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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22. 2021

"나는 여기에 살고 있는 게 아니야"

<에반게리온: 다카포>(2021)







<에반게리온: 다카포>(2021)보고 나서 글을 쓸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에반게리온이라는 브랜드 자체가 갖는 상징성은, 이야기라기보다 안노 히데아키 본인에 그 방점이 찍혀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에반게리온>은 작품이 작가를 대변하는 것이 되어선 안 된다는 말에 대한 ‘예외’였다. 평소에 우리는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난 순간부터 작가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왔지만, 안노의 이 영화에서만큼은 그 발언을 다르게 받아 들여야먄 할 것 같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이 홀로 세상에 서기까지의 과정은 봉준호가 <기생충>의 오스카 어워드에서 보여준 것처럼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다. 이 작품들은 영화 외적으로, 그러니까 배급이나 홍보와 같은 문제에서 감독의 전적인 지지가 필요하며 감독의 지지 없이 홀로 ‘어른’이 되는 작품 같은 건 없다. 쉽게 말해,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는 것과 그를 성장하게 해주는 이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영화를 만드는 이는 분명하게 감독이지만, 그를 성장하게 해주는 이는 감독이 아닐 수도 있다. 감독 자신이 버린 영화가 평론가나 관객의 손에 이끌려 어른이 되는 일이 허다하며, 어떤 경우에는 어른이 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유년기에만 머무르게 되는 영화도 있다.



*



다소 장황하게 이야기했다면 용서해주길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다카포>의 중간에 아스카가 말했던 바를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나는 여기에 살고 있는 게 아니야. 이곳을 지키려고 있는 거야.” 장소에 동화되어 사는 게 아니라 장소의 바깥 거주민으로써 안쪽을 지켜야 하는 아스카의 모습은, 마치 가상의 울타리를 상정하는 듯하다. 이 울타리는 에반게리온식으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AT 필드다. AT 필드는 마음의 벽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점에서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지만 공동체에 소속되어서는 안 되는 에바 파일럿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에바는 도시를 지키는 기구(apparatus)라기보다 그 과정에서 훨씬 많은 것을 파괴하는 대의이기 때문이다.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아스카와 신지의 태도는 이를 두고서 정반대로 갈린다. 아스카가 남아있는 것을 우선시한다면, 신지는 남아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말하자면 아스카가 ‘지키는 쪽’이라면 신지는 ‘살고 있는 쪽’이다. 그러나 영화 중간의 마을 시퀀스에서 내적으로 성장한 신지는 살고 있는 쪽에서 지키는 쪽으로 마음을 움직인다. 이 과정은 굉장히 비약적으로 이루어지지만, 단언하건대 여기서 중요한 건 더는 남아있어서는 안 된다는 모종의 전언일 것이다.



실제로 안도가 했던 말은 아니지만, 우리의 뇌리에 박혀있는 “에바에 타라, 신지.”라는 대사를 떠올려보자. 신지에게 세상은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떠야 하는 곳, 말하자면 긴급한 상황이기에 에바에 탑승해야만 하는 대의적 세상이다. 여기서 겐도는 신지에게 “어른이 돼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어른이 되라는 말은 대의를 위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어른이라는 뜻을 내포하는 듯 보인다. 왜냐하면, 겐도가 말하는 유년기의 세계는 외톨이였던 자신의 세계, 즉 아내를 만난 후 세계의 울타리 안으로 편입된 공동체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겐도에게 어른이 된다는 건 세계의 안쪽에서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 이른바 ‘1인분’의 몫을 해내는 것이다. 무릇 어른이라면 혼자서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은, 외부에 도움을 청하기보다는 자가생성하는 로고스의 논리를 따를 것을 아이에게 강요한다. 이 자가생성하는 로고스는 만물은 순환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전언, 아이는 어른이 되고 어른은 다시금 아이가 된다는 생명의 논리이다. 이는 실제로 겐도의 어른스러움이 사실은 죽은 아내를 보고 싶었을 뿐이라는 ‘어리광’이었다는 점에서도 증명된다.



하지만 어리광은 통하지 않는다. 에반게리온이 존재하는 세상은 에바에 탑승할 것이 강제되는 장소, 예컨대 어른이 되어야 함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사회이다. 이에 따르자면, 어른들은 언젠가 다시금 아이가 될 테지만 그럼에도 아이가 되는 일은 거부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어리광을 피우는 겐도의 모습은 어른이 되기 싫다고 말하는 신지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으며, 일종의 이형동질이다. 그렇다면 어리광이 통용되지 않는 세상에서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이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자신이 지켜주어야 할 울타리의 안쪽에 들어가 틀어박히지만 이들은 공동체에 소속되고자 하는 게 아니다. 그런 울타리를 지켜주어야 할 자신이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버렸으니 이제 울타리를 지킬 사람은 남지 않게 된다. <에반게리온: Q> 까지의 신지는 정확히 이 지점에 있었다. 그런데 <Q>에서도 그랬지만 <다카포>에서 신지는 낯선 세계로 이동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Q>에서의 경험이 눈을 뜨자 펼쳐진 수십년 후의 세계라면, <다카포>에서의 경험은 미래의 어느 낯선 곳처럼 보이는 공동체의 경험이다. 쉽게 말해 <Q>가 육체의 비약이라면 <다카포>는 영혼의 도약이다. 마찬가지로 <Q>의 사건이 육지의 생물을 꺼뜨리는 것이었다면, <다카포>의 사건은 생물의 영혼을 꺼트리는 것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여기서 떠올려보아야 한다.



이른바, <Q>가 육체와의 간극을 신지에게 부여한다면 <다카포>는 영혼에의 다가섬을 신지에게 부여한다. 다시 말해서 신지는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렸고, 이에 따라 영혼이 육체의 성장을 따라잡는 구도로 이야기는 전개되고 있다. 여기서 안노는 아주 친절하게 아스카의 입을 빌려, 신지에게 “내가 너보다 먼저 어른이 되어버렸다.”고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아마도 <다카포>를 메타적으로 바라본다면, 이 말은 아스카로 대변되는 에반게리온 프렌차이즈가 안노의 그릇에 비해 더 많이 흥행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할 테다. 하지만 작품 내적으로도 의미하는 바가 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그리움과 영원이라는 말을 혼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그리움은 “돌아가고 싶다.”는 감정이다. 하지만 이 감정이 지닌 뚜렷한 감정은 그것이 정말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알기에 생겨난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움은 실패를 전제로 한 감정이다. 그렇다면 이때, 그리움을 겪는 우리는 그런 실패가 정해진 미래를 어떻게 감수할 것인지와 같은 점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다카포>의 다른 제목이기도 한 <3.0+1.0>에서 후자의 ‘1.0’이 의미하는 바가 위의 문장에서 ‘하지만’에 대입되는 점을 말해두고 싶다. 이 ‘하지만(But)’이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접속 부사에 해당하지만 그 뒤에 무언가 접합되지 않는다면 부정형의 용태로 변형되는 특징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 “<태어나기는 했지만…>(1932).” 이 문장에서 ‘하지만’이라는 접속 부사가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오히려 주체를 세계에 접속시키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습은 <다카포>에서 신지가 자신을 희생해 울타리 안에 갇혀 있던 세계, 그러니까 ‘에바의 주박’에 갇혀 있던 세계를 에바가 없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The World)로 변환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예컨대 신지에게 ‘하지만’이라는 부사의 용례는 ‘나만’ 없으면 평화로운 세계에서 ‘내가’ 있어야 평화로운 세계가 된다. 물론 배제의 방법론을 사용한다는 점은 같다. 그러나 이렇게 뒤바뀐 배제의 방법론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수행하는 주체가 그곳에 그대로 자리해도 된다는 점이다. 즉,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정할 필요 없이 생각의 벡터값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다카포>의 전개는 안노가 에바 신극장판을 만들어야만 했던 이유가 바로 그러했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어리광을 담아 만든 <에반게리온> TVA는 너무 성공해버렸다. 그래서 그는 정신적 성장을 이루지 못한 채 몸만 어른이 되어버렸다. 십수 년이 지나 소환된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의 상황은 이 불합리함으로부터 시작한다. <에반게리온>을 끝내기 위해 신극장판을 꼭 만들어야만 했느냐는 물음은, 오직 <에반게리온>을 통해서만 이 시리즈를 끝맺음할 수 있다는 답변으로 이어진다. 이는 인과나 업보가 아니라 일종의 성장의 증표이다. 물론 하나의 프렌차이즈가 되어버린 에반게리온 시리즈에서 줄곧 안노 개인의 취향에 해당하는 다른 작품들의 오마주가 등장하는 것은, 확실히 이기적이면서도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나 <Q>에서부터 도드라진 이 경향은 작품 안에서 안노 본인의 반영인 신지와 그의 아버지인 겐도 사이의 관계를 통해 줄곧 암시되어 왔다. 겐도가 신지에게 “어른이 돼라.”고 말하면서 “어른의 몫을 해라.”고 선택을 종용할 때, 이는 ‘1인분’의 삶이란 것은 자기가 선택한 것은 자신이 책임지는 일, 바꾸어 말해 “자신이 선택한 것은 자신의 손으로 끝내야 한다.”는 시작과 끝의 순환 논리로 이해된다. 사실 <다카포>라는 음악 기호가 암시하는 속뜻이 그렇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신지의 성장은 단순히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유년기에서 출발해 다시금 말년의 유년기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즉 신지는 어른의 과정을 훌쩍 비약해버린 것이다. 여기서 내가 관심있는 건 그렇게 비약해버린 과정이 어떤 면에서는 세기의 대폭발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먼저, <Q>의 오프닝이 주었던 충격은 신극장판을 보았다면 그 누구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일 테다. <Q>는 어떤 일이 터졌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았고 이는 마치 고도의 블러핑(Bluffing)처럼 보였다. 하지만 세상은 정말로 망했다. 이들에게 신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지금을 있게 한 요인이었다. 하나는 사도로부터 세상을 구했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임팩트를 일으켰다는 점이었다. 말하자면 과거로부터 만들어진 현재와 미래로부터 만들어진 현재가 공존하는 자리가 바로 신지였고 그래서 그는 모종의 영원과도 같은 것이 되었다. 여기서 영원이라는 말은 끝없는 현재를 의미한다. “언젠가는 끝날지라도 최선을 다해 현재를 살아간다.”고 말하는 마을 사람들의 말은 그들의 미래가 이미 한 점으로 고정되어 있으므로 되려 현재의 지속성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 예컨대 이곳에서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조류가 합쳐지는 지점에서 만들어진 울돌목과도 같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소용돌이에 빠진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영화가 신지의 마음을 바꾸어놓고 나면 이 논의는 변화한다. 닫혔던 영원이 끝난다.



여기서 신지가 해야 할 일은 영원한 현재를 지속하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제물로 바쳐 완전히 새로운 현재로 나아가는 일이다. 즉, 전자의 경우가 안으로 뒤집는 양말이라면 후자의 경우는 밖으로 뒤집는 양말이다. 양말을 밖으로 뒤집을 때는 안쪽에 있는 것이 밖으로 배제됨으로써 그 안의 것들이 해방된다. 여기서 아스카는 죽음을 맞이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라지 않는 육체로 자라버린 영혼을 힘들게 견인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 신지의 멈춰버린 정신 상태는 아스카의 멈춰버린 육체 성장에 비견될 수 있어 보인다. 물론 순서상으로 볼 때 후자가 먼저일 것이다. 두 사람은 십수 년 전의 같은 현장에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전자를 먼저 이야기한 것은 안노가 에반게리온 시리즈에 걸쳐 줄곧 말해왔던 것이 오타쿠의 문제의식이어서다. 안노는 오타쿠들을 영원한 존재로 생각했다. 영험하다거나 신적이라는 게 아니라, 줄곧 유년기를 살아간다는 뜻이다. 이들에게 그리움이라는 단어는 오타쿠 문화가 제공하는 몇몇 대리 형상들을 통해 실체화되기에 적절한 방법으로 해소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해소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움은 해소되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를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다카포>는 그리움을 닫는 장이다. 이제 위에서 말했던 아스카의 말은 다음처럼 이해되어야 한다. “나는 여기(*그리움)에 살고 있는 게 아니야. 이곳(*그리움)을 지키려고 있는 거야.” 그리움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리움을 지키고자 한다는 아스카의 말은 이미 어른이 되어버려서 오타쿠 문화에서 손을 뗐지만, 그럼에도 유년기의 추억만큼은 남겨두려 하는 어른들의 모습에 적용된다. 이들은 돌아갈 수도 없지만, 구태여 돌아가려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어딘가에 올라타야만 하는 이들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다카포>는 에반게리온 시리즈와의 이별이다. 안노 개인에게도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 시대와의 이별이기도 하다. 네온 제네시스, 그러니까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라는 이름이었던 TVA 판은 명실상부하게 21세기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들은 20세기의 끝자락에서 21세기의 초입을 가리켰고 여기서 20세기는 슬픈 기억들로 얼룩져있었다. 그러나 안노는 20세기의 끝자락에서 21세기로 넘어가지 않았었다. 오히려 그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더욱 늘려놓았다.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이 TVA의 마지막 2개 화를 시간적으로 늘려놓은 불릿 타임의 한 타입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안노의 이 선택은 의미심장하다. 끝나야만 할 시간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 이 얼마나 섬뜩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인가?



이 대목에서 나는 “폭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말을 떠올리고 있다. 이 말은 두 개의 측면을 지시한다. 첫 번째는 한 번 일어난 일은 얼마든지 또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임팩트는 세컨드, 서드, 니어 서드, 포스, 파이널 등에 걸쳐 여러 번 일어났다. 두 번째는 우리가 이미 폭발 이후의 세계를 살아간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은 빅뱅이라는 이름의 최초의 폭발이다. 이 폭발이 한 번 일어났기에 다시 한 번 일어날 수 있다면, 이들이 처한 상황은 얼마든지 또 뒤바뀔 수 있지 않은가? 신지가 일으킨 파이널 임팩트가 완전히 망해버린 세상을 가장 선명한 긍정의 세계로 바꾸어 놓았듯이 말이다. 겐도의 말처럼, 오히려 임팩트가 벌어지지 않았다면 임팩트 없는 세상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임팩트가 벌어졌기에 임팩트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최초의 폭발이란 개념이 왜 중요하고, 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에바에 타라’는 최초의 말이 에바에 타지 않아도 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사는 게 아니라 지키는 것이라는 말은 더는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세계의 창조로 나아갔다.



여기서 사건이라 부르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몇몇 폭발의 순간과 그로 인한 강제적인 성장을 떠올리게 하는 듯하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몇몇 일들이 있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한차례 어른에 다가선다. 다른 한편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어른-되기를 강요한다. 여기서 유년기는 그리움의 대상이다. 우리는 어른이 된 이상 유년기로도 돌아갈 수 없다. 이때의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울타리 밖에서 그것을 관망하는 것뿐이다. 유년기를 마음의 벽으로 밀어내지 않으면 어른이 될 수 없다고 우리는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렇게만 어른이 되기만을 강요한다면 우리가 사는 지긋지긋한 현실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지켜야만 하는 대상으로만 볼 게 아니라, 마음의 문을 열고 그리움과 하나가 되는 게 바로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안노는 말하는 것 같다. <에반게리온>의 세계에서 마음의 벽은 강해질수록 강한 출력을 내지만 정작 그것을 운용하는 파일럿에겐 마음의 벽을 강화하는 역효과를 낳았었다. 이제 중요한 건 이 마음의 벽이 유년기를 격리하는 게 아니라, 온전히 과거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음을 보증하는 일로 바라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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