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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n 24. 2023

추락에는 목적성이 존재한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2023)


스파이더맨 프렌차이즈의 특징 중 하나는 활공 액션이다. 이는 토비 맥콰이어가 주연으로 나온 첫 스파이더맨 영화에 대한 평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캐릭터와 세계관의 성격을 드러낸다. 가령 빌딩 숲에서 극대화하는 거미줄 액션과 사물의 벽에 붙어있을 수 있다는 설정은 이들로 하여금 중력을 무시하는 듯 보이게 한다. 그러니까, 스파이더맨이라는 단어는 부유의 성질을 갖는다고도 볼 수 있다: 스파이더맨은 유독 슈퍼 히어로 중에서도 중력과 반중력의 사이에 매달린 캐릭터다. 이들은 배트맨처럼 뛰어다니지도 않고 슈퍼맨처럼 하늘을 날아다니지도 않는다. 항상 어딘가에 매달려, 위치 에너지를 운동 에너지로 변환하는 방식을 택하곤 한다. 바꾸어 말해 이는 스파이더맨이라는 캐릭터가 그러한 추락에서 시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스파이더맨은 소중한 이의 죽음을 겪는다.” 이들은 그러한 추락에서 히어로서의 활동동인을 얻는다. 그리고 누군가를 구하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항상 누군가를 잃어야만 한다는 ‘반-작용’이 요구된다.


빌딩 숲을 배경으로 거꾸로 매달린 스파이더맨의 모습은 중력이라는 세계의 법칙에서 벗어난 듯 보인다. 또한 세계를 거꾸로 보여줌으로써 이들의 세상을 이질적이고 예외적으로 보이게끔 한다. 이 부유의 주제는 스파이더맨이라는 캐릭터를 방랑자로 만들고, 이들은 어디에도 어울리지 못한다. 스파이더맨이라는 인간과 그 안의 본체로 이루어진 이 결합물은 너무나도 불안정해서 스파이더맨은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게 정설이 됐을 정도다: 말하자면 스파이더맨은 도시의 속성을 대변하는 캐릭터다. 빌딩 숲을 배경으로 부유와 추락의 정서를 선보이는 이 캐릭터는 현대인의 고독과 불안에 긴밀히 연결돼있다. 여기서 스파이더맨 캐릭터의 기원을 얘기해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그는 도시를 벗어날 일이 없을 것이다. 스파이더맨 캐릭터가 보여주는 도시의 불안은 다양한 부류의 이분법에서 최전선을 향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가령 도시는 구역과 구역으로 분배되지만, 그 안에의 것들은 너무 다양해서 하나로 영토화되지 않는다. 이 안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취미와 소속을 갖지만 그만큼 다른 하나를 선택하는 일에서 고민을 얻곤 한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자연스레 포기하는 상황은 ‘현대적’인 삶이 쟁취한 게 시간의 자유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어떤 면에서는 도시의 직장인보다 시골의 목가적인 삶이야말로 더 여유롭다. 도시는 자원으로 넘쳐나지만 그 안의 삶이 전부 풍요롭지는 않다. 바꾸어 말하자면, 도시의 다원성은 하나의 영토, ‘정체성’으로 귀결되지 않음으로써 개인을 불안하게 한다. 도시의 삶이 고독과 불안과 긴밀히 연결되는 것엔 그런 이유가 있다. 그리고 스파이더맨은 도시의 구획과 구획을 날아다니며 현대인의 불안을 가로지른다. 이 점에서 스파이더맨이 갖는 부유의 속성은 단순히 도시의 표면을 들여다보기만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스파이더맨은 도시의 사이와 사이를 횡단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트롤리 딜레마를 논해보자. 히어로 영화의 유구한 전통 중 하나인 이 철학적 논제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하나를 구하면 다수가 죽고, 다수를 구하면 하나가 죽는다.” 이 논제가 말하는 건 공리주의의 한 관점이지만 대개 히어로 영화에서는 다음처럼 오인된다: “네가 모든 사람을 구할 수는 없어.” 그 말처럼 히어로는 모든 현장에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에 선택을 해야 하고 그에 집중해야만 한다. 모두를 구하다가 모두를 놓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나에만 집중하는 게 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히어로 영화는 크게 다음의 두 가지 선택지를 받아들인다. 첫 번째는 개개인의 가치를 따지면서 ‘가치’를 측정 가능한 형태로 환원해보려는 것이다. 이는 감정이나 역할 같은 추상을 부피와 질량으로 드러내려는 시도를 동반한다. 두 번째는 최대한 많은 이를 동료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는 혼자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모두에게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맡긴다.


이 글에서 말해보고 싶은 건 후자다. 히어로에게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일은 고독과 불안을 이겨내는 일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이 말은 다른 히어로들과의 협업을 통한 콜라보 무비를 제작하는 논리이기도 했다. <어벤져스>나 <저스티스 리그>와 같은 협업은 ‘혼자’서는 감당 못할 일을 마주했을 때를 가정한다. 그만큼 영화적으로는 사건의 규모가 커지므로 관객에게 보여줄 게 많아진다. 영화는 규모의 확대를 통한 스펙터클과 재미를 얻으며 이는 마치 베스킨라빈스에 가서 파인트를 택하는 것과도 같다. 문제는 이러한 규모의 확대가 어떤 면에서는 ‘불안감’의 총량을 대변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다양한 외모와 능력의 캐릭터는 프렌차이즈에서 ‘개성’을 담당하기도 하지만 각자의 고민과 불안을 담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부유의 감각과 연결되어 추락의 형상으로 변환된다: 히토 슈타이얼의 표현을 빌리자면, 추락은 바닥이 없음을 상정하며 이는 곧 ‘국경’과 ‘경계’의 없음을 뜻한다.


‘현대’와 ‘고독’은 국경과 경계를 가리지 않는다. 인도의 뭄바이에서와 미국의 뉴욕에서의 인간상은 작게는 다르지만 크게는 얼추 비슷하다. 마찬가지로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멀티버스 개념으로 다양한 군상의 스파이디를 끌고 오지만 이들의 삶은 얼추 비슷하다. 어느 시간이나 세계에서도 스파이디는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고 또 가장 밀접한 곳에서 불안을 얻는다. 이들에게 부여된 건 슈퍼맨처럼 행성 대 행성을 두고 싸우거나 아이언맨처럼 우주의 운명을 걸고 싸우는 ‘숙명’이 아니다. 대개 스파이디의 삶은 현물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모두 거지 같다. 그리고 그런 거지 같은 삶에서 ‘힘’은 책임을 과대대표한다. 큰 힘에는 큰 의무가 따른다는 말은 딱 힘에만 어울리는 일만 벌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실성을 잃는다. 스파이디에게 힘이 있는 건 맞지만, 주어지는 의무는 항상 힘을 초과한다. 묘사하자면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부유’와 ‘추락’은 그러한 과잉의 산물이다.


가령 전작에서 마일스 모랄레스의 첫 추락은 경이의 맥락에서 다뤄졌다. 그러나 이런 시선이 관철되지는 않는다. 삼촌의 죽음은 모랄레스에게 작용에는 반동이 따라온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빌딩 숲을 향한 웹슈팅이 단순한 전진이기만 한 건 아님을 말해준다. 웹서핑이 차이와 분열 위를 미끄러지는 방식으로 불안이 자아내는 간극을 지운다면, 웹슈팅은 불안의 총량을 진폭으로 활용하고 또 이 파고에서 가장 높은 위치 에너지를 갖는다. 즉, 스파이더맨은 한 번의 비상을 위해 두 차례의 추락을 경험한다. 그러나 첫 번째의 추락과는 달리 두 번째의 추락은 항상 바닥을 염두에 둔다는 점에서 어떠한 목적의식을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 번째 추락이 소극이라면 두 번째 추락은 희극으로 끝나야만 한다. 현대사회에서 자유낙하는 오히려 시점을 고정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며, 이때 ‘어딘가로’ 추락할 것인지를 묻는다는 건 ‘도주’라는 말을 단순한 반작용에만 그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도주한 마일즈가 도착한 건, 자신이 살던 곳과 비슷하지만 다른 미래가 펼쳐진 지구다. 이 우주에 있던 거미가 자기 세계로 넘어와서 자신을 물었고, 그렇기에 기계가 오작동했다. 그런데 만약 이곳의 거미가 본래대로 여기에 남아 이곳의 마일스를 물었다면, 이들의 미래는 우리가 보았던 것(<뉴 유니버스>)와 동일했을까. <어크로스>는 도주의 결과로 제시되는 세계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이는 소극으로 끝난 본편에서 희극으로 벌어질 다음 편을 예고한다. 이 과정에는 바닥을 디딛고 서 있다는 비상의 감각이 있고, 이는 스파이더맨에게 부유의 감각인 ‘불안’이 세계를 떠돌지 않게끔 한다. 그 점에서도 스파이더맨은 도시의 모습과 닮아있다. 경찰관들의 무전에서 정보를 얻는 스파이더맨들은 그들의 활동을 ‘네트’에서만 존재하는 ‘일(Work)’처럼 여긴다. 바꾸어 말해 스파이더맨이 현대를 대변하는 지점은 그러한 네트워크의 사회에서 과잉연결되는 지점이다. 모두를-너무 많이 연결되어서-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크로스>가 남겨놓은 나머지 반절의 이야기를 두고서 꺼내놓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하지만 현대 사회가 다원화하면서 남긴 흔적이 여러 영화에서 멀티버스 설정으로 드러난다는 건 말해볼 만하다. 일단 멀티버스는 이야기의 변주를 한 번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콘텐츠의 과잉을 겪는 현대인에게 딱 알맞은 형식이다. ‘베스킨라빈스 파인트’처럼 고민할 것 없이 하나만 주문하면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메뉴라는 결이 자리한다. 선택지가 다양한 만큼 경우의 수도 늘어나면서 ‘취향’은 온전한 하나만이 아니게 되었다. 사건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현대 사회에서 불안은 제시가능한 형태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불안은 선택지가 다양한 만큼 그런 다양함 사이의 모순들 사이에서 피어난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이’를 횡단하며 미끄러지는 게 바로 현대인일 것이다. 마치 도심을 활공하는 스파이더맨처럼, 현대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반대로 ‘그 무엇도’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사건 또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미겔 오하라는 한 명 때문에 세계 전체를 잃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다른 것이지 틀린 말을 하는 건 아니므로 미겔의 말을 단순하게 반박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고 말하는 일은 그동안의 매체에서 이미 다양하게 논해진 바 있다. 가령 <마이너리티 리포트> 같은 영화나 마블코믹스의 2차 시빌워 같은 이벤트에서 ‘잠재’를 ‘현행’으로 사유하는 일이 빈번했다. 지지자들의 논리는 확률에 기대어보자는 것이었고, 반대자들의 논리는 ‘현재’를 토대로 구성된 결과물은 바로 그 현재를 변형하는 것으로 변형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9.11테러 이후 이라크 전쟁을 두고 벌어졌던 논쟁은 ‘선제타격’을 두고 이루어졌다. 그들은 ‘잠재적인 위협’을 이들의 ‘미래’에서 발견했고 이를 토대로 현재를 공격했다. 그런데 미래는 단순히 ‘발견’되는 게 가능할까? 멀티버스는 제시된 현재를 하나의 공식삼아 발달하는 뿌리 우주다. 그 점에서 미래는 발견이 아니라 발명된 것이다.


미래가 발명품이라면 그 원리와 구조를 잘 이해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러한 이해는 이들이 기반을 둔 현실을 변형하는 것으로 쉽게 바뀐다. 여기서 혹자는 살아가는 기반을 바꾸는 건 물리법칙을 바꾸는 일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네트와 웹에서 물리는 촉각이나 시각으로 연결되는 감각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가로질러지는 자신을 뜻한다. 즉 현대인의 정체성은 횡단과 단절의 관행에서 추락을 통해 발달한다. 숱한 스파이디에게 찾아온 불행이 큰 힘에 대한 책임을 일깨우듯이 도심의 속도에 동기화된 감각은 거미줄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파고를 통해 변형된다. 도심의 리듬에서 이탈하는 이 운동에서 우리는 ‘추락’이 단순한 ‘끝장’인 것만이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 단독성을 뜻한다는 점을 본다. 이는 멀티버스의 스파이디에게 벌어지는 죽음이 모두 같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이들에게 추락은 관행이지만 동시에 무언가에 관한다-이들에겐 추락에 목적성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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