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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Nov 24. 2021

만화를 보며 현실 정치를 생각한다

<진격의 거인>의 사례


*콜리그에 투고한 여덞 번째 글이다.

https://colleague.co.kr/forum/view/592462


만화를 정치 소재로 삼는 것은 여러 면에서 문제가 된다. 해당 정치의 성격에 만화의 이미지가 종속되어버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 소재를 만화에서 찾아내는 일은 여러 면에서 흥미롭다. 전통적으로 하위문화(Subculture)란 주류문화에 대항하는 성격의 것으로 이해됐고, 이에 따라 하위문화는 주류문화에서 가려진 것들을 보여준다. 즉 만화를 서브컬처라고 가정할 때, 우리는 현실 정치의 나머지 부분을 다룰 능력을 얻게 된다. 따라서 나는 “만화를 보며 현실 정치를 생각한다.”는 점을 주제로 삼아보고자 한다. 이러한 행위는 만화의 이미지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서브컬처 안에서 현실 사회의 정치를 발굴해낸다는 점에 더 큰 의의가 있다.


그렇다면 만화를 보며 현실 정치를 생각하는 행위 자체가 타당한지를 검토해야만 할 것이다. 아마도 만화 일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상상력을 극단으로 몰고 간 매체가 아닐까 한데, 만화는 상상력을 전량 발휘하기에 현실에서 풀어놓을 수 없는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는 그들의 논의가 어디까지나 만화 안으로만 한정될 뿐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만화를 보며 현실 정치를 생각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탁상공론에 불과한 것처럼 여겨져 왔다. 만화와 현실 사이에는 뚜렷한 벽이 있으며, 그게 아무리 기발한 생각이라 한들 ‘벽’을 넘어올 수는 없다고 말이다. 헌데 이런 점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만화적 상상력’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만화라는 매체를 하나의 방어 수단으로 삼았다. 만화를 보며 현실 정치를 생각했지만, 정작 현실 정치가 만화에 손을 내밀 때는 ‘만화’라는 매체의 상상력을 방패 삼았다.


이런 일이라면 결국 만화를 핑계로 자기가 할 말만 하는 것뿐이다. 정치라는 게 결국 잘살아 보자는 의지의 표현이기에, 이런 태도를 막연하게 비난하지만은 못하겠다. 그러나 이런 이기적인 태도가 과연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길인지는 의문이다. 만화 매체의 상상력을 극단으로 밀고가서 현실을 살려보겠다는 말은, 오히려 그 상상력에 삼켜지는 여러 현실을 간과한다는 한계점이 있다. 즉, 만화를 보며 현실 정치를 생각한다는 말은 “현실에서 바라본 만화의 입장”을 참고하는 것이지, “만화 속에서 현실을 갈구한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


“만화 속에서 현실을 갈구한다.”의 사례로는 올해 초(2021)에 유행했던 ‘문크예거’ 밈이 있다. 문크예거 밈은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이 만화 <진격의 거인> 속 캐릭터 ‘지크 예거’의 행보와 닮았음을 지적하며 시작되었다. 물론 이 주장은 어디까지나 해당 밈으로써만 통용된 것이고 실제로 그런 내용은 아니다. 이 밈은 소위 이대남이라 부르는 세대에서 유행했는데, 그들은 만화 속 상황이 자신들의 처지와 닮았다고 말하며 이 밈을 지지했다. 이 만화가 일본에서 나왔고 지금의 한국 상황과는 하등의 상관도 없다는 점은 별 상관없이, 그들이 만화 안에서 발견한 몇몇 사실들이 지금 그들의 처지처럼 보인다는 점이 더 중요했다. 즉 그들은 만화 속에서 그들의 현실을 발견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만화의 결말이 바로 그들의 현실이 될 것이라고 미리 현실을 예측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이대남들의 현실은 무엇인가? 여기서 현실이라 함은,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 세계가 아니라 문화적 인식을 토대로 구성된 상상적 공간을 뜻한다.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발효된 만화적 상상력의 현실 말이다. 즉, 이들은 자신들이 지닌 상상력의 한계치가 바로 멸망이라고 생각했다. 멸망이라는 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사건의 지평(Event horizon)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인터넷을 하나의 방어 수단으로만 사용했다. 그 자체로 거대한 가상인 인터넷 공간에서는 어떤 종류의 상상력도 허락된다고 말하면서, 만화적 상상력을 인터넷 안으로 끌고 왔다. “이런 세상 따위 망해버려라”고 저주하면서도, 정작 저주의 책임자로는 문재인 정권을 지목했다. 후술할 내용에서 이어지겠지만 이러한 사고는 오늘날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현실이 되어가는 것에 반해, 만화라는 공간은 더욱더 상상적으로 변해가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오늘날, 대피처라고 할 만한 것은 인터넷 커뮤니티가 아니라 만화가 되었다는 소리다.


먼저 인터넷 공간에 대해 말해보자. 인터넷은 오늘날 그 무엇보다 현실에 기반한 매체이다. 메타버스와 같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터넷은 여러 현실을 모아주는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이 인터넷 안으로 끌고 온 만화적 상상력은 단순히 현실 정치에 대한 시도에 불과한 게 아니었다. 그러한 만화를 자신의 현실로 삼아버림으로써 외부 세계와는 완전히 선을 끊어버리겠다는 단절의 신호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문크예거’ 밈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사실이 있다면, 이것이 건전한 정치 의사의 표시가 아니라 그냥 모든 것을 체념한 채 무기력함만을 유지하는 ‘자포자기’의 상태라는 점이다. 마치 핵 방공호로 대피해 죽음만을 기다리는 피난민처럼, 세상을 바꾸어볼 수 없다는 무기력함이 현장을 지배한다. 그들은 선대 파라디왕의 말처럼, 잘못을 저지른 자신들은 이 섬에 갇혀 멸망해야 하며 그 전의 짧은 시간 동안만 편협하게 허락된 평화를 맛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대남들의 생각은 아마도 이런 것일 테다. [역사상 가장 살기 좋은 시대라는 오늘날이 바로 우리들 최후의 순간이라고, 이 최후의 순간은 우리들의 선대가 잘못했기에 주어진 것이고 젊은 우리들은 그런 숙명을 받아들이며 절멸을 맞이해야만 한다고. 이윽고 마침내, 이대남들이 사라지고 나면 세상은 비로소 평화로워질 것이며 나머지 국민들은 평화롭게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이 말을 읽고서 어딘지 모르게 과격하다는 느낌이 든다면 착각은 아닐 듯한데, 이 생각은 만화에서 지크 예거 사상의 핵심축을 이루기 때문이다. 만화에서 지크는 말한다. “이 세상에서 에르디아인을 한 마리도 남김없이 없애는 것, 그것이 전 인류의 소원이라고.” 지크의 목적은 시조의 거인의 능력을 취해 모든 에르디아인을 불임으로 만드는 것이며, 이 생각은 업보를 등에 진 채 살아갈 바에는 차라리 세계에서 배제되어 버리자는 자멸의 논리를 따른다. 즉, 문제의 원인은 에르디아인이라는 민족 자체에 있으며, 이것은 사회적이거나 지리적인 면이 아니라 유전적 단위로 각인된 것이므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라면 배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유전자 단위로 민족을 개조해서 민족의 재생산을 막는다는 말은 확실히 현실과는 괴리가 있다. 이른바 만화적 상상력이기에 현실을 초과하는 범주에 있고, 그래서 과격하게 느껴질 수 있다. 문제는 만화 속에서 에르디아인 전체를 대상으로 하던 이 말이, 이대남들에 와서는 그들 자신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즉, 대한민국을 하나의 국민으로 보는 게 아니라 이대남이라는 특정 그룹 군을 범주화하려는 시도가 여기서 발견된다. 이에 따르자면 이대남이라는 카테고리는 일종의 유전적 단위로써, 태어날 때부터 바꿀 수 없는 각인의 논리를 따른다. 바꾸어 말해 이대남들은 이대남이라는 말을 일종의 유전적인 면으로 바라보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신들 스스로를 그렇게 바라본 게 아니라, 외부 세계에서 이들을 유전적으로 다른 타자로 지칭하였고, 이것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한 결과가 바로 이대남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대남이라는 말은 우리가 ‘이대남’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심리를 분석할 때 그다지 적합하다는 볼 수 없다. 이 말은 우리 쪽에서의 표현이니 말이다.


그들의 측면에서 볼 때, 이대남이라는 말은 만화적 상상력을 현실에 대입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이는 “만화 속에서 현실을 찾는” 게 아니라 그들이 찾아낸 것(이대남)을 현실로 가져와 버렸다는 점을 뜻하기 때문이다. 즉, “만화를 보며 현실 정치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들도 만화(이대남)가 결코 현실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만화를 보며 현실 정치를 생각한 것이고, 오히려 이대남이라는 정체성을 현실 정치의 수단으로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따라서 ‘나만 사라지면 세상이 평화로워진다’는 발상은 오히려 실현 가능한 목표로 설정된 게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이 목표는 “이런 세상을 과연 누가 만들었는가?”라는 의문에 답할 요령으로 설정된 것이며, 그 원인으로 지목된 게 바로 문재인 정권이라고 보는 게 옳다. 말하자면 문크예거 밈은 현실 세계에서의 절멸과 밀접하게 연결된 사회적 현상이 아니라, 만화를 보며 현실 정치를 생각한다는 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문화적 상상력에 더 가깝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더는 대피처로 사용될 수 없는 현실에서는, 만화야말로 가상의 정체성을 상정하고 이를 토대로 사건을 진행할 수 있는 무대가 되는 셈이다.


헌데 그렇다면, 만화적 상상력을 끌고 오는 공간은 왜 인터넷이 되어야 했을까. 위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인터넷을 두고서 일종의 대안 현실(alternative reality)이 되어간다고 말했었다. 이에 따르자면 문크예거 밈은 대안 현실에 상상력을 끌고 옴으로써 일종의 사고 실험을 진행해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당연하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으니, 만화적 상상력을 대안 현실인 인터넷에 수입하여 자신들의 대안적 정체성에 학대를 가해보려는 것이다. 여기서 해석은 두 갈래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이것을 현실에 가져오기 전에 미리 실험을 진행해본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어차피 현실 세계에서는 순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으므로 가상 세계에서라도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해보겠다는 점이다.


내가 지지하는 건 후자이다. 문크예거 밈을 유통하는 측의 태도는 절대 악이라기보다 처연함에 더 가깝다. 그들은 만화와 현실 사이에는 뚜렷한 벽이 있으며, 그게 아무리 기발한 생각이라 한들 ‘벽’을 넘어올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쉽게 말해 실현 가능성이 없으니 아무 말이나 막 질러보자는 뜻이다. 이렇게 써놓으면 정말로 악당처럼 보이는데 우리는 이를 다음처럼 생각해볼 수도 있다. “어차피 안 된다면, 뭐라도 해보자.”고. 이는 “만화를 통해 현실 정치를 생각한다.”는 말의 의미가 일종의 관조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현실에서는 할 수 없는 사고가 가능한 공간이 만화적 세계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만화적 상상력이 아니라면 사고의 도피가 불가능한 이들이 문크예거를 찾는다. 즉, 더는 대안이라고 할만한 걸 떠올릴 수 없이 고착화된 현실에서 어떠한 돌파구를 찾으려 하기보다는, 그냥 현실에 평범하게 순응하고서 시대의 흐름에 파묻혀버리겠다는 사고인 것이다.


*


이쯤 되면 <진격의 거인>이라는 만화가 궁금해진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만화의 주요 이야기는 평화를 갈구하던 이들이 사실은 스스로가 세계를 평화롭지 못하게 한 원흉이라는 걸 깨달음으로써 시작한다. 오래전 에르디아인들은 거인의 힘으로 세계를 정복했으나 모종의 이유로 패배했고, 이에 파라디섬으로 후퇴해 벽을 세운 상태가 만화의 시작점이다. 이후 시간이 흘러 본래의 역사는 잊혀지고 에렌의 시대가 시작된다. 처음에 에렌 예거는 벽 안의 위협을 모두 없애고 나면 벽 밖으로 나가 자유를 맛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들이 벽 밖으로 나갔을 때, 벽 안의 위협은 아직 잔존한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건 바로, 에르디아인 자체가 바로 세계의 위협이며 이들이 벽 안에 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는 점이다. 파라디왕은 자신들의 죄가 너무 커서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 말고는 사죄의 방법이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에르디아인을 서서히 절멸시키고자 벽을 세우고는 그 안에 틀어박혀 고사를 택한 것이었다.


위에서 만화와 현실 사이에는 벽이 있다고 말했던 걸 떠올려보자. 파라디섬이 에렌의 현실이라면 섬 바깥의 풍경은 일종의 인터넷이라 할 수 있다. 파라디섬 사람들은 인터넷에 접속함으로써 여러 정보를 얻게 되며 그중에는 비교적 충격적인 것도 있다. 이때 그들이 마주한 역사적 진실이란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이어서 일종의 ‘만화’처럼 여겨진다. 이들에게 파라디섬 너머의 마레 제국은 모든 진실이 모이는 현실이었지만, 자기들의 선조가 저지른 역사적 과오는 터무니없게만 들렸다. 그래서 작중에는 이 만화적 상상력이 자기들의 현실과는 별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나온다. 잘못을 저지른 건 선조인데 대가는 우리가 왜 치러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만화를 보며 현실 정치를 생각한다는 건, 만화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수단을 강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고로 작중에는 수단을 강구하는 두 명의 인물이 나오는데, 그게 바로 에렌 예거와 지크 예거다.


에렌이 섬 밖 전부를 초토화하면 자기들의 삶은 계속될 수 있다고 믿는 반면, 지크는 섬 안을 초토화해야 자기들의 삶이 완성된다고 믿는다.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이 우리밖에 없다면 그 역사는 대외적으로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고, 에렌은 믿는다. 그러나 “이런 세상 따위 망해버려라”고 자조하는 일은 정작 그들을 기억해줄 세상이 없을 때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세상이 망한다는 건, 우리가 그 세상을 이미 살아간다는 점에서 세상이 망한 것을 볼 수 없는 우리 자신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현실 인식에는 이런 벽이 있고, 그런 벽을 넘을 수 없다면 차라리 벽 안에서 말라 죽어가는 게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 는 게 지크의 생각이다. 이렇게 되면 적어도 자기 자신만큼은 확고하게 제거될 수 있고, 이는 개인이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능동적인 행위에 해당한다. 자살 말이다.


자살이야말로 자신이 아니라면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가장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행위이다. 자신을 비춰볼 세상이 없다면 자신을 규정하는 여러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만, 그게 안 되니 자살을 택한다. 이런 측면으로 보면 문크예거를 일종의 사회적 밈으로 전유하는 이대남들의 태도는 오히려 이것이 ‘만화’임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하는 듯 보인다. 벽을 넘을 수 없거나, 넘어서는 안 된다는 지크의 말은 만화가 왜 현실에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가, 혹은 왜 참여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호응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문크예거 밈을 두고서 어떤 말을 해야 한다면, 그들이 현실 감각이 없어서 그런 생각을 한다고 지적할 수는 없다. 오히려 너무 현실을 잘 알기에, 하지만 아는 것에 비해서는 수행 능력이 떨어지기에 그런 논리를 택했을 공산이 크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서브컬처의 본래 기능이기도 하다. 서브컬처는 주류정치에 당당히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는 이들이 차선책으로 택하는 개구멍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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