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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14. 2021

<진격의 거인> 결말에 대한 단상

진격의 거인 139화 ©학산문화사


1.


지난 4월 초, <진격의 거인>의 마지막 화인 139화가 공개되었을 때 세간은 떠들썩해졌다. “학살자가 되어줘서 고마워.”라는 문장이 만화의 중심에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를 좋게 바라볼 수 없음이 분명해 보였다. 전 세계의 80퍼센트를 죽였다는 사실 앞에 놓인 이 문장은 학살의 행위를 아주 확실하게 긍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야기 전체를 놓고 보면 대략 어떤 맥락으로 이런 말이 나오게 되었는지를 추측해볼 수는 있다. 에렌은 사람들이 자신을 죽임으로써 거인의 힘이 사라지기를 바랬고, 아르민의 해당 발언은 에렌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을 테다. 하지만 ‘고맙다’라는 말이 과연 존중의 의도로만 사용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고맙다고 말할 때는 당사자의 수고를 인정함을 전제하는데, 여기서 수고란 당사자가 어떤 의도로 그 행동을 했고 그로 인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고맙다’라는 말은 상대방의 행동과 처지를 ‘이해’한다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과연 에렌의 행동은 이해될 수 있을까? 존중한다와 이해한다는 말은 확실히 다르다.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건 ‘이해하긴 어렵지만 당신의 의견을 인정한다’는 냉소적인 태도이고,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건 ‘당신의 의견에 동감하기에 받아들일 수 있다’는 보다 적극적인 태도이다. 정리하자면 존중은 냉소이고 이해는 연민이다. 여기서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에렌의 태도에 대해 아르민이 연민이 아닌 냉소를 보여주었어야 한다는 점이다. 에렌의 태도를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역사상의 모든 학살극을 인정해버리는 게 된다. 에렌의 태도를 두고 히틀러보다 더하다는 비판이 나오는 건 그런 맥락이다. 누군가 에렌을 이해한다고 말할 때, 에렌의 행동은 우리 세계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그 발언을 한 이는, 세계에 학살극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우리는 냉소 또한 반대해야 해야 하는데, 페터 슬로터다이크가 말했듯이 냉소주의란 ‘계몽된 허위의식’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연민보다 냉소가 더 나쁠 수도 있다. 냉소주의는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순응”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생각해봐도 다른 좋은 선택지가 없었고, 따라서 당신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라는 아르민의 말은 연민이 아니라 냉소에 더 가깝다. 예컨대 이 문제는 이해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상대방에게 이해를 요구하거나, 이해한다는 뜻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에렌의 행동은 이해가 아니라 인정의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사실 만화 전체가 이해보다는 인정을 다루고 있기도 하다. 아르민을 비롯한 온건파는 폭력은 대화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세계에 두 세력이 공존할 수는 없었다. 마레는 에르디아를 인정할 수 없었고, 에르디아는 마레를 인정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도 인정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서 예거파는 온건파들이 정권을 장악하고도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비판하는데, 적어도 냉소주의를 따른다는 점에서 이들은 별반 다를 바 없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냉소주의자들이 자주 하는 말 중 하나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이것 말고는 정말로 대안이 없고, 그래서 그들의 선택은 합리적으로 지지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주변 사람들은 냉소주의자들을 이해하려 드는 게 아니라 인정해야 한다고 다짐하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그들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해의 대안으로 인정을 사용하는 일은 옳을까. 이해하지 않아도 좋으니 인정이라도 해달라고 호소하는 일은 오히려 상대방을 냉소주의자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냉소주의자들은 자신과 상대를 속인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진정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감추며 거짓 위로를 전한다. 이들의 냉소는 그들이 세계에 녹아들기 편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이지만,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반사회적이다. 그래서 냉소주의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또 다른 냉소주의를 낳는다. 우리는 이들을 받아줄 자신이 없어서 그냥 인정해버린다. 요컨대 설명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것에 도전하는 일은 또 다른 ‘이해불가함’으로 이어진다.


냉소주의자들은 세상이 이해되지 않는 곳이라고 말하면서 애초에 이해하기를 포기하는데, 이는 <진격거>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잔혹함에 대한 주된 옹호의 논리이기도 하다. 세계는 잔혹하다는 말이 그것이다. 만약 벽이 개인의 인지적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벽 밖에서 들어온 거인의 얼굴은 명실상부한 ‘이해불가함’의 모습이다. 따라서 이들이 이해불가함을 맞닥뜨리는 일은 세계에 대한 냉소주의를 유발할 수밖에 없다. 이들에겐, 거인을 죽이는 것에 별다른 이유가 없어야만 사태는 해결될 수 있었다. 시즌 1과 2에서 이들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세계의 한계를 생각하기보다 세계의 종말을 생각하는 것에 더 몰두했었고, 이곳에서는 종말을 상상하는 일이 곧 사회적인 일이었다. 이들 사회는 종말을 중심으로 통제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해불가능한 것들이 사라지고 나자 종말은 이해가능한 문제가 된다. 종말이 이해가능한 것이 되고 되려 외부세계야말로 진정으로 이해불가능한 곳이라는 걸 깨닫는다. 종말을 연민하는 이들과 외부세계를 냉소하는 이들은 이렇게 탄생한다.


만화는 계속해서 온건파의 손을 들어주려 하지만, 종말을 이해하려드는 일이 정말로 가능한지는 의문이다. 종말을 이해하는 자가 곧 종말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들은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본 것이다. 이들조차 그들 자신의 시도에 의문을 품는 상황에서 연민이란 것은 결국 자기기만의 다른 형태인, 냉소주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온건파의 종말에 대한 연민과 예거파의 외부세계에 대한 냉소는 사실 크게 다를 바 없는 생각이다. 둘은 냉소라는 점에서 서로를 똑 닮아있다. 한쪽은 대화의 가능성에 대해 자신을 속이고 있고, 다른 한쪽은 평화가 불가능하다는 점으로 자신을 속이고 있다. 결과적으로 139화에서 에렌과 아르민이 나누는 대화는 양쪽 다 냉소의 측면으로 세상을 바라봐버리는 것인 셈이다. 에렌은 자신이 이해받을 수 있다는 냉소를, 아르민은 에렌을 이해할 수 있다는 냉소를 저질러버렸다. 적어도 이들이 침묵으로 일관하기라도 했다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자신을 속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무능함과 잔혹함을 인정해버리는 게 더 나으니 말이다.


2.


에렌 예거=히틀러라는 극단적 비유로부터 출발해보자. 학살자가 되어줘서 고맙다는 말은 정말로 쓰레기 같은 말이다. 학살은 이해되어서는 안 되었고, 그 말 뒤에는 어떤 설명도 붙어서는 안 되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학살극은 이해불가능한 것이기에 설명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우리는 이를 ‘에렌해버렸다’라는 고유명사로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에렌에게 아르민이 한 건 자기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면서 일단은 꺼내버린 정신병 같은 말이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고맙다’와 ‘이해한다’라는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들은 큰 우를 범하는 것이다. 차라리 에렌을 그냥 있는 그대로 그려냈다면 별다른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에렌을 설명할 수 없는 이로 설정했던 게 다름 아닌 만화 자신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진격거> 1기에서 에렌이 최초의 거인화 이후, 조사병단에게 심문받던 장면을 떠올려보자. 인간인지 거인인지를 묻는 이 장면은 에렌 자신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마치, 그들로 하여금 에렌을 이해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두고서 판단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후 거인화 가능한 인간들을 그려내는 이 만화에서 거인이라는 건 도덕적 판단 기준처럼 변모한다. 파라디 섬에 거인들이 사라지고 나면, 거인들을 만들어내는 ‘씨’를 제거하는 게 이들 세계의 주된 목표가 된다. 일종의 개념 말살형을 집행하려 드는 셈이다. 문제는 한번 개념이 도출되고 나면 그 이전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생각해보자. 우리가 핵을 두려워한다고 해서 핵이라는 개념 자체를 지워버린다면 그것만으로 평화가 쟁취되는 것일까? 우리는 핵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핵이 무엇인지는 모르는 세상을 살고 있다. 왜냐하면, 핵을 사용하면 모두가 끝장이라는 걸 알고 있고, 그래서 다들 핵의 존재를 쉬쉬하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 거인이라는 개념이 사라진다고 해서 이들 세계가 평화를 맞이하지는 못한다. 잠재적 위협에 대한 각인은 이들의 무의식에 남아 끊임없이 세계의 파멸을 가속하고, 또 각인시킨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퇴치되지 않는 괴물이듯 말이다. 그런데 결말지점에서 에렌은 거인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에렌은 과거와 미래에 동시에 존재하는 시조 거인이라는 점에서 사람들과 다른 시간선에 서 있는 인물이다. 이는 에렌이 거인의 힘을 지우려 했던 건 그런 시간관에 영향받았기 때문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과거와 미래 모두를 현재로써 느낀다면 에렌에게 거인을 지우는 일은 곧 세계 전체를 구원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역사에서 거인은 언제나 ‘현재적 위협’이었으며, 이는 그들이 사는 현대까지 줄곧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요컨대 에렌에게 거인을 지운다는 건 모두가 끝장일 수 있는 현재를 살려내는 일이다. 미래와 과거 모두를 없애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냥 살아가도록 만드는 일이다. 반면에 에렌을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 거인은 현재에 사라진다고 해서 과거와 미래에서도 사라지는 게 아니므로, 어쨌거나 줄곧 거인이라는 개념의 형태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거인을 지운다 해도 그들에게 거인은 여전한 위협이다. 아마도 비극은 이런 이해의 차이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르민의 말처럼 대화를 통해서 해결할 수는 없었을까?


에렌을 이해받을 수 없는 당사자로 그려놓고서 그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예거파가 말하는 것처럼 ‘대화만능론’의 국면으로만 흘러갈 뿐이다. 물론 대화는 충분히 도덕적인 행위다. 세계 어디를 가도 범죄자에게도 소명의 권리를 준다는 점을 보면 그 사실을 잘 알게 된다. 그러나 소명의 권리가 있다면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도 있다. 말함으로써 불리해지는 게 있다면 말을 하지 않는 게 더 낫다. 이해받을 수 없는 일을 설명하는 건 입이 아플 뿐이기도 하거니와, 침묵은 동의 혹은 거부라는 둘 중 하나의 선택지를 강요하지 않기에 오히려 발화보다 더 나을 수 있다. 바꾸어 말해, 대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선택지를 막아설 뿐이지만, 서로에게 침묵한다는 건 많은 선택지 앞에서 무언가를 택하기를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행여나 양측의 의견이 잘못 조합될 경우 이 폭탄이 터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가 어떤 말을 꺼낼 때는 필수적으로 찬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곤 하므로, 어떤 면에서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평화의 길이 될 수 있다.


냉전 시기에 미국과 소련은 침묵함으로써 전쟁을 피했다. 무언가에 목소리를 낸다는 건 전쟁하는 것과 전쟁하지 않는 것을 택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이들은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는 물밑 작업을 통해 대화했다. 여기서는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부분적으로 사실이다.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보다 이해하지 않는 일이 더 쉽다. 이런 이해불가능함을 도구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그래서 흔하다. 예를 들어 쿠엔틴 타란티노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나 게임 <울펜슈타인> 시리즈에는 나치가 적으로 나오는데, 이 덕분에 주인공이 얼마나 잔혹하게 적을 다루든 우리는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 이들은 ‘죽어도 싼’ 것들이니 말이다. 이 사람들이 나쁘다는 점에 그 어떤 의문도 없기에 우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이들을 죽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절대악’은 작품 내에서 주인공의 어떤 면모를 보여줄 요령으로 설정하는 서사적 장치로 사용되곤 한다. 이 경우에는 외부 세계가 아니라 주인공의 내면세계에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이다. 바깥을 이해할 필요가 없으니 그에 사용될 연산능력을 주인공을 이해하는 것에 쓴다고나 할까.


그런데 만약 이해불가능한 것들을 이해하려 든다면 이때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사실은 착한 놈이었어”라던가 혹은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라는 말 말이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건 쉽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이 문제 또한 쉽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재판에 참석해 그에 대한 수기로 악의 평범성을 저술했을 때 이 사실이 증명되었다. 이 사람들은 ‘너무나도’ 평범해 보여서 그들이 정말로 했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평범하다는 건 그냥 평범한 것일 뿐 그 어떤 것도 증명해내지 못했다. 우리는 평범함의 기준에 대해 물어야 했고, 이내 그들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충격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에렌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충격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에렌의 선택도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너무나도 어려운 도덕적 문제를 ‘고맙다’라는 이해의 한마디로 포함해버리면 안 됐다. 이 결말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는 작품 안이 아니라 밖에서 판단되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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