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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12. 2024

숨이 드는 것, 숨어드는 것

<우마무스메 프리티더비: 새로운 시대의 문>(2024)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은 영화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실패는 어떤 의미일까? <새로운 시대의 문>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의 1878년작인 <움직이는 말>을 패러디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현실의 말을 대체해 우마무스메가 태어나는 이들 세계에서는 영화의 역사 또한 우마무스메와 함께 시작됐다. 그런 점에서라도 작품이 다루는 ‘실패’의 감정은 영화의 기능적 면모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다. 가령 <우마무스메> IP에서 흥미로운 점은 작품과 비교할 수 있는 원본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실존했던 경주마를 캐릭터화한 이들 세계에서 ‘승부’는 열혈의 소재가 아니다. 이미 이야기의 발단과 전개, 결론에서 커튼콜에 이르기까지의 전부가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미 결론이 난 일이니까 노력하거나 하는 일이 무용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영화의 기능이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영화가 이를 수용해서 정제하는 과정은 감정적 쓰레기통이나 불타버린 희망회로에 그칠 공산이 크다. 예를 들어 <우마무스메>의 TVA 2기가 다루는 사일런트 스즈카는 현실에서 발목이 골절 당해 안락사를 당했지만, TVA에서는 이를 극복해서 미국으로 떠나는 식의 ‘대체’가 이루어진다. 현실에서는 이미 다 이야기가 끝나버렸지만 TVA는 이를 되살려 다시금 미완의 결말로 향하게끔 한다. 실존하는 대상에 대한 묘사이므로 윤리적인 면에 대한 비판이 일 수도 있었겠지만, <우마무스메>는 한 차례 모에화를 거치며 사람들의 현실을 벗어났고 이를 토대로 ‘분기’할 수 있었다. 영화도 얼추 비슷한 역할을 한다. 영화에서 실패는 날것의 현실과는 달리 비교적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가공된다. 영화에서 실패는 현실의 특징적인 몇몇 것들을 조합해 만들어진 무언가이면서, 동시에 장르적 특성을 타고 개인의 내면에서 효용화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곳의 실패는 게임에서 죽음과 마찬가지로 유희거리가 된다. 영화에서 실패는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을 전제하는 게임에서처럼 ‘다시’를 내포하기에 현실과의 구분점이 된다. 


<새로운 시대의 문>의 특징적인 이미지를 꼽는다면 창문을 바라보는 아그네스 타키온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그녀는 정글 포켓과의 경주에서 손에 꼽힐 만한 기록을 남기는 것으로 첫선을 보인다. 이후 이어지는 세 차례의 경기 등에서 좌절을 겪는 정글 포켓에게,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가공의 입자’로 소개하면서 정글 포켓에 기준점을 제공한다. 그녀의 설명을 따르자면 타키온은 빛보다 빠르게 움직일 것으로 추론되는 가공의 입자다. 이 소개문구를 따라 그녀는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 마냥 경주를 은퇴해버린다. 이제 포켓은 타키온과의 승부를 겨룰 수 없게 되었고, 마음속 한 구석에서 이 경험은 자신이 어떠한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이미지’로 자리 잡고야 만다. 작품이 다루는 것은 포켓이 초반에 겪었던 네 차례의 실패담이 아니라, 스스로가 형성한 실패를 받아들이는 과정 그리고 극복의 모습이다. 영화가 경주마의 삶을 가져와서 이를 ‘보여주는 방법’으로 장르를 형성함을 염두에 두자. 타키온의 다리부상으로 인한 이른 은퇴와 엠페라-오의 연패, 정글 포켓의 성공담은 모두 실존마가 겪었던 삶의 궤적이다. 역사는 만약을 허락하지 않지만, 영화의 기능은 역사가 아니라 시간을 사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얼핏 보았을 때 영화는 숱한 기적을 일구어낸다고도 여겨진다. 그러나 영화 또한 주어진 시간을 마치면 어떤 형태로든 결말에 이르게 된다는 점에서 실패의 궤적 안에 있다. 예를 들어 타키온이 포켓을 두고서 언젠가는 자신을 뛰어넘을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영화의 전개와 방향을 지시하면서도 동시에 ‘실패’한 역사로서 한 미래를 바라보는 듯한 인상이 있다. 은퇴식을 진행하고 난 뒤 타키온은 자신의 기숙사에 틀어박혀 창밖을 내다보며, 이때 영화는 타키온의 시선이 닿는 곳을 쇼트로 잇지 않는다. 즉 외화면을 남긴다. 외화면을 보여주지 않기에 상상의 여지가 남았다고도 말할 수도 있지만, 영화의 기능이 ‘만약’과 ‘다시’라면 그녀는 실패의 표상으로 남아야 한다. 다시 한번 언급하자면, 영화에서 실패는 어떤 의미일까?

 

작품에서 숨 가쁜 순위 다툼이 벌어지더라도, 이야기의 다음 장에서 벌어질 일을 전부 알고 있다면 작품을 구성하는 건 예측의 논리가 아닌 회피의 감정이다. 여름 합숙에서 깨달음을 얻은 포켓이 타키온을 찾아온 장면을 떠올려보자. 포켓이 타키온에게 경주를 권유하자 타키온은 “그럴 수 없다”고 답한다. 내내 이상한 말투를 사용하던 타키온이 유일하게 이를 사용하지 않는 이 장면은 그녀의 말투가 방어기제의 일종일 수도 있겠다고 추론하게끔 한다. 작품은 “우마무스메는 달리기 위해 태어났다고” 세계관을 설명하지만, 반대로 보면 “달릴 수 없는 우마무스메는 삶의 의미가 없다”는 것쯤 되고 말아서 타키온이 자신을 가공의 입자로 설명하는 대목은 자신의 몫까지 달려주었으면 좋겠다는 의미가 내포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은 ‘허구’이자 ‘가상’이지만, 이를 돌파할 수만 있다면 빛의 속도를 추월해 달릴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그저 허구이자 가상일 뿐이지만, 언젠가는 결말에 이르러 끝나버리기 때문에 관객 모두가 현실을 이겨낼 수 있다.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은 영화가 되어야 한다”라는 건 그런 뜻이다. 잠정적 은퇴를 선택한 타키온이 창문 너머, 혹은 스크린 너머를 바라볼 때 이 장면은 적어도 다음 두 개의 맥락으로 흘러간다. 작품 내적으로는 실존마의 삶을 따라 여기가 ‘결말’이라는 사실이 있고, 작품 외적으로는 ‘바깥’의 수사를 건드리면서 한 현실이 안전하게 대체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가령 이곳 세계관에서는 학교를 다루는 만큼 성인 우마무스메의 모습은 비교적 묘사되지 않는데, 경주에 졌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버린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어도 등장인물은 줄곧 살아가야만 한다. 유년기는 어른의 흔적기관이며 관객도 그렇다. 영화의 주된 기능 중 하나는 무언가를 끝내는 일이 중단이나 절단으로만 인식되지 않고서, 지난 세기를 안고 졸업하거나 슬픔이나 과오를 끌어안고서 다음을 기약하는 분기점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결말에 이르러 경주에 복귀한 타키온의 모습은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재현의 방법은 전기영화를 만들 때 기록된 사연을 어떻게 허구로 가공할 지와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 수정된 결말은 작품 내의 서사에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나 미래 궤적을 돌파하는 일과 연결된다. 포켓이 타키온에게 졌던 자신의 과거를 돌파한다면, 타키온은 자신에게 본래 주어졌던 결말인 은퇴를 번복한다. 이때 타키온이라는 ‘가상’은 그 자체로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살아가게 하는 영화 안에서 실제 현실의 지위를 ‘대체’한다. 물론 영화에서 외화면의 역할을 단순한 프레임 이상으로 끌어오는 일은, 이야기의 전개를 내부적으로 해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판점이 될 수 있다. 다른 인물이 타키온을 설명하는 대목을 보면 그녀는 자신의 몸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를 알고 싶어서 그런 수준의 달리기를 한다고들 한다. 타키온은 어떠한 표면에 가까워지려는 인물이고, 그 점에서 스크린의 추방자를 자처한다. 그러나 추락하는 속도에도 한계상한은 있기 마련이어서 영화는 다시금 신체의 문제로 돌아가게 된다. “신체 전체가 어떤 강한 움직임에 의해 주파되었다. 추할 정도로 변형시키는 움직임이 매 순간 사실적인 이미지를 신체에 가지고 와서 형상을 만든다(질 들뢰즈).” 빛보다 빠른 입자인 타키온과 자신의 속도상한을 증명하려 했던 그녀 자신에게 신체는 곧 물리적인 한계이자 종속점이다. 타키온은 자신을 세계의 표면으로 밀어내고 있고, 어떤 점에서는 영화가 인간이 가장자리에 서면서 동시에 삶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오늘날 영화의 장소는 어디인가? 우리 자신이 하나의 장소를 갖기 위해 ‘걷기’를 행한다면, 여기서 신체는 세계의 소실점이 되어준다는 점에서 한 결말을 향해가는 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녀가 신체의 외부에 나설 수 없는 것만큼이나 영화 또한 외화면을 묘사할 수 없으며, 이를 따라 타키온이 창밖을 보는 장면은 그 바깥을 알 수 없게끔 진술된다. 하지만 파국의 천사는 미래를 마주하고, 도래하는 과거를 폭풍에서 지켜내고야 만다.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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