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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an 26. 2023

가능성은 내부에서만 주어지지 않는다

<퍼스트 슬램덩크>(2023)


만화에 관한 보편적인 해석으로 이야기에 접근해보자. 어떤 이들은 송태섭의 서사에 중점을 둔 이 플롯을 두고서 “완성된 서사”에서 “비상의 서사”로 초점이 이동했다고 말한다. 완성형 천재였던 강백호에서 송태섭의 패배 플롯으로 출발하는 이 영화가 명실상부하게 ‘2010년대 작품’의 어떤 경향을 따르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건 바로, 완벽하면서 내적으로 성장하는 인물이 아니라 넘어진 상태에서도 꿋꿋하게 일어나는 노력형 주인공의 유행이다. 그리고 이 유행은 (설명에 따르면) 대안이 없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그러한 노력이 어느 정도 이입하거나 따라잡을 만한 것임을 보여준다. 단순히 멋있어서 동경하기보단 자신의 처지를 대입하는 걸 더 선호한다는 소리다. 따라서 이는 다음의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어 보인다. 첫 번째는 완전이라는 단어에 공감의 여지를 둘 수 없게 되었다는 점, 두 번째는 자신의 처지가 ‘실패’에 있음을 통감한다는 점이다.


이런 설명은 큰 범주에서 보았을 때 소위 ‘사이다패스’라고 불리는 형태의 이야기와 거리가 있는 듯 보인다. 사이다패스는 막힘없이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점에서 이야기에 파고들 지점이 없고, 또한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이다패스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반발로 등장했음을 떠올려보면 ‘비상의 서사’는 확실히 그들과 친연관계에 있다. 가령 사이다패스는 인물의 완전함을 강조함에 있어 그것이 도덕적 순결이나 무고와 연관되기보단 자신의 모든 것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인물상으로 그려지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자신이 읽은 소설 내용이 앞으로의 미래 전개로 활용되는 것부터, 자신의 내적 능력을 적재적소에 활용하게 되는 능력자물에 이르기까지 공통된다. 비상의 서사 또한 인물의 노력을 통한 성장을 그린다는 점에서 어떠한 가능성을 엿보지만, 사실은 그게 본래적으로 주어진 것의 발굴 혹은 개발일 뿐이라는 점에서 현실 세계의 완전한 대안이 되진 못한다.


말하자면 비상의 서사란 ‘뇌의 100%를 사용한다’는 공상과학적 상상만큼이나 터무니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상이야말로 ‘패배’를 그나마 현실의 영역에 들여다 놓는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자신의 내적인 가능성을 온전히 활용할 수만 있다면, 패배는 그 활용의 영역을 변위함으로써 자신을 성공의 방향에 두는 일이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패배는 독자의 감정이입이 전위되는 장소가 아니라, 그와 반대로 독자의 현실이 어떠한 ‘통제가능의 범주’안에 있음을 말해준다. 이른바 비상의 서사가 인기를 끄는 것은 바로 그렇게 ‘통제 불가하게 여겨지는’ 사회에서 개인이 자신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심어주는 덕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점에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같은 스포츠 장르는 ‘선수의 모든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점에서의 ‘가능성’을 전한다. 자신의 모든 걸 끌어내야 하는 승부에서, 사람들은 패배자가 승자로 바뀌는 기적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완전한 지휘 행위를 본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매체론과 사회론으로 물음을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평면화된 영화, 모니터로 확장되면서 관객의 통제하에 들어온 영화를 뜻한다. 후자는 공정, 자본주의든 능력주의든 간에 자신의 능력만으로 정당히 겨루었다면 승패에 말끔히 승복함을 뜻한다. 이때 나는 둘 중에서 후자를 좀 더 파고들어 보고 싶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건 경기에서 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산왕전의 후반에서 부상 입은 강백호가 안선생에게 “저에게는 그게 바로 지금입니다.”라고 말하며 부상 입은 몸을 경기에 투입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에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보여야만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패배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또 한 번 강조하자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봐야 ‘끝났다’고 선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선생은 “포기한다는 건 인정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으며, 이러한 사실은 경기가 통제의 행위임을 명징히 말해준다. 기회를 잡는 것보다 중요한 건 통제를 포기하는 일이며, 이는 불수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운동선수들이 그걸 원하겠는가?


실패가 통제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이는 계산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해 실패는 계산의 결과라는 점에서 공식화되어있고, 이는 실패가 우리의 인식과는 달리 ‘안전함’을 추구한다는 점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실패를 불안정의 상징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이다. 이 점에서 ‘실패’란 것은 능력주의를 설명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될 수 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승패에 말끔히 굴복하는 건 그 자신의 능력을 모두 끌어낸다는 점에서 그게 ‘공정’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패배가 대결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타인의 존재를 요구한다면, 실패는 성공의 반대편에 자리하면서 자기 자신과의 싸움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잦다. 예를 들어 우리는 RPG 게임 등에서 무기나 방어구를 강화할 때 강화 패배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오직 강화 실패라는 표현만이 존재하며, 여기서 그 대상은 무기나 방어구 별개에만 온전히 적용된다. 마찬가지로 우리에 있어서도 실패란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적용되는 표현이고 이는 어떠한 가능성을 수행하는 과정을 지칭한다.


이제 ‘가능성’을 수행하는 과정에 대해 논해보자. 잘 알려져있듯 <슬램덩크>는 송태섭의 이야기에 중점을 두었고, 이를 통해 영화는 실패의 태도를 주목했다. 그 플롯이란 어릴 적에 실종된 형의 그림자에 짓눌린 태섭의 모습과 그에 따른 극복이며, 이는 “타인의 꿈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며 살아가는” 전형적인 서사이다. 물론 정신분석학적인 해석에 따르자면 이러한 욕망은 실재이며, 충족될 수 없기에 영구적인 결핍으로 남아 이를 대리하는 주체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허나 이것은 심리치료드라마가 아니라 스포츠 드라마다. 그렇기에 그것은 실재가 아니라 가능성이며, 플롯은 주어진 가능성을 어떻게 이어받고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묘사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달리 말하자면 <슬램덩크>가 원작과 비교했을 때 말하고 싶었던 건 “가능성은 내부에서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앞서 우리는 능력주의론에 기반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을 때 ‘패배’란 비로소 ‘실패’로 인정될 수 있다고 말했었다. 허나 가능성이 내부에서만 주어지지 않으므로, ‘모든 것’은 ‘나’를 뜻하지만은 않는다.


바로 이 부분이 <슬램덩크>가 하나의 수행처럼 여겨지게끔 한다. 팀제 스포츠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게 개인의 기량만큼이나 선수 간의 화합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모두가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게 전술이요, ‘나’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매체는 신체의 확장이라고 말했던 매클루언식의 수사가 연상된다. 요컨대 앞서 생략해보았던 매체론은 이 점에서 후자의 이론과 결합한다고 볼 수 있다. <슬램덩크>라는 영화는 매체론의 내외로 그 자신을 외부로 확장한다고 말이다. 예를 들어 <슬램덩크>는 원작자의 의향이 충실히 반영되어 그 만화적 질감을 영화 매체에 투영하고 있다. 허나 반대로 보면 이는 <슬램덩크>는 어디까지나 만화 매체의 힘을 빌리고 있을 뿐, ‘영화’로서는 온전히 기능하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약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실사 영화였을 때도 사람들이 지금과 같이 열광했을까? 어떤 면에서 <슬램덩크>는 영화라는 코트 위에서 경기하는 만화 매체의 모습이기도 하다. 즉 만화는 그 자신의 가능성을 영화에서 실현하고 있고, 이는 곧 “가능성은 내부에서만 주어지지 않는다”는 원리에 충실한 것이기도 하다.


<슬램덩크>의 초반부, 경기가 시작할 무렵에는 하얀 화면에 스케치 형태로 그려지는 인물이 점진적으로 살아나면서 영화의 일부로 편입되는 듯한 연출이 있다. 그와 동시에 영화의 시작지점에서 우리는 송태섭의 유년기가 형의 출항소식과 함께 암전되는 걸 본다. 이러한 암전은 명실상부히 연극에서 따온 것으로, 장면이 넘어갈 때 필연적으로 무대를 암전해야만 했던 무대의 ‘쇼트’론’을 재현한다. 헌데 그렇다면 우리는 스케치 형태의 연출이 연극 기법을 영화에 적용하는 것만큼이나, 만화 기법을 영화에 옮겨놓는 일이라고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만약 영화가 연극 매체의 확장된 ‘영역’에 해당한다면, <슬램덩크> 또한 만화 매체의 확장된 영역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경우, 그 매체가 내부적으로 지닌 가능성은 태섭의 플롯처럼 자신에게 ‘죽은(실종된)’ 형의 가능성을 물려받아 끝내 그것을 구현해내고야 마는(산왕전에서 우승하는) 일로 이뤄진다. 따라서 우리는 <슬램덩크>가 과연 만화 매체의 영화적 구현에 성공했는지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그 자신의 가능성을 어떻게 이어받았는지에 주목해야 함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실패’조차 그 자신의 가능성 안에서야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돌이표를 받아 다시금 글의 시작점으로 돌아와 보자. <슬램덩크>가 원작 구현에 충실했다는 점은 누군가에게 있어 ‘영화적’이기를 포기했다는 말과도 같다. 만화의 충실한 구현이라는 게 ‘만화적’이라는 표현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영화’란 단지 형식적인 의례에만 불과할 뿐이다. 허나 바로 이렇게 만화 자신이 영화가 되는 것에 ‘실패’함으로써, 오히려 이 플롯은 젊은이들에게 되려 희망을 주는 게 아닐까. 앞서 우리가 말하는 ‘통제가능성’이라는 범주에는 원작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다는 점 또한 포함됨을 기억해두자. 원작의 내용을 이미 안다는 건 앞으로의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지를 다 안다는 뜻이며, 이는 관람자에게 예측의 가능성을 부여함으로써 이후로 펼쳐질 순간들에 확정적인 선택지를 만든다. 즉, 여기서 실패는 통제 가능한 변인으로 취급되며 그게 실현될지 아닐지는 오로지 개인의 믿음과 판단에 달렸다는 점에서 여기에는 그 어떠한 외부적 개입도 없다. 다시 말해서 ‘원작’이란 게 존재하는 <슬램덩크>란 그 자신, ‘만화’를 가능성 삼아 그 안에서 영화의 플롯을 펼쳐 보이고 있다.


여기서 나는 만화를 가능성에 영화를 플롯에 두는 것으로 <슬램덩크>의 몇몇 면모를 이해하는 게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다. ‘완전’이라는 면모에 공감할 수 없게 된 사회가 의미하는 건 ‘영화적’이라는 수사가 더는 이해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오래전 바쟁이 ‘완전한 영화라는 신화’를 서술했을 때 그것은 환상으로나마 남을 수 있었지만, 심리치료드라마가 몰락하고 스포츠 드라마(~게임의 시대)에 들어선 이 시대에 영화는 완전할 수 없다. 허나 영화는 오히려 불완전하기에 내적인 가능성의 범주 안에서 실현 가능한 것으로 편입된다고 보아야 한다. <슬램덩크>의 북산 팀원 서로가 완벽한 모습만을 보여주지 않는 것처럼, 이들의 여정은 완벽하지 않기에 되려 무대를 성공으로 이끌었으며 그렇기에 실패 또한 그러한 성공의 범주 안에서 ‘실현 가능한 것’이 될 수 있었다. 이는 송태섭이 죽은 형을 ‘완전한’ 것으로 파악했던 일에서, 자기 안의 조그마한 극복의 대상으로 넘겨버림으로써 자신을 ‘실패’의 처지에 대입하는 계기가 된다. 요컨대 <슬램덩크>가 송태섭의 플롯을 내세우며 말하려 했던 건 ‘영화’는 완전하지 않다는 점과 만화는 영화가 되는 것에 실패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해야만 만화는 영화로 그 자신을 확장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처지를 지킬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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