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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28. 2023

'보고 있음'과 '계속 존재함' 사이


영화를 보는 이들 사이에는 배속 재생을 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다. 이는 배속 재생이 영화의 고유한 시청 경험을 해친다고 보아서인데, 영화가 있는 그대로를 재현하는 만큼 우리 또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헌데 영화를 있는 그대로 보아야만 한다면 영화는 처음에 어떤 방식으로 놓여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가지를 지적해보려 한다. 첫 번째로는 배속 재생을 할 때 놓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볼 수 있다. 배속 재생은 주어진 시간보다 더 빨리 소비하겠다는 점을 의미하므로 배속 재생은 ‘주어진 것’을 과잉소비한다. 두 번째는 세계를 곡해해서 받아들이는 것에 관한 거부감이다. 세계가 비단 주어진 것으로만 받아들여질 때 해석의 여지가 없어진다는 점이 자명하므로, 어떤 점에서 배속은 영화의 시간에 대항하는 법일 수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는 ‘영화의 시간’이 아니라 그 외부에서 영화를 바라보는 시간을 배속하는 것이므로 큰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게임에서 배속은 어떤 역할로 나타나고 있을까. 일단 게임은 플레이어가 직접 세계에 상호작용한다는 점에서 영화와는 달리 외부자 포지션을 유지할 수만은 없다. 이로 인해 플레이어는 그러한 배속이 작용되는 일에서 매체와 동일한 영향을 받는다. VR을 제외한다면 게임 또한 모니터와 같은 사각 프레임 안에서 자신이 대상을 ‘보고 있음’을 자각하게 하지만, 게임은 플레이어가 컨트롤러를 거머쥔다는 점에서 조금은 더 세계에 다가서 있다. 이를 따라 플레이어는 게임에 더 깊은 영향을 받으며 여기서 프레임은 게임의 시간에 더 많이 가닿는다는 점에서의 세밀함이 된다. 현실이 얼마나 부드러운지가 아니라 게임이 얼마나 부드러운지에 따라 게임은 더 깊숙이 플레이어에 스며든다. 이는 마치 입자가 얼마나 고운지에 따라 분말이 더 잘 용매에 녹아드는지와도 같으며, 그런 의미에서 ‘배속’은 세계에 플레이어를 더 빨리 녹아들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언니전지현과 나>(2020)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가정이 가능하다. 영화가 배속을 거부하는 건 자신이 세계에 과몰입해서는 안 되어서라고. 영화는 항상 보는 사람인 나, 혹은 ‘관객’이 존재해야만 하기에 몰입의 형태로 ‘나’가 사라져서는 안 된다. 반면 게임에서 배속은 이야기나 진행을 해치지 않으며, 오히려 재화나 보상을 위한 반복 플레이에서는 거진 필수적이다. 이미 한번 경험했던 이야기를 게임에 다시 등장시키는 과정은 신속히 전개되어야만 한다. [던전앤파이터]와 같은 RPG 게임에서 장비 파밍은 스토리에서 제시된 던전을 따라 이루어지지만, 그때마다 매번 이야기를 설명해줄 필요나 의무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던전의 배경과 설정에 관해서는 설명되었을뿐더러 게임에서의 몰입은 ‘관객’이 아니라 ‘배우’의 입장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게임에서 배속은 이야기 없이 곧바로 조작에 뛰어드는 것에 사용되곤 하나, 이 기능은 근본적으로 관객이 아닌 배우를 위해 존재한다. 


관객이 보는 자라면 배우는 계속 존재하는 자다. 넥슨의 초기 서비스작인 [일랜시아] 유저들의 이야기를 다룬 <내언니전지현과 나>(2020)을 살펴보자. 이미 업데이트가 뚝 끊겨버린 이 게임은 무언가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진 않는다. 말 그대로 폐허가 되어버린 이 땅에 남은 건 각자의 추억으로 진행되는 유저들 간의 친목이며, 여기서는 개개인의 현실 역할을 수행하는 게 중요하다. 유저들은 길드에 들어가 캐릭터가 아닌 ‘나’를 내세우며 이 덕분에 일랜시아는 단지 폐허뿐만이 아니라 유저들의 삶이 계속 존재하는 곳이 된다. 이때 중요한 건 이 게임이 오래된 만큼 여러 편의기능이 없다는 점이다. 유저들은 친목행위에 방해되는 다른 잡무들, 사냥이나 퀘스트 같은 일들을 서둘러 해치우기를 희망하며 여기서 게임은 ‘배속’과 스킵이 요구되는 곳이 된다. 어떤 면에서 이 플레이어는 게임 속 세계가 아니라 단지 세계 안에 존재하기만을 바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 많은 조작으로 현실의 나를 조작하자고 말이다. 


게임 속 세계도 어느 매체와 마찬가지로 언젠가 끝나게 되어있다. 반면 인간의 현실은 끝나지 않으며 [일랜시아]는 그런 점에서의 유예지대가 되어주었다. 감독이 인터뷰한 길드 구성원들은 취준생이나 직장인처럼 자신이 두려워하거나 이겨내야 할 현실이 있었고, 여기에서 예외적일 수 있는 건 게임을 하는 순간뿐이었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일랜시아]의 배속, 매크로 프로그램의 사용은 그러한 세계에서 찢겨나가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자신을 투입해보려는 세밀함의 시도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배속은 게임의 서사적 단을 생략하고 곧바로 캐릭터를 움직이려는 행위로 이해되는데, [일랜시아]의 경우 배속은 플레이어의 현실 서사를 지우고 이곳 세계에 계속 존재하기 위해 수행되었다. 여기서 배속은 서사단에서 작동하는 일반적인 게임의 작법을 가리키는 게 아니며, 이미 유저 간의 소통이 주요 콘텐츠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배속은 지속을 구성하는 한 가지 필요요인일 뿐이다. 


더는 이야기되지 않는 장소일 폐허에서 계속 존재하는 방법이 배속이라는 점은 의미가 크다. 배속은 ‘과잉 소비’이기도 하다는 점이 그러하다. 주어진 시간에 더 많은 콘텐츠를 즐기려는 욕망이 배속 기능을 낳았다면, 그 속내에는 주어진 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이들의 마음이 있다. 바꾸어 말해 이는 세계가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을 뜻하는데 특히나 게임은 영화보다 더 큰 슬픔을 유저에게 선사한다. 영화에서 ‘끝’이 주어진 시간으로 인해 미리 예측되고 그 제시가 일방적인 반면, 게임에서 ‘끝’은 자기 삶을 살아야 하는 유저가 직접 종료버튼을 눌러야한다는 점에서 능동적이길 요구한다. 이른바 게임은 유저로 하여금 자기 삶의 종언을 직접 선언하도록 하며 이로 인해 플레이어는 한정된 시간을 더 잘 활용할 방법으로 배속을 택한다. 이 점에서 [일랜시아] 유저들이 배속을 활용하는 방식은 기존과 다른 면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은 게임 속 세상에 남고 싶어서 게임을 스킵해버렸다. 


<사이버펑크: 엣지러너>


배속은 어느 매체에서나 같은 원리로 작동하지만 게임에서는 그 주체가 게임 속 세계에 포함된다는 점이 다르다. 게임에서 배속을 사용한다는 건 그 자신 또한 배속의 일부가 된다는 뜻이다. 가령 <사이버펑크 2077>에서 등장하는 산데비스탄 기구를 떠올려보자. 산데비스탄은 설정상 신경계에 작용해 인지 기능에 배속을 거는 설정을 갖고 있으며 이로 인해 사용자는 자신의 시간을 지연시킬 수 있다. 불릿타임(Bullet Time)으로 불리는 이 작법은 빠른 속도를 묘사하고 싶을 때, 그것을 어떻게 플레이어가 보게끔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던 끝에 만들어졌다. 세계의 시간을 정직하게 묘사하기보다는 인식의 순간을 쪼개놓으면서 이를 토대로 세계에 잔류하는 시간을 ‘늘인다’. 이러한 배속은 시간을 직접 마주하기보다는 마주할 순간을 지연시킨다는 점에서 시간의 한계에 저항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에 가깝다. 어쨌거나 다가올 순간이라면 느리게 걷는 것만이, ‘지연’하는 것만이 가능하다고 말이다. 


쉽게 말해 다가올 순간을 더 빨리 마주하는 쪽이 있는 만큼이나 그걸 마주하고 싶지 않아하는 쪽도 있다. 위의 [일랜시아]는 후자에 해당했고, [사이버펑크] 또한 순간에 다다르는 속도를 배속함으로써 플레이어가 잠재적으로 얻을 수 있는 리스크를 회피한다. 산데비스탄을 사용하면 플레이어는 적이 공격하지 못하는 사이 적진 한복판을 썰고 다닐 수 있다. 이른바, [일랜시아]가 세계에 계속 존재하려는 의도로 배속을 사용했다면 [사이버펑크]의 배속은 한시라도 빨리 긴장사태를 빠져나가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자신=캐릭터가 죽을 수 있는 상황을 회피하는 게 바로 배속인 것이다. 그러니 ‘주어진 것’에 대한 과잉소비로 배속을 읽는 것은 일반화될 수 있는 독해가 아니다. 누군가는 게임 속 재화를 더 많이, 빨리 획득하고자 효율성으로의 배속을 택하기도 하지만. 배속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계속해서 과잉으로 작용할 때 이에 대한 저감책으로 선택되는 것일 수도 있다. 


게임은 언제 끝낼지를 플레이어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점에서 현실을 마주하기를 종용한다. 그러니 게임을 지속한다는 건 게임에 몰입해서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현실이 너무 과하기에 그로부터 잠시 떠나온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을 지속되어야만 하기에 플레이어는 적절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자리를 떠야만 한다. 이 점에서 [사이버펑크]의 산데비스탄은 우리에게 흥미로운 단상을 제공한다. 게임에서 산데비스탄은 주어진 시간을 조금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해주는 기법에 가깝지만, 이를 바탕으로 만든 애니메이션 <사이버펑크: 엣지러너>에서 산데비스탄은 꿈에서의 각성 작용을 지연시키는 역할을 한다. 고통스러운 삶과 사랑하는 연인과의 한때는 배속에 대한 두 가지 용례 모두를 충족시킨다. 산데비스탄은 사용할수록 정신에 착란을 일으키며 여기서 꿈과 현실의 경계는 무너진다. 과잉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배속을 택했던 주인공은 끝내 늘어진 순간처럼 무너지고야 만다. 


이 애니메이션에는 우리가 배속에 대해 논했던 두 가지 사례가 모두 존재한다. 게임 속 세계에 줄곧 머무르려 하는 시도가 있는가 하면, 현실 세계로 빠져나오기를 조금이라도 늦춰보려는 시도가 있다. 주인공에게 산데비스탄은 갱 사회에서 인정받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사랑을 지속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는 갑갑한 현실의 출구를 찾고 싶어하지만, 정작 그 출구로의 다가섬을 지연시키고자 배속을 쓴다. 이러한 양가성으로 인해 그는 게임이나 현실 어디에도 남지 못한 채 붕괴하고야 만다. 이 사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는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과분한 사랑, 양쪽 모두에서 배속은 현실을 지연시킨다고. 게임에 관해 도피의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게임에 관한 몰입과 서로 다른 접근방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지연’의 맥락이 있다. 플레이어는 바꿀 수 없는 자신보다 소속된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들은 탈출할 시간과 깨어날 시간을 벌고자 자신을 지연시킨다. 바꾸어 말해 이들은 고통과 사랑 모두를 한 자리에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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