 없다. 이는 마치 우리가 위에서 “과거 없이 현재도 없다.”고 말했던 것처럼, 자신을 ‘흑역사’ 취급하며 말끔하게 잊어달라는 간언에 가깝다. 아마도 이런 기만이 에반게리온이 나왔던 20세기 말 당시에 크게 흥할 수 있었던 건, 사람들이 20세기를 막 떠나보내며 새로운 21세기를 맞이한다는 공감대가 있던 덕택일 것이다. 그런데 눈에 띄게 바뀌는 건 없었다. 오히려 역사가 반복되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2000년이 막 시작되고 일년 뒤, 미국에서는 역사상 가장 큰 테러가 발발했다. 세계는 다시금 1914년의 전조에 접어드는 것처럼 보였고 이는 국소적으로나마 현실이 되었다. 말하자면 신지가 자신을 희생해 만든 현재란 우리의 과거가 눈앞에 선명히 보이는데도 그냥 자신을 잊어달라고만 생떼를 부리는 것으로 느껴졌다. 


이후 2016년, 일본에는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이 등장한다. 이 작품의 내러티브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과거의 여자와 현재의 남자가 자리를 바꿈으로써 그들 사이의 공통된 미래를 새로 만들어낸다.” 여자는 이미 멸망한 과거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없는 상태의 미래를 살아간다. 반대로 남자는 이미 현재를 살아가고 있음에도 자신에게는 없을 과거를 그리워한다. 이때 양쪽을 원작과 리메이크의 관계에 놓고 보면 이 논의는 다소 흥미로워지는데, “잊어서는 안 될 사람, 잊어서는 안 될 풍경”이라는 작품 전반의 주제 의식이 그러하다. 시간을 넘어 이어진 둘 사이에는 깊은 망각의 골이 자리하는데, 작중에서 이는 거대한 재난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 재난은 기본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삭제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기억할 수도 없고, 탐험할 수도 없는 불가역의 상황을 만들어낸다. 어떻게 해야 두 사람은 서로와 재회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어느 한쪽이 희생되지 않고 나란히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이 작품은 원작과 리메이크 사이에 자리한 그런 단절의 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줄곧 탐구한다. 그 방법론은 과거를 잊지 않고서 온전히 그에 개입하는 것이다. 재난이 벌어지는 이토모리현의 미츠하는 자신이 잊혀져야만 비로소 타키의 현재가 성립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런 과거가 없다면 현재는 존속할 수 없기에 타키는 미츠하를 구하려 든다. 예컨대 타키의 이 행동은 단순히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다가서는 일에만 그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에반게리온 <신극장판>도 그런 길을 택한다. 구작에서 신지는 자신이 잊혀짐으로써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지만, 이런 사고에서 주변 인물과의 화해는 배제되어 있으며 따라서 이것은 자폐적이고 이기적인 태도이다.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것은 신지의 양친이다. 구작에서 신지는 자신의 어머니에 해당하는 에반게리온에 탑승해 세계를 바꾸는 선택을 한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와의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는데, 우리가 위에서 말했던 바를 따르자면 안쪽으로의 무한한 수축으로 볼 수 있을 테다. 그리고 이러한 수축은 그 응축의 지점에서 폭발한 후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지만, 정작 폭발의 당사자인 자신은 폭발 이후의 세계에서까지는 살아있을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에바 <신극장판>에서 신지는 아버지와 화해도 하고, 에바와 폭사하지도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아버지와의 화해가 먼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에반게리온의 <다카포>에서 신지는 자신과 동일한 기체에 탑승한 아버지와 전투를 벌이는데 기체 스펙이 같으니 싸움에 결판이 나지 않는다. 이에 이카리 신지와 그의 아버지 겐도는 다른 방식으로 싸우게 되는데 그게 바로 화해다. 이 장면이 흥미로운 건 에반게리온 기체가 겐도의 아내이자 신지의 어머니의 영혼이 담겨 만들어졌다는 점 때문인데, 신지는 어머니의 가호 아래 아버지와 화해함으로써 적절한 타협점을 찾았지만 겐도의 경우는 죽어버린 자신의 아내, 즉 그의 과거를 희생시켜야만 세계를 리메이크할 수 있었기에 밖으로 나갔다. 


결국 겐도에게는 진정한 의미에서 화해가 아니었을 수 있는데, 어쨌거나 신지에게 이는 진심으로 받아들여졌고 이야기는 다음 장으로 넘어가게 된다. 신지가 자신을 희생해 세계를 바꾸어 보려 할 때, 어머니의 몸과 영혼을 모방해 만들어진 아야나미 레이가 다가와 신지를 에바로부터 밀어낸다. 이를 통해 세계의 수축하는 힘은 온전한 힘으로만 남고 그에 대한 추진력으로 신지를 밖으로 밀어낸다. 이 대목에서 신지에게 부여된 건 앞으로 나아가고 전진하는 힘이며, 자신의 내면이 아니라 바깥쪽으로 힘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는 일종의 성장의 증표라 할 수 있다. 이전까지 고개를 숙인 채로만 지내던 신지가 수축하는 힘에 이끌리던 상태라면, 이 과정에서 아야나미 레이 클론의 죽음을 목격한 신지는 아버지와 대적하지 않으면 자신 또한 그러한 위치로 나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어머니의 힘이 마음에 대한 온전한 장악이고 아버지의 힘이 몸에 대한 완전한 장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과정에서 신지가 아버지와 육탄전을 벌이는 이유 또한 잘 설명된다. 구작의 신지가 마음이 결핍된 채 자기로만 남길 원했다면, <신극장판>의 마지막 다카포에서 신지는 단순히 에바와의 싱크로뿐만 아니라 그에 걸맞은 육체의 지위, 즉 의무감도 짊어지게 된다. 예컨대 원작에서의 신지가 마치 사춘기의 소년이 변화하는 몸을 따라잡지 못해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살아갔던 것과도 같았다면, <신극장판>에서의 신지는 끝내 몸을 따라잡는 일에 성공하고야 만다. 


마음이 있어야 몸도 있을 수 있다, 바꾸어 말해 과거가 있어야 현재도 존속할 수 있다. 우리는 위에서 배웠던 걸 여기에도 적용해볼 수 있을 테다. 몸이 마음을 제거하려 드는 일은 전적으로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이는 에반게리온에 먹혀버리면 그게 곧 세계의 멸망으로 이어진다는 극단적인 설정에서도 발견된다. 기본적으로 에바 파일럿은 에바의 육체를 조종하는 마음이었고 둘 사이의 협조적 관계를 바로 싱크로율이라고 우리는 불렀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오늘날 원작과 리메이크작 사이에 존재하는 대응 관계를 두고서 우리가 싱크로율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이고, 이는 주로 배우들의 얼굴이나 미장센적 디테일 등을 지적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곤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건대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의 과거와 미래 사이에 어떤 싱크로나이즈가 있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만약 마르크스의 말처럼 역사가 두 번 반복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과거에 겪었던 고통들을 다시금 떠올려야 하고 기억해야만 한다. 이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접속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기억이고 그렇게 해야만 다시 벌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에바의 신작에서 안노 히데아키가 보여준 극적인 변화는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세간의 추측처럼 아내를 만나 마음이 회복되었다는 작품 외적 추론에만 만족해버린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에바]를 끝맺음할 수 없다.


에바의 구작과 신작 사이에는 아마도 그러한 차이가 있다. 에바의 구작과 신작 사이에 생긴 극적 변화는 미디어 매체의 다시 보기 환경이 눈에 띄게 개선되었다는 점이다. 에바의 구작 시기에도 CD와 VHS는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화면을 얼려 그 안의 디테일한 면을 발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오타쿠 문화의 유희거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보급된 오늘날에 무언가를 멈추고 들여다보는 일은 굉장히 흔한 게 되었고, 암묵적인 불법 프로그램과 유튜브 클립 등의 존재는 같은 장면을 자의적으로든 아니든 간에 계속해서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여기서 파생된 문제는 어느 순간 미래가 예측되는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는 점인데, 작품의 클리셰가 너무 흔해서이든 아니면 다른 곳에서 파편적으로 클립들을 너무 많이 보아서든 간에, 오늘날 작품의 시작과 결말은 우리의 뇌내 속에서 감지되고 또 예지된다. 그리고 이런 예지 속에서 우리는 사건이 어디서 어떻게 진행되고 끝나게 될지를 미리 알면서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고, 대처할 수도 없다는 학습된 무기력함을 겪게 된다. 말하자면 미래가 고정되어 있다고, 이 운명의 타임라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묵묵하게 살아가는 것뿐이라고 여기게만 된다. 그러나 이게 과연 옳은 것인가. 신극장판의 마지막에서 신지는 아버지를 이겨내고서 단단한 몸을 갖게 되지만, 이것은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었을 때 이것은 단단해진 몸을 상징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미래가 더는 극적으로 바뀔 수 없음을 뜻하기도 한다.


아이가 성장해 어른이 된다는 건 상상력으로 인해 매번 변동하던 미래와는 달리, 어느 정도 안정된 상태로 고정된 미래를 향해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꿈도 희망도 제약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도 그렇게 되어버린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흔히 인간의 불안으로 바라보는 에반게리온은 오히려 <신극장판>의 종결을 통해서 비로소 새 이야기로 나아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열심히 달려갔더니 그곳엔 그저 해변뿐이었다고, 눈앞에 보이는 바다가 드넓은 미래를 상징하는 것만 같지만 사실은 어디로 가야 할지 잘 모르겠는 불안 섞인 자유를 상징한다고. 대략 이런 식의 감각이 우리에게 있다. 허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어른이 되어버리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든 어른에겐 어린 시절이 있다. 그리고 이 어린 시절을 잊어버리면 우리의 현재도 망각되고야 만다. 내가 여기에 왜 있는지도 모른 채 덩그러니 남겨져 버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과거를 잊지 않으면서도 그를 토대로 미래로 나아간다는 두 개 방향의 힘이 적절히 맞물려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삶의 균형을 찾을 수 있고, 더는 기억에 얽매이지 않은 채 진정으로 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해볼 수 있다. 물론, 어떠한 기억의 도움도 없이 나 자신으로만 존재하는 일은 몹시 불안할 테다. 하지만 이는 이제야 비로소 나 자신이 홀로 서게 되었음을, 즉 세계와는 관계없는 나 자신만의 고유한 내러티브가 시작되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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