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Sep 24. 2022

행복한 결말: 대체 현실의 분쇄 골절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1. 


“영화 이론은 영화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영화의 개념들에 근거하고 있다.” 들뢰즈가 이 말을 남긴 곳은 그 유명한 『시간-이미지』다. 들뢰즈의 이 책이 철학과 영화 사이의 어중간한 무언가라고 평가받음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것이 단순한 비판에 불과한 게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들뢰즈 본인도 영화를 순수하게 바라보지만은 않았음이 드러나니 말이다. 들뢰즈는 영화를 혼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영화는 영화 이론에 의해 파악되며, 영화 이론은 다시금 영화 개념에 근거한다는 것. 그러니까 들뢰즈에게 영화의 개념이란 곧 영화와 이론 사이를 이어주는 것이며, 그게 바로 철학이다. 그래서 들뢰즈에게 영화 이론은 철학이 아니다. 들뢰즈에게 철학은 영화 이론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에 가까웠다. 마찬가지로 들뢰즈의 [시네마]가 영화 이론서도 철학서도 아닌 이유는 그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 책에서 영화에 관해 썼다. 다만 그런 영화가 혼자서만 존재할 수 없었기에 여러 부가적인 수사가 달라붙었을 뿐이다. 


들뢰즈의 이런 태도는 아무쪼록 무언가를 되뇌게 한다. 그건 바로 혼자서만 존재할 수는 없다는 점.  대상은 이론으로도 철학으로도 설명될 수 없지만, 오히려 그렇게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 그것들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대상을 대체 무엇으로 불러야 할까. 이름을 불러야 비로소 효과가 있는 몇몇 계약처럼, 대상의 이름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그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목소리도, 기쁨도, 유희도 모두 전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우리가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할 때 고스란히 드러난다. 혼자를 어떻게 말해야 할까? 혼자 있는 것을 어떻게 내버려둘지를 생각해야 비로소 그런 혼자를 말할 수 있다. 헌데 이런 혼자는 너무나 괴로운 것이다. 괴로움에 앞서 다가서다 보면 이론과 철학을 내세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이론과 철학이 대상을 보듬는 것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도 알게 된다. 대상은 여전히 홀로 남아있고, 우리는 이론과 철학이 없다면 되려 괴로움에 공감할 수조차 없다는 모순에 슬퍼하게 된다.  


2. 


생각컨대 영화와 전혀 다른 분야에도 이런 관점은 적용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우스꽝스럽게도 [사이버펑크 2077]을 생각하면서였다. 미완성 작품이라는 악평을 들으며 사기꾼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이 게임은 동명의 게임을 원작으로 한 <사이버펑크: 엣지러너>가 공개된 후로 약간의 상승세를 탔다. 게임 시점에서 일년 전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작품은 유저들이 게임에서 갈 수 있는 장소를 배경 삼았다는 점에서 기존 애니메이션들의 성지순례 문화를 어느 정도 따라갔다. 차이가 있다면 그 장소가 현실에 있는지 가상에 있는지의 차이일 뿐이었다. 바꾸어 말해 <엣지러너>는 [사이버펑크 2077]의 대체 현실처럼 기능했고, 이는 우리가 <엣지러너>를 단순한 애니메로만 바라볼 수 없게 한다. 단순한 미디어믹스를 넘어선 무언가가 이곳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게이머가 아닌 우리가 게임의 완성도를 판단하는 건 불가능하고, <엣지러너>가 게임의 완성도를 보완해준 것도 아니지만, <엣지러너>는 게임과 동일한 현장을 공유하면서 둘 사이에 하나의 현실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바라보는 현실이란 무엇일까? 확실한 건 이 현실이 양쪽 모두가 있어 가능하다는 점이다. 즉 이 현실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이곳은 게임과 애니메를 모두 경험해야만 비로소 존재하는 현실이다. 허나 역설적으로 어느 한 쪽만을 경험하더라도 이런 현실을 목격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현실은 바로 그 현실 개념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도시[나이트시티]는 게임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단지 그런 현실의 개념에 근거하고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사이버펑크]라는 중첩된 현실은 그 자체로 이론도 철학도 아닌 무언가로서,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채 우리의 현실에 덧씌워진다. 우리는 이곳에서 무언가 대단한 것이 시작된다는 느낌을 받진 않지만, 재밌게도 그렇게 간편한 인상을 묘사하기 위해선 무언가 대단한 것이 있다는 뉘앙스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 무언가 대단한 것은 오히려 현실이 대단하지 않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대체 현실’이라는 유령으로 읽혀진다. 정말로 현실을 대체해서는 안 되는 현실, 현실의 개념만을 취한 무언가 말이다. 


3. 


어쩌면 이런 말이 가능하다. “현실 이론은 현실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현실의 개념에 의존한다.” 우리가 현실과 맞닿은 면을 묘사하려는 시도는 되려 현실의 설명할 수 없는 면을 두고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영화란 현실에 의존한다기보다는 현실의 몇몇 개념을 발굴해내려는 기능이 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그런 개념이 겉으로 드러나는 만약의 가정이 바로 대체 현실이다. 물론 이 현실은 그것 자체로 현실이 되지 못하고 ‘대체 현실 유령’으로 돌아다닌다. 마르크스의 유령처럼, 우리가 아는 개념들은 그러한 대체를 통해서만 비로소 몸을 드러낼 수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 대목에서는 대체 현실이 현실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없으므로 상호 간에 의미 없는 교류만이 계속될 뿐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고 싶다. 가령 아무리 이상적인 내용이든 간에 영화는 현실의 아쉬움을 담은 게 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영화는 플라토닉 러브의 일환으로서 자위 기구에만 그친다. 그러나 이러한 자위는 둘만의 현실을 가정한다는 점에서, 그것이 있을 수 없는 유령이라는 점에서 대체 현실이다. 


스탠리 카벨은 영화를 두고서 “보이지 않으면서 보는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그는 고립의 확립을 통해서 비로소 영화와 연결된다고 말한다. 이와 유사하게 대체 현실 유령이라는 말은 정확히 말해 양쪽 세계가 같은 꿈을 꾸지만 결국에는 서로 독립된 것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지적한다. 트랜스 미디어, 멀티버스와 같은 말이 난무한 세상에서 이런 관점은 다소 맞지 않노라 느껴질 수 있겠지만, 오히려 대체를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는 현실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애초에 둘이 만날 수 있었다면 이런 현실 따윈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양측이 하나의 현실을 가정함으로써 비로소 양측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런 대체의 중요성은 크다. 그 현실은 정말로 있는 것을 바꾼다기보다 동일자에 대한 환상에 가깝다. 우리가 같은 꿈을 꿀 것이라는 믿음, 그것은 더 나은 미래일 수도 있고 과거에 대한 서투른 후회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서로 접촉할 수 없다는 점, 바로 이런 현실이야말로 서로를 유령으로 공존할 수 있게끔 하는 증강 현실의 감각이다. 


4. 


실존 경주마를 대상으로 한 [우마무스메] IP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현실에서 모티브를 가져왔으면서도 그런 현실에서 모티브를 가져오진 않았다는 점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것이 대체 현실 유령이라는 점이다. 첫 번째로는 경마가 돈을 걸고 하는 게임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도박의 성격이 문제가 되는 건 아니고, 좋게 봐줘도 이들의 경주에는 돈이 걸려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것을 말 자체가 원해서 달린다고 보면 일종의 프로 스포츠 경기겠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이 그저 원할 뿐이라는 점에서 대상을 달리게 하는 생존주의 전략일 수 있다. 이 점에서 경마는 <오징어 게임>과 같은 부류의 거대 자본 작품과 유사하다고 느낀다. 큰돈을 투자받은 감독이 부담감을 느끼는 것처럼, 혹은 자본주의의 실패에 밀려 마지막 게임에 참가하는 것처럼. 경마라는 것은 단순한 행위를 넘어 어떤 세계들의 중첩인 듯 보인다. 그리고 [우마무스메] IP는 결과적으로 돈을 벌기 위한 세계에서, 그러한 실패의 세계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다시금 유령의 출현을 선보인다.  


가령 [우마무스메]는 고전적인 할리우드 영화처럼 ‘행복한 결말’만이 존재한다. 이곳에는 부상을 당해 안락사를 당하는 편이 더 나은 사례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이는 동물 상태에서 인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의 변화로 볼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동물적 세계와 인간적 세계를 나누는 하나의 기준점이기도 하다. 동물적 세계인 <오징어 게임>에서 생명의 무게가 얼마나 덧없는지를 떠올려보자. 인간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아니라는 이 현실은 인간의 개념들에만 근거한 무언가로만 보인다. 이와 유사하게 [우마무스메]는 실존 경마에 준거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런 실제 사례의 개념에만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우마무스메] 애니메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우마무스메>는 현실과 그 주변부의 미디어(방송과 대중 반응을 비롯한 여러 것들)를 가져오면서도 이것이 현실에 기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모든 픽션 매체의 서두를 장식하는 이 문구는 애니메에서 ‘개념들’에 준거만을 밝힐 뿐, 그 자신의 이론과 철학을 독립적으로 가져간다. 


5. 


앞서 우리는 [사이버펑크]가 게임과 애니메 양측에서 모종의 협공을 가하면서, 그들 간에 공통점을 하나의 대체 현실 유령으로 만들어냈음을 논한 바 있다. [우마무스메]는 조금은 다르지만 거의 유사하게 작동하는 한 가지 사례다. 현존 경주마를 다뤘다는 점에서 경마 팬들을 끌어들였지만 이들 게임은 시스템적으로 경마로 작동할 뿐, 실질상에선 전혀 현실을 다루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현실과는 다르다고 말해야만 비로소 성립한다. 왜냐하면 모 SF 장르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리얼리즘이 될 수 없으며 다큐멘터리 또한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마무스메]가 가져온 대체 현실은 경마 팬들이 꿈꿔왔던 가상의 세계가 유령처럼 떠돌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실에서 게임의 진행을 위해 붙여지고 고쳐진 몇몇 전개들은 이것이 완전한 대체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면서도, 그와 동시에 게임과 애니메 양쪽에서 만들어진 대체 현실이 끝내 유령이 되고 만다는 점을 지적한다. 현실에 근거하지 않고서, 현실의 몇몇 개념들을 차용한 이 IP에서 이론과 철학은 전적으로 개인의 행복과 연결된다는 점 말이다. 


행복은 유령과도 같은 것이다. 이런 의문에는 경마팬들에게 있어 가장 민감한 문제가 담겨있다. 말이 달리기 위해 태어난 동물이라면 달리고 싶지 않은 말도 있는 건가. 질주하는 게 말의 본능이라면 질주를 종용하는 것은 애호인가 아니면 학대인가. 더 나아가 경마라는 행위는 돈을 거는 과정에서 그 사회적 대중성이 확보되지만, 반대로 대상에 대한 애호가 순수한 마음으로만 여겨지지 않게 한다. 선수들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난다 한들 돈이 되지 않으면 어디까지나 비인기 스포츠로 남는 것처럼. 이런 상황은 자신의 순수한 마음이 드러날 수 있는 대체의 현실을 옹호하게끔 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현실에 동경을 품게 한다. 역설적으로 그것이 대체 현실이기에 유령처럼 떠돌게 된다는 점은 이 대목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여기에는 두 개의 세상이 있다. 그리고 둘 중 하나가 진짜 현실이 되는 과정에서 나머지 세상은 탈락되지 않고서 여전히 이곳에 남는다. 개념의 형태로 남아 우리 곁에 자리한다. 그렇게 본다면 행복한 결말이란 것은 우리가 늘 행복과 살아가고 있음에 관한 방증일 테다. 


6. 


허나 이 행복한 결말에 드리운 그림자는 우리가 이것을 바라보는 일을 불편하게 한다. 왜냐하면 “행복 이론은 행복에 근거하는 게 아니라 행복의 개념들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행복한 결말이라는 영화는 우리 현실에 행복이 떠돌고 있음을 지적하지만, 정작 그것은 그런 행복이 개념의 형태에서 구체화될 수 없다는 ‘실패’의 감정에 근거한다. 말하자면 행복한 결말이란 것은 행복의 이데아를 묘사하려는 시도, 행복의 그림자로 여겨지는 우리 세계에 관한 한 가지 대안적 서술법이다. 이에 따라 대체 현실이라는 만약의 시도가 이루어졌고, 여기서 대체라는 말은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가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탈락된 나머지’를 실패의 배제로 볼 것인지, 아니면 보호로 볼 것인지와 같은 두 가지 가정이 가능하다. 대체 현실이란 것은 행복한 결말을 아편처럼 사용할 수 있고, 혹은 행복의 개념들을 보존하려는 비파괴 변증법의 시도일 수도 있다. 대체 현실을 통해 우리는 현실을 잊고자 했을 수 있고, 혹은 행복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재확인하려는 교육의 과정을 겪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들 모두에서 ‘실패’라는 말이 그들 자신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점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기본적으로 대체 현실은 실패를 전제하는데 이는 ‘실패’가 변하지 않는 것이어서다. 이미 실패한 현실이 있기에 실패하지 않은 현실이 있다는 소리다. 그래서 이 말은 마치 실패한 현실과 행복한 결말 간의 순차진행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가령 실패에서 그런 실패의 수복을 통해 정상적인 결과로 나아가는 행복한 결말이 당대 이데올로기의 정당화였다는 점이 영화사에서 잘 알려졌다. 이 경우 실패한 현실이라는 말은 이데올로기 투쟁의 과정이자 근간이 되며, 실패라는 것은 행복이라는 후처리 결과에도 불과하고 그 자체로 보듬어질 수 없게 된다. 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탄생한 매체다. 영화는 동시대를 촬영하더라도 곧바로 예전이 되고야 만다. 영화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은 바로 이 점을 의미한다. 그리고 행복한 결말이 영화의 고유한 역할처럼 여겨졌던 것도 그러한 생성 덕분이었다. 영화는 실패의 끝에서 성공의 시작으로 달려오는 일종의 잠재태와도 같았다. 


7.


영화가 곧바로 실패해버리기에 영화는 ‘실패하지 않은 현실’로서의 내용물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촬영 시점에서는 극복해야 할 미래가 촬영의 결과에서는 극복되지 않은 과거로 남아버렸기 때문이다. 헌데 잘 생각해보면 이것은 ‘변할 수 없음’이라는 견고함을 바탕으로 했기에 되려 가능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현실은 우리가 무언가를 펼치기 위한 지대여서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기 마련이므로. 영화란 어떠한 결과로서의 실패가 아니라 그 자체로 실패라는 순수이다. 말하자면 영화는 그 자체로 행복한 결말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성공의 시작지점으로서 우리에게 행복한 결말로 다가온다. 어느 시대에서나 영화는 실패한 대상이었고 이런 역사는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만 영화는 그 자신이 내보이고자 하는 행복한 결말에 도달할 수 있다. 이른바, 영화는 행복을 배태한 잠재태가 아니라 그런 행복의 견고함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분쇄골절’이었다. 영화는 순수 과거이지만 극복될 수 없는 실패의 지점이기도 했기에, 그 자신은 다시금 원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분쇄골절이었다. 


혹자는 실패라는 말을 현실의 대전제로 박아두는 행위가 불가능성에 대한 영원의 조소라고 비판할지도 모르겠다만. 대체를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는 현실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만 한다. 대체 현실이란 것은 실패를 전제로 한 행복한 결말이 바로 우리 현실의 유령이라는 점을 말해주니 말이다. 그러니까 대체 현실이란 것은 실패가 현실에 드러날 수 없는 상황에서, 그것을 순수 실패로 만들면서 행복한 결말이라는 조소의 감정으로 그런 실패를 드러내는 효과가 있다. 예컨대 이때의 실패는 행복한 결말로서 맺음 지어지는 순수가 아니라 현실의 개념을 이루기에 변할 수 없는 몇몇 지점들을 되새긴다. 그리고 마침내 실패는 애도라는 히스테리 청산의 절차를 밟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마무스메] IP는 그것이 픽션임에도 불구하고 현실과의 기묘한 연관성을 지닌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애니메에서 묘사된 서사를 짧게 언급해두려 한다: <우마무스메>에는 두 개의 실패가 있다. 하나는 작중 인물의 원본이 되는 경주마들의 실패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죽음의 재현에 관한 작품의 내적 실패이다. 


8.


[사이버펑크]가 게임과 애니메 간에 하나의 가상을 공유한다면, [우마무스메]도 게임과 애니메 간에 하나의 가상을 공유한다. 허나 <우마무스메>에 등장하는 각 캐릭터의 성격과 행적은 [우마무스메] 게임에서 묘사되는 것과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이 둘은 하나의 현실을 공유하며, 이때의 현실은 게임 내의 현실과 그런 현실을 가능케 한 우리들의 현실이다. 즉 현실에 기반했다는 점에서 행복한 결말의 일종이고 이를 다음처럼 표현할 수 있다: [우마무스메]는 경마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우마무스메]는 경마의 몇몇 개념들에 의존할 뿐이다. 여기서 생각해볼 만한 것은 [우마무스메]가 왜 자신을 실패의 운명으로 끌어들였는지다. [우마무스메]는 경주마의 모에화를 선언하면서 원본마의 성격과 행적을 어느 정도 설정에 반영했는데, 문제는 시계열 순으로 배치되었던 역사가 가상의 평면에 압축되는 과정에서 선조와 후손들이 한 자리에 살아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말들의 미래가 이미 완결된 현실과는 달리, 그런 현실의 몇몇 개념만으로 이루어진 현실이 ‘대체’로 등장해온다.  


알다시피 애니메이션(장르 말고 기술로서)의 장점은 그 세계가 완전한 허구일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곧 제작자의 의도가 작품에 온전히 반영된다는 뜻이다. 현실의 몇몇 제약으로 실패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영화 매체와는 달리, 애니메이션 기술은 그 자신이 선보이고자 하는 것을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원하는 대로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은 결국 그런 표현들의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애니메이션은 필히 작품의 구성을 이루는 개념을 응용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면 [우마무스메]는 어떠한가? 역대 경주마를 다룬다는 점에서 일종의 올스타전이 되어야만 했던 스타성의 발효는 그것들이 서로 혈연과 지연으로 얽힌 관계라는 점에서 탱크나 전함 같은 부류의 역사와 차별화된다. 쉽게 말해 쇠는 무뎌지지만 신체는 다친다. 폴리곤 덩어리로 이루어져 다치거나 뜯김에 따른 공포가 없는 게임과는 달리, [우마무스메]는 현존 경주마의 몇몇 개념을 가져왔고, 이에 따라 독자는 그것이 단순한 가상이 아닌 것처럼 여기게 된다. 


9.


단적으로 말해 [우마무스메]는 연대와 역사를 초과한다는 점에서 우리들의 현실일 수는 없다. 현존하는 시간을 압축해 만든 이 현실에서는 상호 간의 고리가 더욱 팽팽해져 현실의 몇몇 겹침이 일어난다. 부마가 자마와 단순한 학년 구분으로 나뉘지거나, 활동시기가 달라 서로 같은 경기에 출전할 수 없던 말들이 한 곳에서 달린다거나 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렇게 겹쳐진 현실은 이들 현실을 구성하는 몇몇 개념을 통해 견고히 지지된다. 죽었던 말들이 다 함께 살아있는 이곳에서 ‘현실’이란 것은 시계열이 될 수 없기에, 바꾸어 말하자면 ‘시공간에서의 죽음’이 그들의 실패를 결정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 바로 이들의 현실을 구성한다. 위에서 말한 두 개의 실패, 광활한 IF 전개의 세계에서 이들을 지지하는 건 ‘실패’라는 비가역적 구간인 것이다. 예를 들어 <우마무스메>는 기본적으로 경마를 컨셉으로 잡은 만큼 달리기라는 행위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수상에 따른 영애는 현실의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취급되며, 따라서 달리기라는 행위는 단순한 물리적 행동이라기보단 삶의 한 요인이다. 


그렇다면 [우마무스메]가 보여주는 건 인물의 성장서사인가. 이 애니메에서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호승심과는 달리, 그 속내에서 유의 깊게 다가오는 것은 계속되는 실패이다. 현실의 전개를 모티브로 한 이곳에서 독자는 그들에게 펼쳐질 미래가 어떠한지를 이미 알고 있다. 그런 미래에서 어떤 말은 달리던 중에 분쇄골절을 당하거나, 3번의 골절을 겪는다. 볼륨상 게임에서는 다루지 않는 이런 사건들은 <우마무스메> 애니메의 주요 이야기 흐름에 편입되어 실패의 두 가지 요인으로 남는다. 경주마들의 실패, 경주 중에 분쇄골절을 당한 사일런트 스즈카는 <우마무스메>의 대체 현실에서 생존한다. 그리고 이 생존은 현실의 대체로서, 그들의 실패를 바탕으로 한 행복한 결말이다. 이 행복한 결말은 현실과 대체 현실의 간극을 완충하는 이데올로기였으며, 어떠한 사건으로서의 죽음을 바탕으로 구축되었다는 점에서 대체 현실의 유령을 소환한다. 사일런트 스즈카는 살아남아 경주를 계속하지만 정작 그녀는 작중에서 미국으로 떠나 더는 애니메의 전개에 등장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의 유령이 되고 만 셈이다. 


10. 


<우마무스메> 애니메의 이런 전개는 행복한 결말을 위해 현실을 실패로 몰아넣는다는 점에서, 그런 실패들에서 완전한 가상으로 넘어가지 않기 위한 최선의 타협점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현실의 몇몇 인상적인 실패들은 대체 현실에서도 여전한 실패로서 남아있다. 비록 대체라는 말이 현실의 개념을 토대로 한다 한들, 이것이 실패의 운명이기에 현실을 대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명확히 드러나 있다. 바로 이런 실패들이 있기에 독자는 이어지는 운명을 숨죽이며 바라볼 수 있다. 가령 2기의 주역인 토카이 테이오가 묘사되는 1화의 연전연승에서 독자는 앞으로 벌어질 현실이 대체되길 기대한다. 하지만 테이오는 현실의 전개 그대로 삼 연패, 무패가 좌절당하는 과정에서 세 번의 골절을 겪는다. 현실의 실패를 토대로 한 이 전개는 1기에의 사일런트 스즈카가 본래 역사와는 다른 결말로 넘어갔다는 점에서 독자에게 모종의 실패담으로 남는다. 그것은 바로 실패에 관한 실패, 대체 현실의 유령, 현실이 대단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은 이들에 대한 배신을 뜻한다.  


죽음의 재현에 관한 작품의 내적 실패란 것은 바로 이 점을 의미한다. 대체되지 않는 이 현실은 실패의 경험담이 행복한 결말을 위해 소모되는 일을 막아선다. 이른바 실패의 실패, 변하지 않는 것을 변하지 않게 함으로써 실패의 끝에서 성공의 시작이라는 운명이 깨어진다. 허나 어떤 면에서 이는 경마팬들에게 있어 자신들이 사랑했던 말들에 관한 트라우마적 재발견일 수 있다. 어떤 대상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면 우리는 그의 이름을 기리는 것으로, 유령의 형태로 그를 현실의 실패담으로 남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패의 세계에서 애도란 그런 실패에서 빠져나온 성공의 시점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행복한 결말이라는 실패담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런 결말은 현실을 대체하려 해도 대체할 수 없는 투과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현실이라는 것이 변하지 않듯이 실패의 단단함 또한 가차 없이 분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비록 가상일지라도, 육체에 피를 내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현실의 매끄러운 전개를 위한 유령에 그칠 테니 말이다. 

이전 04화 추락에는 목적성이 존재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