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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29. 2022

무엇이 평행우주인가:<던전앤파이터>에서 기억의 논리


<던전앤파이터>는 2005년에 서비스를 시작한 한국의 온라인게임이다. 2022년을 기준으로 17주년을 맞이하는 던파는 명실상부한 장수 게임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서비스 기간이 오래된 만큼 이 게임을 기억하는 유저의 연령층도 다양한데, 가령 2005년에 중학생이었다면 2022년엔 20대 후반일 테고 대학생이었다면 이미 결혼을 해서 자리를 잡았을 공산이 크다. 말하자면 게임이 오래된 만큼이나 유저들의 연령도 점점 올라가서 ‘인생의 한 부분’에 던파가 자리한 이들이 많다. 그래서 해볼 수 있는 생각 중 하나가 바로 예전 던파와 요즘 던파의 비교이다. 어떤 형태로든 던파를 즐겼다면 이들의 기억 속에 있는 던파는 과거형으로 남았을 텐데, 던파는 여전히 서비스 중인 게임이므로 기억 속의 던파와 요즘 던파를 비교해볼 수 있다. 던파를 즐겼었던 유저는 다시 게임을 시작하면서 예전 추억을 되살릴 수 있고, 더 나아가선 게임을 즐겼던 시기의 기억들을 부차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군대에 가기 전이라던가, 결혼하기 전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긴 서비스 기간을 지녔음에도 게임 내의 이야기는 기획 단계에서의 원형을 그대로 가져가는 중이라는 점이다. 보통 게임의 서비스 기간이 길어질수록 게임 내의 이야기는 방치되거나, 혹은 갱신이 지연되는 경우가 잦은데 던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그 던파조차 중간에 대전이와 재전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를 두 번이나 갈아엎은 전례가 있지만, 이는 이야기의 구상과 실제 패치 간에 어긋남이 있어서였지 이야기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건, 기본적으로 던파가 처음으로 세계관을 구상할 때 추상적인 설정들을 느슨하게 엮어두었던 덕택이라 할 수 있다. 아라드 대륙, 마계, 천계, 선계, 12사도 등의 지역이나 기타 인물들이 여러 퀘스트와 아이템에 걸쳐 플레이버 텍스트 형태로 제시되었고, 이러한 형태로 남은 데이터는 후임 스토리 기획자가 입사했을 때도 자료를 찾아 능동적으로 세계관을 엮어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세계관은 유저들이 게임을 하는 이유, 즉 게임 내에서 강해져야만 하는 이유를 설정함으로써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게임 내 목표를 설정했다.


특히 던파가 이야기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도드라지는 건 대전이 이후 도입된 ‘평행우주’ 개념의 적극적인 활용이다. 대전이가 기존의 이야기를 갈아엎는 리부트 성격의 패치였다면, 재전이는 기존에 만들어두었던 대전이 세계관을 본래 세계관의 ‘평행우주’로 넘기는 패치였다. 대전이 패치의 실패를 인정하고서 세계관을 원복하는 과정에서 본래의 설정들이 자연스레 이야기 안에 편입될 방법을 찾은 것이다. 이 패치는 비록 세계관 리부트의 실패에서 비롯되었지만 이후의 던파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플레인: 코로나, 플레인: 사이퍼즈 등의 평행우주 개념이 설정됨으로써 던파는 자체적으로 그들 과거에 개입해 이야기를 개변할 가능성을 설계했다. 이를테면 예전에 이미 사망했던 사도 오즈마를 다시 살려내는 일은 던파의 이전 이야기에 손을 대지 않고선 불가능했다. 유저들은 이미 이세계를 다룬 던전에서 오즈마의 사망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행우주 개념을 도입한 덕택에 같은 세계 안에서도 과거와 미래를 보여주는 방식이 ‘관찰’에서 ‘개입’으로 바뀌었고, 이는 유저들이 던파 초창기에 겪었던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불러낼 수 있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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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야기 구성 방식은 던파와 삶을 함께했던 유저들에게 아련한 추억을 남긴다. ‘초창기의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개입하는 방식’은 그런 던파를 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에 접속하여 다시금 현재에 맞춰 개변하는 일을 끌어낸다. ‘기억’은 이미 끝나버린 이야기이므로 일반적으로는 떠올리는 것만 가능하지만, 던파는 이에 개입해 끝나버린 기억을 재개한다는 것이다. 이는 옛 콘텐츠를 토대로 유저들의 추억에 호소하는 ‘추억팔이’인 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평행세계를 응용한다는 점에서 온라인 게임과 더 세부적으로는 ‘디지털 온라인 게임’의 특성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온라인 서비스의 특징 중 하나인 ‘실시간’은 계속해서 변화하는 비가역적인 시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기억과 더 밀접하게 연결된다. 패키지 게임은 게임 안에서 이야기의 완결이 있지만, 온라인 게임은 그 특성상 미완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온라인 게임’은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여러 문제를 되풀이할 공산이 크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이야기를 바로잡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 왜냐하면 온라인 게임은 ‘실시간’으로 패치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던파는 게임에서 전통적인 방법론이었던 ‘반복’을 가져와 이 문제를 해결한다.


피에르 노라는 “우리 시대에 기억에 관한 이야기가 활발한 이유는 오히려 기억이란 게 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노라의 이 말은 크게 기억의 불가능성이라는 주제를 암시하는데, 언급되는 횟수의 증가가 곧 보존량의 증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억의 과정에 허수가 있음을 보여준다. 쉽게 말해 무언가를 본다는 게 곧 목격담이 될 수 없고, 무언가를 논하는 일이 곧 그에 대한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 말인즉 기억이 생겨나는 과정이 일종의 엔트로피로 이해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기억이 생겨나는 과정에서 얼마간의 손실이 생긴다고 말이다. 가령 영화를 관람하는 일을 떠올려보자. 영화 한 편에 담긴 기억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건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이 놓치는 부분이 있고, 매회, 매 순간 손실되는 기억이 있으므로 여러 번의 관람을 통해 이를 최소로 줄이고자 노력한다. 그런데 기억이란 기본적으로 무언가가 끝난 뒤에 발효되는 개념으로, 우리가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건 그것이 이미 끝났다는 점을 전제한다. 즉 기억은 종결이라는 말과 불가분의 관계이며, ‘종결’이 있어야 기억도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이야기의 진행을 막아버리는 일은 무언가를 기억하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미 끝나버린 기억/이야기를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아즈마 히로키는 게임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리얼리즘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죽지 않는다’는 게임의 법칙이 종결의 불가능성과 연결되어 ‘기억할 수 없음’의 대목으로 이어지는 점을 지적한다. 이에 따르자면 평행우주는 “기억이란 게 더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가정하는 것인데, 특정한 시공을 종결짓지 않고서도 다른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평행우주는 애초에 손실될 기억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역으로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제안한다. 그렇다면 기억이란 ‘그것’들을 취합하는 게이머의 몫이 아닐까? ‘평행우주’에서 이야기의 종결은 없지만, 게이머 자체가 이야기가 된다고 말이다. 선형적 시간에서 ‘결단’은 특정한 순간을 기점으로 이전과 단절할 것을 요구하지만, 평행우주는 계속해서 여러 순간들을 가져갈 수 있으므로 우리에게 이야기 분기의 선택권을 준다. 즉 평행우주는 세이브&로드라는 전통적 게임 분기 시스템에서 파생되어 나온 ‘반복’의 리얼리즘, 한번 쓰인 이야기를 게임 라이브 서비스 중에 어떻게 고쳐나갈 수 있는지를 논하는 디지털 시대의 이야기 작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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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 개인으로서, 게이머인 우리는 과거의 기억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이미 지나가 버린 세월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번 태어난 이상 우리는 기억을 안고 죽어가야만 한다. 하지만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즉 ‘리플레이’가 가능한 게임 세계에서 이런 일은 가능하다. 한번 적용된 기억을 되돌릴 수 없다면, 우리는 평행우주를 가정해서 다시금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 현재에서 과거를 동시에 마주하면서 여러 이야기 중 우리의 기억이 되어야 할 게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일이 바로 평행우주라 할 수 있겠다. 가령 시로코 레이드에서 사용된 스토리 로그라인을 살펴보자. 초창기 던파엔 비명굴이라는 던전이 있었는데, 이 던전에는 여귀검사 록시와 그녀의 사망으로 남겨진 아간조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때 록시는 게임 내에서 아이템 등의 플레이버 텍스트만을 통해 언급되었을 뿐 이야기 안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하지만 이후 던파측에서는 ‘레이드’와 같은 대규모 콘텐츠 업데이트가 필요해지자, 그동안 세계관 안에 남아있던 록시 관련 텍스트를 모두 지워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망각 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쯤 출시된 시로코 레이드에서 록시는 ‘시로코의 죽음으로 인해 무너진 시간 차원’ 사이에서 그 존재가 갈갈이 찢어졌다는 설정으로 재등장한다.


사연인즉, 시로코는 죽음 당시에 록시와 동귀어진을 택했고 그 결과 록시는 모든 평행우주에서 존재가 지워진 채 시로코의 무의식안에서만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로코 레이드의 주된 줄거리는 바로 이 록시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부활한 시로코를 모험가 일행이 만났을 때, 무의식을 형상화한 상대 중에 바로 그 록시가 있었다. 되살아난 악몽을 컨셉으로 잡은 이 던전들에서 록시는, 모든 차원에서 지워졌지만 바로 그 점 덕택에 모든 차원에 간섭할 수 있는 사도 시로코를 처치하는 데 도움을 준다. 게임으로 치면 버그가 프로그램인 시로코를 박살 낸 셈이다. 이때 시로코는 죽어가면서 과거의 다른 사도들에게 자신이 겪은 미래와 이를 유도한 힐더의 농간을 경고하며, 게임 내에서 이는 기억의 전파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를 통해 던파의 전반적인 이야기를 다시 쓰는 것에 ‘역사가 바뀌었다’는 식의 근거가 마련되었다. 이제 던파는 이전에 단순히 과거를 들여다보기만 했던 ‘관찰’의 입장에서 벗어나 차원을 항해하고, 그 안의 역사에 참석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쓸 수 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게임에 대한 유저들의 기억도 단순히 회상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이를 바꾸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던파는 7인의 마이스터가 존재하던 과거 시절, 이야기상으로는 이미 한번 죽었던 바칼의 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안톤, 루크, 프레이, 시로코, 오즈마, 바칼로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유저들은 초창기에 둥실 떠다녔던 떡밥을 자신의 기억 속에서 살려낸다. 그와 동시에 예전에 던파를 하며 느꼈던 감정과 기억을 개변된 역사에 맞게 현재에 재소환한다. 이는 단순히 라이브 서비스의 테크닉에만 불과하지 않고 유저들의 기억에도 작용했다는 점에서 고평가의 여지가 있다. 평행우주를 도입하며 게임 내의 역사를 개변한다면, 이는 게임을 즐겼던 유저들의 추억도 함께 날려버리는 일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로코 레이드의 사례에서 ‘개변’은 유저들의 삶을 바꾸는 게 아니라. 여태까지 수정됐던 던파 이야기를 모두 경험한 ‘자신’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록시를 토대로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마치 여러 평행우주 사이에서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자신에 대한 은유처럼 보인다. 시로코 레이드에서 희미해진 록시의 존재감은 ‘게이머’로서의 자신을 망각하는 일에 비견된다. 그렇다면 이 개변은 여러 캐릭터를 키우면서 희미해졌던 자신을 ‘그 모든 기억’으로 평행하게 나열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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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노라의 말처럼, 평행우주를 통해 모든 기억의 보존을 선언하는 일은 역설적으로 우리 시대에 ‘기억’이란 게 점점 희미해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평행우주를 통해 역사를 개변하는 일은 그런 기억을 ‘현재’로 가져옴으로써, 이를 다시금 선명히 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우리가 무언가를 망각하지 않는 방법은 ‘종결’에 대항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억’이라는 게 특정 시간의 종결 이후에 생겨나는 구간이라면, 세이브&로드에서 따온 평행우주의 논리란 그러한 시간들에 관한 무수한 종결이기도 하다. 즉, 플롯을 다각 면에서 변형 및 전개할 수 있다면 이는 하나의 현상에 대한 여러 방면에서의 목격담과도 같다. 무언가를 다시 볼 수 있게 하는 힘은 기억이란 게 더는 존재할 수 없다는, ‘종결’된 시공간에 대한 의구심에서 나온다. 기억이라는 게 점점 존재하지 않는 세계로 가는 일을 막기 위해서는 이러한 ‘개변’이 필요한 게 아닐까. ‘디지털’ 시대에 기억의 손실을 겪는 일이 NFT와 같은 상호인증을 통해 방지된다면, 평행우주란 다양한 기억들에 의해 정의되는 게이머 자신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던파의 행보는 우리 시대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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